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조선왕릉 탐방 [고양 서삼릉] 후기 <1>
<2023년 12월 9일>
518년 조선 왕조의 숨결을 찾아 떠나는 우리들의 여정!
열두 번째 탐방으로 [고양 서삼릉] 탐방 기록입니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양 서삼릉]은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
12대 인종(재위기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
25대 철종과 철인황후 김씨의 예릉(睿陵)이 있으며,
삼릉 외에 3원*과 회묘(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태실, 왕자/왕녀묘, 후궁묘가 함께 있습니다.
*** 소경원(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의령원(추존 장조의 아들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탐방 코스는 원흥역~농협대학~매표소~희릉~예릉~의령원/효창원~원당목장 산책~너른마당~
서삼능보리밥<중식>~효릉 및 태실권역 정문~수역이마을~원당역에서 일정 마무리.
겨울 날씨답지 않은, 마치 봄날같이 포근한 날씨에 산길을 조금 걸은 후에 서삼릉 탐방,
그리고 마사회의 원당 종마목장 산책 후 소문난 맛집 [서삼능보리밥집]에서 식사,
수역이마을을 거쳐 원당역까지 고양누리길 3코스 일부 구간을 걸으며
언제나 한결같이 정겨운 길벗님들과 함께한 소중한 하루였습니다.
함께라서 더욱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효릉/태실 관람신청은 인터넷으로 1인 4명까지, 관람일 7일전~3일전까지, 회(回)당 선착순 30명.
관람 시간은 10시, 1시, 3시 중 택일. 해설사 동행으로 관람. 효릉 60분, 태실군 60분 소요.
♣ 효릉은 지난 9월 8일 공개하였으나, 가축전염병(럼피스킨) 발생으로 10월 21일 부터 중단 중입니다.
원흥역 ~ 농협대학교 ~ 서삼릉 탐방 ~ 원당목장 산책 ~ 서삼능비빔밥 <점심> ~ 태실권역 정문 ~ 수역이마을 ~ 원당역
※ [수원문산고속도로 (17번)]는 현재 표기가 제각각이다. 예컨데 카카오 지도는 [수원문산고속도로], 네이버 지도는
[평택파주고속(서울~문산)], 구글 지도는 [서울문산고속도로]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평택파주고속도로]의 미개통 구간이 있어 그런가 본데, 2020년 11월 7일 서울에서 문산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울문산고속도로] 개통이란 뉴스 전파, 광고하기도 했었으나, 백과사전 등에도 이미 구(舊) 서울문산고속도로라고 표기.
현재 국토교통부의 도로명 주소는 [수원문산고속도로]이며, 이미 그렇게 사용 중.[고양휴게소 주소 (수원문산고속도로 51)]
서삼릉 매표소 ~ 희릉 ~ 예릉 ~ 의령언/효창원 ~ (원당목장 산책)
만남의 장소 3호선 원흥역 6번출구 안쪽
10시, 참가자 인사, 일정 안내, 공지사항 전달, 준비체조
솔밭마을을 거쳐 [서삼릉 보행경로] 중 산길구간을 거쳐 농협대학교 정문으로 ~~~.
날씨도 포근하고, 말이 산길이지 동산 언덕길 수준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새박] 열매. 새알같이 생긴 박이라 하여 '새박'이라 한다.
***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앙증스레 열린 초록색 열매가 11월이 지나면서 회백색으로 익어간다.
언제나 여길 오면 빈센트 반 고흐가 ~~~, 작품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에' 등등.
산길구간에서 [서삼릉길]로 내려선다. 이 길은 고양누리길 3코스 서삼릉누리길이기도 하다.
***서삼릉누리길은 삼송역 ~ 솔개약수터 ~ 농협대학교 ~ 서삼릉 ~ 수역이마을 ~ 원당역까지 8.28km.
농협대학교
'통오리밀쌈'으로 소문난 맛집 [너른마당] 돌 조각. 이 길을 지나면서 맨날 뒤태만 보고 만다.
식사를 한 후 잠깐 돌아보면 될 걸, 흔히 친구들은 그런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냐고, 하여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궁금하면 500원이 발동, 결국 지난번 답사 때 짬을 내서 돌조각들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의외로 많았다.
*** 사실 급한 용무를 보기 전일까 후일까, 또 얼굴 표정은 어떨까, 얼마나 시원할까, 매우 궁금했었는데 ~~~.
[너른마당]
식당 [너른마당] 보경루 오른쪽에 자리잡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 식당에서 碑 오른편에 세운 안내판에 의하면, '고구려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있던 이 비석을 5년여 각고의
노력 끝에 옮겨왔으며, 비석 높이 6.39m, 각 면 너비1.5m, 무게 47톤, 4면에 새겨진 글자 수 1,802자이며 재질은 오석(烏石).
서삼릉 가는 길, 마사회 건물 같은데, 맨날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더니 오늘은 어이하여 문을 활짝 열었을까.
고양 서삼릉
종합안내도 앞에서 고양 서삼릉에 대해 간단한 설명,
*** 어이하여 136만여 평이 현재 7만여 평으로 능역이 축소되었는지, 효릉은 젖소개량사업소 부지로 인해 마치 섬처럼 ~~~.
금년 9월 8일부터 효릉이 개방되었음에 감사해야지. 비록 사전 예약제에 문화해설사 동행 조건으로 제한되긴 했지만.
*** 빨리 럼피스킨 전염병이 끝나야 지난 10월 21일부터 중단된 관람이 다시 재개될텐데 ~~~.
먼저 희릉으로 향한다.
희릉禧陵(중종비 장경왕후)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2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 1537년(중종 32)에 희릉 조성 당시 문제점이 있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으며, 1562년(명종 17)에 문정왕후의 주장으로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면서 다시 희릉이 되었다.
결국 중종은 강남구 정릉, 단경왕후는 양주 온릉, 장경왕후는 여기 희릉, 문정왕후는 태릉에 각각 단릉 형태로 잠들어 있다.
홍살문 기둥 초석(받침돌)은 빗물 등으로 인해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빠짐 구멍을 뚫는다.
*** 땅에 묻히거나 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확연히 드러나기에 한 컷.
예릉으로 가는 길.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웃기는 표석이다. 이럴 때 '웃프다'고 하는 건가.
*** 한국마사회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가꾸는 사업의 일환으로 서삼릉 능역 정화를 위해 부지 3,750평을 증여하였기
그 뜻을 기리고자 이 기념표석을 세운다고 하였네. 원래는 이 부근 전체가 서삼릉 능역이었는데 ~~~.
예릉睿陵(철종과 철인황후)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
흔히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 1831년 6월 17일 ~ 1863년 12월 8일, 재위 : 1849년 6월 9일 ~1863년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로, 조부 은언군, 아버지 전계군, 역모 사건 등에 휘말려 강화도로 유배, 사사되고 형과 둘이 강화도 생활.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로 승하하자, 순조의 양자로 입적, 왕위에 올라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으로 3년간 국정 운영.
1851년 친정으로 헌종 때 부터 시작된 삼정(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으로 진주민란 등, 수습에 진력하였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고 33세에 승하. 1908년 철종장황제로 추존.
강화도에서 농사 짓고 나뭇꾼으로 살때 '봉이'와의 첫사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세도정치에 되는 일은 없고 ~~~.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나 다시 걸어야겠다.
국조오례의에 의한 조선국 마지막 왕릉이며, 기록에 의하면 향로와 어로만 설치되었다고 한다.
현재 왼쪽에 판석길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은 황제 추존 이후의 일인 듯.
*** 홍살문과 정자각 기준, 향로와 어로의 위치를 볼 때도 후에 왼편에 하나 더 추가한 게 분명해 보인다.
황제로 추존 되기 전 표석이 없는 것은 원래의 표석을 깎아내고 다시 새겼기 때문.
[가정자각 유구(假丁字閣 遺構)] 장례(보통 3년상)을 지낼 때까지는 흉례, 3년상이 지난 후 기신제는 길례에 해당,
길례를 위해 진설하던 제상에 흉례를 지낼 수 없어 이럴 땐 탈상까지 사용할 정자각을 별도로 세운다.
다만, 왕후의 정자각에 임금을 늦게 장례할 때는 기존 정자각을 그대로 이용한다.
멀리서 봐도 석물이 커 보이는 것은 정릉(중종)을 강남구로 천장할 때 묻어 둔 석물을 재사용하였기 때문이다.
*** 518년 세월의 흐름따라 석물의 크기 변화는 태릉 탐방 후기 참조 바랍니다.
[의령원 / 효창원] 가는 길
관리사무소, 재실 건물과 매우 닮아 있다.
의령원懿寧園(의소세손)과 효창원孝昌園(문효세자)
의령원은 1752년(영조 28)에 의소세손이 3세로 세상을 떠나자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묘를 조성,
의소묘(懿昭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하였으며 1949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효창원은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가 5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 묘소의 이름은
효창묘(孝昌墓). 1870년(고종 7)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하였다. 이후 1944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어머니 의빈 성씨(성덕임)의 묘도 효창공원에 있다가 고양 서삼릉 후궁묘역(빈/귀인묘)으로 이장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이곳으로 이장되기 전까지는 모자의 무덤이 효창원 언덕에 백걸음 이내 나란이 있었다.
참고로, 관람을 제한(군 부대 관련)하고 있는 소경원昭慶園(소현세자)은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 한 후
두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하였다.
*** 거듭 얘기지만 소현세자(1612~1645)의 갑작스런 죽음은 두고두고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마도 모두가 그러하리라.
정조가 직접 지은 문효세자 신도비
위가 의령원, 아래는 효창원.
의령원
효창원
제각
고양 서삼릉 탐방을 마치고 서삼릉을 나서는 길, 왠지 생각이 많아진다.
능이나 원의 주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하여 아쉽고 안타까운 것도 그러려니와 문화재 관리와 개발의 문제, 등등.
136만여 평이 골프장(서울한양CC, 뉴코리아CC, 젖소개량사업소, 마사회, 군부대, 한국스카우트연맹 수련원 등등으로
7만여 평으로 줄어들었고, 그 드넓은 지역에 빽빽한 수백년 수령의 황금같은 나무와 숲과 숲들, 적송이나 참나무 ~~~.
오늘은 탐방하지 않았지만 태실 권역에 가면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들의 문화재까지 ~~~.
유독 소나무 숲이 무성한 한양CC, 몇 년 전 [한양CC 명품 소나무 사진전]이 생각나서 퍼온 사진.
마사회 종마목장 산책 이후의 일정 사진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여유로운 산책과 같은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리는 만만치 않았지요.
왕릉에 대한 자세한 설명덕에 많은 것을 알아갑니다.
마사회 마당도 멋졌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불어 함께라서 더욱 즐거웠습니다. ^^
능, 원, 묘가 다 있어 많은 스토리들을 간직한 곳이었어요
해설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남은 왕릉은 모두 한 분씩이라 단촐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