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1889~1945)
아돌프 히틀러는 1918년 11월 10일 독일 ‘파제발크’ 육군병원에 부상병으로
입원해 있던 29세의 하사관이 있었다.
무공으로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이 하사관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날은 ‘호엔촐레른’ 왕조가 무너진 날이다. 히틀러는 나라의 멸망에 어머니
무덤에서 통곡을 한 후 처음으로 울었다.
히틀러네 황제는 러시아 차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평화조약에 서명을 한 것이다.
남부 독일의 한 마을에 현수막이 걸리고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병사를 맞았다.
“환영한다, 용감한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임무를 마쳤다.
그다음은 하나님과 ‘윌슨’이 처리할 것이다”.
‘베르사유조약’이 발표된 1919년 5월 독일인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운명은 독일보다 가혹했다.
독일은 차르 체제의 러시아를 무찌르고서 석탄과 철이 풍부하고 산업이 발달한
‘슐레지엔’에서 독일 몫을 야만인인 러시아에 빼앗겼다. 베르사유조약에 의거
슐레지엔이 분할된다는 사실을 독일 정부가 국민에 알려주지 않았었다.
독일 정부는 국민에게 외교 정책의 목표와 수단의 진실을 말 한 적이 없다.
독일 정부 관리는 위엄을 세우기 위해 군복을 즐겨 입었다.
비스마르크는 기병대 군복을 입고 과시했다. 현대 세계사에서 크나큰 비극은
러시아와 독일 공화국이 매우 특이한 역량을 지닌 레닌과 히틀러를 번갈아가며
적으로 만나야 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우리 시대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권력의지를 행동으로 옮겼다. 히틀러의 등장은 열광적인 독일
우익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히틀러는 레닌과 성장 배경이 비슷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하급관리로, 바이에른 접경지역의 오스트리아 세관원으로 일했다.
히틀러도 레닌처럼 시대의 소산으로 점차 정치에 사로잡혔다.
그는 정치이외는 다른 수단으로 생계를 꾸린 일이 없다. 레닌처럼 음모. 선동.
힘에 의한 권력 추구가 목표였다. 히틀러는 지적 이기주의, 자기 의심의 결여,
개인적 관계에 대한 냉담함, 토론이 아닌 힘에 대한 선호, 교묘한 이기주의로
다른 이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목표로 이끄는 능력이 레닌과 비슷했다.
이 두 사람은 청교도적인 특성도 비슷하나. 히틀러는 허영심이 전혀 없고
권력의 허상 때문에 부패하지도 않았다.
독일에서 음악은, 특히 악극은 곧 정치였다. 히틀러는 건축학적 재능과 연극적
재능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그는 낭만적. 예술자적
본능 덕분에 파라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만큼이나 오래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군주든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가든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연출은 적어도 그가 행하는 정치만큼이나 중요한 것 말이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숭배한 이유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파르지팔parsifal이 예다. 이 교훈은 나의 투쟁의 유명한 6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글은’ 모든 선전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침투하는 것이다‘
그는 스타다운 전문가 정신으로 연습을 벌리곤 했다.
그에게 미친 연설가라는 칭호는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히틀러는 레닌과 마찬가지로 의회제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모든 측면을
경멸했다. 하지만 레닌이 엘리트 집단 또는 한 명의 개인이 그의 靈智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한 반면, 히틀러는 민주주의가
보다 덜 형이상학적인 형태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반감을 품지는
않았다. 그는 참여 민주주의를 신뢰했고, 한동안 그 것을 실천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어느 정도 민주적 수단 없이 권력을 추구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레닌은 자신이 했던 방식으로 쉽게 권력을 추구할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하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독일의 경우는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독일은 강탈하기보다는 유혹해야 하는 나라였다.
1919년 초 적색봉기 즉 뮌헨 소비에트가 진압된 후 독일군이 이를 다시 받아들여
뮌헨지구 사령부 정치교관에 히틀러가 임명된다. 히틀러는 적색봉기의 두려움을
활용해 독일 과격파의 수도로 만들고, 독일 노동당이라는 프롤레타리아 집단에
들어간다. 1920년 4월 군대를 떠나 정치를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일
노동당을 대중적인 정당으로 변모 시킨다.
나치의 공식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다.
히틀러의 생각은 레닌의 경험에 기초한다.
그는 실제로 끝까지 레닌 주의자였다. 엄격한 규율을 갖춘 중앙 집권화 된 당이
독재의 절정에 올라섰을 때, 근본적인 혁명을 가능케 할 유일한 수단이 된다는
신념에 있어 히틀러는 철저한 레닌주의자다. 일단 권력을 잡자 레닌처럼 모든
기구를 당이 체계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히틀러도 1917년에 레닌이
취한 방식 그대로 준군사적인 폭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마침 독일의 마르크화가 대 폭락을 한다. 베르사이유 배상금 조항 때문에 독일은
어마어마한 국채인 빚을 지게 된다.1923년 독일을 방문한 미국 위원 ‘앤드류’는
7달러를 환전하여 40억 마르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2인의
식사 값이 15억 마르크였고, 팁이 4억 마르크였다. 예금자나 공채를 갖고 있던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득을 본 사람은 모든 은행 담보대출을 상환한
지주들과 채무를 가치 없는 지폐로 지불해 고정자본을 산 산업자본가들이었다.
역사상 가장 잔인한 규모가 큰 부의 이동이었다. 히틀러는 바이에른을 장악할
기회로 잡고 나치 당원 3000명의 병력으로 베를린을 향해 진군했다. 경찰의
진압으로 실패하여 5년 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란츠베르크’ 요새 감옥에
수감된다. 그는 여기서 보낸 수감생활 중에 나의 투쟁을 집필한다.
독일은 큰 변화가 온다. 그는 정치가로 변신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1924년 12월 그는 석방되자 바그너가 미치도록 듣고 싶어, 피아니스트
‘에른스트 한프슈텐겔’ 집으로 간다. 그리고 “사랑의 죽음을 연주해 주시오“
이튿날 메르세데스 한 대를 샀다. 그리고 히틀러는 총리가 될 때 까지 길에서
만나는 차는 뭐든 앞지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영국의 무관심함에 분노한다.
1922년 독일이 러시아와 라팔로 조약을 맺자 더 분노한다. 이 조약을 러시아에서
무기합작을 확대하고 독일 조종사와 탱크 승무원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동맹국 폴란드는 불길한 징조였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 첨부된다. 17세기 프랑스
인구는 다른 유럽국 보다 두 배 이상 대국이었다. 다음 대국이 폴란드였다.
1924년 말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출옥한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력으로
엎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중 정당을 창당하여 공화국 안으로 침투한다.
히틀러의 정치적 기반은 공산주의 덕분이었다. 공포라는 일체감을 통해 급진
민족주의자를 끌어들인다. 당시는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 전성기였다.
히틀러는 레닌주의를 통해 일단 권력을 잡으면 조직이 통제의 기반임을 알았다.
고로 선거구에 따라 관구로 나누고 지역마다 대표를 두었다. 나치당은 중앙
집권화 되어 모든 권력을 히틀러가 갖고, 히틀러 청년단, 나치 학생연맹, 나치
법률가 연합, 대학생 연맹, 나치 교사협회, 독일여성회, 나치 의사연맹, 이외도
여러 조직이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조직원들에게 어떤 결정권도 주지 않았지만,
폭력을 포함하여 그들의 활동에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독일수출은 1924년 이후 5년간 두 배로 증가하고,1927년은 1차 대전 전 수준을
돌파했다. 1929년에는 국민 생산이 12% 증가했다. 히틀러는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해서 권력을 잡았다. 1932년에는 나치 당원이 80만 명이 된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기 전까지 좌. 우익 모두 히틀러를 과소 평가 했다. 11월의 선거에서
나치당은 33% 득표 196석을 얻고 공산당은 100석을 획득한다. 33년 1월
히틀러는 총리가 된다. 이 날은 독일과 전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날이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나치는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지 않는 한,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재빨리 움직였다.
히틀러는 긴급법령을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독일 민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과 반역 음모’에 관한 보완법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경찰이
사법권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이 나치 통치의 실제 토대가 형성되었다.
히틀러의 하수인은 괴링이었다. 괴링은 경찰이나 게슈타포를 이용했다. 몇 주
만에 공산당을 괴멸시킨 것도 괴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와 살인 정책을 썼다.
적법성 여부는 고려하지 않고 무참하게 가혹한 처리를 했다. 게슈타포의 간부
‘한스 기제비우수’는 나중에 증언에서 ‘존경할 만한 시민을 가장하고 모든 무절제,
거짓말, 법률위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친위대가 즐겨 사용한 전략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할 때 힘러는 친위대를 장악해 치안기구로 만들었다.
친위대 안에 강제수용소를 위안하고 특별업무를 수행할 살인 혐의로 복역한
자들을 모아 특수 임수를 수행할 해골부대를 만들었다.
힘러는 빈틈없는 관료적인 사무 처리로 합법성에 성실성은 자기만족이었다.
노모를 관용차로 모시면 비용을 급여에서 공제시켰다. 힘러는 품위와 청렴,
정의의 전사라는 느낌을 주었다.
힘러와 괴링의 반목에서 수용소에서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함과 사디즘, 무법상태가
존재했다. 힘러가 정치 경찰의 권력을 독점하자 히틀러는 조폭 같은 숙청 작업을
해나갔다. 즉시 눈앞의 모든 정적이나 오랫동안 원한이 있던 사람을 살해해 나갔다.
정보기관은 증거를 조작해 연루관계를 만들어 갔다. 히틀러는 총살할 자들의 명단에
단순히 연필로 밑줄을 긋기만 했다. ’하이히들러‘가 총살장에서 서명했다.
총살 집행장의 문구는 단순했다.
“총통 겸 제국 총리의 명령에 따라 대역죄로 총살을 선고한다.” 한 장면을 보자,
힘러와 괴링이 활주로에서 히틀러를 맞이한다. 붉은 하늘아래서 그들은 총살로
죽을 자와 앞으로 총살할 사람의 명단을 꼼꼼히 살핀다. 내무장관 ’프리크‘는
집으로 돌아가라 지시한다. ’프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총통 각하, 각하가 ’룀‘과
돌격대에 취한 조치를 즉시 ’힘러‘와 친위대에 똑같이 하지 않는다면, 각하가 하신
모든 일은 악마를 쫓기 위해 악마의 왕을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룀’과 돌격대가 정부전복을 꾸민다는 구실로 ‘룀’은 재판 없이 총살당한다.
정부와 경찰이 자행한 이런 대량 학살 행위는 독일에 도덕적 재앙이었다.
독일 장군들의 명예는 사라졌다.
강제수용소 제도는 나치가 러시아에서 수입한 것이다. ‘힘러’는 무섭게 강제
수용소를 증설했다. 나치의 수용소는 100개에 달했다. 대부분의 수용소는 특정한
경제적 목적에 이바지했다. ‘힘러’가 독일경제에서 ‘사회주의화된 부분’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부분은 소비에트에서 자극을 받아서이다. 수용소는 입구에 “노동은
명예, 용기, 영웅적 행위와 같다.” 라는 글자를 걸었다. 나치도 아우슈비츠 입구에
“노동은 자유를 준다.” 라는 표어를 걸었다. 수용소에서는 종종 기관총으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1938년 해도, ‘콜리마’ 강제수용소에서 어린이 포함하여 4만
명이 살해당했다.
1930년대 중반에 만은 지식인은 파시즘이 유럽, 어쩌면 세계의 지배적인 통치
제도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터기, 그리스, 루마니아,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파시스트에
준하는 정권이 수립되었다. 어쨌든 그 무렵 극소수의 지식인만이 스탈린 체제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고, 유대인 작가들은 스탈인의 폭력적 반유대주의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히틀러의 목표는 동방정책을 강조하는 그가 쓴 ‘나의 투쟁’과 ‘비밀의 책’에서
확인 된다. 이 책에서 정화과정은 유태인의 말살이다. 이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필수임을 강조한다. 계급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종사회주의자인 히틀러는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인종이라 믿었다. 이 원동력이 인종의 오염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그 중요한 오염원이 유대인이라 굳게 믿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부정적인 슈퍼맨이라 부르며 유대인은 지구상의 어떤 민족보다 혈통의 순수성을
잘 보존하였다 봤다. 반면 독일인은 오염되었기 때문에 1차 대전에서 패했다
믿었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인종 오염 청소를 하는데 100년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지상의 왕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청소한 것이다. 후세의 통계는 700만 명 좀 안되게 해서는 안 될 극악무도한
과오를 저지른 것으로 우리는 알고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권력을 잡은 이들이 지식인 계급이다.
1930년대 전체주의 테러의 영향력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막대했다.
그러나 당시엔 히틀러나 스탈린의 영향력을 대단치 않은 것처럼 봤다.
그보다는 그 두 정권이 장래에 그들 국민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러 나라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가 문제였다. 두 사람이 절대 권력에 오른 일은 이미 구조가
불안정하고 취약해진 세계에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한 쪽은 계급에, 한 쪽은
인종에 근거했지만, 이 둘은 똑같이 종말론에 기대어 무한한 영토 정복 욕구를
불태우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경쟁하는 권력 시스템은 널리 펴졌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출현은 세계적인 침략 시대의 개시를 알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존슨 지음, 살림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