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 칠 닥.
어머니와 칠 남매, 그리고 피붙이 아들과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나의 염이 시작된다.
인생 막바지 즘에 맺은 인연이었던 영철이는 나를 이쁘게 화장하고 철재 침대에 반듯이 누워서는 굳어 있는 내 몸 구석구석에 한지와 삼베로 이리저리, 저렇게 이렇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 장례식에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 솟던 그 때 그대로 죽은 나의 염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 때와는 달리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훌쩍거리는 서러운 소음과 찬송가가 불려지고 기도문 낭독이 이어진다.
나는 영철이가 하는 데로 몸을 맡기며 잠시 고개를 돌려 내 죽음을 찬양하고자 내 시신 앞에 도열해 있는 가족들을 무심히 살펴본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 서러운 눈물을 끊지 못하신다. 개똥이형의 아쉬움과 회한의 눈빛을 읽을 수 있다. 누나 자야는 누구의 죽음인지는 무관심한 듯이 왼 쪽 중지에 낀 반짝거리는 보석 반지를 천장의 형광 불빛에, 마치 감정사인양 이리저리 비쳐보며 고개도 갸웃거리더니 빙긋이 만족하는 미소를 짓는다. 희야는 가족의 모든 업보를 책임진양 어깨가 든든한 것이 누름 하게 떡하니 버틴 모습이 귀신이 되어도 자문을 구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미야는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내가 일찍이 저 세상으로 불려 간 사태를 야속해 한다. 저러다 그토록 믿어마지 않던 자신의 주님을 부정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짝인 형수나 매형 매제들은 그 형상이 희미하여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그네들의 속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끄트머리 여동생 숙이는 찬송을 지휘하고 기도를 주도하는 전도사 제 신랑을 그윽이 쳐다보며 대단히 만족하다는 듯이 사랑스럽게 주시하고 있다.
내 염이 진행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막둥이 천이는 한켠으로 돌아서서는 열심히 꼼지락거리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아버지 장례식 때와 마찬가지로 생애에 필연적인 행사에 있어서 부조금 수입과 경비지출을 계산해 보고 손익을 맞춰 보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내 피붙이 아들과 딸이 나와는 제일 가까이 서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아들 녀석의 표정은 담담해 보인다. 간간이 흐르는 눈물을 훔칠 따름이다. 딸애는 국립묘지에 國葬을 진행하는 여군처럼 교복을 차려 입은 녀석의 모습이 떳떳해 보인다. 나는 생전에 녀석이 교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오늘에야 깔끔한 그 모습을 보게 되는데 녀석은 어릴 때는 커서 군대에 가겠다며 호기스럽게 말 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래 넌 군인이 되면 딱, 좋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딴 사람과 와는 달리 아들의 모습에는 알 수 없는 영롱한 분위기가 감싸고 있다. 그 영롱함은 아들이 단순히 아들만이 아닌 어떤 웅장한 무게를 느끼게 되는데, 그러는 순간에 아들의 모습은 아들이 아닌 하얀 도복을 입은 할아버지이셨다. 나는 내 할아버지가 아버지 나이19세에 돌아 가셨기 때문에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아들이 할아버지처럼 느껴졌고 그 할아버지 뒤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 계신다. 어쩌면 짜 맞춘 듯이 아버지 19세에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고, 아들 나이 19세에 내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 시간의 서열과 진행의 구조가 톱니바퀴 물려가듯이 필연적인 묵직한 압력이 나를 감싸 돌고 있는 것이다.
"아~씨발, 칠닥이 놈 로또 되면 오토바이 사 준다 ?N는데 말이야....."
장례식 식당에 모여 앉은 몇몇의 오래 된 나의 친구들, 그 중에 상수의 넋두리다.
사실, 나는 나에게 큰돈이 생기면 진심으로 상수에게 오토바이를 사 줄 작정을 했었다.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어른이 되어서도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나는 말이야 칠닥이가 죽기 전에 농담으로 알았던, 거 왜? 부조금 선금으로 달랬잖아?...
그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아 그 놈 죽고 나니까 말이야."
"무슨 의미야 있겠어? 농담 좋아하니 그렇겠지."
"아냐, 백 만원에서 오 백 만원까지가 부조 선수금의 한계라고 했잖아? 그 정도라면 각자가 형편에 따라 각출할 수 있는 정도이지. 사실 칠닥이의 자야누나 같으면 오 백 만원쯤은 그리 어렵잖게 동생에게 선물하는 셈치면 될 거야.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각출해 준다면, 지 놈의 평생의 꿈인 작은 농장은 마련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그 걸 아 가 죽을 때까지 생각 못하고 있었던 거야. 각출한 돈이야 농장이 번창하면 나중에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거고...."
"짜슥이~ 로또나 되면, 나 오토바이 한 대 사주고, 지 농장 차리면 될 텐데...."
상수의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대통령 꿈꾸면 복권에 당첨된다고 했던가? 나는 내가 경험한 대통령을 거의 꿈을 꿨다.
이승만에서부터 노무현까지....
1957년 닭띠 해(오칠닥)에는 내가 풍기극장 옆의 예천상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봉순이를 오 부자 댁의 안방마님으로 만든 맏이 개똥이가 출생한 지 4년 후, 그토록 희망해 마지않았던 富를 성취하였으나 부모형제에게는 냉혈한인 자야가 태어난지 2년 후, 또 다시 아들을 추가한 어머니에게는 개가였다.
장날이면 극장거리에는 각지에서 몰려 온 난전꾼들이 전을 펴는데, 어머니는 어린 나를 들 처 업고는 이쪽 저쪽 난전 주위를 돌면서,
"우리, 둘 째 아 고추 좀 보소~"하였고 영문도 모르는 자랑스러움에 나는 한껏 고추를 불쑥 힘 주어 내 밀고는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예천상회 밑에는 서울상회, 그 밑에 자전거포에 복우가, 풍기극장을 사이에 둔 밑에 집인 솥전 집에 익준이가, 길 건너 중앙시장 안에는 상수가 태어났다.
상수네 외사촌인 한성이가 포목상 거리의 안동상회에서, 안동상회 와는 바로 붙어있는 양과자점에 덕재가, 또는 아버지 오부자의 본 처가 농사를 관리하는 동부동 닭전거리 농가의 옆집에 하근이가 각자들 세상의 빛을 보는 기념으로 각기 생에의 첫 울음을 터트렸다.
나에게는 죽마고우인 그들이 지금은 내 죽음을 축하하자고 내 장례식장에서 주류을 이루며 먹고 떠들며 축배를 들고 있는 것이다.
1965년은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이다.
아버지는 풍기극장 옆의 포목상 <예천상회>를 팔았다. 오랫동안 장사에 지쳐서는 온전히 농사지으면 사시겠다고 성내3동에 대지가 250평의 빨간 양철지붕에 대문이 큰집을 구입했다.
동부동에 아버지의 본처인 큰 엄마와 배다른 누나인 미자와 내 어머니 봉순이의 자식들이 살림을 모합쳐서 대 식구가 되었고 동네에서는 제일 큰 농사 집이 되었다. 풋구 먹는다는 가을 추수감사제 같은 행사가 해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치러졌다.
큰 엄마(아버지의 본처)와 살림을 합치자 꾀 여러 번 어머니 봉순이와는 싸움이 일었는데 주로 어머니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큰 엄마는 서러운 통곡을 하고는 하였다.
어린 나는 그런 큰 엄마가 안쓰러워 어머니 몰래 그 품에 안기고는 하였는데, 그 때마다 큰 엄마는 "우리, 간지(강아지)...간지"하며 유난히 나를 귀여워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 봉순이가 홍정골 거랑(川)을 건너 닭전거리 오부자네 농가로 들면서 할머니와 큰 엄마에게 받은 구박의 되 갚음인 일련의 정해진 행사라 하겠다.
나는 한여름 바닥이 시원한 마루에 누워 스피카에 나오는 어쩐지 서글픈 중계방송을 듣게 된다. 스피카는 봉음사라고 하는 전파사에서 라디오 방송을 받아서는 집집마다 삐삐선(군용전선)을 통해 딸랑 스피카와 볼륨기만 달린 라디오 대체 품이다.
"지금 이 박사의 행렬이 광하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어렸던 내가 기억한 이승만은 그 때 그 스피카로 중계되는 이승만의 장례식 중계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나는 미자누나에게 이박사가 누구냐고 물었고 누나는 어린 이복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넓은 대청마루 구석으로는 광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광의 구석에는 침침한 골방이 있었는데 누나는 그 구석방에서 붉은 줄이 그어진 하얀 편지지를 들고는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을 몇 번인가 목격하고는 그 영문을 궁금해했는데, 그 이야기를 내 어머니에 고하면,
"미자년은 연애대장이라 그렇지 뭐..."하면서 입을 삐죽거리고는 하였다. 아마, 어머니 봉순이와 미자누나 나이 차는 그저 몇 살 차가 아니었을 것이다.
작년에 졸업한 풍기 유치원의 이 선생은 누나의 친구여서 가끔씩 놀러 오기도 하는데, 누나와 이 선생이 넓은 지붕으로 덮여져 그늘이 깊은 대문을 활짝 열고는 거기서 멍석을 폈다. 부채 부치며 수다를 하고 있으면 이 선생 보기가 부끄러운 나는 숨어서 언제나 돌아 가려나하고 분주하게 혼자만의 숨바꼭질을 하고는 그랬다.
그러던 미자누나는 얼마 후에 원주로 시집을 갔고 나중에는 부산 사하공단에서 식당을 하여 큰돈을 번다.
그러고는 큰 엄마는 집에 계시기보다는 가깝거나 먼 친척집으로 내 도시더니 미자누나가 결혼하고는 아주 그 집에 눌러 사시게 된다.
나는 아버지와는 칠 촌 집안 아저씨인 일꾼을 따라 소구루마를 타고 수 십리 떨어진 산골내기의 논에 가기를 무척 즐겼다.
"어디~ 어디! 쪄 쪄 쪄~ 이랴!" 나에게 제일로 신기한 것이 아저씨가 산만한 소를 모는 일이었고 가끔은 평지 길에서 나에게도 소 고삐를 넘겨주는 경우도 있어서 신바람 나게,
"어디~ 어디~ 어 허, 이놈의 소가?..."하면서 아저씨의 흉내를 내고는 하였다.
마른 먼지가 이는 밭을 쟁기로 가는 소의 입에는 곡식을 뜯지 못하게 망태기가 씌워져 있었고 무릎까지 빠지는 논을 써레질하는 힘찬 황소의 모습이 좋다 못해 네발로 밭이랑을 기면서 음머, 음머~하면서 흉내내고는 하였다.
그렇게 놀다 보면 단배재 언덕을 자전거로 내려오는 아버지 모습이 보이는데, 아버지의 자전거는 일제산 후지 자전거였다. 풍기에 몇 대 되지 않는 일제 자전거는 한 날 밤에 도둑을 맞는데 순경이 와서는 열린 대문으로 자국 난 자전거 바퀴의 흔적을 조사해 갔고 그 사실이 온 면내로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어머니는 일꾼과 소구루마를 이끌고는 삼 십리 밖의 영주에서 장롱을 사 오셨는데 그 새 장롱 위에는 늘 원기소라는 고소한 알약이 얹혀 있었다. 하루에 두 알씩만 먹으라는 어머니의 분부를 그대로 지킨 적은 거의 없이 한 번 입에 대면 몰래 라도 훔쳐먹어야 할 정도로 중독되는 약이었다. 어머니는 그 약이 소화제라고 하는데 나는,
"소아제? 엄마, 그럼 이 약이 소의 아제야?" 어머니는 깔깔 웃기만 했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일꾼과 소구루마를 이끌고 삼 십리 밖의 영주에 가서는 긴 쇠파이프에 손잡이 달린 기계를 사 오셨는데, 그러고 부터는 우리 집은 우물에서 두레박이 아닌 펌프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 집 샘은 깊었다. 깊이가 열 다섯 길이라고도 했는데, 한 해는 심한 가뭄이 들어 온 동네의 우물이 다 말라도 우리 집 펌프에는 새하얀 물줄기가 콸콸 쏟아졌다. 이웃에서 한 집 두 집 물을 받으러 오더니 나중에는 풍기극장 동네사람과 중앙시장의 상인들까지 몰려서 넓은 마당에 긴 줄이 이어졌다. 종국에는 우리 우물도 황톳물이 솟았고 아버지는 대문을 걸어 버렸고 대문을 발로 차며 욕을 버럭 질러대는 이는 창호네 드센 누나였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데, 미처 크레파스를 준비해 가지 못한 어머니는 옆 아이에게 빌리려고 하였고 한사코 빌려주지 않으려고 찡찡거리던 아이가 나중에는 방송국 기자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일건이었다.
녀석은 내가 변산서 농사를 접고 올라오던 해에 성남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데, 득표율은 4위에 그친다. 녀석은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일상사조차도 치밀하게 계산을 해서 행동하는 철저한 녀석은 이해관계가 끝나면 냉정해지는 성품, 그대로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넓은 집 마당 담벽으로 건물을 짓고 레그혼이라는 흰색 산란계 오 백수들이고 양계를 시작하신다.
학교를 다니던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었는데, 중앙시장 끄트머리 집인 조정섭씨네 일영이네 집에서 서로 외우기 시합을 하고는 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일영이는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여자문제로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 여자는 동창 방호네 형수가 되고 방호는 어쩐 일인지 제 형수 될 사람과 늘 붙어 다니기를 하여 내가 성수동 시계공장을 다닐 때 둘이서 같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한 번은 나를 데리고 제 형수 집에 가서는 밥도 얻어 먹였는데, 도무지 형수인지 애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친했다.
우리가 국민교육헌장 외우기에 골몰했던 이 당시에 옥탑방 임씨는 중학을 졸업하고는 충청도 시골을 벗어나 서울 흑석동에서 전파사에 취직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현금을 만지는데다가 인물이 좋은 그에게는 여자가 많이 끌었다. 전파사 앞 미장원 처녀가 제 동생을 소개해 주었는데 임씨는 언니나 동생을 번갈아 가며 만날 정도로 연애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임씨가 정작 결혼한 여자는 수줍음이 많은 언니가 약속장소에 항상 데리고 나오던 여학생이었는데, 그 여학생은 언니가 자취하는 주인댁 딸이었다. 그 주인댁 아저씨는 한국전쟁 당시 헌병장교였던 미군부대 군속을 하던 부잣집 둘째 딸이었다. 그 여학생은 최고학부라 하는 이화여대를 졸업하자마자 임씨와 결혼하게 된다. 이 엄청난 신분의 격차는 사슬이 되어 평생을 임씨를 옥죄었고 인생 말년에는 딸랑 이불 한 채로 본오동 옥탑방에서 나와 같이 생활 처지가 되었다.
그맘때 변산의 영철이는 3학년으로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동네 일꾼이 된다. 어린 나이지만 일 품새가 매섭고 힘이 장사여서 그는 얼마 안가 어른들과 짝을 맞추어 일을 다닐 정도가 되었는데, 주로 옆집의 성희 아버지와 같이 다녔으며 덕분에 영철이 주머니에는 항상 현금이 들어 있었다.
영철이의 맏형인 용우형님은 말 못하는 장애자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안쓰러운 마음에 영철이 돈을 꼬드겨서는 용우형님께 건내 주고는 했다. 그 버릇은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된다.
내가 변산으로 가서 농사지을 때, 한 해는 영철이와 같이 가을 방아를 찧어 왔는데 그의 어머니가 큰집에 쌀, 한 포라도 더 떨쳐 놓을 것을 조르는 모습을 보았다. 화가 치민 영철이가
"내가, 평생 이랑다 께~ 아~ 형님도 농사짓는데, 뭣을 울메나 떨치라는 거여~"
부모 마음이 못 난 자식 쪽으로 팔이 굽는 모양이다. 천연이 어머니가 노름꾼 성연이를 유난히 챙겨서 늘 불만스러워 하는 천연이다. 우리 어머니도 항상 개똥이 형을 감싸고는 해서 섭섭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한 늬우스~ 월남으로 파병을 떠나는 장병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배우들이 광하문 네거리에서 환송하는 파월 장병의 무리 속에는 우리동네의 나이 든 형들도 있었다. 월남 간 그들 덕에 우리는 그 댁으로 보내지는 미제 식품을 맛 볼 수 있었는데 누런 기름 종이에 커피가 주로 우리의 몫이었다. 한 움큼 얻어 온 커피 봉지를 팔팔 끓는 주전자에 뜯어서 털어 넣고는 휘휘 저어서 사발에 부어 나눠 마시고는 하였다.
"참, 희한하네~이. 이 씨거운 걸 미국 놈들은 말라꼬 처 먹글꼬..."
당시에 월남이라는 단어가 친숙해지기 시작했는데, 엄마들의 주름치마는 월남치마, 까만 색에 흰색 점이 박힌 외래종 닭을 월남 닭이라 했다.
"이런 거는 월남 장에 가도 안 판다!"하거나,
"애인일랑~ 월남 가서 돈일랑, 부쳐 주고 총에 맞아 죽거라~"하는 노래도 신바람 나서 흥얼거렸지만, 슈류탄을 몸으로 덮친 강재구 소령이나 이인호 소령은 어린 우리들에게 영웅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어 온 인물이다.
아버지가 양계장을 여는 바람에 달걀이나 고기는 기럽지(아쉽지) 않았다.
아직도, 개똥이 형의 친구들은 맨날 달걀 후라이의 ?u또를 싸 오는 형이 부러웠다는 옛이야를 한다.
우리나라 축산업이 태동기인 70년대 초반에 우리 집 달걀은 서울서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 오는 보따리 장수 아줌마가 가져갔고 어머니는 그 계란장수에게 더러는 부탁하여 내 옷을 사주고는 하셨는데, 어린이 잡지 소년세계에 나오는 모델과 같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어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에 정미소 딸인 동창애가 제 언니와 검정코드를 입고 와서는 양계장 입구에서 아버지와 꾀나 심각한 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양계장 사료로 쓰는 곡물 외상값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짐작 하게 된다.
당시에는 공장에서 제품화 된 배합사료가 없었던 때라 인근에 정미소에서 농업부산물과 시장 안의 참기름 짜는 집에 깻묵, 어물시장에 어분을 일일이 사서는 집에서 절구에 분쇄하여 배합하였다. 그 배합에 빠지지 않았던 게 테라마이신이나 오로오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누렇게 섞었는데, 어린 나는 그런 작업에도 즐거이 참여하여 집안에 일꾼으로 동네에 소문나기도 하였다.
이듬해 양계장은 뉴케슬이라는 전염병이 돌아 천 수로 늘어 난 산란계가 허옇게 겨울에 내린 눈처럼 닭장이며 운동장에 나부라졌다. 나는 그 때 붉은 핏줄이 선명했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아버지는 그러는 동안 산골내기나 산법의 농사거리를 팔아서 빛 정리를 하였고 미련을 접지 못하시고는 양돈을 시작하게 된다. 돼지를 한 두 마리들이시더니 얼마 안가 백여 마리로 늘어 놨다.
"이 선생네는 영주에 가 무슨 주사약을 사서 돼지에 놓는데, 그러면 번지름한 게 금방 큰다네?"
"무슨...그런 약도 있을 라고?"
그 것은 성장 호르몬제 일게다. 오칠닥세대가 성장하면서 물질문명이 같이 성장해 갔으나 앞 서 마이신류의 항생제나 성장 호르몬제와 같은 앞 세대가 경험치 못한 유해물질도 함께 먹기 시작한 세대이다. 따져 보면 앞 세대보다도 풍성해지기 시작하였지만 반드시 행복만 하지는 못한 세대라 하겠다.
앞 세대가 전쟁을 겪은 불행한 세대라면 오칠닥세대는 조국이 급격한 근대화를 이룩하면서 필연적인 홍역을 도맡아 겪었으면서도 수혜에서 제외 된 세대라 하겠다. 우선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대접받지 못 받는 첫 세대이다. 변화무쌍한 사회적 정서에 정신 없이 적응해야만 했고,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가 오르막이 가팔라질수록 더 해지는 힘에 겨워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엠프 사태의 정 중앙에 서 있었으며 파급되는 이혼율 급상승 곡선의 단초에 있었다. 당연히 자치해야 할 사회 주도권을 386세대에 추월 당하는 낀 세대의 원조 격이다. 독재를 그리워하며 박정희를 신봉하는 마지막 세대로 은근한 땡깡쟁이 외톨이 세대이다.
퍼 지르기 잘하고 실속이 없는 닭의 습성처럼 57년 닭띠들.... 오랜 내 친구들 상수나 덕재, 또는 한성이와 변산에 영철이와 천연이 등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 본 오칠닥들의 인생역정이 하나 같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가 양돈을 시작하시던 그 무렵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익숙한 박정희와 함께 김대중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알려졌으나 선거가 끝나고는 곧 잊게 된다. 그를 다시 기억하게 되기는 그가 오랜 외유를 끝내고 돌아와서 동교동에 가택 연금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 졌을 오공 때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인생 역정도 표현하는 그대로 징 하다!
양계에 이어 양돈사업도 신통치 않자 아버지는 양계장을 살림집으로 개조하여 세를 놓고 일제 때 아버지의 부를 기반 잡아 준 고물상을 차린다.
이맘 때, 신림 사는 배다른 큰누나 후남이 누나가 와서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미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아버지는 돕지 못한 맏딸에게 끝내는 험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본디 그 누나는 그 쪽의 부잣집에 시집을 갔으나 큰 매형이 밀수사건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폭삭 망하고는 큰 매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머지 식구는 잠적하여 소식이 끊긴지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빨간 양철 지붕에 마당이 넓고 대문이 큰 우리 집은 디귿자 아래채를 헐어 마당을 넓혀 기역자 본 채에 우리 식구가 살았다.
대문 옆에 소 외양간 자리는 만화방이 들어섰고 양계장을 개조한 방 두 칸 짜리 는 엿 방으로 고물 수집꾼들이 기거했다. 그 다음 방은 방직공장에 기사인 건수네가 그 다음 방은 방직공장 처녀들이, 끝 방은 한전에 부 소장하는 신혼부부가 각기 세 들어 살았다.
아버지는 집안에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필요한 경비를 악명 높던 고리대금업자에게 집문서를 잡히고 때마다 조달해서 썼는데, 몇 해 안 가서 빨간 양철지붕 집은 방직공장 하는 전규철씨네로 넘어 가 버렸다.
집안에 그늘이 지기 시작할 때, 개똥이 형은 폭행으로 구속되어 죄수가 된다.
본디,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 집을 구입하려 할 때 흉가라고 반대를 하였으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안동에서 자취을 하다가 어느 토요일에 집에 와 보니 집은 온통 깜깜한 게 방마다 희미하게 촛불을 켜져 있었다.
"엄마, 전기가 고장났는가?"
"전규철네가 약속한 날짜에 집을 안 비운다고 전기를 끊어 버렸다."
같은 시기에 오건이 변산반도로 내려가 농사를 시작하고 천연이와도 연을 맺었다. 영철이는 가마니 공장을 도맡아 하며 다소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때이다.
익준이는 서울서 대학을 다녔으나 노름 빛에 몰렸던 제 형의 압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에 지원하고 덕재는 탄탄한 기독교집안의 외동아들로 고생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낙차가 심한 추락의 쓴맛을 보기에는 그로부터 십 수년 후에 있었고 그 후유증을 아직도 앓고 있다.
아버지의 아니 우리 집안의 몰락은 빠르게 진행되어 고물상을 역전으로 세를 얻어 옮기더니 다시 관사촌의 물탱크 앞으로 옮겨갔다. 그러는 중에 자야 누나와 여동생 희야는 상급학교를 진학 못하고 방직공장에 다녀야 하는 희생자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샘터서림>이라는 헌 책방을 차렸으나 이듬해 추석 쇠러 온 형 친구인 대원이 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성수동의 시계공장의 공원이 된다.
내가 시계공장에서 일당 600원을 받고 일하고 있을 때, 영철이는 변산에서 정숙한 동네 처녀와 야반도주를 하여 면목동에 재제소에 취직하였고 녀석의 일당은 1500원이었다.
시계공장의 공돌이 생활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를 포함하여 하급 노동자는 거대한 우리에 사육되는 돼지와 같은 형상이었다. 시간외 노동이 상습 된지 오래지만 누구 하나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볼이 사과 껍질처럼 연한 소녀들이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서 떨면서 노동하고도 천대받으며 한끼 먹자고 바닥이 질퍽한 식당으로 향하는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청계천에서는 청년 전태일이 화염에 싸여 분신 하였지만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음 해에 공돌이를 그만두고 종로 2가의 한림출판사에서 월부책 장수가 된다. 적어도 매월 받던 수입이 없는 출판사 생활은 극심한 배고픔을 안겨 주었다.
출근하면서 받는 교통비 오 백 원으로 사무실을 나서면서 곧 바로 분식 집에서 130원 주고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실적에 시달리면서도 목소리 좋은 사장 비서인 미스 김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굶기를 자주 하다 보니 변비가 생겼고 억지로 보는 변은 변기에 찰떡 같이 흑색으로 달라붙어 아무리 물을 내려도 내려가지 않았다. 노크 소리에 포기하고 변이 그대로 붙어 있는 채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는 이는 그 목소리 좋았던 미스 김이었고 그녀는 황급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다.
남가좌동에서 대학을 다니는 덕재가 전집을 한 벌 사 주어 몇 개 안 되는 실적 중에 하나를 기록했고, 그 힘으로 외판원 생활을 버텨 나갔다.
그 당시에 을지로 맞춤점 <맨스톱>의 점원이 된 상수가 코메디언 넘버원이 자주 온다는 그 골목 식당에서 사 준 소금구이는 굶기를 밥먹듯이 한 당시에는 잊을 수 없는 환희였다.
맨스톱의 주인은 상수의 큰형인 은수형인데 그 형은 상수를 무섭게 다그쳤고 녀석이 훌쩍거리는 모습을 나는 꾀 여러 번 목격했다. 녀석은 그 것이 객지에서 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구박이었다.
성수동 자취방에 나를 찾아 온 이는 미아리에서 재수를 하던 일건 이었다. 녀석은 제 자취방에 무료로 기거하는 대신에 재수 뒷바라지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때부터 나는 미아리에서 종로 출판사로 출근하였는데 일건이가 구해 주는 학생용 버스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아리 버스 정류장에서 망해서 소식이 끊긴 일영이 아버지를 목격하기도 하였다.
서울생활이 지쳐서 풍기로 도로 내려갔을 때에는 아버지의 고물상이 관사촌에서 농협창고 뒤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그 집에서 개똥이 형은 도박으로 두 번째 구속이 된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대전에 육군통신학교에서 전방기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은 역시 대전에 있는 공군 교육사령부에서 상수가 헌병하사 교육을 받고 있었고 익준이는 서울의 공군본부에서 장군 운전병으로 근무하였다. 녀석은 그 때가 제 생애에 가장 호강하던 때라고 술회한다.
충남 바닷가 오지에 호랑이가 잠자던 곳이라는 숙호지에서 자대 생활을 시작했다.
자대 정문 옆 부대 울타리와 같이 담을 쓰는 집이 기자네 집이었다. 기자는 이제 막 중학을 졸업하고 읍내의 옷가게에 취직을 했는데, 어느 날 전령 업무를 보려고 시장에서 만난 기자는 몰라보게 성숙해 있었고 막 쪄낸 감자를 가를 때처럼 뽀얀 분이 얼굴에 확 피어 어예뻤다.
기자 어머니는 광대뼈가 툭 불거진 드센 과부였고 바다에 나가 갯일을 하는 게 생계수단이지만, 군인을 상대로 술을 팔거나 라면을 끓여주고 생일 맞은 이 생일상 차리기와 면회 온 이에게 잠자리와 식사 제공하는 일이 부업이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노환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데 기자 어머니는 어지간히도 구박을 주었다.
그 할머니 또한 과거에 젊은 며느리에게 소문나게 혹심한 시집살이를 시켰다니 되받는 꼴이 된 셈이다.
"아~ 글쎄, 그놈이 말이여 바짓가랑이 내리고는 골이 잔뜩 난, 거어~ 팔뚝만한 이런 걸 턱 내 놓더니 씩씩거리며 막 흔들지를 안 남? 얼굴이 시뻘거지면서 허어연 물을 찍 싸더란 말이지. 개눔의 새끼...."
기자 할머니가 자신의 목격담을 나에게 이르는 소리다.
아마, 이태문 일병이 할머니가 문구멍 뚫어 보는 것도 모르고 아무도 없는 정지에 들어 가 자위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풀었던 갑다.
내가 군대생활 하는 동안에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었고 내 평생에 전쟁을 맞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멀어져 있던 인물이 부각되지만 그 것은 잠시뿐이고 전두환이가 정권을 장악한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서 백여리 남쪽에는 길상이가 해안부대 분초장으로 있었고 길상이는 부대가 있는 동네처녀와 제대하고는 결혼하였으나 그의 처는 오랫동안 인생을 같이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또 그 근방 레이더 기지에 구한이가 근무했는데, 얼마 전에 나는 녀석이 수 년 전에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주변 친구 중에는 너무 빨리 세상을 등 진 녀석을 나는 이제 곧 만나게 될 터이니 심심찮을 일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는 아버지의 고물상이 또 한번 옮겨져서는 국민학교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주택이 밀집한 곳이라 주위에 눈총도 따가웠고 민원고발도 자주 들어갔다.
잠시 집안 일을 돕던 내가 첫 직장을 얻은 곳이 안동에 있는 음료수회사의 영업소 판매사원이었다. 익준이와 하근이는 같은 영업소에 직장동료가 된다. 오전에 입사한 사람이 점심 먹고는 없어지더라는 정도로 극심한 노동이 요구되는 힘드는 일을 한 오 년 하게 되지만 퇴직금조차도 털어 넣고 나와야 할 정도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기업이었다.
대기업이라는 유명 뒤에는 회사 관리들이 자긍심, 회유 협박 등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 업체와의 경쟁으로 몰아 넣었다. 그 과정에서 대게는 큰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에는 노동조합이라는 게 없었던 때라 노동자가 위법 사항을 노동청에 신고하면 노동청에 공무원이 회사간부에게 신고상황을 일러 주어 용기 내어 찾아가고도 회사에 낙인찍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체의 꼬봉 노릇을 하는 공무원이 꾀 있었다.
그 들이 그러면서 약간의 대가를 얻는 동안 힘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어 갔다.
이 때에 장치활동이 묶여있던 양 김씨가 신당 돌풍을 일으키고 나는 신민당의 홍사덕의원을 특이나 좋아했다. .
익준이가 결혼하게 되자 내가 사회를 봐 주었는데 오래 동안 노총각 친구를 보내는 서운함이 나에게도 결혼 독촉으로다가 왔다. 음료수 회사를 그만 둔 나는 한신금고에 300만원을 외삼촌 보증으로 빛을 내어 중고차를 사고 장사를 시작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대한항공 폭파사건과 함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새차를 구입한다. 그러나 노사분규로 그 큰 공장에 마지막 남은 화물차 한 대를 간신히 구입한 새차는 불량품이었다. 1080만원 활부로 사고 1년 반만에 결국 350만원, 헐값에 팔게 된다. 노사분규는 날로 드세져만 갔다.
노사분규에 이어 전교조 결성이 사회의 큰 화두로 등장하고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은 적당히 세태와 타협하면서 살아 남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익준이가 결혼한 지 이 년 후에 나도 결혼하게 된다. 내 거래처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나 집안 도움을 한 푼 받지 못하고 결혼비용은 고스란히 빛으로 짊어지게 되었다.
나의 결혼 비용은 음료수 회사에 물품을 외상으로 받아서는 그 것을 청량리 시장에 막 바로 덤핑 쳐서는 마련했는데, 애초에 한신금고에서 얻은 장사 밑천을 필두로 해서 내 생애에 첫 빛이 된다. 서울로 이사가서는 도둑 맞아 빚진 것과 함께 이 모든 것을 결혼생활 내내 갚게 된다. 그러나 나는 변산 가서 농협에 농자금 빛을 또 져 버렸다.
결혼하고는 이듬해에 오 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한다. 이사한 지 일주일만에 장사하는 차와 물건을 몽땅 도둑 맞게 된다.
궁여지책으로 빈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로 우유 배달을 시작하였는데, 인계자는 나 모르게 수금까지 해 가는 바가지를 쓰인다. 잘 세워 둔 배달오토바이는 수시로 이유 없이 넘어가 나는 신의 증오를 받는 것 같았다.
일건이 소개로 그의 처이모 댁에 자가용 운전하게 되어 우유배달과 함께 하루에 두 가지 일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야간에 우유수송 하는 일이 부탁 들어 와 잠시동안은 하루에 세 가지 일로 늘어나지만 틈틈이 연습하여 대형 면허증을 따고 부터는 버스 운전가가 되었다.
우연하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가입하게 되고 부터는 부동산 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는 계기가 되고,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에 대하여 고민이 되었다.
방송국 기자가 된 일건이는 그런 내 사고에 대하여 일일이 반박하였다. 청소년기에 경험한 그의 정서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사회 정황에 나는 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치는 시기였다.
삼 당 합당을 한 김영삼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대통령이 된다.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나고 김종필은 신한국당의 대표 최고위원이 된다.
버스 일도 많이 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남으면 아르바이트 장사를 하기도 하여 드디어 장사밑천이나 결혼자금 빛 진 2500만원을 이자까지 4000만원 너는 돈을 모조리 갚는 생애에 감격스러운 날도 맞는다.
방송통신대학 농학과에 입학하여 청소년 때 그토록 소망해 마지않던 농학을 접한다.
하지만 연속되는 빈곤의 힘으로 조금씩 커져가던 부부갈등의 불씨는 화염이 되어 결혼 9년 만에 이혼을 하게된다.
그 해 11월에 아이엠에프 발발하고 이듬해 2월에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김대중은 아이엠에프 사태 해결에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외환위기 청문회가 열린다.
청문회에서는 전임 강경식 부총리가 쏟아지는 질타에 억울해 하는 것이 당시에는 뻔뻔하다고 느껴졌으나 자본주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대가가 아닌가 싶다. 오르막에 오를수록 자전거는 더 빨리 밟아야 하므로 한 번은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닥치는 공항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의 대통령이나 관료들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이엠에프나 더블유티오체제의 자본주의 구조의 희생자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귀농교육을 받으면서 생태농업이라는 것과 자연농법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념을 접하게 되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귀농본부에 칠한이를 사귀게 된다.
칠한이는 출판사에서 농사에 관한 취재를 다니다가 제 스스로 농부가 되고 도시농업 운동을 주도하면서 텃밭농사를 시작한다.
한 번은 칠한이의 텃밭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었는데, 어머니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밭에 들어가서는 작물이고 흙이며 범벅을 하면서 기듯이 하셨다.
"어머니도 농사일을 해 보셨어요?" 즐거워하는 어머니에게 칠한이 물음이 있자, 느긋이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 내고는 뒷짐을 척하니 지시더니,
"에~ 우리는 그 큰 농사지어도 손끝 하나 까딱 안 했니 더. 다아~ 일꾼 두고...."
나는 갑자기 도도해지는 어머니 모습에 당황하였고 의아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칠한이의 벗겨진 이마 위로 칠보 산을 너머 가는 석양이 영롱스럽게 반짝인다.
어려운 결심을 하고, 변산으로 귀농한다.
귀농하고는 한 달만에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되고 약속되었던 일자리를 잃게 된다.
생계의 동아줄인 농산물 운반 기사를 못하게 되자, 농협에 자금을 얻어 한우 사육을 작정하고 영철가
소 막 공사를 하였다. 막 시작할 즘에 재가한 과부 순창댁이 도로 과부가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하고 살 던 집을 내 주고는 도청리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럭저럭 한우 구입자금은 무망하게도 생활비로 그럭저럭 사라졌다.
여름엔 막 노동으로 겨울에 비치랜드 앞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가는 다시 농협에 500만원 사정을 해서 격포항에 포장마차 <비.풍.초>를 차렸다. 여름 대목이 오기도 전에 부안 핵 폐기장 사태가 발발 하였고 제대로 장사를 해 보지도 못한 채 녹슬고 찢어지고 하면서 절박한 현실에는 출구가 없었다. 핵, 반대운동이 격렬해 질수록 내 생계의 목줄은 강하게 조여 왔다.
변산서 마지막 일거리였던 덥섭이 양반의 정미소에서 한 달간의 노동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나 내 평생에 가장 혹독했던, 차라리 고문이었다.
어릴 때 장로 아들 따라 교회 갔다가 보았던, 하얀 교회 벽에 핏빛으로 그려진 십자가 맨 예수의 걸게 그림이 그대로 고통으로 전해왔다.
누구도 예측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일대 드라마와도 같았다. 하루전날의 정몽준의 공조 파기를 겪으면서....
그러나 주인댁 자식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머슴의 아들이 공부를 더 잘 하다면 그 건 밎상을 받을 일이다. 언론의 호감을 얻지도 못하던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위기를 맞는다.
황우석교수의 연구가 뻥튀기 되고 영웅추앙 심리는 여전히 사회저변에 두껍게 깔려 있다.
영화감독 김기덕은 서러움 받는 자신의 작품을 심경 토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역시 맞는다.
못 생겼으면 가만히 있기나 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주류, 한 쪽만 인정되고 대접받는 서글픈 비주류의 식민지 사회이다.
다사다난했던, 변산반도를 정리하고 겨울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서울북단의 어느 지하철에
제 어미에게 보내지는 아들을 내려 주고는 안산 수암동 어머니 계시는 곳으로 돌아와 벽에 걸린 아버지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하, 하. 아부지요 아부지는 우째서 세월이 흐를수록 저를 닮아 가니 껴?"
아버지의 영정사진은 수 십 년 전에 찍어 논 그 사진 그대로인 것을.....
안산으로 도로 후퇴하여 그나마 쉽게 얻은 직업은 마을버스 운전사였다.
"예~ 예. 사모님.... 그러니깐 요, 그럼요~ 제가 그 쪽 돈만 나오면 사모님 것을 곧 바로..."
운전석 바로 뒤에서 들려 오는 전화 대화이다.
백밀러를 통해서 그 자리를 살펴본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한 눈에도 세상의 파고를 넘어 온 듯 한....
불현 듯 버스는 한없이 깊은 폭포수를 향해 내 닫는 거친 물살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구멍 뚫린 낙엽 한 잎에 패잔병이 되어 겨우 몸을 실은 개미 한 마리와 막 적에게 쫓겨 피신하는 개미 한 마리가 편승하였다. 이들 두 사내의 장래는 모른다! 몰라.
버스가 울렁거린다. 어~ 어? 물살이 높다 높은 물살에는 더 깊게 떨어져야 한다. 제발....
이제 또, 무엇을 하면서 살거나? 철저하게 배신을 반복하는 운명의 여신이여!
( 언제 어떻게 끌려 왔는지 모르겠다.
그 것을 따지기에는 현실에서 너무 다급한 결론을 내려야 할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또 지금이 대체, 어느 때인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였다.
" 당신, 나를 사랑할 수 있지? 호 호 호...."
소름이 끼친다. 그녀가 물어 오는 음률은 온화하면서 부드러웠고, 느릿하였는데도 그 음색은 날 선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몸서리치는 진동이었다.
"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주목해 왔어요...호 호... 당신은 인상이 참, 좋아! 나처럼 차가운 여자에게는 따뜻하고 포근한 게 필요 해."
내가 지금 무릎 끓고 있는 곳은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오래 된 궁전 같은데 선뜻한 분위기만 느껴졌고 여인이 서 있는 주위의 몇 개의 얼음 누각만 보일 뿐이다.
심지어 나를 무릎 끓게 하는 어떤 강력한 존재조차도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안 되고 그저 묵직한 중력만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대답을 강요하는 여인을 쳐다본다, 눈이 부시다.
까만 하이힐, 언젠가 인상 깊었던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서의 날씬한 두 쪽배가 코를 마주 댄 듯한 그 하이힐이었다. 하일 힐에서 시작되는 고동색의 가는 가죽띠가 여인의 복상 뼈를 감고는 종아리를 휘 돌아 앞정강이에 나비 모양의 매듭을 지었다.
여인의 허벅지는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 채로 유난히 반들거려 사람이라는 느낌보다는 미술관에 조각과 같이 완만한 유선에 풍만함이 그대로 배여서 사람이라면 충분히 욕정을 끓게 할 만 하였다.
허벅지 그 위로는 검은색 수영복으로 둔부를 감싸고는 있지만 왠지 유혹을 하기로 작정한 듯한 연출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나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도 한 구석으로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거부의 징후도 동시에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어요. 내가 포기하지 않고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면 그 건, 불행의 연속일 뿐이지요. 내가 얼음 여왕이기는 하지만 뭐 어때요? 차갑더라도 온정을 나누어 베푼다면 서로에게는 좋지 않겠어요? 호 호 말 많은 누가 그랬다지요, 조금만 비겁하면, 세상이 편 해 진다고....과감하게 비겁해져 봐 욧!"
마치 갈라 진 뱀의 혓바닥에서 맴돌며 또아리 치 듯한 회유가 계속되고 나는 상아빛처럼 푸르름 하면서 얼음보다도 더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팔목이라던가, 긴 속눈썹과 진한 마스카라에 감 춰진 쭉 찢어진 눈매가 필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릎에 힘을 가했다.
일단 무릎에 힘을 가하자 순간적인 엄청난 힘이 솟았고 영문 모르게 그 얼음 궁전을 탈출하게 된다.
앞으로 달려도 뒤로 가는 안타까움과 금방이라도 누구의 아귀에 잡힐 듯 하기도 하였고 뛰는 것인지, 나는 것인지 분간을 알 수 없는 범벅 속에서....호 호 호 호.....
그런데,
나는 그 막연한 경험이 꿈이라면 어디서인지, 생시라면 언제인지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내 인생이 힘들어 지고 있을 때에는 그 차갑던 운명의 여인이 아직도, 나에게 연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유추해 볼 따름이다.
5. 나에게 이별을 고함.
염의 행사가 끝나고 봄 진달래처럼 화사할 정도로 깔끔해 진 내 시신을 내가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과거 나의 행적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상념에서 시작하여 회상으로 벗어날 즈음에,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웠다. 한 사내가 소복 입은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는 뭐라고 욕설을 퍼 부으면서 끌고 나가고 있었다.
아 하~ 그렇다! 나는 내 장례식 내내 익숙지 못한 그 무엇이 항상 옆에서 분주하게 맴돈다는 걸 느끼면서도 죽어 가는 마당에 미처 따져 확인해 보지 못한 그 존재는 바로 앞집 여자였다.
앞 집 여자는 내가 죽어 자신에 의해 발견되면서부터 마치 자기가 나의 아내인양 소복을 입고 여느 식구와 똑같은 자격으로 장례식을 지켜 왔는데, 오늘 그녀의 남편이 찾아 와서는 끌고 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반월공단에서 오래 동안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노동계의 거물이며 사회주의 신봉자였다. 그런 남편을 사회 부적응 자로 단정하고는 별거를 고하고 일동으로 이사 온 그녀는 나를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자라고 그녀의 남편에게 소개했다. 그는 나를 만나면 더 강한 이념을 심으려고 안달을 하며 동지가 되기를 원했다.
토지와 같은 일정하면서 부동한 한계가 있는 공공재는 일부가 장악이나 독점하게 되면 종국에는 사회가 피폐해져서 망하게 된다며 자본주의를 신랄히 비판하였고 아직도 지구상에는 공산주의는 망했을망정 사회주의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노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데, 다른 가족끼리 공유와 분배의 부분집합을 가질 경우도 가능하다는 공동체 문화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경우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서로간에 사랑도 공동소유에 포함이 된다는 파격적인 사상의 소유자 이였다.
장례식에서 내 어머니의, 뜻 모르게 죽은 내 옆에 여자가 지킨다는 다행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내 아들과 딸은 말하지 않는 불편함과 불쾌한 눈치가 보였던 것이 아마, 그 앞 집 여자의 존재가 그 이유였을 것이다. 어쨋든 소란은 거기서 끝났다.
장례식장에는 이제는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내 직계 식솔과 죽마고우 몇 정도만 남아서 화장터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 돌아가신 아버지는 뭔가 자꾸만 위로하는 말씀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허공에서 반복해서 하셨고 나는 그러시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느라
"아부지요~ 괘안니 더~ 아이... 제가 언제 뭐, 죽기 실타카디 껴? 난, 아무치도 안니 더~"
하지만 왠지, 왠지.... 서운하고도 아쉬움이 울컥하며 목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는 나의 과장 된 허스레를 막거나 혹은 끊어지면서 떨리게 하였다.
어머니는 미궁으로 빠져 녹아 내리는 내 아랫도리가 접히거나 굽지 않게 바로 잡으며
"어뜨 노? 아프지는 않나?"하셨다.
"거 참, 죽는 게 뭐가 아플리 껴~ 잘 녹아 없어지네!'
하지만 녹아서 없어지는 육신의 그 부분만큼은 서늘하면서 섬칫한, 생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야릇한 통증이 전해 왔다.)
그 것은 내가 생시에 언젠가 내 죽어 가는 모습을 꾼 꿈이었다.
컴컴한 소굴로 들어간 내 주위가 팍 하며 밝아지더니 사방이 강한 불꽃으로 밝아졌다.
내 시신에는 김이 무럭무럭 앞을 분간치 못하게 피어오르더니 시간이 흘러 파삭하게 건조된 육신은 군데군데 탁 하며 갈라졌고 그 갈라진 틈으로 새파란 불꽃이 성난 모습으로 무섭게 이글거렸다.
마치, 변산서 아들 딸과 함께 망망하게 바라보던 아궁이에 장작 타던 그 때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머니와 아들과 딸만이 시화호에 뜬 작은 배에 탔다. 내 하얀 상자에 회색가루는 두 아이의 하얀 장갑 낀 손으로 물 위로 뿌려졌다.
내 육신의 가루는 바람을 타고 흩뿌려지면서 막 손에서 떠나는 부분은 진한만큼 내가 볼 수 있는 영상도 진했으나 멀어지는 쪽으로는 희미하였는데 내 영상도 멀어지는 부분과 같은 부피로 희미해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가루는 얼마 남지 않았고 내게 보여지는 영상도 손바닥처럼 줄어들었다.
아들이 가루의 마지막 부분을 뿌리고는 손바닥을 탁 탁 털 때 내 영상은 찌찍거리는 방송이 끝 난 티브이 화면처럼 하얗게 빤짝거리더니 팍 하면서 큰 마름모가 급격히 작아지면서 점이 되어 사라졌고 내 영상은 온통 까맣게 끝나버려 더 이상의 보거나 회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죽음이 죽은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