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여당 대표와 주요 부처 장관들, 재계 총수들까지 대거 동반하고 부산을 방문했다. 이날 행사에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서병수·장제원 등 부산 지역 의원들, 박형준 부산시장, 대통령실 이관섭 정책실장과 관련 수석들이 참석했다. 정부에서는 기획재정부(추경호)·행정안전부(이상민)·산업통상자원부(방문규)·국토교통부(원희룡)·해양수산부(조승환)·중소벤처기업부(이영) 장관이 동행했다. 재계에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함께했다.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참패로 실망한 부산 민심을 달래려고 대통령이 앞장서 정부·여당·재계를 총동원한 모양새다. 애초부터 부산 유치 가능성이 없었는데도 마치 될 가능성이 있는 양 잔뜩 바람 잡은 정부 말을 믿었다가 낭패를 당했으니 부산 민심이 좋을 리 없다. 여론조사업체 메트릭스가 연합뉴스·연합뉴스TV 의뢰를 받아 지난 2~3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긍정 평가는 37%로 한 달 전 조사보다 3%포인트 하락했다. 그러니 정부·여당의 정치 행사에 재벌 총수들을 동원한 속셈이 뭔가는 불을 보듯 빤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부산 동구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부산 시민의 꿈과 도전 격려 간담회’를 열어 “엑스포를 위해 추진한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할 것”이라며 △가덕도 신공항 개항 △트라이포트 물류 플랫폼 진행 △북항 재개발 신속 추진 △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을 챙기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내년 총선용 지역개발 공약을 발표한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부산을 글로벌 허브 도시로 키우려는 대통령의 담대한 비전과 부산 시민의 염원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며 “부산의 도전에 삼성도 늘 함께하겠다”라고 거들었다. 왜 재벌 총수들이 윤 대통령의 부산 방문에 동행했는지 드러나는 발언이다.
위정자들의 지역 방문에서 가장 전형적인 정치 행보는 지역의 재래시장 방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 대통령은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을 찾아 재벌 총수들과 함께 ‘시장 먹방’을 연출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 일행이 깡통시장 분식점 앞에 나란히 서서 떡볶이를 단체 시식하는 희한한 모습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대통령실의 보여주기식 행사에 재벌 총수들이 집단 동원돼 들러리 섰다고 꼬집는 비판이 대부분이다.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7일 MBC 라디오 ‘신장식의 뉴스하이킥’에서 “계속 대기업을 괴롭혔는데 또 부산 민심 수습한다고 대기업 총수들을 끌고 갔다. 이런 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같은 당 전재수 의원도 8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재벌 총수들을 뒤에 병풍처럼 세우고 떡볶이, 어묵 먹는 걸 보고 부산 민심은 분기탱천 중”이라면서 “재계 총수들이 직접적으로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윤 대통령 취임 후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끌려 나간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8일 사설 <걸핏하면 기업총수 들러리 세우는 게 ‘시장경제’인가>에서 “기업인들을 들러리 세운 것”이며 “상식을 벗어난 처사”라고 비판했다. 사설은 “정부는 이들 대기업 총수를 엑스포 유치 홍보전에 대거 동원한 바 있다”고 지적하고 “이번 부산 행사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들은 오는 11일 대통령의 네덜란드 순방에도 대부분 동행한다. 볼썽사나울뿐더러, 연말 연초를 앞두고 더욱 바쁜 기업들에 ‘관폐’가 아닐 수 없다”라고 썼다.
정부·여당의 보기 민망하고 한심한 행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짚고 넘어갈 지점은, ‘재벌이 정권의 피해자인가?’ 하는 점이다. 조선일보가 8일 사설 <글로벌 대기업 총수들 집단 동원은 최소화되길>에서 재벌을 옹호하는 건 으레 그러려니 치자. 하지만 자칭 진보를 표방하는 야당과 언론까지 나서서 재벌 총수들을 동정하며 정권을 비판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더불어민주당과 한겨레는 윤 정권 비판에 매몰된 나머지, 정경유착으로 정권과 한통속인 재벌을 마치 권력에 의한 피해자인 양 둔갑시키고 있다.
정권(정치권력)과 재벌(경제권력)은 정경유착으로 긴밀히 밀착한 상부상조의 한패거리다. 한국의 대표 재벌 삼성의 이재용 회장을 보자. 그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인물이다. 그는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지난 2017년 2월 구속·기소돼 4년의 재판 끝에 2021년 1월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되었다. 정경유착에 대한 사법적 심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윤 대통령의 8·15 특별사면·복권 조치로 국정농단의 족쇄에서 풀려났고 두 달 뒤 삼성전자 회장직에 올랐다. 재벌 총수는 정권에 의한 피해자는커녕 정권의 최고 수혜자이다.
게다가 이 회장은 2020년 9월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으로 기소되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달 17일 검찰은 이 회장에게 징역 5년과 벌금 5억 원을 구형하였다. 이 회장은 정권과 긴밀히 밀착하여 사법적 심판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며, 만일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경우 다시 한번 대통령의 사면복권 조치를 통해 굴레를 벗어나길 기대해야 한다. 재벌 총수는 정권에 의한 피해자가 아니며 정권의 시혜 대상이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관계는 사법부 판결도 무력화할 수 있는 공고한 정경유착의 카르텔이다.
특히 재벌을 정권의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은 본말을 전도시키는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는 갑과 을의 종속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재벌과 정권의 권력관계는 재벌이 우위를 차지하는 구조이다. 재벌 총수는 대대로 자리를 세습하는 반면에 대통령은 고작 5년 단임 계약직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5년 5월 청와대에서 삼성, 현대차, LG, SK 등 4대 재벌 총수들과 중소기업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꺼낸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라고 한 발언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정권이 재벌 위에 군림하면서 재벌이 정권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 심각한 왜곡과 오류를 낳는다. 7일 김남국 무소속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재벌 총수들을 부산 ‘떡볶이 먹방’에 도열시키고, 다음 주 해외순방에 또 동원한다면 이건 권력을 남용한 일종의 ‘슈퍼 갑질’이다”라며 “바쁘게 일하는 재벌 총수들 좀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재벌 총수가 권력에 의해 갑질을 당하는 을인가. 한국 사회에서 재벌이 대체 언제부터 을 신세로 전락한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은 11일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위해 출국한다. 윤 대통령은 10일 공개된 AFP통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반도체 협력이 이번 네덜란드 방문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번 네덜란드 일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ASML(세계 1위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기업) 본사 방문 일정이다. 윤 대통령은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페터르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이재용 회장, 최태원 SK 회장과 함께 외국 정상 최초로 ASML ‘클린룸’과 최신 노광장비 생산 현장을 시찰한다.
윤 대통령과 삼성·SK 재벌 총수 일행의 ASML 본사 방문은 ‘권력을 남용해 바쁜 재벌 총수들 괴롭히는 슈퍼 갑질’에 해당하는가. 정권이 삼성·SK 재벌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 세금 쓰고 있는 건데, 이게 어떻게 재벌에 대한 갑질인가. 재벌에 대한 특혜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이다. 재벌기업의 광고로 먹고사는 조·중·동 언론이야 자나 깨나 ‘재벌 걱정’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열심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왜 야당과 한겨레까지 나서서 ‘재벌 걱정’을 한단 말인가. (2023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