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외출 – 과거에서 온 나와의 조우
인도에서 나온 지 8년 2개월 만에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인도에 들어갔다.
17년 동안 동서남북으로 순회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였고 부끄럽지만 로칼 언어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교우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거나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였다. 순회하는 중에 길거리와 교회 공터나 예배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면 그저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였고 때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가진 것도 재능도 재주도 없는 나는 퀭한 눈동자와 깡마른 몸과 허름한 옷차림이 말하는 그들의 배고픔과 절망, 질병의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께 아뢰며 늘 씨름하였다. 때때로 일일이 안수 기도를 하였고 때로는 얼싸안고 울며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친 후에 하루하루 사는 이야기를 들었고 사탕을 나누어 먹거나 풍선을 불었고 때로는 약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렇게 17년을 지내고 본의 아니게 인도에서 나왔고 오랜 기다림 끝에 8년 만에 인도에 들어가는 감회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며 엎치락뒤치락 거렸다.
8년 동안 부재한 현장의 사역에 대하여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최선과 최악의 상황을 묵상하면서 방문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무엇이든지 무조건 감사와 은혜로 받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아도, 환영해주지 않아도,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어도, 그동안의 보고가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감사함으로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던 간에 겸손히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가는 곳곳에서 과거에서 온 나와 조우를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 곁에 와서 잠깐 머물렀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숨소리, 나의 눈빛과 눈물의 기도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자신들을 대하던 나의 애틋한 마음과 뜨거운 눈물과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던 나의 겸허한 자세와 태도를, 따스한 격려와 위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과거에 흘린 눈물, 바친 기도, 탄식과 절규, 아픔과 상처, 분노와 하소연 등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서 싹이 트고 자라서 꽃이 피고 있었다.
나의 첫 도착지인 희망발전소가 있었던 첸나이에서 나는 최초로 과거의 나와 조우를 하며 전율하였다. 곡식만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물론 길가처럼 완악한 마음, 돌짝밭과 가시덤불 같은 마음이 왜곡하며 유언비어를 만들고 거짓과 위선으로 매도하기도 하지만 만사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진실은 진실로 기억된다.
겸허는 겸허로 기억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기억된다.
침묵은 침묵으로 기억된다.
감사는 감사로 기억된다.
나눔은 나눔으로 기억된다.
섬김은 섬김으로 기억된다.
검소는 검소로 기억된다.
친절은 친절로 기억된다.
선의는 선의로 기억된다.
축복은 축복으로 기억된다.
첸나이공항에 픽업을 나온 후배 이 강사의 안내로 MCC 게스트하우스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 강사가 나의 첸나이 일정에 없었던 한국영사관이 주최하는 경축행사에 참여를 권하였다. 한국인들도 만나고 교포사회 무드도 느끼고 MCC 총장도 참여하니 그 때 인사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정말로 보고 싶어 하는 분이 행사에 오는데 그분이 나를 칭찬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하였다. “나는 딱 한 분 진짜 선교사를 압니다.” “ 나는 그 분을 참으로 존경합니다.”라는.
이 강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였다.
나는 첸나이 교포사회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말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었고 존재감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교포사회에 낄 수 있는 주재원도 아니었고 첸나이가 나의 사역지가 아니어서 언제나 섬처럼 떠돌았다. 초창기에 첸나이에 온 몇 분들과 친분이 있었지만 그 분들을 만나서 사역이나 현장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첸나이에는 나를 기억하며 자랑스럽게 말할 한국인들은 없을 터였다.
나를 “진짜 선교사”라고 말한 그 분은 당시 한국식당 “인서울”의 사장이었다.
그 분은 식당을 인수인계 받는 과정에서 인도인 변호사의 시비로 맘미암아 참으로 큰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은 내가 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원으로 채용해주어서 4년 정도 취업비자를 받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나는 늘 사랑에 빚진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그분의 가족과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라열라씨마지역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거나 시내에 나가는 일이 있으면 꼭 들려서 인사도 드리고 식사를 하였다.
그 분은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었고 반찬을 많이 주어서 한국 음식에 굶주린 배를 포식하게 해주었다.
한번은 홀 매니저인 우데이가 나에게 물었다.
“마담은 가난한데 왜 항상 팁을 주시는지요?”
나는 얼결에 “부자”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마담은 여기에 오는 한국인 중에서 가장 가난합니다.” 라고 대꾸하였다. 그는 한국인 마담 중에 나처럼 늘 티셔츠에 곤색 조끼와 검정바지만 입고 머리스타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고 목걸이나 반지 등 일체 장신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바꾸어서 “마음이 부자”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당시 한국인들이 신흥졸부처럼 오만방자하여 홀 써빙하는 인도 종업원들을 종 다르듯이 마구 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종업원들의 말을 무시하며 홀에서 개구리처럼 폴짝거리며 소란을 피울 때 마다 나는 종업원들이 받을 상처와 한국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가 작용하여 위로하며 격려하는 마음으로 종업원들에게 팁을 주게 되었다.
이래저래 “인서울”은 지친 몸을 쉬며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 고향 냄새가 그리울 때 갔던 첸나이 안에 있는 유일한 나의 쉼터였다. 그러나 8년 전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어 “Say goodbye”라고 말 한 마디 못하고 나왔고 고군분투하느라 안부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나처럼 무심한 사람을 “인서울” 조사장님이 “진짜 선교사”라고 말한다니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드디어 저녁 한국영사관이 주최하는 행사장에서 조사장님을 만났다.
그 분은 8년 사이에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하였으며 첸나이한인회 회장이 되어있었다.
8년 만에 만나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고 눈물이 났다. 오랜 벗을 만나는 친밀감이 우러나왔다. 그 분의 8년도 나의 8년만큼이나 드라마틱하였다. 우리는 포옹하며 살아있음을 서로 축복하였다.
“‘진짜 선교사님’을 뵈려고 달려왔습니다. 조금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옷 갈아입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 동안 힘 드셨지요?”
그 분의 얼굴에 세월에 무게가 실려 있었고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졌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의 면모였다.
“제가 사람들에게 ‘진짜 선교사’ 한 사람을 안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진짜 선교사”라는 말을 들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자르르 흘렀다. 나는 그런 호칭을 들을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 그 분의 말이 립 서비스가 아니고 심장에서 나온 말이어서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옛 기억의 필름을 돌려도 그분에게 감동을 줄만한 언행을 한 적이 없었다. 첸나이 한인사회를 감동시킬만한 선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극찬해주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장님께서 너무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 식당에 오실 때 마다 선교사님을 뵈었지요. 선교사님 그대로를 보고 가슴에 담은 겁니다.”
“그래요. 그런데 무엇이 사장님 생각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요?”
“선교사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우리 종업원들에게 겸손하고 온유했습니다. 항상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진지하고 진실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웃고 친절하고 무엇보다 우리 종업원들을 차별하지 않고 선대하여 주었습니다. 제가 첸나이에서 식당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선교사님 같은 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선교사님이야 말로 우리 곁에 있었던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참된 “진짜 선교사”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힘주어 말하였다. 그는 나와 관련된 특별한 사건이나 언행이나 공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식당에 조용히 오가던 평범한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마음에 담았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면서 차별 없이 종업원에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고 나를 “진짜 선교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과장이나 포장이 없는 나의 민낯을 보며 진짜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의 눈이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있는 그대로 나를 조용히 말없이 스크린 하였다. 그리고 본 것으로 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나의 이미지는 내가 부재하고 있는 사이에도 내가 되어 활동하였다. 그가 만든 이미지의 나는 나와 꼭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눈에 비친 나를 그대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사랑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진짜 선교사”“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의 내가 그 분의 가슴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경이감에 압도당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8년 동안 겪었던 나의 모든 수모와 멸시와 질시를 나의 첫 도착지인 첸나이에서 깨끗이 도말해주셨다.
할렐루야!
사람들이 없는 말을 부풀려서, 또는 사실을 왜곡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첸나이에서 나를 지켜 본 사람의 눈과 가슴에 사랑과 영감을 주시어 나를 위로하게 하셨다.
할렐루야!
앞으로 생애에도 사람들의 눈이 나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으로 나의 이미지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나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때로는 긍정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일 것이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할 것이다.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슬픔을 자아낼 것이다.
조사장님이 보여준 과거로부터 온 나는 나를 환희와 감사, 감동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첸나이에서 만나게 된 과거의 나는 라열라씨마, 마니푸르를 거쳐서 네팔로 나오는 15일의 여정 동안 나와 동행을 하였다. 우리는 어디서나 비슷한 과거의 나와 해후하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새 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체험하였다.
“진짜 선교사”는 나에게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 주님의 질문이었다.
"진짜 선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주님의 애틋한 눈빛, 어린 종을 향한 어루만짐이었다.
2022.11.25.금 새벽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은총에 빛나는 글을 읽으며 감동으로 가슴이 울컥하며 떨립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가
정말 가난한 주님의 모습으로
다가와 그분의 가슴속에 살아 계신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