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10>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10)
[My Review MDCCLXXX / 인물과사상사 17번째 리뷰] 제37대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 1968년 대선과 1972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공화당에서 연이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닉슨 시절에 미국사회를 들썩인 굵직한 두 가지 사건은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일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위상을 실추 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리처드 닉슨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미국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상황도 그닥 나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타이밍이 늦어지면서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던 미국으로써 뼈아픈 실책을 남겼다는 점을 안타까워할 뿐이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을 하며 불명예를 안게 되지만,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보여준 '닉슨의 행정능력'에 대한 평가는 역대 대통령과 견주어도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고 평가 내리곤 한다. 다만, 그가 사임하고 수감된 뒤에 곧바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석방된 일 때문에 닉슨 개인의 불명예뿐 아닌 '공화당' 전체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 상당기간 독차지하는 뼈 아픈 실책을 남겼기 때문이란다. 닉슨이 '보여준' 행정능력을 책속에서 속속들이 밝혀주지 않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지만, 그의 시절에 실추된 '미국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실리'는 챙길만큼 챙긴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리해보자. 베트남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다. 당시 '속국'이었던 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는 아닌 느슨한 조공(무역) 관계였음 감안하면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런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이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화가 되자, 프랑스와 청나라는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패배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베트남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 '베트민(월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프랑스는 베트남에 실력행사를 할 여력이 남지 않았고, 이를 틈타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베트민'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으로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돌아왔고, 베트민은 프랑스와 다시 싸우게 된다. 하지만 '디엔비에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물러나게 된다. 베트남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에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일명 '베트콩')'은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활약하는데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60~1975)'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통킹만 사건(1964)'을 조작하며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존 F. 케네디가 암살(1963)된 직후여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남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지원하였고, 통킹만 사건을 통해 미군은 본격적인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허나 전황은 여의치 않았다. 계속되는 고전으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우며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베트콩 섬멸' 대신 '민간인 학살'을 하며 애꿎은 보복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에 '68혁명'이 프랑스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이 붙자, 곧이어 전세계 젊은이들이 호응을 하며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마침맞게 '반전시위'와 '민권운동'이 미국사회를 들썩였는데, 그 유명한 '히피문화'와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이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징집거부운동'이 펼쳐지며 미군은 곤혹을 겪게 된다. 전황은 날로 악화되고, 징집거부로 참전군인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고 말이다. 이때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미국으로선 대단히 반길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박정희 한국대통령은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꽉막힌 '베트남 참전' 미군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이걸 대환영했던 대통령이 린든 존슨 대통령이었는데, 68년 대선에서 닉슨이 미국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자 박정희는 쩔쩔 매게 된다.
사연인 즉슨, 닉슨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케네디와 존슨에게 연이어 패배를 당하고 상원위원선거에서도 낙마를 한 닉슨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면담'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홀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대사의 주선으로 어찌어찌 만남을 갖긴 했는데, 마주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서먹하고 냉랭한 분위기로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 닉슨이 '화려한 재기'에 성공해서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했으니, 이제 상황은 거꾸로 반전을 해서 박정희가 닉슨을 만나러 미국 워싱턴으로, 캠프 데이비드로, 심지어 닉슨의 개인별장까지 찾아가서야 겨우 '면담'을 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도 닉슨의 대답은 '닉슨 독트린'이었다. 미국의 대 아시아외교의 원칙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다시는 '베트남 참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가 스스로 해결한다'는 골자를 내세우며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장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급습한 일도 발생한 마당에 '미군철수'까지 만지작거리는 미국의 행보에 박정희는 안절부절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월남전 파병'까지 하고 있는 한국을 마냥 홀대할 수는 없었는지, 어찌어찌 박정희를 달래려 애를 쓰는 닉슨이었지만, 곧이어 펼쳐진 중국과의 '핑퐁외교'로 인해 데탕트가 이루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는 상황까지 펼쳐지자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대원칙을 밝혔고, 한반도는 '통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산가족찾기'와 같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허나 곧바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은 이유'는 중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견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기 위한 '선조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전여론이 거세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이 철수한 뒤에 '중국군'이 참전해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면 미국으로서는 결코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베트남의 공산화' 불똥이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중국과 북한이 '남한'을 베트남과 같은 방식으로 '공산화'를 시킬 우려를 미연에 막고자 미국은 중국과 '외교라인'을 형성하고, 중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가입까지 통과시키며 중국을 추켜세워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평화적, 민족적 대단결'을 확인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에는 평화의 물결이 휩쓸고 갔으나, 정작 박정희와 김일성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1인 독재 체제'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남쪽의 '유신', 북쪽의 '유일' 정책이다. 유신정책의 골자가 '박정희 종신대통령' 만들기였고, 유일사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김일성 일인독재'를 더욱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통일이 된다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탄탄히 하여 '통일한국'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견고히 하겠다는 심보였기 때문이다. 떡(통일)이라도 마련해놓고 '김칫국'을 마셨으면 오죽 좋으련만...
이렇게 닉슨은 전쟁에선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하는 일'마다 대체로 성공 이상의 성과를 얻으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다 터진 사건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자신이 역대 대통령보다 훨씬 잘났다(?)는 기록물을 <워싱턴포스터> 기자가 빼돌려서 기사화 시켜 버린 것이다. 그저 단순히 자신이 잘난 것만 기록에 담았으면 문제될 것도 없었겠지만, 자신의 '정치적 적수들의 약점'을 까발리며 자기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날조하고 기만하는 따위의 '비윤리적인 내용'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던 터라 닉슨 행정부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폭삭 내려앉고 말았던 것이다.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더는 버티지 못한 닉슨은 끝내 사임한다는 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수감되었다가 자신이 지목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사면권'을 행사받은 뒤에 석방되고, 정치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살아갔다.
'워터게이트 사건(74년)' 이후에 베트남 전쟁도 종전을 맞이한다. 미군 철수가 논의되고 곧바로 실행된다. 베트남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표면적으로는 '공산국가의 팽창'을 막는데 미국이 선봉에 선 것이다. 반공주의에 열심이던 미국으로선 당연하고 자연스런 참전이었다. 허나 전쟁의 양상이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참으로 빛났다. 미국의 역량은 고스란히 전쟁에 투영되었고, 미국의 힘으로 전쟁은 일단락이 되며,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온갖 명예를 누렸고, 전쟁 참전으로 인한 이득도 어마무시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는 완전 달랐다. 2차 세계대전에 쏟아부은 포탄보다 훨씬 퍼부었는데도 미국은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는 고사하고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과 부상당한 군인들이 속출했다. 부랴부랴 '한국군'을 비롯해서 우방국을 상대로 파병요청을 하면서까지 승리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했지만, 미국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하지 못한 분풀이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이 발달된 통신기술이 '텔레비젼 혁명'으로 인해 전세계에 즉각적으로 '참혹한 현실'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9년엔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하는 것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전쟁의 참상도 시시각각 '텔레비젼'을 통해서 전해졌다.
과연 전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물론 미국이 전세계를 대표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만큼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막대한 이윤에 비한다면 '베트남 전쟁'은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로 돌아서서 전쟁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국의 경제는 더욱더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단다. 그런데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얻은 성과는 여전히 '매우 높음'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쏟아부었는데도 '기축통화'라는 장점을 살려 '달러의 가치'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비용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런 비난을 감내하고서도 '세계적인 존경'을 받을 정도로 미국은 초강력한 국가로 우뚝 서버렸다. 감히 누가 미국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미국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까지 어찌하진 못한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로만 이루어지지만 '도덕'과 '윤리'를 나몰라라하면서 부와 명예를 건사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장은 떵떵거리며 남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을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있을지언정 '그 손바닥'이 하늘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도덕적인 일을 저지르고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언제고 망하는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의로움'과 '공정함'이다. 세계사를 배우는 목적이 '서양의 위대함'을 달달 외우기가 아닌 것처럼 '미국사'를 배우는 목적 또한 '미국의 위대함'을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믿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사'를 통해 우리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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