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12. 상상 테마11 - 특정 사람 관련 명칭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일반적인 인칭 말고 특별한 상징성이나 암시성을 갖는 고유한 인칭 명사를 생각해 보자. 뭉크, 마그리트, 보들레르, 고흐, 쇼팽, 슈베르트, 모차르트, 랭보, 아인슈타인, 연암, 정약용, 이중섭 등. 이런 이름들은 그 자체로 막강한 내포성이 있기에 우리는 종종 특별한 고유명사라고 여기고 그 이름들을 끌어와 시를 쓴다. 또한 직접적인 이름은 아니지만 특별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지칭하는 명사도 자주 활용되어서 시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애인, 이방인, 난민, 방관자, 주동자, 노마드, 아니키스트, 지하생활자 등이 바로 그런 명사에 해당한다.
이런 명칭으로 시를 쓸 때 두 가지가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 명칭을 끌어온 ‘나’의 특별한 정서 상태가 확보되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그 대상이 가진 상징성을 특별하게 인지하되 상징성 자체에 갇히지 않는 센스가 필요하다. 우선 왜 ‘나’가 그 명칭을 바라보고 사유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후 특별함을 품고 있는 명칭을 ‘나’의 상황과 자연스럽게 신선하게 맞물리게 해야 한다. 상징에 기댄 듯 기대지 않은 듯 명칭을 따와서 ‘나’의 정서적 맥락에 기여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상을 신선하게 적용하면 나만의 시가 탄생한다. ‘자학을 좋아하는 내 심장 속엔 고흐가 산다/ 자폐로 가득 찬 뒤틀린 방/ 고흐의 잘린 귀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들레르가 어머니 무덤 옆에/ ‘악의 꽃’을 심는다’ ‘처음부터 나는 나에 대한 방관자다’ ‘아나키스트처럼 떠도는 것이/ 구름이나 새나 바람이 아니라/ 일요일 아침 십자가 아래에서/ 부활한 내 우울이다’와 같은 상상을 적용하면 시가 낯설게 되고 나만의 세계를 훨씬 다채롭게 펼칠 수 있게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은둔자 / 하린
지하실이 나의 신앙인 것은 매우 적절하다 층간 소음은 생각을 제거하기에 충분하고 집주인의 도덕과 윤리는 흡착률이 좋다
본능적으로 우린 지하실에서 지하실을 잊는다 고상한 천장을 상상하며 창문을 쳐다보지 않는다
위층 여자를 나는 이불 삼아 덮는다 여자의 꿈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까지 불면 위에 불안을 포갠다
산다와 살다와 살아지다의 차이점을 알려고 할 필요 없다 그 모든 것은 악몽으로 치환되고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사물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암막 커턴을 치고 모든 소리 잠그지 않은 것에 대해 꿈속에서 후회한다
미세한 꿈틀거림만 있어도 독백은 나를 참견한다 어둠을 적당히 방치할 순 없는 건지 방치를 끝까지 사랑할 순 없는 건지
친애하는 운둔이여!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되어 내리길 무작정 쏟아지길…
나를 완벽하게 은닉하기엔 손바닥만 한 창은 충분치 않고 나를 호출하기엔 신들은 한가롭지 않으니 쇠창살처럼 단호하게 아름답게 꽃혀주길…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의든 타의든 운둔을 경험한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람도, 활달한 사람도 혼자만의 시간에 침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는 그런 은둔의 극대화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누구나 흔하게 느끼는 은둔은 새로운 형상을 획득하기도 어렵고, 독자들에게 정서적 파장도 심어줄 수 없다. 그래서 은둔에 처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이 시의 장점은 현대인들의 자기 소외가 지극히 사적이고 예민한 방식으로 극대화될 수 있음을, 긴장감 넘치는 언술을 통해 보여준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은둔자」에서 객관적 상관물은 방이다. 이 시에 나온 방은 지상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지하에 있고 암막 커튼까지 처져 있다. 지하방은 처음부터 어두운데 거기에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으니 방은 암실이나 다름없다. 암실은 자신을 더더욱 깊은 곳에 은닉하려는 태도를 반영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산다와 살다와 살아지다의 차이점을 알려고 할 필요 없”는 암울한 날들의 연속인 화자. 불면과 불안만을 품은 화자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기에 방은 최적화된 장소이다. 객관적 상관물이 지하방이니만큼 지하방에 관련된 단어와 이미지들을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건물, 손바닥만 한 창, 몇몇의 가재도구, 암막 커튼이 메모됐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의 장점이 자기 소외의 심리 상태와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은 많이 적용되지 않았다. 긴장감 넘치게 극적인 장면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더욱더 부각하는 언술을 주로 배치했다. 은둔이 일상인 화자의 상황을 상상해서 거기에 맞는 시적 진술을 집요하게 나열해 공감의 폭을 넓히려고 한 것이다.
거기에 화자에겐 ‘지하실’이 신앙이나 다름없을 거야, 월세가 밀렸을 때 세입자를 위한 척하는 “집주인의 도덕과 윤리는 흡착률이 좋”았겠지, 불면을 안고 누우면 “위층 여자를” “이불 삼아 덮”는 듯한 기분이 들었겠지,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사물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도 했을 거야, 맞아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면 아마 감옥 같았을 거야, 라는 추론적 상상을 덧붙였다.
* 또 다른 예문
우유를 따르는 사람 / 김동균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던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윤숙노* / 이산율리 소매 길이를 잰다 풀어진 머리칼을 제치면서 잰다 짜증 낼 수 없다 귀신은 아무때나 팔을 내주지 않으니까
버선을 넣어 만든 액자가 기울어 새벽종이 울린다 애썼다고 입에 땅콩 알사탕을 넣어준다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귀신은 존댓말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귀신이 잘 보여 존댓말을 모른다 귀신은 옷고름 길이가 봄날보다 짧다고 투정했다 할머니는 섭섭해서 남산에서 목련처럼 울었다 붉은 치마가 더 붉은 날이었다
귀신은 금박을 무서워한다 할머니는 좋아한다 샛노란 끝동에 복복福자를 찍었다 귀신처럼 감쪽같다
소매에서 팔을 뺄 때마다 팔이 자꾸 생겨났다 쉬지 않고 소매를 만든다 이제 색깔 옷은 지겹다고 할머니는 종로 3가 골목이 꽉 차도록 검은색 당초무늬 갑사를 펄력거렸다 이상하게 어둡지 않아
목이 쉬도록 종이 울렸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귀신에게 알사탕을 물렸다
치마가 길어서 넘어져도 귀신은 씩씩하게 팔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숱 없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밤새도록, 그림자 없이 바느질이다
* 한복 명인 - 《사이펀》 2021년 여름호
경계인 / 김제옥 그날부터 빗금으로 서 있는 사람이다. 외침이다. 지나치는 사람이다. 둘레를 배회하는 사람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내미는 얼굴이다.
스스로 경계에 갇힌 놀라움으로 벽이 숨통을 죄어오는 공간에 산다. 이곳도 아닌 저곳도 아닌, 어둡고 습습한 시야의 틈에 걸어 들어간다.
찬 공기가 살 에이듯 감은 눈으로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 바람을 넘어서며 벽애 부딪치는 투명한 겨울 사람. 뜬 눈으로도 들을 수 없는 이름. 떠돌다 죽어버린 바람결 곁에서 결빙된 언어를 녹이는 사람. 그대가 스쳐 간 투명한 자리를 맴돈다. 찬 불빛의 고요함은 너무 아름다워, 나막이 나에게만 들리는 따스한 온기의 목소리. 폐부 깊숙이 스미는 사이렌의 노래 그때의 감정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 아니냐고 텅 비어있는 말라버린 것이 눈물의 흔적 같은 언 손을 내밀어 본다. 벽의 어둠이 드러날 때까지 외친다. 듣는다.
그 날의 눈알을 빼서 걸어놓았다. 집 근처 서성이는 겨울의 그림자가 있다. 산화하는 노을빛으로 잠긴 다리. 휘발하는 글자 사이 빈 곁으로 경계인이 걸어간다. - 《시향》 2020년 봄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저자(하린 시인) 약력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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