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호수가 바이칼이다. 지도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바이칼은 매우 큰 바다이다. 그 크기가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친 것 만하고, 물의 양은 미국 5대호의 물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이 일대는 저지대의 분지이기 때문에 주변의 높은 지역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호수에 모인다. 도합 336개에 달하는 작은 하천의 물을 끌어모은 바이칼湖는 인체의 맹장처럼 호수 남서쪽 끝에 매달려 있는 앙가라江을 配水口(배수구)로 삼는다. 앙가라江을 통해 바이칼湖의 물은 예니세이江과 합류하여 다시 北極海로 흘러 들어간다
이 지역의 주인은 브리야트族이다. 알타이語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터키族, 카자크族, 몽골族, 브리야트族, 한국族, 일본族 중에서도 한국인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 브리야트族이다. 이들은 森林(삼림)과 호수를 생활근거로 하고 남쪽의 말 달리는 평원을 경제생활의 무대로 삼았다.
예니세이江 유역의 광활한 지역에 살고있는 全주민들에게 바이칼은 정신적 고향이다. 그 이유는 바이칼의 신비스러운 물 때문이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북극지방의 야쿠티아에 사는 주민들이 브리야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까마귀를 조상신으로 모시며, 지도자는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여인의 몸에 엑스터시 과정으로 잉태된다는 믿음이 바이칼 지방 주민들과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이유가 의아하였었다.
타이가(森林) 지대인 바이칼과 툰드라 지대인 야쿠티아와는 전혀 딴판인 환경이지만 예니세이江으로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역시 지리학은 문화학의 기초가 된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데 하루와 반나절이 걸렸다.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한 무대이었기에 매력이 있는 곳이고, 정치학도들에게는 17세기 러시아 청년 장교들이 반란사건의 결과로 참혹한 유형을 당한 곳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에게 바이칼은 흉노의 땅이자 鮮卑族(선비족)의 고향으로 더욱 매력 있는 땅이다.
한국인보다 더 韓國人 같은 브리야트族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많다. 아니 나보다 더 한국사람을 닮았다. 나는 한국사람치고는 약간 검은 피부를 타고난 사람이다. 金海(김해) 김씨의 조상이 되는 駕洛國(가락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의 부인이 印度(인도)의 아유타國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 중에는 유난히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많은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기 브리야트族들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것처럼 동양인치고는 화사하다. 나처럼 南아시아적인 유전인자가 섞이지 않은 순수 몽골人인 셈이다
안내양의 모습은 순수 몽골人이 아니었다. 「스베타」라는 이름의 전문대학 3년생은 슬라브系 처녀였다. 여기서 태어나지도 않은 듯 이 지역의 인구라든지 산의 이름 같은 지역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에도 머뭇거린다. 우리 대중가요에 등장한 「아무것도 모르는 順伊(순이)」 같은 시골 처녀였다. 하긴 당시의 소련은 帝國(제국)다운 큰 영역을 경영하고 있을 때이니까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 지방 출신도 시베리아에 와서 자유롭게 직업을 찾을 수 있을 때였다. 「순이」를 앞세우고 민속박물관으로 갔다.
1883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지역문화 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한 蘇聯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서 조명은 희미하고 진열장도 유리가 나빠 얼룩거렸다. 그러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실증되었다. 박물관 건물이 초라하다고 해서 소장품도 초라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전시품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샤먼(shaman: 무당)의 복장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원주민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舊러시아 시절부터 소련 통치까지 오랜 기간 시베리아에 살던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넓은 대륙에 퍼져 살고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하던 샤먼의 존재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치하려던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 시베리아에는 샤먼이 한 사람도 없다. 世襲巫(세습무)는 이미 代가 끊겼고 가끔 神이 내린 降神巫(강신무)가 탄생한다고 해도 스승이 없으니 전통이 이어질 수 없다.
따라서 춤이나 비손(神에게 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비는 일)도 잊혀졌다. 1995년에 야쿠티아 공화국에서 만난 샤먼 춤 전공자는 呪文(주문)을 암기하지 못했다. 공산주의는 70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 실패한 실험의 결과는 人文學(인문학)에 커다란 空洞現狀(공동현상)을 초래하였다. 공산주의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공화국이 된 지금이라도 누가 정신을 차려 잊혀진 말과 노래를 採錄(채록)해 둔다면 문화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틀림없겠다.
샤먼의 복장은 두 개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나는 가죽으로 만든 에벵키族의 것이고, 또 하나는 야쿠트族의 털 복장이었다. 에벵키族의 무당 옷은 가죽 모자와 가죽 두루마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자는 둥근 형태로 이마 높이로 帶輪(대륜)을 돌리고 대륜이 흘러내리지 않게 귀와 귀를 연결하고 이마와 뒤통수를 잇는 헝겊이 정수리에서 열 십(十) 자로 교차하게 만들었다. 한국 여자 아이들이 설빔으로 쓰던 모자인 「굴레」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런 모자는 신라 시대 귀족인 瑞鳳塚(서봉총)의 여자 주인공이 썼던 金製(금제) 모자와 北燕(북연)의 馮素弗(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金銅(금동) 모자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두루마기 앞면에는 얇은 철판으로 만든 날짐승 여러 마리와 활촉·칼 등을 달아 놓았고, 뒷면에는 역시 철판으로 만든 사람, 포유동물, 물고기, 반달 모양의 칼 등을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것은 샤먼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린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야쿠트族의 샤먼 복장은 털이 달린 두루마기라고 앞서 말하였다. 다만 모자에 사슴 뿔 모양으로 장식한 것과 털가죽 장화가 달려 있는 게 에벵키族의 복장과의 차이점이었다. 하긴 야쿠트 지방은 툰드라 지대이니까 거기에 서식하는 순록이 주민의 경제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샤먼도 거기에 걸맞은 복장을 입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환경·경제·신앙의 3요소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의 색깔이 결정되는 현상이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바이칼에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
빗살무늬 토기는 한국 新石器(신석기)시대의 간판격인 유물이다. 바이칼 민속박물관에 보이는 고대 유물로는 舊石器(구석기) 시대의 打製石器(타제석기)부터 신석기 시대의 통나무 베는 돌도끼가 특징적이었다. 바닥 부분이 뾰족하고 몸체에 선과 점을 陰刻(음각)하여 마치 머리칼을 빗는 빗으로 그린 平行線(평행선)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데, 바이칼에서는 한반도 보다 늦은 시기인 靑銅器 시대의 제품이다. 함께 사용된 유물로는 石製(석제) 어망추와 동물 뼈로 만든 바늘이 있어서 당시 주민들의 어로생활을 설명하고 있었다.
조금 어려운 얘기지만, 한국 신석기문화의 대표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전체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놓고 나는 고고학도로서 평생토록 고민하고 있다. 先史時代(선사시대)에 유라시아의 문화현상을 보면 한반도부터 시베리아 헝가리·독일·스칸디나비아로 연결되는 環北極圈(환북극권: Circum Polar) 음각토기 文化帶(문화대)와 따뜻한 남쪽 지역인 중국·이란·터키로 연결되는 彩色土器(채색토기) 문화대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음각토기는 추운 지방의 수렵 어로인들이 만들었고, 채색토기는 따뜻한 지역의 농경인들이 만든 것이다.
도대체 토기가 무엇이기에 공을 들여 뜻 모를 선들을 陰刻하거나 붉고 검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이건 내 추측인데 先史人(선사인)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현대인들보다 더 깊었던 모양이다. 기후나 환경이 경제생활을 완전히 지배하던 때이었으니까 풍요를 희구하는 의미의 그림을 토기에다 그려서 주술적인 혜택을 기원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토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抽象畵(추상화) 계통으로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인 具象畵(구상화) 계통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陰刻土器(음각토기) 문화권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현상을 놓고 민족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토기에 그려진 무늬가 고대인들의 신앙을 표시한 것이라면 한반도에서 발생한 어떤 신앙의 내용이 음각토기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고 추리된다. 이때 혹시 신앙과 함께 사람의 遺傳因子(유전인자)도 퍼져 나갔다면 한국인은 수억이 넘는 北方 유라시아 인구의 DNA 구성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인가?
문화는 따뜻한 지방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한반도는 음각토기 문화권에서는 가장 따뜻한 땅이다. 언어학에서는 다른 견해일지 몰라도 음각토기 문화권 사람들끼리는 유사한 언어인 우랄語와 알타이語를 사용하고 있다. 고고학적 문화 벨트와 언어문화권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현상이 나로 하여금 학문적 고민에 빠지게 한다.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지만, 자연과학의 연구성과가 축적될수록 이런 해석에 힘이 실린다. 학문 발달사를 보아도 인문학적 발상이 자연과학을 선도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맬서스(Malthus)의 人口論은 適者生存(적자생존)이 키워드인데, 다윈 (Darwin)의 進化論(진화론)도 適者生存의 시각에서 動物界(동물계)를 해석한 것이다.
先史時代부터 숟가락 사용
잠시 과거 속으로 갔었지만, 이제 바이칼로 돌아가자. 레나 강변 일가(Ilga) 지방의 청동기 시대 유물 중에 청동제 낚시바늘과 함께 사슴 이빨로 만든 목걸이 장식이 있어서 어로와 사냥이 당시 그곳 주민의 생활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동물 뼈로 만든 숟가락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시베리아 주민들은 先史時代부터 숟가락을 사용하였다. 돌로 만든 숟가락은 「西 시베리아 先史文化」라는 책에 소개된 적이 있어서 놀라운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뼈로 만든 숟가락이었다. 정교하게 갈아 만들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일상 생활용의 수준을 넘는 儀禮用品(의례용품) 같아 보였다. 한국의 先史時代 유적에서는 이렇게 정교한 숟가락이 발견된 적이 없기에 나의 고질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숟가락의 용도는 술이나 국물을 떠먹기 위한 것이다. 특히 뜨거운 국물은 숟가락 없이는 먹을 수 없다. 뜨거운 국물을 만들려면 물을 끓일 솥이나 냄비 같은 容器(용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생긴 容器였을까?
이 의문은 다음날 대번에 풀렸다. 바이칼 호반의 호텔에서 점심을 먹을 때 뜨거운 스프가 나왔다. 어른 주먹 두 개 합친 것만 한 오뚝한 오지 단지에 담긴 스프를 먹게 되었다. 쇠고기 국물에 끓인 야채국이었다. 러시아말로 「쉬」라고 한다. 오지 그릇이니까 스프의 온도가 오래 보존되어 뜨거워서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밖에 없었다. 西유럽의 미지근한 스프는 납작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데 비해 이곳의 단지는 깊어서 국물을 떠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떠서 입으로 불어 가며 먹는 「쉬」의 맛은 별미였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야채가 귀한 탓에 야채가 가득한 「쉬」는 감칠맛이 있었다. 역시 추운 지방에서 뜨거운 湯(탕)류를 먹는 습관이 숟가락을 일찍부터 발전시켰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사람 이치이로 하치로(一色八郞)가 쓴 「젓가락(箸)의 文化史」라는 책을 보면 南중국에서부터 적도지방까지는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이다. 지금이니까 위생적으로 젓가락을 쓰지 옛날에는 모두 손가락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매운 커리 음식도 손으로 먹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南아시아를 여행하면 스프를 먹어 볼 기회가 드물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서 뜨거운 스프가 없는 것인지 몰라도 스프를 먹는 문화가 없어서 숟가락이 불필요한지도 모른다.
바이칼 自然史 박물관
바이칼 호수를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박물관이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목조 건물 속에 각종 어류의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바이칼은 원래 바다였다. 地質時代(지질시대)에 화산 활동으로 생긴 深淵(심연)이 융기하여 바다에 있던 동·식물을 고스란히 품은 채 호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서만 사는 물고기들이 내륙호수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짠물은 서서히 단물이 되고 그 속의 생물들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매우 특수하게 진화하였다. 바이칼湖는 길이 636km, 최대 폭 79km, 표면적 3만1500km2, 가장 깊은 곳 1742m, 투명도는 한때 40m였고 2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南美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갈라파고스 섬에서 살고 있는 도마뱀을 연구한 다윈도 아마 여기는 못 와본 것 같다. 그 사람의 책에 바이칼湖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는 걸 보니….
호숫가에는 수영복 입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정작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이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물가에 서서 낚시하는 사람도 있어 一見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호수를 건너다니는 여객선이 도착하여 사람과 짐들을 내리느라고 잠시 어수선하였다가 이내 太古風의 평화로 돌아왔다.
바이칼湖 서쪽 언덕 위는 나무 숲이었고, 숲 속엔 굵은 백화나무에 흰색 광목 조각이 무수하게 매여 있었다. 우리나라 巫俗(무속)에도 등장하는 堂木(당목)이었다. 한국에서는 당목에 五方色(5방색)인 검은색(북) 붉은색(남) 푸른색(동) 흰색(서) 황색(중앙)의 천을 매단다. 한국 것과 비교하면 바이칼 것은 흰색 한 가지뿐이어서 단순하지만, 나무에다 헝겊이나 종이를 매달면서 인간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나무와 헝겊을 러시아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순이가 알 턱이 없었다. 하긴 러시아말로 알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원주민인 브리야트族이나 인근에 살고 있는 에벵키族의 말이어야 우리말과 비교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목이 있는 곳에 장승이 있는 법이다. 호텔 입구에 텁석부리 영감 모습의 장승이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한, 安東 하회탈을 쓴 모습의 장승이었다. 먹과 붓이 있었다면 「天下大將軍」이라고 써 주고 싶었다.
사냥꾼들은 통나무집에 산다. 우선 혹한을 이겨 내려면 보온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통나무집은 견고하기 때문이다. 한번 내리면 몇 미터씩 오는 폭설의 무게를 이기려면 우선 집이 튼튼해야 한다. 또한 여기 주민들이 시베리아 삼림지대의 맹주들인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통나무집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굵은 재목으로 지은 귀틀집들이 타이가(Taiga) 지대 곳곳에 있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이고 중앙에 출입구, 좌우에 들창이 있는 게 기본형이다. 이 경우는 방이 하나 짜리다. 조금 큰 집은 2층으로 아래층은 창고, 위층이 살림공간이다.
신라 積石木槨墓의 原型
「타이가 하우스」(멋대로 命名한다면)의 기본형은 유목민인 스키타이-알타이族들의 무덤방으로 전용되었다. 예니세이 상류의 유명한 파지리크 古墳(고분)은 초기 금속기 시대의 族長級(족장급) 주인공이 통나무집을, 저승생활을 위한 집으로 삼아 쉬고 있었다. 수많은 副葬品(부장품)들이 통나무집 속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과 유품들이 도굴되지 않도록 통나무집 위에 천문학적 분량의 돌이 산처럼 쌓여 있는 구조였다.
유사한 구조가 인근의 얼음공주의 묘, 카자흐스탄의 이씩 쿠르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新羅(신라) 왕족들의 무덤인 積石木槨墓(적석목곽묘)의 구조다. 돌을 쌓아 통나무집을 덮은 구조인 것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거리는 요즘의 제트기로 날아가도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고 알타이지방의 이씩 쿠르간이나 파지리크 古墳이 만들어진 때는 신라왕들의 무덤보다 800년 이상 빠르다.
중앙아시아의 古代민족들과 新羅의 왕족들은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고고학자들은 世紀(세기)를 넘기면서 고심하고 있다. 인간의 이동인가? 그렇더라도 기나긴 시간 가운데 傳承(전승)의 錯誤(착오)현상도 없었단 말인가? 이에 관한 고민은 일단 나중에 하기로 하자.
타이가 하우스 정문에 물고기 그림이 있었다.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金海 首露王陵(김해 수로왕릉)의 雙魚文(쌍어문: 神魚)이었다. 앞서 말한 쌍어문의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한 文樣(문양) 이상으로 심오한 것인데, 여기서 발견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도(아요디아)-南중국(安岳)-가야-倭(왜)까지의 이민 루트 때문에 首露王이 神魚思想(신어사상)에 접하게 되었겠지만, 바이칼 지방의 雙魚 무늬 그림은 약간 의외의 존재였다. 어쩌면 바빌로니아-스키타이-알타이-바이칼까지 주민들이 이동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前者가 농업사회 간의 이민이라면, 後者는 騎馬民族(기마민족)들 간의 접촉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백화나무는 新羅의 토템
타이가 지대의 한복판인 바이칼 지대는 「白樺(백화)나무」(자작나무)로 덮여 있는 땅이다. 백화나무의 고향은 寒冷(한랭)지대다. 한반도의 기후는 백화나무가 탐스럽게 자라기에는 너무 덥다.
그런데도 신라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화나무를 숭상하였다. 天馬塚(천마총)에서 발견된 승마용 障泥(장니:말다래)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고, 그 위에 하늘을 날아가는 天馬를 그렸다. 하고많은 재료 중에서 하필이면 백화나무 껍질을 썼을까? 그뿐만 아니라 천마총의 주인공은 白樺皮(백화피)로 만든 모자도 쓰고 있었다. 신라인들에게 백화나무는 무슨 의미가 있었기에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말다래와 모자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었을까. 여기에 신라인들의 신비성이 있다.
백화나무는 영어로 「birch」이고 러시아 말로는 「베로이자」이다. 유목민들이었던 스키타이族이나 사냥꾼인 에벵키族들이 이승의 집이나 저승의 집을 모두 백화목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나를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白木」이라고 쓰고 「시라키」라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백화목이 新羅라는 國名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新羅 金氏의 조상인 金閼智(김알지)는 鷄林(계림)에서 탄생하였다. 유목민들의 민속 중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항상 커다란 나무를 통해서 생명이 내려온다는 것은 月刊朝鮮 9월호에서 설명하였다. 新羅人에게 그 나무가 바로 한랭지대에서만 자라는 白樺木이었다는 것이 민속과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모두 일치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고향은 따라서 白樺木이 잘 자라고 있는 시베리아 지역이다. 그 지역 종족 중에서 한국인들과 假定(가정) 유전인자가 가까운 바이칼 지역의 브리야트族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