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猜忌:Jealousy)
‘시기(猜忌)’는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고 집단을 이루면서부터 생겼는지도 모른다. 구성원 사이에 서로 비교되고 다르다고 하는 의식이 정착되면서 다름을 다름으로 보지 않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일것이란다.
부러움이 시간을 더하면서 점차 시기심으로 확장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시기(猜忌)’라고 하는 것이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다는 부러움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외모와 물질에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나갔고 산업사회가 정착되면서 더욱 굳어져 갔단다. 동성(同性)에서 나오던 시기심은 이성(異性:opposite)에까지 투영되어 인생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감정의 한 패턴(pattern)이 되어갔구나.
너희들은 태중에서 쌍둥이로 있으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된단다. 이것이 점차 시기심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며 시기심은 경쟁사회에서 모든 이들을 향한 구도로서 자리를 잡게 된단다. 경쟁사회이다보니 공부와 시험을 통한 경쟁에서 밀리면 자신보다 앞서가는 인자들을 향한 시기심이 등장하고,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또 등장하며 외모의 잘남과 그렇지 못함에 대한 비교에서 또 나타나게 된단다.
경쟁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비교우위의 논리는 너희들의 감정에 시기심(猜忌心)을 정착시키게 된단다. 시기심은 시기에서 끝나지 않고 ‘분노(忿怒)’로 까지 연결되어 폭력을 불러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단다.
이성간의 교제도 자신보다 잘난 이성을 만난 다른 이를 보면서 심리적으로 부러움을 넘어 ‘시기심(猜忌心)’을 유발 하는 것은 경쟁사회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한단다. 다른 사람보다 더 출세해야 하고, 더 잘나야하고, 더 돋보여야 하며 서로를 비교하게해서 우위에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것이 물질만능주의가 불러온 것이라 본단다.
너희들은 무한 경쟁시대에 살면서 잘 살지 못하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좌절을 맛보고, 출세하지 못했다면 명예적인 측면에서 좌절을 맛보며, 잘 나지 못했다면 외형적인 측면에서 좌절을 맛보니,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를 쌓아 나가게 된단다.
그리고 상대를 비방하고 공격하며 깎아 내리려 하는 행동들을 보이는 것이 오늘날 너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구나. 자신에겐 없는 것,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있다고 하는 그 점이 부러움을 낳고 부러움이 발전하여 ‘시기(猜忌)’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란다. 만약에 경쟁사회가 아니었다면 상대가 가진 것을 인정하고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갔을 것이란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는 것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구나.
그러나 물질사회에 ‘돈(money)’이 들어오고 나서 경쟁사회의 구도가 자리를 잡아갔고 먼저 서두르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경쟁논리가 무한 경쟁을 불러왔으니, 공평하게, 평등하게, 균등하게 자리 잡아 나누자는 공산주의 이론도 현실에서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질사회에서는 평등하게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단다.
어찌 되었든 ‘시기심(猜忌心)’은 인류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반목(反目:hostility)하면서 조화와 상생해야 된다는 사실은 인류들 사이에서 멀어져 갔단다. 상대에 대한 시기(猜忌)는 불화(不和)와 분리(分離)를 가져왔고, 극과 극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단다. 이원법칙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며 서로에 대한 경쟁구도만이 너희들의 인생들을 험난하게 만든 것이란다.
성서에서도 쌍둥이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과 시기가 등장하니 기록하자꾸나.
<창세기 27:41~45> -KJV-
그의 아비가 축복해 준 그 축복으로 인하여 에서(Esau)가 야곱(Jacob)을 미워하더라. 에서가 속으로 말하기를 ‘내 아 버지를 위해 곡할 날이 가까웠으니, 그때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니 자기의 맏아들에서의 이 말들이 리브카에게 들린지라, 그녀가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말하기를 “보라, 네 형 에서가 너에 대해 계획하기를, 너를 죽여 스스로 위안을 얻고자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아들아, 내 음성에 순종하여, 일어나서 하란에 있는 내 오라비 라반에게로 도피하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그와 더불어 몇 날을 기다리며, 너에 대한 네 형의 화가 풀리고 네가 그에게 행했던 일을 잊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서 거기에서 너를 불러오리라, 어떻게 내가 한 날에 너희 둘을 빼앗길 수 있겠느냐?” 하더라.
형제가 형제를 시기하는 것을 기록하여라.
<창세기 37:3~5, 18~20> -KJV-
이스라엘이 요셉을 그의 모든 자녀들보다도 더 사랑하였으니, 이는 그가 늙어서 얻은 아들임이라. 그가 요셉(Joseph)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더라. 그의 형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모든 형제들 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는 말도 온순하게 하지 않았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그가 그것을 자기 형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은 요셉을 멀리서 보고 그를 죽이기로 공모하며, 서로 말하기를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서 그를 구덩이에다 던져 넣고, 우리가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리고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라.” 하는지라.
선지자가 선지자를 시기하는 것을 기록하여라.
<민수기 12:1,2,4~10> -KJV-
미리암과 아론(Miriam and Aaron)이 모세가 혼인한 에티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였으니, 이는 그가 에티오피아 여인과 혼인하였음이더라.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참으로 모세(Moses)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느냐? 우리를 통하여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시느냐?” 하니, 주께서 그것을 들으셨더라.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들 셋이 나아갔더라. 그러자 주께서 구름 기둥 속에 내려오셔서 성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니, 그 두 사람이 나아가더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만일 너희 가운데 선지가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 가운데서 그에게 나를 알게 할 것이요, 꿈 가운데서 그에게 말할 것이니라. 나의 종 모세는 그와 같지 아니 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신실하니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분명히 말하고 난해한 말들로 아니하며 또 그가 주의 모습을 볼 것인데, 어찌하여 너희가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시고 주의 노를 그들에게 발하시고 그분께서 떠나시더라. 구름이 성막에서 떠났는데, 보라,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어 눈같이 희더라.
인류 최초의 시기와 질투를 기록하여라.
<창세기 4:4~8> -KJV-
주께서 아벨(Abel)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Cain)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여 안색이 변하더라.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리라.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과 이야기 하더라.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니라.
시기와 질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을 통하여 대규모 살상을 일으키기도 한단다. 사람은 태어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회생활이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동족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경쟁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기심(猜忌心:jealous)이 등장하고 서로 간에 마음을 열지 못하며 분리된 채로 살아간단다.
너희들은 우정을 쌓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여도 상대방이 하는 것에 따라 시기와 질투가 나오게 되는 것은 배신(背信) 당했다는 것 때문인데, 마음을 열고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있었다 하여도 한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란다. ‘내 마음 같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자신과 하나로 일치시키기가 쉽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어디 너희들이 그렇게 하느냐?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과 같기만을 바라는 것이 너희들이다보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믿음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시기와 질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란다. 자신보다 잘났다는 것, 잘한다는 것, 뛰어났다는 것, 사랑을 더 받는다는 것, 축복받는다는 것 때문에 시기(猜忌)와 질투(嫉妬)는 자연스럽게 인생이라는 과정 속에 투영되어 너희들의 감정선을 어지럽히는 요소로 자리 잡았단다.
경쟁심리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겠지만 카인과 아벨도 첫 제사 문제로 결국 형이 동생을 죽이는 형태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니, 자신보다 잘한다는 것과 사랑받았다는 것이 너희들의 마음에 시기심과 질투심을 유발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단다. 경쟁 심리는 은하에서 진화해가던 인류들과 파충인들 사이에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 또한 있었기에 은하전쟁이라는 결과까지 나타났던 것이란다. 한 마음이 아닌 두 마음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단다.
양극성 실험 자체가 두 마음의 실험이었으니, 시기와 질투는 경쟁 구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요소였다는 것이란다. 이것이 지구 인류들인 너희들의 마음에도 정착되어 경쟁이 촉발되었고, 시기와 질투가 생산되었던 것이란다. 신들도 질투함을 성서에서 보자꾸나.
<출애굽기 20:3~6> -KJV-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 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네게 만들지 말고 또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지니라. 이는 나 주 너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임이니,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삼사 대까지,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에게 미치게 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베푸느니라.
보아라. 십계명이라고 하는 곳에도 질투하는 신으로 그려 놓았음이니, 신(神:God)도 감정이 있다고 표현한 것이구나. 너희를 창조할 때 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라고 했음이니 신의 감정까지도 닮게 만들었기에 인류들은 인생을 살면서 감정선에 따라 휘둘리고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란다.
인류들은 인류들의 유전자와 파충인들의 유전자까지 심기어졌기에 밝은 면의 마음뿐 아니라, 어두운 면의 마음도 간직한 채로 지음 받아 한 몸에 두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자신 안에서 시기와 질투는 자연스레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빛과 어둠의 속성에 따라 인생을 공부하도록 설계되었던 것이란다. 경쟁구도는 그렇게 해서 주어졌으며 두 마음이 만나 경쟁하면서 한 마음으로 통합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었단다.
이 단계까지 진출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경쟁에 따른 부작용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에 의해 발생한 것이 바로 시기와 질투, 미움이었다고 하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육체의 성향과 혼의 성향이 다르게 배정되었는데, 이것이 통합을 위한 계획이었으며, 육체가 남성의 기운이면 혼의 성향은 여성의 기운으로 완성하도록 하였고, 육체가 여성의 기운이면 혼은 남성의 기운으로 완성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란다.
그래서 이성이든 동성이든 이것이 끌리는 형태로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안배하였고 상반되는 성향을 통해서 배움과 서로 통합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데, 두 마음이 비워진 상태라면 서로가 하나로 합일할 수 있게 된 반면에 하나라도 마음이 비워져 있지 않다면 합일할 수 없게 되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었단다.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상대에게 믿음을 져버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고 배신감을 느끼면서 시기와 질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투영되게 된 것이었구나. 이것을 보면 사랑을 받지 못해서, 인정을 받지 못해서 일어나게 되는데 주는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어떠냐에 따른 반응으로 시기와 질투가 생겨난다는 것이구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있느냐? 인정을 얼마나 받고 있느냐? 연인사이에, 가족관계에서, 형제사이에서,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서, 대인관계성 속에서 너희들은 주고받는 관계성을 성립시켜 왔고 주는 만큼 돌려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더 받아야 한다는 의식에 만족을 얻지 못하여 상처를 받게 된다면 이런 이유로 해서 상대를 향한 시기(猜忌)와 질투(嫉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단다.
너희들은 주는 것에는 인색하고 받는 것에는 욕심을 부리는 형태를 보이며, 받지 못함에 따른 영향이 시기와 질투를 낳고 있음이니, 물질적인 부분이든, 감정적인 부분이든 주로 주는 것에 반해 적게 받거나 받지 못하면 상처를 받게 되면서 그 상처가 시기와 질투로서 형상화하여 마음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란다.
그리스 신화에도, 고전동화에도,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도, 특히 아이들이 읽는 동화 속에도 시기와 질투를 그린 이야기들은 단골 메뉴로 다루어지고 있음이니, 너희들의 인생에서는 빠질 수 없는 속성이 되었다는 것이란다. 일례로 백설 공주에서도 어머니인 왕비가 딸인 공주의 미모에 시기와 질투를 품고 독약이든 사과로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라는 것이구나.
트로이 전쟁(Troy war) 이야기 속에도 세여신이 파리스 왕자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황금사과를 선택하여 미녀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선택하자, 두 여신인 아테네와 헤라의 시기로 인하여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 발발하고 그 결과로 파리스 왕자의 나라인 트로이가 멸망하게 하는 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의 시기가 등장한단다.
질투하는 올림포스 신들 이야기는 거의 전반부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인류들과 신들 이야기에는 사랑과 비교해서 시기와 질투가 많이 등장한단다. 그 만큼 시기와 질투는 인생에서 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 한다고 볼 수 있단다.
너희들이 인생을 경험하면서 받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의 비중을 늘려가고 그것도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것에 익숙해져 갈수록 받지않아도 상처받지 않게 되며 오히려 주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를 알게 되니, 그 희열이 너희들의 인생 공부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게 하고, 깨달음의 길로 자연스럽게 인도하게 되는 것이란다.
‘시기와 질투’는 너희들의 인생들에 불이익을 동반하고 에너지를 소모시켜서 힘들고 어렵게 과정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란다. 받지 못함에 따른 섭섭함과 서운함이 마음에 축척되어 상처로 남겨지고, 이것이 쌓이다 보면 반감(反感:antipathy)을 불러와서 시기와 질투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란다. ‘시기와 질투’는 원한(怨恨:grudge)을 낳게 하여 분노(忿怒)로 표출되니, 결과는 폭력과 살인 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란다.
모든 전쟁들이 사소한 원인으로 출발하게 되는데, 시기와 질투가 불러왔던 전쟁들이 역사에도 많이 기록되었으니, 이것을 참조한다면 원인이 얼마나 조그마한 불씨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란다. 특히 여성이 중간에 개입되어 있었던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여 애증(愛憎:love and hatred)으로 변질 되어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며 일어난 전쟁들이 과거 역사속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는 것이구나.
‘미움(enmity)’도 사랑의 배신이나 돌려받지 못한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상대를 향한 마음이 왜곡되게 변형을 일으켜서 ‘미움’이라는 성향이 자리 잡게 된단다. 미움은 상대를 위험에 빠트리거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미움은 상대를 갉아먹는 독충이라 할 수 있단다. 마음에서 나가는 미움의 감정은 상대방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쳐서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단다.
‘미움(enmity)’은 쌓이다 보면 풀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상대를 ‘저주(咀呪:curse)’하게 된단다. 부적을 만든다거나 주술을 통하여 상대에게 피해가 돌아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니 만큼 너희들의 이야기책이나 사극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으며, 저주(咀呪)를 통하여 직접 피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미움의 감정이, 저주의 감정이 얼마나 부정적인 요인들을 많이 발생시키는지 알 수 있단다.
시기와 질투에서 출발했던 감정의 변화는 이런 요소로서 변화를 일으키고 너희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단다. 마음은 이러한 상처들을 극복하여 견디게 하는 것과 나약하게 한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소심하게 하여 대인 기피를 유발케 하기도 한단다.
마음은 자신들 스스로가 조절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너희들의 인식 외적으로 작용하고 의식을 벗어나 펼쳐지기도 하는데, 여러 유형으로 나타나는 형상들을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 표현들 하고 있지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식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의 정화와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란다.
마음은 누군가와 교감과 소통을 통하여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데, 사랑과 사랑이 만나서 두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바란단다. 하지만 스스로가 많이 주어 상대를 채워줄 생각보다는 받아서 채우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두 마음에 사랑이 가득 넘쳐나지 못하고 항시 부족하게 되는 것이란다. 늘 상대에게 받아서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이것이 오래 길어지면 받지 못함에 부족해진 마음 한 구석에 시기와 질투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란다.
자신이 주지 못함을 알아채지 못하기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는 것이고, 사랑 대신에 시기와 질투를 보내게 되는 것이란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면 주는 사랑보다는 받는 사랑만을 추구하고, 받지 못해서 생기는 여러 유형의 성향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란다.
시기(猜忌)와 질투(嫉妬)와 미움(enmity)은 사랑과는 상반되는 성향이라서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현대사회에 더 많은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들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절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고, 상대를 통하여 사랑을 어떻게 배우고 베푸는가를 배우게 되는 것이란다. 주었을 때의 기쁨이 받을 때보다도 더 크게 하여 사랑은 베푸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알게 하고, 사랑은 줄때가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란다.
이 사랑이 관계성 속에서 영양 결핍에 걸리다보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것이란다. 영양소가 부족하면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처럼, 감정에도 사랑이 부족하면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시기와 질투로서, 미움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란다.
너희는 상대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얼마나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는지를, 직접체험을 통해서 습득하게 되는데 이 단계의 과정이 종료되면 더 강하고 더 고통스러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단다. 바로 원망(怨望:resentment)과 원한(怨恨:grudge)에 이어서 저주(咀呪:curse)의 단계를 배우게 된단다. 이 단계의 과정을 배우면서 스스로와 상대에 대한 부작용들과 역효과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타나는지와 그것에 따른 시련과 고통은 어떤 것인지 등을 배우게 된단다.
사랑이 부족하면 나타나는 현상들을 통하여서 너희들은 상처가 남겨진다는 것과 그 상처는 오직 사랑만이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란다. 사랑은 허다한 상처들, 특히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명약이라는 것이구나.
이로서 ‘시기(猜忌:jealousy)’ 와 ‘질투(嫉妬:envy)’에 대하여 줄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