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붉은 등이 건물 외벽 2층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안세병원 사거리의 [공을기 객잔]이나, 청나라 시대의 의자와 탁자들로 실내가 장식되어 있고 중국식 전통 복장의 종업원들이 들고 온 메뉴에 빨간 고추로 표시된 매운 요리가 일품인 시네시티 뒤편 락앤롤 골목 안의 [라메이], 혹은 2층에 포스트모던 바가 있는 도산공원 입구 맞은편의 퓨전 레스토랑 [초우]같은 중국집들을 나는 좋아한다.
모든 중국 음식은, 불이다. 뜨거운 불의 가열로 비로소 음식이 완성되기 때문에 중국음식을 화식(火食)이라고 한다. 커다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 위에 얹어 가열시키면, 그때부터 세계는 변화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불의 욕망은, 세계를 나의 의지로 변화시키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소산이다. 나를 중국집으로 이끄는 것은 이러한 잠복된 욕망의 은밀한 유혹 때문이다. 물론 짜장면 한 젓가락 먹으면서 세계 변혁을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성수대교 남단에서 비엠베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 있는 [강가] 본점은 최근 압구정역 근처로 이사를 했고, 실내에 설치된 평면 LCD TV로 최근 유행하는 인도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압구정 골목 안의 [인디아 게이트], 혹은 이태원 소방서 뒤편 50미터 거리의 2층에 들어가 있는 [타지마할]과 해밀턴 호텔 옆의 [아쇼카], 삼청동 가는 길의 아트 선재센타 1층에 있는 [달] 같은 인도 음식점도 좋다.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아니라 부드럽게 삶은 콩에 마살라를 가미한 인도식 스프를 말하는 것이다.
인도 음식의 백미는 역시 커리다. 중국에 가면 짜장면이 없듯이 인도에 가면 카레가 없다. 그것은 모두 한국화 된 음식이고 인도에서 커리는 향신료로 쓰인다. 모든 인도 음식은 커리를 통해 완성된다. 맛살라라고 부른 향신료는 열대지방 인도의 풍부한 나무로부터 나온다. 나무의 뿌리, 잎, 열매 모든 것들이 향신료의 재료로 쓰이는데 월계수잎이나 박하, 계피, 백리향 등 무척 다양하다. 인도 음식에 익숙하지 못한, 혹은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이 향신료에서 인도 맛 기행을 포기한다. [강가]나 [달] 같은 인도 음식점들은 전통적인 인도식 향료보다는 한국인들 입맛에 맞게 훨씬 순한 향료를 쓰고 있다. 정통 인도 음식을 맛보려면 이태원에 가야 한다. 인도 음식은 크게 북부 음식과 남부 음식이 있는데, 북부에서는 밀을 발효시킨 밀반죽을 손으로 얇게 쳐서 만든 짜투리, 밀반죽을 탄투리라는 화덕에 구워 만든 난이 있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남부에서는 쌀가루를 반죽해서 튀긴 도사 안에 감자나 양파, 향신료 등을 넣어 먹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 음식은 손으로 먹는 게 좋다. 화장실도 웨스턴 스타일의 수세식보다는, 인도식으로 물을 떠서 손으로 직접 뒤처리를 하는 이스턴 스타일이 훨씬 더 깨끗한 것처럼, 인도에서는 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음식도 역시 포크나 젓가락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숯불에 구운 닭고기나 양고기를 직접 손으로 찢어 먹거나 난을 커리에 찍어 먹는다. 손끝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인도 음식의 숨은 비밀이다.
지난 7월 16일 USA투데이지는, 건강하게 사는 10가지 방법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하루 한 번씩 웃어라, 요가를 하라, 잠을 7-9시간 정도 충분히 자라, 섹스를 자주 하라, 기도하거나 명상을 해라, 이를 자주 닦아라 등등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들이다. 하루 한 움큼씩 아몬드나 다크 쵸콜렛을 먹으라는 것도 있다. 재미있는 유머는, 쇼핑몰에 자주 가라는 충고였다.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치매가 예방된다는 것이다. 요가를 하거나 잠을 많이 자는 것 이외에는 대부분 실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내가 오래 살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삶은, 살고 싶을 때까지만 살면 된다. 내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할 때, 나는 삶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삶을 버릴 것이다. 그 기사의 마지막 열 번째 충고는 인도 음식을 먹으라는 것이었다. 인도 커리에 함유된 커큐민 성분이 암이나 심장병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인도나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내가 부드럽고 순한 맛보다는 강렬한 맛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 레스토랑에 가면, 나는 강한 향로가 들어 있는 마살라보다는 순한 맛의 꼬르마 커리를 인도식 빵인 난에 찍어 먹는다. 차이니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정통 중국 요리보다는 퓨전 스타일을 선호한다. 빵에다 잡채를 넣어 먹거나 두부요리를 더 좋아한다. 물론 중국집의 기본은 탕수육이나 짜장면이다. 아무리 다른 요리를 잘해도 탕수육과 짜장면이 맛이 없으면 절대 가지 않는다.
한때 집에서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좋았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런 예감은 우리를 얼마나 절망케 하는가. 집에서 밥을 먹어본 것은 몇 만 년 전 일이다. 7미터가 넘는 큰 키에 꼬리까지 14미터나 되는 티라노타우르스나, 등에 고슴도치처럼 뾰죽뾰죽한 톱날이 나 있는 스테고사우루스가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오던 백악기 시절에는 집의 식탁에 촛불을 켜 놓고 저녁을 먹기도 했었다. 쇼팽이나 슈만의 가벼운 피아노 소품이 아니라, 바하의 브란덴부르그 3번이나 5번 혹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D 메이저처럼 장중한 곡을 틀어도 식사 시간은 경쾌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기쁨으로 부엌은 따뜻했고 식탁 위에는 어떤 요리가 나올 것인지 충만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전에 만났던 어떤 여자 친구는 케익을 만들어서 퀵 서비스로 집까지 배달시켜주기도 했는데, 모양은 조금 일그러졌지만 그런대로 맛있었다. 음식 만드는 게 취미였던 그 친구는 자주 집에 찾아와서 나를 실습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행복했다. 행복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것이 더 어렵다. 이 삼단논법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므로 행복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탱고를 추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갈 수 있는 저녁 레스토랑이 제한되었다. 냄새 때문이다. 고급 레스토랑은 실내 환기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삼겹살 집에서 순두부찌개나 냉면만을 먹어도 온몸에 고기 냄새가 배는 것 같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불과 몇 센티 밖에 떨어지지 않는 [존재의 거리]를 두고 땅게라의 손을 잡으며 춤을 춰야 한다. 탱고 바 오나다에 가기 위해서는 더욱 세밀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저녁 레스토랑을 선택할 때 최우선 조건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하는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하는 것에 있다. 탱고를 추면서부터 변화한 일상 중 하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저녁을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탱고는 운동량이 많다. 계속 플로어에서 춤을 추지 않아도 하루 저녁에 10명의 땅게라와 춤을 춘다고 가정하면, 한 명당 최소 3곡을 추는 것이 밀롱가의 기본예절이니까 모두 30곡의 춤을 춰야 한다. 탱고 한 곡당 평균 3분이라고 해도 90분, 한 시간 반을 플로어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걷는 것이 아니라 탱고 음악을 들으면서 그 리듬을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내딛는 스텝 하나에 인생의 무게를 걸고 춤을 추면 온 몸의 신경이 집중된다. 뇌의 활동량도 증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녁을 먹는 것이 좋다.
그런데 탱고 바 오나다는 삼겹살 집으로 포위되어 있다. 냄새가 나지 않는 마땅한 음식점이 없는 것이다. 오나다에 간다면 저녁을 오나다 근처에서 먹는 게 편하다. 매일 저녁마다 20분 정도의 생방송을 해야 하는 나의 일과로 보면, 방송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탱고 바 오나다 근처로 먼저 가서 저녁을 먹고 탱고 바 오나다의 지하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나 탱고 바 오나다 주위에서는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이 거의 없다는 게 불편하다. 탱고 바 오나다 1층에 있는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거나, 뒤편 돈까스 집에서 치즈 돈까스나 모듬 돈까스를 먹거나 그것도 아니면 종로 김밥집 같은 데서 김밥이나 우동을 먹는 것 이외에는 선택할 곳이 많지 않다.
[레드 망고]는 그런 점에서 내가 선택한 최적의 장소다.
탱고 바 오나다 뒤편 주택가 골목길 작은 네거리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 체인점은, 웰빙과 다이어트 열풍을 타고 시내 곳곳에 매장을 넓혀 가고 있는데, 주 메뉴는 요구르트다. 하얀 접시에 소프트 크림 형태로 얹어지는 요구르트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천원을 더 내면 토핑 5가지를 추가할 수 있다. 또 3개 한 묶음인 트빵이나 르빵 같은 것을 약간 덥혀서 차가운 요구르트에 찍어 먹으면 저녁 허기까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오나다 뒤편의 그 집은 다른 체인점보다 양이 조금 적어서 불만이지만, 건물 외부에 덧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의자도 놓여 있어서 여름철 저녁에 시원한 기분을 느끼려는 사람은 야외로 나갈 수도 있다. 사실 시원하기는 에어컨으로 일정 온도가 유지된 실내가 더 시원하지만, 감성적으로 자연의 바람과 별빛이 쏟아질 것 같은 환상을 품게 하는 야외 테이블로 눈길이 가는 것이다. 레드 망고에서 파는 모든 것들에는 냄새가 제거되어 있다. 무색무취. 결정적으로, 나는 이것이 가장 좋다.
나는 오늘 저녁에도, 탱고 바 오나다에 가기 위하여, 레드 망고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
*상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탱고를 포기하라
냄새에 관한 강박관념은 탱고 바 오나다에 가기 전, 나를 항상 1층 엘리베이터 뒤편에 있는 화장실에 들르게 한다. 두 사람은 들어갈 수도 없는 그 비좁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손을 씻고, 옷을 다듬고 향수를 뿌린다. 공간은 비좁지만, 저녁 시간 세면대에는 향기가 은은한 좋은 비누가 준비되어 있다. 그 화장실은 1층 중국집과 같이 쓰기 때문에 저녁 이전까지는 대부분 중국집 손님들이 이용하고 저녁 7시가 지나면 오나다 손님들이 이용한다. 좋은 비누향기를 맡을 때는 탱고 바 오나다 주인의 세밀한 마음 씀씀이에 절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루종일 땀에 절어 있는 셔츠를 벗고 때로는 가방 속에 가지고 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기도 한다. 땅게라들은 이 모든 것을 지하에 있는 탱고 바 오나다 안에서 해결하지만, 남자 화장실이 외부에 있는 땅게로의 경우, 이곳은 탱고를 추기 전, 필수 코스다. 탱고를 추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한 번 탱고 바 오나다에 들어가 탱고 슈즈로 갈아 신고 나면 집에 가기 위해 다시 구두를 갈아신기 전까지 오나다 철문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향수는, 남성적 체취가 강한 불가리 쁘루 옴므나 납작한 반달 모양의 불가리 아큐바 보다는 알콜이 많이 함유된 2005시즌 불가리 블루 옴므나 몽블랑 인디비쥬얼 혹은 지속력이 강한 샤넬 오드 퍼퓸을 쓰기도 한다. 난 남성적 체취의 향보다는 부드럽고 신비한 향이 좋다. 이탈리아에 다녀 온 친구로부터 십년 전 선물 받은 살바드로 달리는 가장 아끼는 향수다. 그 향수를 뿌리고 간 날은, 예민한 후각을 가진 여자들은 꼭 무슨 향수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탱고 바 오나다에 가기 위해서는 아직 한 번도 뿌려본 적이 없다. 살바드로 달리는, 내가 느끼기에는 강렬한 유혹의 향수다. 나에게 탱고는 유혹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오픈 스타일로 탱고를 추기 때문에, 상대 땅게라의 손을 잡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이 생기니까 다행이지, 만약 내 오른손을 상대의 등 뒤로 휘감아 반대쪽 가슴까지 껴안는 클로스 엠브레스 스타일이나, 약간의 틈만을 허용하는 살롱 스타일로 춤을 춘다면 옷에 배어 있는 미세한 냄새의 흔적들까지도 상대를 자극할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 처음 탱고를 가르친 탱고 선생님은 밀롱가에서 춤을 추는 밀롱게로스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공연 전문가였기 때문에 나는 밀롱가 스타일보다는 오픈 스타일 위주로 탱고를 배웠다.
물론 서로의 가슴을 밀착시키면서 상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함께 탱고 리듬에 따라 몸을 움직일 때의 희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가슴을 밀착했을 때 형성되는 음양 에너지의 교류야말로 탱고 춤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밀롱가에서 만난 한 땅게로는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상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탱고를 포기하라고. 그러나 나는 서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춤을 추는 오픈 스타일이 좋다. 특히 속도감 있는 자유스러운 움직임으로 역동적 에너지를 산출하는 누에보 탱고가 좋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도 낯선 사람의 가슴에 내 가슴을 밀착한다는 것이 서먹하기 때문이다. 낯익지 않은 습관에 길들여지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상대의 가슴과 밀착해서 춤을 춘다는 것은 또한 상대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필연적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사소한 신경전을 즐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픈한 상태에서 음악의 해석에 따라 힘의 균형과 속도의 조절을 달리하며 전개되는 파노라마가 더 즐겁다. 감정적 교류가 꼭 육체적 밀착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상처 많은 사람들은 다시 상처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탱고는 소용돌이다. 사분의 이 박자로 이어지는 탱고의 소용돌이는 엄청나게 강한 원심력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나는 탱고에 강렬한 매혹을 느낀다. 모든 매혹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미술관의 탱고 퍼포먼스
금요일 밤이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에 도착한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6시 40분이 지나 있었다. 오프닝 퍼포먼스는 6시 15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물론 예정보다는 조금 늦게 시작하겠지만 미술관 문 닫는 시간이 7시이므로 그 이전에는 공연이 끝날 것이었다. 금요일 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미술회관에서 [쌍쌍]전 오프닝 퍼포먼스가 있었고, 그 퍼포먼스를 개최하는 사람은 나의 탱고 사부였다.
마로니에 공원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느리다. 공원 안에서 뛰어 다니는 사람은 길거리 농구팀 밖에 없다. 사람들은 여유를 갖고 벤취에 앉아 있거나 주위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연인들은 상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책을 읽고 있기도 한다. 그 사이를 헤집으며 미술회관 입구까지 도착해서 나는 잠깐 망설인다. 맞은 편 문예회관과 함께,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붉은 벽돌 건물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8년을 근무했었다. 제대하고 잡지사 기자로 몇 달 있다가 편집권을 침해하는 사주에 대항해서 파업을 하고, 파업이 끝난 뒤 주동자로 보복인사 조치가 이루어지자 사표를 내고, 그리고 두 달 쉬다가 글쓰는 선배의 추천으로 이곳에서 근무를 했었다. 그 8년동안 나는 가장 많은 시를 썼다. 밤 새워 시를 썼고, 아침에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머리 속에서 시를 썼으며, 직장 의자에 앉아서도 시를 썼다. 직장 일도 코피 터지게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나는,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회사에 일찍 출근해서 책 읽고 일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일어나면 곧바로 세수하고 출근했었다. 어느 날 아침 6시쯤, 역시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은 건강 체질인 나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경험이었다. 언제나 마로니에 공원에 오면 이곳에서 보낸 8년 세월의 추억 때문에 감상적인 기분이 된다.
미술회관에는 모두 3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예전에 마로니에 커피숍이 있던 자리를 전시실로 개조한 제 3관은 일반 관람객들로 듬성듬성 했다. 퍼포먼스가 개최되는 곳이 1층인지 2층인지 몰라서 망설였지만 2층에서 귀에 익은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로비에 서서 수박이나 케익을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실내로 들어가자 왼편의 붉은 벽 앞에서 검은 양복에 검은 모자를 걸치고 탱고를 추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의 동작에서 익숙한 모습들을 발견한다. 처음 함께 탱고를 배운 동료들이다. 나도 저 자리에 있을 뻔 했지만, 생방송 일정 때문에 그리고 무리 짓는 걸 싫어하는 습성 때문에 이렇게 객석에 서 있다. 벽에 부착된 작은 판넬에는 [김지현]이라는 이름 밑에 작품 설명이 써 있었다.
김지현은 자신의 일상이자 작업의 소재인 탱고를 가지고
비디오 영상작업을 한다. 이 비디오 영상은 전시장에 실제로 세워진
댄스홀의 붉은 색 커튼에 비춰진다. 탱고는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가능한 춤
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탱고를 추는 동안
남녀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흐른다. 남자는
좀 더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하고, 여자는
통제 속에서 자유를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이 팽팽한 긴장을 적절하게 주고 받을 때
비로소 두 남녀는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탱고에서 남녀를 분리시킨 채 각각
독립적으로 춤을 진행시키게 했다.
그들은 영상을 통해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합일을 이뤄내기도 하고 있다. 마치
현실과 가상이 서로 교차되고 중첩되는 듯 하다.
스크린 속 두 남녀의 분리와 결합의 양상은
비디오 영상 속 공간과 붉은 색 커튼이 드리워진
실제의 물리적 공간이 발현하는 불일치와 혼합을 통해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고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환상-어쩌면 그 자체가 진실 내지 실제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을
보여준다.
작품 설명 판넬을 읽던 나는 [복종]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탱고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단어다. 작가가 직접 쓴 것은 아닐 것이다. 탱고 사부라는 개인적인 인연을 떠나서 작가 김지현의 작품은 탱고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방법적 전개 역시 입체적인 효과를 발산하고 있었다. 좋았다. 5년 전 처음 탱고를 배우던 나의 사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아마도 오초나 볼레오 연습이었을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려던 아파트 주민들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에서 자신의 닉네임을 엘리라고 정하고 그 옆에 영자로 e를 덧붙였다. 엘리e 사부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땅게로와 춤을 추고 있었다. 탱고 바 오나다에서 자주 눈을 마주쳤던 브리앙이다.
미술회관 2층 왼쪽 벽은, 디귿자 형태로 천정에서 바닥까지 길게 붉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엘리e 사부는 치렁치렁 바닥에 닿는 선홍빛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벽의 붉은 천을 만져 보았다. 비로드는 아니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을 것으로 걱정했는데 비로드 천과 흡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끌미끌한 천을 구한 것이다. 벽면의 선홍빛 커튼은 스크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정면 벽에서는 빔 프로젝트 2개에서 분출되는 영상이 엘리2샘, 트리스탄샘의 클로즈업 쇼트를 벽면 전체에 보여주고 있었다. 정면 벽 양쪽 끝의 디귿자 벽에도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는데, 모두 탱고를 소재로 한 영상들이었다. 그리고 디귿자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엘리e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는 굶주린 프란체스카처럼 흡혈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두 개, 뾰죽히 솟아나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옷은 사실은 피의 실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금자씨의 친절한 케익처럼 그 속까지 붉게 칠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뒷풀이 장소는 낙산 올라가는 쪽 골목 안에 있는 삼겹살 집이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에어컨 바람의 사각지대인 에어컨 옆쪽이었다. 나는 옷에 밸 삼겹살 냄새가 두려웠다. 뒷풀이가 끝나면 탱고 바 오나다에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사시간은 길었고 길었으며 길기만 했다. 밖에 나와서 우리는 다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갔고, 화이님이 가져온 베스킨라빈스 케익을 한 조각씩 먹었다.
* 탱고 오나다의 땀과 눈물
탱고 바 오나다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지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루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구두들만 보였다. 지금까지 탱고 바 오나다에서 이렇게 많은 땅게로스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없다. LOD(Line of Dance)를 따라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번 실패를 했지만, 나는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춤추는 커플들 수를 헤아려 보았다. 33커플이었다. 즉 66명이 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탱고 바 오나다가 가장 붐비는 날은 토요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토요일 밤 탱고 바 오나다에 가본 적이 없다. 사람 많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토요일 밤에는 다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요일 밤이 이 정도라면 토요일은 어떨까 짐작이 되지도 않았다. 며칠동안 비가 내리다 그쳤고 다시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가 시작되었는데, 에어컨을 켜 놓은 실내는 7월 마지막 금요일 밤의 거리보다 오히려 더 더웠다. 홀의 의자에 앉아 있는 땅게로스들까지 합하니까 83명의 사람들이 탱고 바 오나다 안에 있었다.
춤을 마친 사람들이 그냥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에어컨 앞에서 땀을 말린다. 에어컨 앞에는 항상 여섯 일곱 명 정도가 서 있다. 다른 세 대의 대형 선풍기 앞에도 두 세 명의 땅게로스들이 땀을 식히고 있다. 가끔 마루 바닥이 얼굴을 드러낼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순간이다. 금요일 밤 탱고 바 오나다는, 83명의 인체 모든 구멍에서 발산되는 땀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펄펄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마루 바닥에 떨어졌으며, 강약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132개의 구두와 쉬고 있는 36개의 구두로 덮여 있는 탱고 오나다의 마루는 땅게로스들이 흘린 땀방울들을 가슴에 고이 품었다.
7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이었다. 지난 98년부터 홍대 앞에서는 전통적으로 매월 마지막 금요일 클럽데이를 개최한다. 홍대 앞 클럽 13개가 연합해서 개최하는 이 파티는, 하나의 티켓으로 13개의 클럽들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거리는 새벽까지 사람들로 뒤덮인다. 한일 월드컵 한국과 이탈리아전을 보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처럼 홍대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클럽들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탱고 바 오나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번 금요일 밤에는 파리의 프로 탱고들이 탱고 바 오나다로 찾아온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지난 수요일 밤 이 커플들을 보았다. 그들이 탱고 바 오나다 안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주위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예사롭지 않은 춤이었다. 플로어에 서서 단 한 걸음만 움직여도, 그 사람이 고수인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오나다 주방과 그 앞의 높은 의자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 그들의 춤을 주시하고 있었다. 플로어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도 몇몇은 춤을 멈추고 그들의 춤을 지켜보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춤이었다. 특히 땅게라는 매우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었으면서도 바디 라인이 깔끔했다. 힘 있게 진행하다가 서정적으로 음악을 흡수하고 다시 힘 있게 광풍이 몰아치듯 진행하는 땅게로의 리드도 인상적이었다. 뒤늦게 들어온 탱고 오나다는 파리 밀롱가에서 그들을 만났다고, 그들은 독일 출신의 프로 댄서라고 확인해 주었다. 홍콩에서 강습을 마치고 오직 탱고 바 오나다가 그리워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시 금요일 밤 탱고 바 오나다를 찾을 것이라는 공지는 오나다의 마루를 가득 차게 만드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들은 11시 조금 안된 늦은 시간에 도착했고 마루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찬 플로어에 나섰다. 그들은 신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단 한 번도 다른 커플들과 부딪치지 않았다. 진행하다가 멈추고 회전하고 다시 진행을 했다. 그 비좁은 공간을 완벽하게 활용하면서 자신들에게 허락된 두 사람의 몸이 붙어 있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도 다양한 피겨를 선보이며 춤을 추었다.
밤 12시가 되고, 붉은 치마를 입은 탱고 오나다가 플로어 안으로 뛰어 들었다. 크게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실내는 많은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탱고 오나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곧 플로어는 조용해졌고 모두들 탱고 오나다의 말에 귀 기울였다. 주방 맞은 편 벽면으로 파리 커플들이 자리 잡고 그 사이에 통역을 맡은 땅게라가 서 있었다. 에어컨은 웅웅거리며 돌아갔고 2대의 대형 선풍기도 쉴새없이 회전을 하고 있었지만 더운 바람은 실내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여전히 탱고 바 오나다의 마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땀 기운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 소금구두를 신은 탱고 오나다
티에리와 베로니끄, 파리에서 활동하는 탱고 댄서들의 즉흥 공연이 있었다. 밤 12시가 지났지만 탱고 바 오나다는 여전히 무더웠으며 땅게로스들은 둥그렇게 벽면을 따라 둘러앉아서 그들의 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볼까다와 꼴까다를 적극 활용하면서 속도 조절의 탁월함으로 힘과 기교의 조화를 통해 화려한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탱고 바 오나다의 마루는 전신으로 엎드려 그들의 구두 아래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춤을 추고 있는 탱고 오나다를. 탱고 바 오나다의 마루는 텅 비어 있었고 동시에 꽉 차 있었다. 수많은 땅게로스들이 탱고를 추며 흘린 땀, 그것은 사실 그들의 고통의 눈물이었으며 기쁨의 절규였고 환희의 탄식이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다. 모든 땅게로스들이 춤을 마치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 퇴장하면, 탱고 바 오나다의 마루는 하얗게 변한다. 수많은 땅게로스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 속에 스민 영혼의 소금을 긁어 모아 만든 하얀 구두를 신고, 탱고 오나다는 그때부터 진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대, 본 적이 있는가?
하얀 소금 구두를 신은 탱고 오나다가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을.
두둥실 만월의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떠올라,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욕망의 불빛들과 무뚝뚝한 고층 빌딩의 옥상을 지나 구름까지 상승하는 탱고 오나다를 그대, 본 적이 있는가,
이번 글은 술술 잘 읽어 집니다. '복종'이란 말에 저 또한 눈에 불이 튀었는데... 그 글 쓴 분은 탱고를 한번도 춰보지 않은 분 같습니다. 좀 비틀면, 남성이 여성을 절대적으로 굴복 시켜야 가능한 춤..이라는 말일 수도 있는데.. 주종관계에서 춤을 출 순 없겠지요.^^
첫댓글 아아... 늘 느끼는 거지만...글이....너무 기~~~~~~~~~~~~~~~~~~~~~~일어요!
가위, 좀 빌려 주세요....
다음부터는 짧게, 쓰겠습니다...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화요일 오전 3시간 투자해서 이 글 쓰는데, 짧게 쓰려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해요....
티에리와 베로니크는 프랑스입니다.~ 핑킹가위도 되나요?제가 빌려드리져~
음..그렇죠. 불어 통역이었으니..수욜날 모땅게로가 저에게 독일 사람이라고....그래서
이번 글은 술술 잘 읽어 집니다. '복종'이란 말에 저 또한 눈에 불이 튀었는데... 그 글 쓴 분은 탱고를 한번도 춰보지 않은 분 같습니다. 좀 비틀면, 남성이 여성을 절대적으로 굴복 시켜야 가능한 춤..이라는 말일 수도 있는데.. 주종관계에서 춤을 출 순 없겠지요.^^
다다님 글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번에 춤도 한 번 추었던 것 같으데 뇌용량이 참새 수준이라... 닉네임과 얼굴이 늘 따로 노는군요... --;;
<-- 통역했던 땅게라에요, 오늘 저녁 밀롱가에 오시면 춤 한 번 신청해 주세요. 담 주에 출국하기 때문에..--;;
읽을때마다 느껴지는 특별함.... 다다님의 글에는 영혼의 울림이 들어있어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필라땅고에 퍼 가서 font 키워 올립니다. 씨에리는 프랑스계 세네갈에서 수년 지냈다고 하더군요.
아~~~~~~~~~~ 한번 다 읽어 볼 수 잇으면 좋겠어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이미 탱고를 알고 느끼며, 그것에 굶주려있던 DADA님과의 첫대면이 벌써 먼 이야기같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부터 마음이 보채고 있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장식동작이 많은 글이네요. @.@ 갈리아 전쟁기.. 처럼 써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