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난번에 뭉치님이, 우리가 다룰 작가에 대해 게시판에서 나마 정보를 교환하자 이런 말씀하셨잖아요? 전 그렇게 했음 좋겠어요. 여러 모로 도움이 될 듯..
저번에 살펴본 숀 탠도 그렇고 찰스 키핑도 그렇고 독자층이 어린이인지 성인인지 애매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죠. 그래서 아마 '당신의 책은 어린이를 보라고 만든 건가요?'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나봐요. 각자 대답했겠지만, 대답의 요지는 '책을 만들 때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보라고 생각하며 만든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였던 걸로 기억이 나네요.
아래 글에서 작가의 일생에서 우울증이나 요양원, 지독한 가난 부분 읽으면서 그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썼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어요. 왜 그렇게 기괴한 그림책 세계를 만들어내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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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을 내다보는 어린이의 마음
한 인간에게 있어 유년기의 상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그의 예술적 창작물 속에 투영되곤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되는지 찰스 키핑(Charles Keeping)의 『창 너머』를 통해 살펴볼까요? 우선 표지만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색 바탕에 점으로 늘어선 무늬가 있는 것은 커튼입니다. 그 커튼 위로 흉물스럽게 맞은편 건물들의 키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소년은 바로 그 커튼 뒤에 숨은 채 간신히 얼굴을 보여줍니다. 싸늘하도록 푸른 그림자는 소년의 놀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고, 가늘고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소년의 머리카락과 아래 속눈썹은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년은 단단히 겁을 먹은 것 같군요. 무엇인가 소년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는지, 소년의 입술은 ‘헤’ 벌어져 있고 시선은 단단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소년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년이 내다보고 있는 외부의 세상과 소년이 현재 위치한 내부 세상을 분리하는 창문의 격자형 틀이 볼록하게 보입니다. 이처럼 표지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민한 독자들은 파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자의 감정을 옥죄는 표지 그림 하나만으로도 이미 찰스 키핑은 독자의 감정을 지배하는 전능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소년의 눈에 비친 사건을 아직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일종의 작가적 자존심도 함께 느껴집니다.
이야기의 첫 부분은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제3의 시선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소년을 관찰하고 있는 유령 같은 존재이겠지요. 아니면 소년의 분신(도플 갱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하루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인지 햇살이 차분하게 커튼 안쪽으로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턱을 창틀에 기댄 키 작은 소년의 등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옆 면, 땅거미가 내려앉은 건지, 검은 건물들의 그림자가 성큼 소년에게 다가와 멈춰 서 있습니다. 소년을 보호해주는 힘이 교회의 십자가에서 비롯하는지 소년의 이마에는 십자가상이 맺혀있습니다. 어둠 속 고양이의 수정체처럼 확장된 소년의 눈은 그러나 뿌리 부분만 살짝 보일 뿐입니다. 제이콥의 어머니는 아래층에, 누나는 학교에 있고, 제이콥이 지금 내려다보는 아랫길은 제이콥에게는 세상의 전부라고, 목소리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년의 이름은 제이콥이고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거나 동네에서만 서성거리는, 병약하거나 심약한 아이라는 정보를 알려주고 싶었던 게 작가 찰스 키핑의 심사였나 봅니다. 소년이 사는 동네에는 맛있는 과자 굽는 냄새를 풍기는 알프네 과자 가게가 있고, 사람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올리는 교회가 있고, 저 멀리로는 아직도 말이 끄는 짐마차가 몇 대가 있는 양조장이 있습니다. 평범한 유럽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인 풍경을 갖춘 거리이지요. 거리는 보는 시각에 따라 활기찰 수도 있지만, 소년이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은 칙칙하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소년의 내면은 황폐함으로 그득한 것 같습니다. 아직 채 어른이 되지도 않은 소년의 눈에 밝고 활기차야 당연할 세상, 친근한 이웃 거리의 풍경이 어째서 을씨년스럽기만 할까요? 소년의 도플 갱어는 바로 작가 자신이기에 그런 것 아닐까요?
유난히 몸집도 작고 병약했던 찰스 키핑, 이런 유약한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의 부모님은 그가 바깥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찰스 키핑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얼마지 않아 할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러니 소년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고독, 고립, 적막, 상실 등의 어두움 감정은 그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의식 밑 깊은 우물 속에서 숨어있다 가끔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그 거리에는 사람들이 ‘쭈그렁탱이’라 놀려대는 삐쩍 골은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노파가 있는데 노파는 개를 산책시키며 소년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청소하는 위레트씨도 지금 막 소년의 창문 아래로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양조장의 짐마차를 끄는 말들의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지만, 짐마차는 보이지 않고, 성난 말들의 울음소리만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비둘기 떼가 느닷없이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이제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1인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비둘기들이 왜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지?” 소년의 독백으로 시작된 사건의 암시로 말미암아 바짝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성이 난 말들, 양조장에서 뛰쳐나온 고삐 풀린 말들이 무섭게 거리를 질주했습니다. 양조장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 “마부다”, “양조장 사람들이야!”, “위레트 씨도!” 창 안에 있던 소년은 혼비백산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덩달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를 질렀을 것만 같습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거칠어지다 사위어갑니다. “쭈그렁탱이도 나왔어” 그러면서 소년은 남루한 노파의 안절부절 못하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일까?” 소년은 궁금해졌습니다. 소년의 궁금증은 걱정으로 탈바꿈합니다. ‘마부가 말을 붙잡아야 할 텐데.’ 그런데 소년은 그만 쭈그렁탱이 노파의 굽은 팔에 축 쳐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개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위레트 씨도 양조장 사람들도 쭈그렁탱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소년은 애써 잊어버리려 합니다. 소년은 곧 학교에서 집으로 올 누나를 떠올렸지만, 소년의 손은 서리 낀 유리창 위에 한 점 그림을 그립니다. 웃고 있는 개를 가슴에 품고 있는 웃고 있는 사람, 아마 그 사람은 쭈그렁탱이 노파가 아닌 소년인 듯 합니다.
사건의 긴박감과 주인공 소년 제이콥의 감정 변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찰스 키핑은 다양한 색감으로 정서적 표현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개를 잃은 쭈그렁탱이 노파의 모습은 핏빛 배경으로, 이 모습을 목도하였지만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은 창백한 파란색 배경으로, 은총이 가득한 거룩한 교회의 모습은 황금색 배경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색채만으로도 독자는 정서적 감정 이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석판화에도 능했던 찰스 키핑은 이 작품을 위해 석판화 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책장에는 커튼이 완전히 드리워져 있고 소년의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 소년, 아니 작가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잔혹 취미인가요?’ 제가 묻고 싶었던 이 질문은 이미 많은 그림책 비평가들이 작가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적나라한 묘사, 과도한 우울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꼭 아름답고 즐거운 세상의 양지만 보여줘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처럼 음울하고 쓸쓸한 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그것은 이제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라면 스스로 생각할 힘이 있는 아이에게는 보여주고 싶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찰스 키핑(Charles Keeping)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존 버닝햄과 함께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로 꼽히는 찰스 키핑(Charles Keeping)은 램베스(Lambeth)에서 1924년 9월 22일에 나고 런던에서 성장했습니다. 위의 그림책『창 너머』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는 시장이 에워싸고 말들이 다니는 이웃해 있는, 삼대 째 내려온 테라스가 딸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몹시 병약했던 그는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주로 실내에서 활동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누나 그레이스와 함께 이야기를 꾸미고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주로 신문배급업자인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가판 포스터의 뒷면에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평범하면서도 행복했던 그의 유년기는 아홉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과 연이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두워집니다.
어린 찰스는 학과 공부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고 오로지 말과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습니다. 열네 살에 학교를 중단한 그는 나이 어린 인쇄공으로 허드렛일을 하다 열여덟이 되던 1942년 군대에 징집되어 해군소속 무선통신병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4년 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도시 생활로 인해 병영에서 당한 머리 부상의 후유증이 악화되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심리적 타격은 어린 시절 부친과 조부의 상실 후에 형성된 내면적 기질을 더욱 강화시켜 그를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이중인격자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정신의 건강을 회복한 그는 리젠트 스트릿 폴리테크닉(Regent Street Polytechnic)의 미술학과에 지원했지만 몇 해에 거쳐 번번이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낮에는 가스 주유소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클래스에서 삽화를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곤궁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자 그림 모델로도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49년 어느 날, 등 근육의 기능을 설명하는 수업에서 벌거벗은 모델로 서 있던 그에게 반한 여학생 르넷 메이어(Renate Meyer)를 만나게 되었고, 삼 년 후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당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니겔 램보른(Nigel Lambourne)과 스튜어트 트레질리안(Stuart Tresilian)이 교수로 있던 리젠트 스트릿 폴리테크닉에서 미술 수업을 제대로 받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3학년 편입 시험을 거쳐 마침내 삽화와 석판화를 전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1952년 이후 4년 간, 그는 <데일리 해럴드(the Daily Harald)>지에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시사만화가로서 그는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지요. 시사만화를 그리던 것과는 별개로 1953년 『심장병으로 죽는 이유(Why Die of Heart Disease?)』라는 제목의 건강 홍보용 책자의 삽화를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교육 교재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은 1957년 나온 로즈마리 서트클리프의 『The Silver Branch』라는 어린이용 역사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텍스트 내에서의 삽화의 관습적 위치와 크기를 변형시켜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냄으로써 이후에도 여러 번 로즈마리의 어린이 동화에 삽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동화책에 삽화를 그리면서 명성을 얻게 된 그는 성인들의 책에도 삽화를 그렸습니다. ‘폴리오 협회(The Folio Society)’와 함께 다시 만든 고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는 자신의 22점의 이색(二色)석판화로 제작된 삽화를 싣기도 했습니다. 매우 표현주의적이고 감정을 훔치듯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석판화 삽화에 매료된 출판업자들의 지원으로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호레이스 월폴의 『온타리오 성』등에도 석판화 삽화 작업을 맡게 되었지요.
『Charley, Charlotte and the Golden Canary』의 표지
그림책으로 그의 첫 작품은 1966년에 출판된 『검은 돌리』가 처음입니다. 다음 해에 나온 그림책 『Charley, Charlotte and the Golden Canary』는 당시로서는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된 우화인데 이야기 속의 두 주인공 어린이들은 거리에서 성장합니다. 한 어린이의 가족이 새롭게 건설된 탑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된 두 아이는 애완용 앵무새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찰리를 통해 찰스 키핑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있던 어린 시절의 런던의 모습과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어린이의 내면세계(즉 자신의 내면세계를 회상해서 재현해 놓았습니다. 총천연색의 삽화는 강렬한 색의 사용으로 도드라지게 혼란스러운 느낌을 전달하며, 스펀지 느낌의 재질감을 밀어내는 밀랍의 효과로 독특함을 인정받아 케이트 그리너웨이(Kate Greenaway)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조지프의 마당』(1969), 『창 너머』(1970)의 성공은 이 작품들이 BBC 방송국의 “스토리라인” 프로그램에서 단편 영상물로도 제작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석판화 'Wagon Turning', 1958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능수능란하게 전달하는 작가로 유명한 그는 1988년 6월,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총 22권의 그림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과슈, 템페라, 수채 물감, 석판 등의 재료로 선은 힘이 있되 섬세한 조형성을 갖추게 하고, 선을 통해 현실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비감을 표현해냈습니다. 찰스 키핑은 자신만의 내면세계와 세상에 대한 입장을 갖고 있었기에 다른 작가와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가끔 이러한 주제 의식과 난해한 그림 때문에 어린 독자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그림책은 두 차례의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또 다른 작품은 1981년 작품인 『노상강도(The Highwayman)』이다)을 수상 받아, 예술적 견지에서 혹은 전문가적 견지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가 가히 영국이 내세우는 3대 일러스트레이터의 반열에 오르기에 합당한 저력을 지닌 그림책 작가임을 당당히 입증하였습니다.
서커스를 추억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지난날의 화려했던 순간들이 찬란한 무지개로 평범한 일상을 이끌어주는 힘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옛 순간들이 영원히 과거의 한 페이지 속에 묻혀 어두운 광에 갇힌 채 영원히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찬란한 광채를 발휘하는 시간들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한정된 들뜬 시간들을 반짝이는 보석으로 일상의 모래밭에서 찾아낼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사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빈터의 서커스』에서 찰스 키핑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 또한 이것입니다.
이야기는 강변에 늘어선 공장 지대에서 공을 차며 뛰어노는 두 남자 아이의 모습이 무채색의 선으로 그려지며 시작됩니다. 스모그로 잔뜩 찌푸린 듯 칙칙한 하늘,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는 계속 하늘로 올라 오염의 두께를 한층 두껍게 하는 곳, 아마도 찰스 키핑이 어린 시절을 보낸 런던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아이, 스콧과 웨인은 시내 한복판에 들어차 있던 낡은 주택과 공장이 헐리고 빈터가 생기자, 이 빈터에서 공차기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두 아이는 이 빈터에 녹색의 짐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것을 목격합니다. 낮은 담장 너머로 공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던 두 소년은 이윽고 그곳에 커다란 천막 두 동이 세워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서커스단이 마을에 온 것이니까요. 쏜살같이 달려 호주머니에 동전을 채우고 온 두 소년은 평소 기대했던 서커스단원이 아닌 사람들과 마주함으로써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실망은 곧 새로운 즐거움으로 쉽게 잊혀지는 경향이 있지요. 두 소년은 돈점박이 말, 사자, 코끼리를 보고 회전목마, 공중 관람차, 작은 기차를 타며 서커스 개막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리고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흐릿한 무채색에서 점점 녹색의 빛깔을 띄어가던 배경들이 서커스의 시작과 더불어 빛의 스펙트럼처럼 황홀하게 빛납니다. 물론 동물원에나 가야지 볼 수 있는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이나 놀이동산에나 가야지 탈 수 있는 기구들을 타는 것 또한 그네들의 일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아주 이색적이고 특수한 경험은 아니지요. 여기에서는 이 경험들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기에 아이들의 마음처럼 푸르른 연두색, 건강한 초록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 보기 어려운 서커스를 그것도 멀리까지 가지 않고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서 보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찰스 키핑은 서커스를 프리즘을 통해 보듯 무지개 빛 너머의 세상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들의 율동감은 섬세한 곡선으로 리듬감 있게 전개되고, 후끈 달아오른 서커스의 열기가 붉은 광대들의 옷을 통해 전달됩니다. 광대가 무대 뒤로 사라진 뒤 돈점박이 말들의 우아한 곡예가 시작됩니다. 그 아슬아슬한 광경이 빙그르르 구르는 프리즘을 따라 퍼지는 태양광선의 스펙트럼처럼 좌에서 우로 천연색의 빛깔로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 이제 서커스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속도감 있게 표현된 색 띠 뒤로 외줄타기 곡예사들이 아찔한 묘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비범한 아크로바틱은 평범한 육체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근력과 아름다움을 극화시켜 표현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찰스 키핑이 포착한 공중 곡예도 철저히 무지개 차양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즉 두 소년이 앉은 자리 혹은 독자가 위치한 쪽이 현실 세계라면 무지개 차양 너머 서커스가 진행되고 있는 세계는 찰나적 환상과 미지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지요. 이제 코끼리와 아가씨들의 공연으로 황홀한 순간이 점멸하다 어둠 속에 묻힙니다.
서커스가 끝나자 천막이 걷히고 공터는 조용해졌습니다. 두 소년은 서커스가 특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 갖는 비일상성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에 서커스단원들이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사라진 빈 공터에서 쓸쓸함을 느낍니다. 이 장면에서 서커스가 없는 빈 공터가 공장과 창고들이 있던 오래 전보다 더 짙은 무채색으로 표현된 것은 내면에 자리 잡은 공허감의 표현일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 칙칙한 무채색의 마음은 웨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스콧에게는 비록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서커스도 그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스콧이 살고 있는 이 텅 비고 황량한 도시라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향하는 길을 비출 반짝이는 별로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요. 언제든 스콧의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그 빛은 더욱 높은 촉수의 빛으로 스콧 앞에 놓인 미래로 향하는 길을 밝혀줄 수 있을 겁니다.
자연의 생명을 배워가는 아이, 조지프
조지프는 아스팔트 킨트입니다. 조지프가 사는 환경이 우선 그렇습니다. 그래도 조지프는 아파트 생활을 하는 우리네 아이들보다는 나은 형편입니다. 적어도 마당은 있으니까요. 그곳에는 벽돌담, 나무울타리, 돌바닥, 녹슨 고철 등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곳에도 물론 자연현상은 일어납니다. 비가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불고, 눈도 쌓입니다. 찰스 키핑은 이런 현상을 석판화를 통한 가는 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수직으로 이어지는 가는 녹색 선들이 가득합니다. 햇살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달걀노른자처럼 노란 원형을 둘러싼 곡선이 동심원을 이루며 점점 퍼져나갑니다. 오렌지색 열선이 가장자리로 갈수록 보랏빛이 됩니다. 바람 부는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키핑은 소년 조지프의 옆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지프의 머리카락이 바람이 부는 오른쪽 방향으로 사정없이 날리고, 조지프는 혹시라도 바람에 날아갈까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키핑은 예각의 사선으로 좌에서 우로 긁어내린 석판화로 바람의 속도며 질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눈의 표현은 하얀 점선이 위에서 아래를 향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형체 모를 정물들이 눈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프는 마당에 널린 고물들과 나무 한 그루를 바꾸었습니다. 마당에 깔린 딱딱한 돌바닥을 들어내야만 간신히 땅을 파고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장면에서는, 조지프의 마당에는 흙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연의 원리대로 조지프가 심은 나무는 햇빛과 비를 받고 작은 꽃망울을 피웠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체험한 조지프는 행복감에 겨워 활짝 핀 꽃을 꺾어 집안으로 가져가지만, 이때까지 꺾인 꽃은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시든 꽃으로 인해 상실감을 느낀 조지프는 고개를 떨구고 기운 없이 지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햇빛, 바람, 비를 조지프의 마당에 가져다주었고 생명 있는 나무에는 다시 잎이 돋아났습니다. 이번에 조지프는 자연이 꽃을 가꾸도록 그대로 두었습니다. 자주 나무를 찾아오는 벌레, 벌레를 쫓아온 새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를 쫓아 고양이까지 왔을 때 조지프는 고양이들의 장난으로 꽃이 다시 시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외투를 벗어 햇볕과 비를 가리자 꽃은 다시 죽고 말았지요. 생명의 죽음을 두 번째 경험한 조지프는 전보다 더 많이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는 자연의 생명들도 다른 생명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야지만 외롭지 않아 다시 환한 꽃을 맺게 된다는 것을요. 따듯한 햇살, 목마름을 해소시켜주는 달콤한 비, 시원한 바람뿐 아니라 꽃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줄 벌레며 다른 꽃들의 소식을 알려줄 새들, 밤의 적막함을 달래줄 고양이들이 있어야지만 꽃이 혼자 고독함에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요. 조지프는 아스팔트를 깨고 그 곳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그 생명을 통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의 이치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찰스 키핑은 이 책에서도 대도시 생활에서 겪는 아이들의 일상의 문제를 예리한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스물 두 권의 그림책 중에서 『조지프의 마당』 표지를 가장 좋아한다는 그이기도 합니다. 찰스 키핑은 이처럼 물화된 도시 생활 속에서 방치된 사람들의 소외감을 소재로 삼는 그림책 작가입니다. 그의 그림책은 보면 볼수록 다양하게 읽힙니다. 그의 그림책이 어렵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라는 어색한 꼬리표를 달고 소개되었습니다만 그림책이라고 꼭 어른이 보지 말란 법 없습니다. 저는 그의 성 Keeping의 문자 의미 그대로 그의 책들을 제 책상머리에 두고 가끔씩 들여다봅니다.
첫댓글 무심님- 우리 책 바꾸기로 정해진 건가요? =ㅁ= ? 헷갈려요...
네 현주님 답 기다렸는데 아래 보니까 오늘 답글 달아주셨네요. 곧 정리해서 글 올릴게요.
무심님, 정리를 정말 잘해주셨네요. 잘 보고 갑니다.^^
학습부장님은 참.. 겪을수록 배울 점이 많은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좋은 자료 잘 봤어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