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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불펍 소총의 대명사
이미 존재하던 방식
우리나라에서는 소유와 보관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총을 상당히 낯선 물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스포츠나 레저 용도가 아닌 인마살상용 고성능 소총을 다루어 본 사람이 인구 대비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병역의무가 있어서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면 총기의 분해, 결합과 사격은 일생에 한번 이상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 병역의무 때문에 건강한 한국 남자라면 총을 다뤄본 경험이 있습니다 ]
그에 비해 이웃의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평생 동안 총을 만져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군 복무를 하고 총을 사용해봤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총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표준 제식총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수 병과나 직종의 경우 임무에 특화된 별도의 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국군 전체로 본다면 다양한 종류의 총을 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 대테러 부대는 작전에 적합한 별도의 총을 사용합니다 ]
그런데 이처럼 많은 종류의 총기를 운용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불펍(Bullpup) 방식의 총은 상당히 낯섭니다. 불펍은 급탄, 격발 행위가 개머리판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말하는데, 대개 탄창이 방아쇠 뒤쪽에 있어서 외관상으로 쉽게 구별이 가능합니다. 사실 낯선 만큼 정규군용 제식화기로써 불펍총의 역사는 1977년 탄생한 슈타이어 AUG 돌격소총(Steyr AUG Assault Rifle)을 시초로 하고 있으므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 슈타이어 AUG 돌격소총 ]
불펍 방식이 신기한 것 같지만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자동권총이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메커니즘 상으로 전혀 새롭거나 혁신적인 기술은 아닙니다. 사실 1901년 시험적으로 만들었던 소니크로프트(Thorneycroft) 볼트액션식 카빈 소총을 최초의 불펍 소총으로 보기 때문에 오래 전에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수시로 다양한 종류의 불펍 소총이 시험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최초의 불펍 방식 소총인 소니크로프트 ]
그 만큼 다른 방식의 소총과 비교하여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불펍 소총은 총의 뒤편에서 사격 행위가 일어나므로 총열을 길게 만들 수 있습니다. 총열이 길면 유효 사거리가 길어지면서도 소음은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총열을 일반소총 수준의 크기로 유지한다면 상대적으로 총의 전체 길이는 짧아져 총의 크기와 무게를 축소시킬 수 있고 당연히 휴대가 편리합니다.
[ AUG로 무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여군 ]
총의 무게는 가벼울수록 휴대가 편리하지만 명중률 등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반동을 충분히 흡수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저격총처럼 정확도와 파괴력이 큰 소총은 반발력이 커서 총의 무게로 이를 상쇄시키지만, 사용의 편리성을 고려한다면 무작정 총을 크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때 기술적인 방법으로 반동을 줄이기도 하는데 불펍 방식은 격발이 몸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므로 반동 제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편입니다.
[ 부착된 스코프를 이용하여 사격하는 모습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력 총기로 오랫동안 채택되지 않았고 지금도 특별하게 취급 받는 이유는 그에 못지않게 단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늠자와 가늠쇠의 사이가 짧아 조준이 부정확해 질 수밖에 없는데 AUG같은 경우는 스코프를 장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생산비용이 커졌습니다. 또한 사격 시에 얼굴 부근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탄피배출구도 좋은 소총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구조입니다.
[ 초기의 불펍 소총인 엔필드 EM-2.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
무게 중심이 뒤쪽에 쏠려 있으면 반동 제어에 좋지만 총의 모양이 불균형하게 생겨 백병전에서 사용하기 곤란합니다. 돌격소총의 등장 이후 백병전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최후의 전투방식이라며 보수적인 전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불펍 방식의 소총은 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불펍식 소총은 이처럼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이 눈에 띄어 제식화되기 어려웠습니다.
(이후는 2014.4.10 내용추가)
새로운 길을 선도한 소총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Steyr Mannlicher)가 1970년대 초에 자국군용으로 사용할 새로운 돌격소총인 AUG를 불펍식으로 개발하겠다고 한 선언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펍식 돌격소총은 비관적인 견해가 커서 슈타이어가 불가능한 도전에 뛰어든 것 아니냐는 전망이 우세하였습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국내 수요만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외국에서 좋은 총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었습니다.
[ 처음에는 AUG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였습니다 ]
오스트리아는 20세기 초까지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열강 중 하나였지만 제1차 대전 후 나라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후 독일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가 제2차 대전 후에 영세중립을 조건으로 간신히 독립한 약소국입니다. 따라서 군대의 규모도 적어 그 동안 FN-FAL을 라이선스 한 StG58을 제식소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제식소총을 국산으로, 그것도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은 불펍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일견 무모해 보였습니다.
[ StG58 이라는 제식명으로 사용한 FN-FAL ]
그러한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나선 슈타이어는 한때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군대에 다양한 각종 총기를 공급하여 온 역사를 자랑하고 뛰어난 기술력도 보유한 제작사였습니다. 특히 StG58을 라이선스 생산, 공급하면서 앞으로 사용될 새로운 차기 소총이 갖추어야 할 조건과 기능에 대해 나름대로 개념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즉 AUG는 결코 갑자기 나타난 산출물은 아니었습니다.
[ 19세기말 슈타이어가 제작한 M1888 소총 ]
정식명이 StG77인 AUG에게는 개발에 참조할 프랑스의 FAMAS라는 반면교사가 있었습니다. AUG는 탄피배출구를 사수의 필요에 따라 변환할 수 있도록 하였고 조준경을 달아 명중률을 높였으며 전방에 그립을 달아 무게를 적절히 분산하였습니다. 덕분에 FAMAS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반동을 잡을 수 있었고 당연히 명중률은 향상되었습니다. 시제품을 실험한 야전에서의 평가도 대만족이어서 즉시 제식화되었습니다.
[ 반면교사가 되었던 FAMAS ]
슈타이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쉽게 개조할 수 있도록 AUG에 모듈화 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덕분에 AUG는 카빈, 경기관총, 기관단총 등의 다양한 변형이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영세중립국임에도 개발 당시부터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5.56mm NATO탄을 사용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어차피 소련 소총으로 통일되어 있는 동구권에 새로운 규격의 총을 팔 수 없었으므로 그 반대편의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 사용자 요구에 따라 9mm 탄을 사용할 수 있는 모델도 있습니다 ]
개발 당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일부에서는 비관적인 전망도 내놓았지만 AUG는 한 세대 앞선 돌격소총이라는 명성을 들을 만큼 성공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때맞추어 채용한 5.56mm탄과 우려하였던 불펍 방식 덕분에 반동을 쉽게 제어할 수 있었고 총의 크기와 무게도 상당히 양호한 돌격소총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도 여러 나라에서 앞 다투어 채용하였습니다.
[ 다양한 부가 장비를 장착한 모습 ]
라이선스 생산을 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약 20개국 이상이 군경용으로 사용 중에 있으며 반자동으로 개조되어 민수용으로 사용되는 AUG도 상당수 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영국 SAS를 비롯한 많은 대 테러 기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활용도와 정확성이 최고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덕분에 슈타이어는 일약 세계적인 총기 제작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AUG는 불펍 소총의 진정한 개척자입니다 ]
AUG는 한마디로 그 동안 개념 정도로만 여겨지던 불펍 소총의 진정한 시대를 열은 개척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총이라는 무기는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하면 되므로 그 모양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성능까지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UG처럼 좋은 성능에 독특한 외관과 구조까지 가졌다면 그야말로 미래형 총기라는 명성을 얻기에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펌] / 출처; august 님의 블로그 / 남도현 / 2014.04.01 09:29
다시 한 번 돌아본 교훈
히틀러가 전쟁을 결심하였을 때에 독일 군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지난 1935년 재군비를 선언한 후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주변의 군사 강국인 프랑스, 영국, 소련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장인 괴링이 히틀러의 충복이었던 관계로 공군(Luftwaffe)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육군과 해군은 고분고분하게 결정을 따를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 집권 초기 히틀러에게 사열하는 독일 전쟁성장관과 육해공군 총사령관 괴링을 제외하고 이들 중 전쟁 개시에 적극적인 이는 없었습니다 ]
전통적으로 독일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Das Heer)은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려는 총통의 결정이 너무 무모하다고 격렬히 반발하였고 일각에서는 쿠데타로 히틀러를 축출하려는 시도까지 모의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우려와 달리 실제로는 프랑스를 순식간 굴복시켜 군부수뇌들을 머쓱하게 만들었지만, 1940년 프랑스 침공이전 독일 육군의 소극적인 자세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 히틀러에게 격렬히 저항하다 해임당한 육군 참모총장 루드윅 베크.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
그만큼 제1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불과 20년 만에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육군의 반발에 비한다면 해군(Kriegsmarine)의 경우는 체념에 가까웠습니다. 비록 독일 해군도 재군비 선언 후 군비 증강에 나섰지만 주변 열강들과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독일과 일전을 벌일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1위와 4위의 해군을 보유한 강국이었습니다.
[ 독일 해군은 준비가 상당히 부족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
제1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은 세계 2위 수준의 해군을 보유하였지만 패전 후 철저히 해체되었습니다. 군함은 건조에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므로 재군비를 선언하였다고 즉각적으로 전력을 늘릴 수 있던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히틀러의 개전 선언에 해군 사령관 래더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절망하였을 만큼 상황이 나빴습니다. ( 관련 글 참조 )
[ 개전 당시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래더 ]
모두의 예상대로 독일 해군은 처음부터 수세에 몰렸습니다. 저 멀리 우루과이에서 포위당한 포켓전함 그라프 슈페(Admiral Graf Spee)는 자침하였고 ( 관련 글 참조 ), 해군이 앞장섰던 노르웨이 전역에서 중순양함 블뤼허(Blucher)를 비롯한 금쪽같은 13척의 전투함을 잃었습니다. ( 관련 글 참조 ) 그리고 그 절정은 1941년 침몰당한 거대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의 최후였습니다. 한마디로 독일 해군이 바다 위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 우루과이 라플라타강 하구에서 자침한 그라프 슈페 ]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 해군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맞설 수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독일은 비대칭 전력을 앞세워 연합국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바다의 늑대들로 알려진 유보트(U-Boat) 잠수함이 주인공이었는데 독일은 이들로 하여금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한 연합국이 바다를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없도록 전쟁 내내 격렬히 저항하였습니다.
[ 바다의 늑대로 불리며 연합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유보트 ]
이것은 이후 해군력 운용과 관련하여 다양한 시사점을 남겼습니다. 비록 수상함 전력이 부족하여 제해권을 장악할 수 없는 국가라 하더라도 잠수함 전력은 주머니 속의 송곳 노릇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입니다. 예전보다 많은 방법이 개발되었음에도 물속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잠수함을 완벽히 찾아내고 격침하기는 아직도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해군력을 대등하게 구축할 수 없는 국가에서 잠수함 전력의 육성은 첫 번째 고려사항입니다.
[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 ]
북한 해군은 처음부터 제해권 확보는 포기하고 잠수함 전력에만 극단적으로 집중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보유 척수로는 동북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70여척의 잠수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동안 연안에서만 한시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구형으로 취급되어 크게 문제시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이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임이 확실히 입증되었습니다.
[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
단순히 수상함 전력만으로 바다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음은 앞에서 살펴본 유보트의 경우처럼 지난 전쟁에서 입증되었고 시대와 환경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유효한 법칙이라는 점을 천안함 사건은 알려주었습니다.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맞설 수 있는 우리 해군력의 확충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입니다. 적의 송곳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가 당한 아픔은 지난 천안함 사건 한번으로 끝내야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펌] / 출처; august 님의 블로그 / 2014.03.28 09:10
민가에 머물면 화장실 청소하고 떠났던 중공군, 그들은 '正義' 선점에 능했다
중공군은 교묘했고 유엔군은 그들의 기만에 빠져 들었다
대민 폐해 적었던 군대
참전했던 중공군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공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한반도 주민들이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물론 그들과 싸웠던 국군과 유엔군의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장 뚜렷했던 인상은 그들 중공군의 대민(對民) 폐해가 적었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우선 기율이 엄격했다. 여러 가지 행동수칙이 있었겠지만, 우선 민가 등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또 실제 그렇게 행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는 일을 피했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가에 숙영하더라도 머문 뒤의 장소를 깨끗이 정리했으며, 반드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참전 전과 후에 철저하게 시행한 내부 교육 때문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이 북한쪽 농민을 도와 밭을 갈고 있다. 중공군은 강한 기율로 대민 폐해 최소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인으로 구성한 군대의 인상은 6.25전쟁 참전 이전까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부패하기 쉬웠으며, 그에 따라 기강이 없었다. 만주사변 당시의 상황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최정예 2개 사단은 무기를 시장에 내다 팔다가 그 약점을 노리고 들이닥친 일본군 1개 대대에게 일거에 사라지고 말 정도였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도 부패와 무능의 덫에 걸려 있다가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하는 소수의 홍군(紅軍)에게 밀려 하루 사이에 수십만의 병력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니 중국 군대라고 하면 우선은 그런 부패와 무능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그들과 많이 달랐다. 중국 지도부는 특히 참전 뒤에도 중공군 각 부대에 지속적으로 작전 수칙(守則)을 보내 예하 장병들을 교육했다. 그 내용 중에는 ‘현지 인민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한다.’ ‘학교와 문화, 교육기관, 명승지와 유적지 등을 보호한다.’ ‘사사로이 민가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민의 것은 하나라도 들고 나오지 않는다.’ ‘교회나 사찰 등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이 들어 있다.
참전 뒤의 전황을 설명하고 있는 마오쩌둥. 치밀한 전략가의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베이징(北京)에서 전쟁을 모두 지휘한 마오쩌둥의 군사사상 중에 돋보이는 내용 중의 하나가 이른바 ‘물과 물고기’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홍군을 물고기에, 그 바탕을 형성하는 인민을 물에 비유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홍군은 인민의 토대 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이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작전의 토대를 인민 위에 둠으로써 부패와 무능의 가능성을 막았고, 그로써 다시 내전과 항일전쟁에서의 ‘정의(正義)’를 선점할 줄 알았다. 6.25전쟁 참전 뒤에도 그런 기강은 그대로 살아 있었고, 참전 중공군 장병들은 그에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마오쩌둥이 1951년 1월 19일 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가필한 메모. 중공군과 북한군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사병들에게도 작전계획 고지
1950년 10월 말 운산에서 전면의 15연대 수색대가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심문할 때 나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중공군 포로가 일개 사병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부대 이동과 배치, 병력수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사(戰史)를 보면서 나는 그 궁금증을 풀었다. 중공군 지도부는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작전에 관한 고급 정보를 알려줘 함께 공유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공군의 단점이기도 했다. 중공군이 포로로 잡힐 경우 제법 많은 정보가 상대 진영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곧 중국으로 번질 것이라며 保家衛國(보가위국: 집과 나라를 지키자는 뜻) 식의 구호를 만들어 위기의식으로 무장했고, 당시에는 없었던 계급 때문에 아래 위가 한결 강한 동료의식으로 묶였다.
아주 단일한 명령체계와 기율, 그리고 가정과 나를 지킨다는 식의 단순한 목적의식으로 중국인들이 한 데 묶일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당시 중공군의 한반도 참전 상황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배후 지휘자 마오쩌둥은 그 점에서 매우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는 명분을 만들고, 그를 집행할 세부의 틀을 조작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의 중공군 작전 스타일은 우직하다기보다는 교묘했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힘차게 내지르는 타입은 아니었고, 대신 상대의 빈 구석을 파고들어 화려한 기만(欺瞞)과 변칙(變則)을 구사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군의 정면에 나서 총을 뽑아들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기만과 변칙 스타일의 중공군에게 미군이 번번이 당했다는 점이었다.
1952년 중공군이 비무장지대 북쪽에 구축한 총연장 4000km의 지하갱도. 그들은 일명 '지하만리장성'이라는 이 갱도 요새를 만든 뒤 그 속에서 생활하며 작전을 펼쳤다./ 눈빛출판사 제공
중공군 참전과 1차 공세가 벌어진 때는 앞서 소개한 대로 1950년 10월 말이었다. 국군 1사단장이었던 나는 당시 평북 운산에 진출해 있었다. 전황(戰況)이 아주 급박해 당시로서는 중공군 지도부가 어떤 기만을 펼쳤는지 제대로 살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를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기만과 변칙의 깊은 덫
중공군은 1차 공세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따라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다수의 유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로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일부러 풀어줬던 것이다. 그냥 풀어주지는 않았고 ‘교육’해서 석방했다. 그 핵심은 “우리는 곧 돌아간다.” “식량이 부족해서 귀국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국 지도부는 1차 공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11월 초에 접어들어 전군(全軍)에 유엔군 추격 금지 명령을 하달했다. 지도부가 추격을 금지하면서 중공군은 느닷없이 전선 곳곳에서 사라졌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51년 3월 7일 수원에서 논란거리가 된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는 맥아더. 그는 "병력 지원이 없는 한, 중공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한, 아시아에서 중공의 공격력을 저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공군 1차 공세 때 붙잡혔다가 아군 진영으로 살아 돌아온 포로는 국군 76명, 미군 27명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공군 진영에 붙잡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이 곧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일부러 도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별로 쓸모가 없는 물자 등을 배낭에 넣어 길가에 버렸고, 역시 용도가 별로 없는 구식 중소화기(中小火器) 등을 도로 등에 내던지고 도망쳤다. 산발적 전투에서 그런 중공군의 모습을 지켜봤던 아군 장병들이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면, 이는 정보형태로 상부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여러 조각 정보가 모이면서 아군 진영을 이끌었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어떤 판단을 했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아군 포로가 중공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상황은 서방 언론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뉴스거리였다. 특히 전쟁 당사자로 나선 미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했다’ ‘중국은 인권을 중시한다.’ 등의 내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마오쩌둥의 기분이 이 때문에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미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포로 석방 소식을 전하자 그는 베이징에서 “300~400명을 더 풀어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마음씨 좋은 척 선심을 베푸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서방 언론이 그 안에 담긴 전략적 의도를 읽었을 리 없다. 그들이 칼로 두드리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에 바빴을 뿐이다.
중국은 그 때 이미 12월 들어 벌이는 2차 대규모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만주지역으로부터 압록강을 도하한 후속 부대의 한반도 진출로 중공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40만에 달하는 중공군이 차분하게 강을 넘어와 적유령과 낭림산맥 일대에 포진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군을 유인하고 있었다. 포로를 풀어주고, 산발적인 전투에서 등을 보이며 쫓겨 가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미 워싱턴 행정부,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런 중공군의 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은 중공군 병력을 “특수부대 형태의 1만5000~2만 명의 중공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고, 주력은 아직 만주 일대에 남아 있다”고 파악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지휘부나 언론 등은 모두 그런 중국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깊고 복잡한 기만과 변칙의 덫 말이다.
[펌] / 출처; 프리미엄조선 / 백선엽(전 육군참모총장) / 정리=유광종(도서출판 ‘책 밭’ 대표) / 201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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