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매축지 안용복 생가터 약도 |
목욕탕뒤 좁은 골목길의 생가터. |
기념관에는 안용복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여 있는데 그의 행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안용복의 1차 도일 (1693년 3~12월 숙종19년)
부산 수영의 수군병사 이였던 그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으로 가게 되고 울산에서 울릉도에는 수산물이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울릉도에 가게된다.
일본어부들과 조업권을 다투다가 안용복은 일본으로 붙들려 가게된다. 잡혀간 안용복은 독도는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조선으로 이첩된 안용복은 동래부에서 2년의 옥고를 치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 조선과 일본은 복잡한 논의가 전개되고 1696년 1월 일본은 울릉도.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활동을 금지한다.
안용복의 2차 도일 (1696년 5월~8월)
그러나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있는 것을 보고 일본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 이라는 관리로 사칭하고 일본으로 가서 항의한 다음 조선으로 돌아왔다.
*울릉우산양도감세장 이란 울릉도와 독도의 세무담당장 이라는 뜻이다.
관리로 사칭하고 일본으로 가는 모습
*이듬해 일본 에도막부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및 월경(越警)을 금지시키겠다고 통보하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울릉도 영유권을 확실히하고 일본 정부에게 까지 확언을 받아온 점 등은 공(功)으로 삼을 만한 일로 보았다.
그러나 일개 평민이 무단출국과 국가의 관직자를 참칭한 점 등이 크게 문제가 되어 사형은 면했으나 유배형에 처해젔고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등은 전하지 않는다.
유배 때의 나이가 40세 였다고 한다.
훗날 조선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은 안용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賞)을 내리기는 커녕 형(刑)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무함(誣陷)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
첫댓글 에도막부의 문서를 전달받아 올정도의 나라사랑 국토사랑에 대한 안용복장군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일본이 자기땅이라 우겨보지만 우리도 대마도가 우리땅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