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학교 선후배로 만난 도시 남녀 안병서 씨와 김영경 씨는 귀농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반려자로 서로를 택했다. 결혼과 귀농으로 시작한 이들의 인생 2막이 올해로 벌써 10년. 돌아보니 아쉬운 것도 많지만,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법에 익숙해진 지금은 남부러울 게 없다. 철밥통 평생직장 ‘땅’이 있어 든든한 것은 물론이다.
글 손수정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산촌마을. 1996년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 등이 이곳의 빈 골짜기를 개간해 깃들여 살면서 여러 귀농인이 모이기 시작해, 현재 마을의 16집이 모두 귀농 가구다. 안병서 씨(49)와 김영경 씨(43) 부부가 이 신생 마을의 주민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9년.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가 지금만큼이나 뒤숭숭하던 때였다. ‘귀농’이란 말이 사람들 입에 어색하지 않게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골 가서 살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고
“포토샵 같은 기존 프로그램은 따라갈 수가 없고, 복제품도 너무 많고, 외국의 값싼 노동력은 밀려들어오고….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전부터 농사짓는 삶을 동경하기도 했고요. 대학교 1학년 때 친구 부모님 농사 거들며 시골살이를 느껴봤는데, 저에게는 그게 맞더라고요.”
그러니 1996년 6월, 전국귀농운동본부가 발족된다는 신문 기사가 컴퓨터 책 만들던 노총각 안병서 씨 눈에 띈 것이 우연만은 아니리라. 안씨는 그해 11월 귀농학교 1기를 수료하고, 이듬해 2월 충남 연기로 귀농했다. 그해 여름,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던 김영경 씨도 귀농학교 3기 과정에 등록했다.
“직장 생활도 웬만큼 해봤고, 여행 다니며 놀 만큼 놀기도 했고…. 슬슬 도시의 삶, 혼자 사는 삶이 지루해졌지요. 게다가 원래 흙 밟고 사는 삶을 꿈꿨어요. 그래서 여름휴가 대신 귀농학교를 선택했어요.”
귀농학교 1기 선배와 3기 후배로 만난 안씨와 김씨는 서로를 귀농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반려자로 택했다. 만난 지 1년 만인 1998년 10월에 결혼한 이들은 이듬해 2월 허 목사네 행랑채에 짐을 푸는 것으로 이 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11월에 첫째(형곤·안성초 3)가 태어났고, 이듬해 초엔 더부살이를 벗어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 아니라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 살림집을 꾸렸다. 하지만 김씨의 표현대로 “시골 가서 살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귀농을 통해 이뤘으니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 집에서 둘째 유진(안성초 2)이가 태어났고, 올해는 새로 지은 집에서 막내 윤진이까지 얻었으니 안씨 말마따나 “해야 할 숙제보다 더 많이 한 셈”이 됐다고나 할까.
이들의 현재 농사 규모는 논 8마지기(1600평)와 밭 1000평. 이 정도면 다른 데서는 명함도 못 내밀 소농이나, 이름대로 산골 마을인 이곳 산촌마을에서는 대농에 든다. 올해는 논 2마지기 놀리고 6마지기만 유기농으로 지어 쌀 15가마를 거뒀다. 마지기당 2.5가마 수확했으니 산골 논에서 유기농으로 거둔 것치고는 괜찮은 소득이다. 밭은 막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절반인 500평만 농사지었다. 여기에 고추, 수수를 비롯한 잡곡, 그 밖의 자급자족을 위한 먹을거리를 심어 가꾼다. 철따라 취나물 뜯어 말리고, 토마토케첩 만들고, 오미자효소 담그고, 곶감 말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해 올해 조수익은 600만~700만 원. 고추 90근을 100만 원에 팔았고, 쌀 15가마니는 450만 원 잡으면 되겠고, 고구마도 30만 원어치는 되고, 여기에 잡곡과 직불금까지 어림한 계산이다. 부인 김씨는 방과 후 교사로 매주 월~금 출근하면서 연봉 10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부부가 맞벌이해 채 한 해 2000만 원을 못 버는 것이다. 도시에서라면 이 수입으로 아이 셋 키우며, 먹는 것만큼은 유기농으로 먹으며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이들은 빚을 지기는커녕 저축까지 하면서 산다.
“저희는 가계부도 안 써요. 돈 쓰는 일이 거의 없으니 가계부에도 쓸 게 없어요.”
김씨가 가계부 대신 수첩을 꺼내 정리해본다. 대형마트에는 한 해(한 달이 아니다) 네 번쯤 가고, 미역·김·다시마·멸치·밀가루 등 자급이 불가능한 것은 한살림에서 구입하고, 트럭 기름값이 1주일에 2만 5000원쯤 들고,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니 신발은 사야 하고, 어쩌다 한 번 자장면쯤은 먹기도 하고…. 이 밖에는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 아이들 옷은 얻어 입히고,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안 쓰니 통신비 안 들고, 샘물 먹으니 수도세 안 내고, 직장생활 할 때와 달리 경조사비 나갈 일 없고, 외식비는 없다시피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 사교육비가 들지 않는다. 매달 살림이야 그렇다 쳐도 땅과 집 마련하는 데는 거금이 들었을 터인데?
“땅 사는 데 총 4000만 원이 들었는데, 괜찮은 논이나 밭 나올 때마다 조금씩 나눠 사서 부담이 적었어요. 빚낸 적은 한번도 없었고요. 집은 2005년부터 4년에 걸쳐 지었어요. 돈 아끼려고 남편이 혼자 지은 거예요. 인건비는 벽돌 쌓고 전기공사 하는 데 300만 원 정도밖에 안 들었어요. 건평이 27평이니, 사람을 사서 지었으면 1억 원은 들었을 거예요.”
나를 알고 땅을 알아야 ‘귀농불패’
귀농한 지 10년. 돌아보니 머릿속에서 그리던 귀농과 실제 시골살이가 그리 다르지 않단다. 몸이 힘들기야 하지만 버틸 만하고, 시간에 쫓기는 것 싫었는데 와보니 도시에서보다 한결 여유롭다. 자녀들도 부부가 원한 대로 산골 아이들로 잘 커가고 있고. 농촌이라고 학습지며 태권도, 피아노, 보습학원 등 사교육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아직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남편 안씨는 “우리가 자식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실은 무지 많다. 다만 제대로, 다른 방식으로 교육시키고 싶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김씨는 “도시의 부모들은 아이를 시골에서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아이들을 도시에서 키울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 누구나 겪는 일을 이들도 머잖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이 지역은 집안 형편이나 아이들 성적이 조금만 받쳐주면 거의 다 전주나 대전으로 진학하거든요. 그러니 남은 시골 학교는 더 열악해지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고….”
농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에겐 농사짓는 것 그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판로 역시 여태까지는 생협에 공급하거나 지인에게 파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안씨가 보기엔 “유기농도 선별하고 경쟁하는 시대”다. “자급농은 가능하지만, 상업농하며 농사 계속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는 게 안씨의 솔직한 심경이다. 그리고 가끔은 외롭다. 사람이니까, 사람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사실 가끔 적적해요. 이야기 나누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요. 그래서 귀농인은 귀농인끼리 모이는데, 그것도 늘 쉽지만은 않아요. 반면 토박이 동네에서는 타지인 대접받고….”
“귀농 덕에 인생의 숙제를 해결했다”며 웃는 이들이었지만, 실은 귀농은 도시에서의 숙제를 해결해준 대신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하기야, 숙제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다만 내가 즐거이 감당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터이다.
이들이, 특히 남편 안씨가 가장 아쉬워하는 점은 이곳 산촌마을이 농사만으로 가정 경제를 해결하기에는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같은 처지의 귀농인이 많아 의지는 되지만, 농사짓기에는 땅이 좁고 산짐승 피해도 심하다. 그래서 안씨는 “농사지을 사람이라면 사람이 아니라 땅 보고 귀농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귀농’인지 ‘귀촌’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중요한 것이 씀씀이를 줄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지 못해 탈농하는 경우가 많단다. 귀농 시기도 중요한데, 이 역시 돈 문제와 관련이 깊다. 너무 젊은 사람은 벌어놓은 돈이 별로 없어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돈 좀 모아 나이 들어 귀농하면 절박함이 없어지고. 귀농에서 돈은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문제다.
두 사람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부부끼리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시골 가서 살자 하고 아내는 아이 때문에 안 된다 하는’ 대개의 경우 귀농 과정이 어려울 뿐 아니라 귀농 후에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또 일단 부부가 합의해 귀농하고 나면, 그 성패는 ‘귀농 이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경험이다.
“귀농을 희망하는 이들이 저희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돈, 땅, 집입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지요. 그러나 귀농의 성패는 이런 준비보다는 얼마나 열심히 농사짓고, 가난하게 사는 데 익숙해지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돈이나 사람 같은 외부 요인에 쉽게 휘둘리지 않거든요.”
큰 욕심 없이 지금처럼만 살리라
남들은 농한기라지만, 이제 돌이 된 막내를 번갈아가며 돌봐야 하는 이들 부부는 한가할 새가 없다. “애가 태어나는 바람에 농사에 차질이 생겼다”면서도, 아빠만 보면 방긋 웃는 막내 앞에서 덩달아 미소 짓는 안씨. 올해로 벌써 귀농 10년, 나이 마흔아홉에 얻은 막내를 바라보는 이 순간 안씨는 ‘귀농 10년, 그 이후’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그런데 그가 갑자기 꿈 이야기를 꺼낸다. 귀농한 덕에 적어도 악몽 한 가지는 덜 꾸게 됐다며.
“남자들이 꾸는 악몽은 세 가지예요. 시험 앞두고 공부 하나도 안 한 꿈, 분명히 제대했는데 입영통지서 다시 나오는 꿈, 그리고 회사에서 ‘짤리는’ 꿈. 하지만 농사짓는 동안은 적어도 짤릴 염려는 없잖아요.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