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2월의 세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때쯤이면 우리는 왠지 초조해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한 해 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오기도 합니다. 소위 ‘연말증후군’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닙니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지만, 나라는 여전히 양쪽 진영으로 분열되어 갈등만 깊어가고, 북한의 핵 무기 미사일과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에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폭등하던 집값이 떨어지고, 금리는 높아지고, 경제도 불안합니다. 축제를 즐기려 거리로 나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위정자들에 대한 불신과 의혹은 가시지를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새해를 준비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설렘이나 희망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새해가 된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사야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타락하였습니다. 물질주의가 만연하여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 이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구원의 날을 바라보는 예언자 이사야의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언어와 비유로 메시아의 시대에 관한 비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말 성경에서는 '백합화'라고 번역했지만, KJV은 ‘장미’(rose)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영어 성경을 보면 ‘크로우커스’(crocus)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크로우커스는 사전을 찾아보면 ‘붓꽃과에 속한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이스라엘 성지를 처음에 방문했을 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였습니다. 예수님이 40일간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광야를 찾아갔는데, 그 광야는 메마르고 삭막한 산지였습니다. 아, 이런 곳에서 주님이 시험을 받으셨구나! 황량한 그 광경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6년 전에 다시 성지에 갔을 때는 마침 우기였습니다. 광야를 다시 찾았는데, 너무나 아름다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황량하고 메말랐던 유대 광야에 키 작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어 노란 꽃을 피운 것입니다. 마치도 노란색 융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습니다.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비가 내리니, 메마르고 황량했던 광야에 꽃들이 피어난 것입니다. 그 광경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또, 그 사막이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레바논의 영광’,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이란 표현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었습니다. 레바논의 영광이 사막에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레바논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작은 나라입니다. 오래 전부터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를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나라가 융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레바논이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한 것은 백향목 때문이었습니다. 레바논 산지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거대한 침엽수입니다. 그 키가 40미터까지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재질이 단단하고, 나뭇결이 아름답고, 병충해에도 강한데다 은은한 향까지 품고 있어서, 오늘 날 까지도 최고의 목재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시편 92편에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하나님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시 92:12)라고 노래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나무라고 비유하고 있는데,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종려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멜과 사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멜은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산입니다. 사론은 영어로는 샤론(Sharon)입니다. 사마리아 북쪽 지역에서부터 지중해까지 펼쳐진 평원입니다. 갈멜산도 여기에 솟아있습니다. 찬송가 89장을 우리가 즐겨 부릅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을 사론의 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님을 노래하는데, 사론의 꽃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럴 만큼, 사론은 향기로운 꽃들과 풍성한 목초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평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레바논과 같은 영광을 얻게 되고,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현실은 여전히 광야이고, 메마른 땅 사막과 같습니다. 광야와 같은 현실, 사막과 같은 현실입니다.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16:10에 보면, 아사셀의 염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사장 아론은 대속죄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회막 문 앞에 두고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물로 바치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아사셀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광야에는 악령이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악령이 바로 아사셀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는 제사장이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어 그 악령에게 제물로 내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제비 뽑혀 아사셀에게 바쳐진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를 배회하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악령 숭배처럼 보이는 이러한 의식이 낯설기는 하지만, 이러한 의식 속에는 광야에 대한 이스라엘의 두려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광야는 악령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광야는 두려운 곳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길도 없기에 길을 잃고 방황하기가 쉽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견뎌야 하고, 밤이 되면 기온이 급강하하여 그 한기에 몸을 떨어야 합니다. 식량을 구하기 어렵고, 마실 물을 얻는 것도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야 길은 힘이 듭니다. 속히 광야를 지나가고 싶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좀처럼 광야를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광야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를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시고 백성들이 부르짖으면 반석에서도 생수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매일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을 걷기가 힘들다 보니, 지치기 쉽고,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출애굽의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며 주어진 삶의 환경과 조건을 긍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불신의 장소가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힘이 들고 불안합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둘러싸고 호시탐탐 우리를 시험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 노리고 있습니다.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에 사로잡히고, 육신의 욕망, 쾌락의 욕망에 취하여 사람들은 비틀거립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존재의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힘들고 불안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광야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고 인간의 교육 수준과 교양이 높아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이사야는 광야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뜨겁고 메마른 사막에 물이 말랐습니다. 승냥이와 사자, 사나운 짐승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들과 우매한 자들이 활개 치며 살아갑니다. 우매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세상적으로 많은 것들을 가졌기에, 스스로 부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만큼 스스로 강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은 강한 자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우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막에는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하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승냥이와 사자가 노니는 땅 광야에서, 우매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모든 불법과 불의를 심판하실 그 날이 오면, 세상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못 듣는 사람들의 귀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들이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사람의 혀는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뜨거운 사막은 변하여 못이 되고, 승냥이가 눕던 곳에서는 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물처럼 흘러 사막을 적시고, 사막에 못이 생기고 시내가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큰 길이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불릴 것인데,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자나 사나운 들짐승이 없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걸어가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고 이사야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과 우주 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좋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좋다’, ‘선하다’, ‘완전하다’,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의 세계는 장엄하고도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 운행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조화는 아름답습니다. 시편 19편의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자연과 우주의 그 신비, 그 아름다움, 그 완벽한 질서와 조화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심히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좋았고 정말 아름다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할 인생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로, 죄를 범하고 추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사함과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역사에서 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18년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한 여인은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앞을 보게 된 여리고의 맹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이와 같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 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값없이 희생의 제물 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십자가의 은총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그 인격과 그 삶에서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격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막 한 가운데서 살아내기를 겁내는 자들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너희를 구하시리라’고 위로하며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힘을 잃고, 길을 잃고 방황하며, 두려움에 기진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을 선포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 손을 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시편 27:4에서 시인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인 성전이 웅장하고 화려하기에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에 그 집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집이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길을 몰라 방황하며 두려움에 기진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을 선포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우리가 가꾸고 헌신해햐 합니다.
비록 지금,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더욱 아름다운 인격과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