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고 시키는 말로 뒤덮인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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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바로쓰기] 한자어 + 시키다.
③ 접미사 ‘시키다’가 동사로 쓰일 때
시키는 말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만 접미사 ‘-시키다’를 써서 동사를 만들 때,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일 때가 있다.
1) 부모로서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점 반성합니다.
2) 문제를 야기시킨 학생들 모두 정학 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3) 업무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정보망을 손볼 예정입니다.
4) 소비자와 생산자를 직접 연결시켜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자져다주다.
5) 학생들에게 단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을 감히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 자신의 공을 부각시키려고 다른 사람이 이룬 성과를 폄하하다니 정말 이기적이다.
7) 수감자를 모두 석방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8) 독재자는 권력을 쥐자마자 곧바로 국민을 세뇌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9)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10) 네 뜻을 관철시키려면 우선 가족부터 설득시켜야 하지 않을까.
11) 협상을 지연시킨 건 노조가 아니라 사측입니다.
12) 그 문제는 지금 검토 중인 정책과 결부시킬 사인이 못 된다.
13)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켜 치료할 병동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14) 죄인을 은닉시킨 자 또한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를 것이다.
15) 피의자의 주장이 옳다는 걸 입증시킬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
16) 물건을 올리는 일은 일단 탁자의 다리를 고정시키고 나서 하자.
17) 노예를 해방시키고 노예 문서를 불태운 뒤 그는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18) 비효율적인 업무 환경이 업무 부담을 가중시킨다.
19) 의혹을 증폭시키는 행동을 일삼으면서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니 누가 들어주겠는가.
20) 이 상황에서 효모를 증식시킬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
21) 한쪽이 기분을 모두 소진시키고 쓰러질 때까지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22)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술을 세워야 한다.
23) 계약 기간을 연장시키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
24) 장군은 가까스로 성을 함락시키고 적장의 목을 베어 버렸다.
각 문장에서 ‘-시키다’가 붙은 표현을 유심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 한자어 명사에 ‘-시키다’를 붙여 동사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한자어에는 ‘-하다’보다 ‘-시키다’가 더 어울려서일까? 아니면 무엇이 됐든 직접 하기보다는 시키는 게 그럴듯해 보여서일까? 하도 ‘시키다’를 붙여 쓰다 보니 이젠 한자어가 아닌 말에도 ‘시키다’를 붙인다. 거리를 지나다 두 연인이 싸우는 걸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쪽이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너 자꾸 거짓말 시킬래?”
말 그대로라면 ‘너 왜 나한테 자꾸 거짓말을 하라고 부추기는 거야!’라고 해석해야 맞는다. 하지만 그런 뜻으로 이렇게 목청을 높였을 리 없다. ‘너 자꾸 거짓말할래?’라고 말해야 하는데 ‘거짓말시킬래?’라고 말한 것뿐이다. 한자어에 ‘-시키다’를 잘못 붙여 쓰다 보니 우리말 동사에도 그 잘못된 습관이 서서히 번져 가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문장들에 쓰인 표현을 하나씩 살펴보자.
1) 가르치는 건 교육하는 것이지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다.
2) ‘야기(惹起)하다’는 ‘일이나 사건 따위를 끌어 일으키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 자체로 일으키는 것이니 굳이 ‘-시키다’를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니 문제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지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3) ‘개선(改善)하다’는 ‘잘못된 것이나 부족한 것, 나쁜 것 따위를 고쳐 더 좋게 만들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다. 더 좋게 만든다는 뜻이니 역시 ‘-시키다’를 붙일 까닭이 없다. 체질을 개선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지, 체질을 개선시키고 처우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다.
4) ‘연결(連結)하다’는 ‘사물과 사물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이어지거나 관계를 맺다’라는 뜻의 동사다. 굳이 ‘연결시키다’라고 쓸 필요는 없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직접 연결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다’라고 쓰면 그 뿐이다.
5) ‘주입(注入)하다’는 ‘흘러 들어가도록 부어 넣다, 기억과 암기를 주로 하여 지식을 넣어 주다’라는 뜻의 동사다. 이미 부어 넣거나, 넣어 준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주입시키다’라고 쓸 까닭이 없다. 체액을 주입하는 것이지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6) ‘부각(浮刻)하다’는 ‘어떤 사물을 특징지어 두드러지게 하다, 주목받는 사람, 사물, 문제 따위로 나타나다’라는 뜻의 동사다. ‘두드러지게 하다. 나타나다’가 뜻풀이에 들어 있다. 공을 부각하는 것이지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7) ‘석방(釋放)하다’는 ‘법에 의하여 구속했던 사람을 풀어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이니 ‘-시키다’를 붙일 이유가 없다. 수감자는 석방하는 것이지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8) ‘세뇌(洗腦)하다’는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던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바꾸게 하거나 주입한다는 뜻이니 역시 ‘-시키다’를 쓸 이유가 없다.
9) ‘소개(紹介)하다’는 ‘둘 사이에서 양편의 일이 진행되게 주선하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양편이 알고 지내도록 관계를 맺어 주다,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모르는 사실이나 내용을 잘 알도록 설명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주선하고 관계를 맺어 주고 설명한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이니 역시 ’-시키다‘를 붙일 까닭이 없다.
10) ‘관철(貫徹)하다’는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 목적을 기어코 이루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관철하다’만으로 충분하지 굳이 관철시킬 필요가 없다.
‘설득(說得)하다’는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뜻풀이에 이미 깨우친다는 뜻이 있으니 ‘설득시키다’라고 쓸 이유가 없다.
11) ‘지연(遲延)하다’는 ‘무슨 일을 더디게 끌어 시간을 늦추다’라는 뜻의 동사다. 더디게 끌고 시간을 늦춘다는 뜻이 풀이에 이미 들어 있다. 협상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연하는 것이다.
12) ‘결부(結付)하다’는 ‘일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연관시키다’라는 뜻의 동사다. 뜻풀이에 이미 ‘-시키다’가 들어 있다. 정책과 결부시킬 사안이 못 되는 것이 아니라 결부할 사안이 못 되는 것이다.
13) ‘격리(隔離)하다’는 다른 것과 통하지 못하게 사이를 막거나 떼어 놓다, 전염병 환자나 면역성이 없는 환자를 다른 곳으로 떼어 놓다‘라는 뜻의 동사다. 떼어 놓는 다른 뜻이니 ’-시키다‘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전염병 환자는 격리하는 것이지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14) ‘은닉(隱匿)하다’는 ‘남의 물건이나 범죄인을 감추다’라는 뜻의 동사다. 감추는 것이 곧 은닉하는 것이니 ‘-시키다’를 붙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죄인을 은닉한 자’라고 써야지 ‘은닉시킨 자’라고 쓰면 어색하다.
15) ‘입증(立證)하다’는 ‘어떤 증거 따위를 내세워 증명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한 것이지 입증시킬 증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16) ‘고정(固定)하다’는 ‘한번 정한 대로 변경하지 아니하다, 한곳에 꼭 붙어 있거나 붙어 있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붙어 있게 하다’가 뜻풀이에 들어가 있으니 탁자 다리를 고정하는 것이지 고정시키는 게 아니며, 시선 또한 고정하는 것이지 고정시키는 게 아니다.
17) ‘해방(解放)하다’는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곧 ‘해방하다’이다. 그러니 노예를 해방한 것이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18) ‘가중(加重)하다’는 ‘책임이나 부담 따위를 더 무겁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무겁게 하다’가 뜻풀이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 업무 부담을 가중하는 것이지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19) ‘증폭(增幅)하다’는 ‘사물의 범위를 늘어나 커지다. 또는 사물의 범위를 넓혀 크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넓혀 크게 하다’가 들어 있으니 의혹을 증폭하는 것이지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다.
20) ‘증식(增殖)하다’는 ‘늘어서 많아지다. 또는 늘려서 많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효모를 증식하는 것이지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21) ‘소진(消盡)하다’는 ‘점점 줄어들다 다 없어지다. 또는 다 써서 없애다’라는 뜻의 동사다. 다 써서 없앤다는 뜻이 있으니 기운을 소진하는 것이지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다.
22) ‘격퇴(擊退)하다’는 ‘적을 쳐서 물리치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적군을 격퇴하는 것이지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다.
23) ‘연장(延長)하다’는 ‘시간이나 거리 따위를 본래보다 길게 늘리다, 어떤 일을 계속하다 또는 하나로 잇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계약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지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24) ‘함락(陷落)하다’는 ‘땅이 무너져 내려앉다, 적의 성, 요새. 진지 따위를 공격하여 무너뜨리다’라는 뜻의 동사다. 그러니 적의 성을 함락하는 것이지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밖에도 ‘압축시키다, 유발시키다, 조련시키다, 매장시키다, 제거시키다’ 등 흔히 한자어에 ‘-시키다’를 붙여 쓰는 낱말들 대부분은 사실 ‘압축하다, 유발하다, 조련하다, 매장하다, 제거하다’와 같이 ‘-하다’를 붙여야 어색하지 않다.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김정선, 유유,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1.15. 화룡이) >
첫댓글 아주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기 빕니다^^^
고마음의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포스팅된 글을 내용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해주시면
더 보람있는 소통이 되지 않겠는지요?
날마다 복된 날이시길 빕니다.
한자는 한 글자가 문맥에 따라 다양한 품사로 쓰이기도 하고, 동사일 때라도 능동과 수동형으로 다 쓰인다고 들은 적이 있지요. 이미 '~시키다'라는 형태로 많이 사용하다 보니 '~하다'로 쓰는 게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잘못 사용해왔음을 알았으니 고쳐나가도록 힘 써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1.15. 05:39, 까만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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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앞으로 접미사 '시키다'를 써서 한자어를 동사로 만들 땐
일단 '~하다'로 바꿀 수 있는지부터 검토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1.16. 11:34,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