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남은 선택권이 없다.
내보내는 데로 나와야 한다.
우리가 해보지 않았는가 ㅎ
가족계획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생기는 데로 낳았고
나오는 놈은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고 싶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태어나기 3년 전,
그러니까 울 엄마 아부지가
나와 우리 형제들을 만들기 위해
밤일도 마다하지 않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도꾜 대공습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군은 344대의 B-29 폭격기를 동원하여
약 백만 발에 달하는 2,400톤의 소이탄을 동경에 퍼부었다.
말 그대로 융단폭격이다.
3시간동안 이어진 공습으로
도쿄와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고 10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자폭탄
핵실험 성공을 비밀에 부친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일본 군부가 이를 거부하자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천황의 옥새가 찍혀 있는 종전조서
죽어도 항복이 아니라 전쟁을 끝낸단다.
'통석(痛惜)의 염(念)'
어쩌구 하듯이 일본인 특유의 말장난이 묻어난다
항복방송하는 일본 천황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짐은 제국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 시국을 수습코져 충량한 신민에게 고한다"
천황의 육성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 퍼지자
일본 국민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경청했다.
망연자실한 국민들은 대성통곡했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도
수용소에서 경건하게 항복을 받아들였다
백인참수 경쟁
중국 남경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소위 무까이 도시야끼와 노다 쯔요시는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빨리 베는가를 시합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시합을 도꾜 니찌니찌 신문과 오사까 마이니찌 신문이
오늘날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했다는 것이다.
신문 소제목에 나와 있듯이
106-105 두 소위는 연장전에 돌입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본인의 잔인성과 엽기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다나까 군기찌라는 장교는 300인 참수에 도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무조건 항복에 서명하기 위하여
미주리 함상에 대기하고 있는
일본 합동참모본부 군인들과 외교관들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외교관
항복문서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할 때는
인조가 직접 수항단에 나아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를 행했는데
그래도 신사적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일본 외교의 승리라고 자평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술수에 능한 일본 외교에 말린 미국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데 눈감아 주는데 이어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아시아에서 5,000만 명을 희생시킨 히로히또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처단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는 오늘날 아베 총리가
전쟁범죄에 반성을 하지 않은 논거를 제공하고 있다.
아베 왈
"침략은 학술적으로 정의된 바 없다"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항복식
서명하는 아베총독
서명을 마친 아베는 경성역에서 비밀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
일본으로 도망가려다 배편이 끊겨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와
현 일본 총리 아베(安倍晋三)는 다른 사람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내려지는 일장기
경성(서울)을 빠져 나가는 일본군
부산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일본인들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 한국인들
기뻐하는 시민들
북치며 장구치며 기뻐하는 시민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해방이란 어휘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든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준 음식을 받아먹은 기분이다.
인천항을 통하여 들어온 하지중장(군정장관)
서울에 입성한 미군
남산 신사앞에서 미군
갓쓰고 도포입은 선량한 백성이
미군이 왜 들어왔는지 뭘 알어?
지게 히치하이킹
지게 지고 걸어가는데 태워주니까 좋기만 했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북한 주민들은 이들을 일본 압제에서 신음하던 민족을 구원한
고마운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인을 색출하는 소련군
미군을 한영하는 서울 시민들
동대문에서 미군을 환영하는 학생들
그땐 미군이라기 보다도 연합군으로 받아들였다.
연합군이라야 미군과 소련군,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이 합작한 중국의 국공합작군,
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던 영국군이 있었지만 미군이 주축을 이뤘다.
종로6가
3.8선
위 사진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3.8선 구획도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를 연구하던 미 국방성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러시아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여
한반도 주둔 일본군 항복과 무장해제를 받아내자고 제의했다.
이 작업에 참여한 미 국방성 인사는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중령이다.
일개 중령과 대령이 한반도의 허리를 두 동강 낸 것이다.
그들은 훗날 유엔군 사령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소련과 머리를 맞대고 도출한 결론은 한반도 분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국가를
자기들 편의에 따라 분할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우리는 이 두 동강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고
얼마나 가슴 아픈 이산의 아픔을 겪었는가?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비극은 진행형이다.
최초에 그어진 3.8선
이게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아온 한민족에게
70년 이상 아픔을 줄줄 아무도 몰랐다.
38선 아래 미군의 첫 경비초소
우리 땅에 외국 군대가 들어와
우리도 모르게 우리 땅을 갈라먹고 있어도 태평했던 백성들
중앙청에서 행해진 미군 환영식
미군 입성을 환영하는 이승만
이땐 대통령 신분이 아니었다.
어린이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하지 중장
북한에는 김일성이 들어왔다
동대문 전차 정류장
남과 북에 외국 군대가 들어와 우리 땅을 갈라 먹고 있는데도
백성들은 먹고 살기위하여 생업에 바빴다
농부는 똥을 퍼다 밭에 주었고
땔감은 나무로 해결했다
국방경비대 발대식
몸과 마음을 다바쳐 신생 조국의
초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 육사와 만주군관 학교를 나와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며 독립군을 잡던 매국노들이
신분을 세탁하는 장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찬탁, 반탁 벽보
남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점령기간이 임박해오자 신탁통치 하자고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국민들은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극렬하게 대립했다.
경회루
지붕에 잡초가 자라고 있다
예의 실종
창덕궁 후원 주합루까지 진입한 미군 지프
조선시대,
칙사를 비롯한 외국 사신도 왕궁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하마비가 있지 않은가.
병자호란에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사신이
왕궁에 말을 타고 들어와 조선을 능멸한 역사가 있는데
미군도 한민족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우월감과
자기들이 항복을 받아낸 일본과 우리를 동일시하여
점령지쯤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오늘날 지프가 있던 자리
시공관과 중부소방서 망루가 보이는 서울 시가지 풍경
12시 방향에 인왕산이 보인다
반도호텔
오늘날의 롯데호텔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입구
3시 방향이 롯데 호텔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1시 방향이 북한산
회현동 오늘날의 신세계 뒷골목
신세계 자리에 미군PX가 있어 미군 상대 범죄가 빈발하자
미군 헌병(MP)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용산역
증기 기관차
부산에서 출발한 증기기관차는 용산에서 물을 마시고 북으로 달려
압록강 철교를 건너고 만주벌판을 가로 질러 봉천(심양)까지 달렸다.
서울 근교 뚝섬
12시 방향에 용마산이 보이고
1시 방향 아차산 아레 긴고랑 마을이 보인다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1시 방향에 관악산이 보이고
10시에서 2시 방향으로 하얀 띠가 한강이다
의정부
12시 방향에 도봉산이 보인다
한강철교
남북 분단을 막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북한을 방문한 김구
북한에 쏘련군이 진주하고
남한에 미군이 들어오자 한반도는 허리가 동강났다.
남북이 38선으로 가로 막히자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했다.
임계점에 이른 대립이 우리가 태어나던 해에 터지기 시작했다.
제주 4.3사건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요충이다.
최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제주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8·15 광복 직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식량난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였으며,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서도 군정 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특히 북한에서 활동하던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내려온 이유와 횡포에 제주인들이 분노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군에 생포된 제주도민들
제주4.3사건 당시인 1948년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들인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인 딘소장과
유해진 제주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정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사진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 의해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4.3 진압문제로 육탄전이 벌어졌다.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에 출동하여 소요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여수항에 집결해 있던 1개 대대가
“어떻게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냐?” 며 반기를 들었다.
지창수 등 대원이 병기고와 탄약고를 접수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했다.
이른바 여순사건이다.
5.10 선거
그래도 지구는 돈다
우리가 태어나던 1948년 5월 10일.
UN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 200석 가운데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전국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정당별 분포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 지지파)가 54석,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당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이 2석, 그 밖이 95석(무소속 84석 포함)이었다.
이때의 투표율은 75% 정도였다.
헌법 공포식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들었다.
대통령 취임식
제헌국회의 의결에 따라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공포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갑장이라는 얘기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태어나던 해를 건국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목숨 바쳐 독립운동 했던 선열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중에 붕 떠버리고 만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우리.
조선의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일제.
조선의 처자들을 끌어다 성노예로 삼았던 제국.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고 나선 독립군을 학살했던 일본과 맞서
목숨 걸고 싸웠던 순국선열들을
하늘나라에서 무슨 낯으로 볼 수 있냐 하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가장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헌법이다.
이승만도 참여했던 제헌 헌법 전문(前文)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라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또한,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처음 발행한 이승만 정부 관보 1호에
헌법전문을 실으면서 발행 일자 1948년 9월1일을
‘대한민국 원년 9월1일’이 아닌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기록하고 있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1948.8.27. 해주시 해운동
북한에서도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들은 투표소를 선거장이라 표기했다.
투표하는 김일성
이 때만 해도 북한에는 인공기가 없었고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김일성이 수상에 올랐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입장식
기수는 베르린의 영웅 손기정 선수
1948년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이 열렸다.
2차 세계대전으로 백림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열린 대회였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전세기는 언감생심.
서울에서 기차 타고 부산에 도착,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국제여객선으로 갈아탄 후 홍콩 도착.
홍콩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 인도 켈커타,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20여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올림픽 복권
여행 경비마저 나라에서 풍족하게 대줄 수 없어
체육 복권을 팔아 기금을 마련했다.
최근 리우 올림픽에 항공료 문제로
시합 6시간 전에야 경기장에 도착한 나이지리아 선수단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영국 역시 전쟁 복구비용으로 선수촌을 지을 예산이 없어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이 군대용 천막에 묵는 일도 벌어졌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국은 50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복싱 한수안, 역도 김성집이 동메달을 따며 59개국 가운데 32위를 했다.
이 대회 선수단 기수는 베를린의 영웅 손기정 선수가 맡았다.
선수촌 입촌
선수촌 입촌식
사이클 선수 환산웅 선수 여권
홍콩 등 경유지 스템프가 찍혀 있다
원반던지기에 출전한 한국최초의 여자선수 박봉식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선수단이
동메달 두개를 따고 귀국하자 환영하는 시민들
(귀한 자료보내주신 "이정근"교수님(삿가스)꼐 감사를 드립니다)*산좋아*
|
첫댓글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들의 소중한자료 함께 공유해주신
산좋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