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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령이 가난한자 : 영이 가난하다 입니다 여기서 가난이라는 뜻은 아래와 같습니다
형용사 프토코스(Homer 이래)는 프톳소(ptwvssw: 두려워하여 '움츠려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따라서 프토코스는
(a) 본래 '쭈그리고 움츠려드는 사람의'란 의미였다. 자주 비참한 가운데 헤멘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의미에서
(b) 이 단어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구걸하는, 자선을 구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가난한, 천한'이란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형용사는 거지(beggar)를 뜻하는 명사로 더 많이 사용된다.
프토코스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페네스(pevnh", 3993)와는 다르다.
2.애통하는 자 : 슬퍼하다 애통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펜데오(Homer 이래)는 펜도스(pevnqo", 3997)에서 유래했으며, '슬퍼하다, 애도하다, 애통하다'를 의미하며, 흔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펜데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주로 아발(애통하다)을 번역한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이미 닥친 또는 임박한 불행 때문에 우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재앙을 만난 또는 맞게 될 지구, 땅, 도시의 일부분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참조: 사 3:26; 사 24:4; 사 33:9; 렘 4:28; 렘 23:10; 애 2:8; 호 4:3). 어떤 개인의 죽음을 애도함(왕하 14:2; 대상 7:22), 후회(느 8:9),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동안 겪은 슬픔에(왕하 13:27; 왕하 19:1)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펜데오는 사 16:8; 사 19:8; 사 24:4, 사 24:7; 사 33:9에서 히브리어 아말(약하다, 약해지다, 기운이 빠지다, 번민하다)을 번역하며, 이것은 이 단어가 때때로 애통의 심리적·신체적 효과를 묘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창 23:2과 창 50:3에서 펜데오는 히브리어 바카(울다)를 나타내며, 시 78:63[77:63]에서는 할랄(찬양하다)을 번역한다. 렘 23:10에서 펜데오는 누드(두근거리다 또는 떨다, 그러므로 슬픔의 감정을 나타내다), 겔 31:15에서는 카다르(스스로를 어둡게 하다, 즉 애통하다)를 번역한다. 이상에서 볼 때, 펜데오는 후회의 외적 표현을 비롯한 슬픔의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위로를 받을것이요에서 위로는
parakalevw(3870, 파라칼레오)
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동사 파라칼레오는 파라(parav, 3844: ~곁에)와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파라칼레오는 '~로 부르다'를 의미한다(Xenopho.등). 사람을 불러 들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초대하는 것, 불러 모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b) 파라칼레오는 '간청하다'를 의미한다(Epict. Diss등). 아들이 어머니에게 자기와 화해하기를 간청하는 것, 신들에 대한 기원으로, 어떤 일에 대해 신께 간청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요구할 때 그 요구는 제안이다. 이 경우에 요구하는 것은 권고에 가깝다.
(c) 파라칼레오는 '권고(면)하다, 격려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어떤 계획을 위하여, 예를 들면 복수의 계획을 위하여 설득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를 의미한다. 슬픔의 때에 친절한 격려에서 위로로 나아간다
3.온유한자 :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인정) 많은.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 사정 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파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상은 단어적인 일반적 뜻 이지만 이 온유란 단어는 좀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
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
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
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
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
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
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
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
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
(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
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구별되는 장소(6:10;9:6), 지
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
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
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
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
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
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
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4.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 의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 를 말합니다
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의로움, 의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올바름':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 마치 공로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믿음은 사람에게 의로 간주된다, 즉 의는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접근된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
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
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
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
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
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
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
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
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
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
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
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
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
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
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 긍휼이 여기는 자 : 긍휼 여기서는 내가 하나님의 의를 알고 누릴때 다른이들도 이것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는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수 있지요
ejlehvmwn(1655, 엘레에몬)
자비로운, 동정적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Homer 이래)은 엘레에오(ejleevw, 1653: 불쌍히 여기다, 자비나 동정을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이 있는, 자비로운'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히브리어 한눈(2587: 호의적인, 자비로움)의 역어로 '자비로운'이나 '은혜로운'(출 22:26; 대하 30:9; 느 9:17; 시 111:4)을, 헤셋(2617a: 선함, 친절, 경건, 긍휼)의 역어로 '인자한'(잠 11:17; 잠 20:6)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히 2:17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그의 '자비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b)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
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
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
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
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
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
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
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
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6.마음이 청결한자 : 당연히 스스로의 깨끗함을 말하는것이 아니겠지요? 심히부패한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보고 산자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복은 무엇일까요?
kaqarov"(2513, 카다로스)
깨끗한 clean, 순결한 pur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다로스(Homer 이래)는 어원이 불분명하다.
(a)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본래 뤼파로스(rJuparov", 4508: 불결한, 더러운)에 반대되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끗한'(예: 맑고 깨끗한 물, Eur. Hippolytus).
(b) 플레레스(plhvrh", 4134: 가득찬)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이에 끼인 것 없이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에서 '깨끗한'.
(c) 아카다르토스(ajkavqarto", 169: 불결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적으로 깨끗한'.
(d) 종교적인 의미의 '도덕적으로 순결한'을 의미한다.
* 헬라어에는 '순결, 정결'을 의미하는 두 개의 형용사, 즉 하그노스(aJgnov", 53)와 카다로스(kaqarov", 2513)가 있다. 하그노스는 본래 '거룩한'을 의미하는 어떤 어근과 관계가 있는 말로 신이나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사물이나 사람(제사 물건이나 제사 직원)에게 속해 있는 질적인 '거룩함'이나 '순결함'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는 카다로스와 이 단어의 동족어들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제의적, 육체적 혹은 도덕적 청결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어근으로부터 나온 단어들이 특히 제한되어 대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카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16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가장 많이 타오르(의식적으로 '깨끗한, 순결한')를 번역한다. 그리고 카다로스는 나키(순결한, 결백한, 욥 4:7), 자카크(밝다, 순결하다, 결백하다, 욥15:15)를 번역한다.
(b) 구약성경. 출산이나 죽음과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레 12장; 민 19:11)은 부정을 가져오는 적극적인 힘이다. 이방 제의와 관련된 것이나 여호와께 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이다. 어떤 동물들은 의식적으로 부적당한 것으로 간주된다(참조: 레 11장; 신 14:7이하). 물론 위생학이 어떤 역할을 한다(레 11:29 - 레 11:30).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에 강조점이 주어지므로 정결의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발달한다. 씻음, 희생 제사 등에 의한 정결 의식은 잃어버린 정결을 회복시켜주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출 19:10; 민 8:15). 하나님의 거룩함은 도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의적 정결은 도덕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제의적 개념들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순전히 제의적인 개념들을 응징할 정도로까지 정결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한다.
(c) 후기 유대교에서 일부 집단들은 이와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헬레니즘 유대교(참조: Philo)는 고대의 제의적 개념을 강력하게 영적화 한다. 정결에 대한 제의 규칙들은 지지된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들의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상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 순결이다(F.Hauck)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카다로스는 물리적 정결을 나타낸다. 이 의미는 전통적 견해를 따르는 구절들에 나타난다. 즉 물리적으로 정결한 것은,
① 히 10:22에서 제의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② 마 23:26에서 의식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③ 마 27:59에서 일반적인 존경의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④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술들은 유대교와 매우 밀접하다(계 21:18; 계 21:23; 계 15:6; 계 19:8; 계 19:14). 정결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하며,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없다(참조: 계 21:27).
(b) 카다로스는 제의적 정결과 깨끗함을 나타낸다.
① 롬 14:20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에서 음식을 금하는 것에 대한 논쟁에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으로 만물의 종교적 정결을 주장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②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바울이 그의 통찰력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규정을 세운 목회 서신에서 만물이 창조로 깨끗하다는 원리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자들,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그들의 전 삶을 영위하는 구원 공동체의 회중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그들의 내적 존재가 더러워져 있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도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순결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사물에 따른 부정이나 순수하게 제의적 부정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덕적 영적 정결의 개념이 그러한 개념을 초월하며 대신한다.
(c) 카다로스는 도덕적 순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눅 11:41(참조: 마 23:25이하)에서 예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찾는 의식적이나 제의적 정결은, 그것이 오직 외적인 것들에만 고려한 것이므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순결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 약 1:27에서 순수한 신앙심은 실천적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③ 벧전 1:22의 일반적 권고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영혼을 깨끗게 하고 순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을 할 것을 요구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목회서신은 딤전 1:5; 딤후 2:22에서 순결한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딤전 3:9; 딤후 1:3에서 선한 양심에 대하여 말한다. 즉 과거의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하는 신자들의 내적 생명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돌아온 순전함과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양심의 내적 통일을 표현한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20:26).
⑤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다. 요 15:3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깨끗해진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러한 깨끗함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참조: 요 17:14이하).
요 13:10이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세례(침례)를 가리키는 상징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용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나타내는 본보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
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
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
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
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
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
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
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
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
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7.화평케 하는자 : 화평은 평안을 전하는자는 아들이라 칭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평안합니다 화평케합니다
eijrhnopoiov"(1518, 에이레노포이오스)
화평케 하는 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노포이오스(Xen., Hell.)는 에이레네(eijrhvnh, 1515: 평화)와 포이에오(poievw, 4160: 만들다,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화해시키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를 의미한다.
랍비들은 화해를 사랑하는 일을 칭찬하며, 필로는 하나님을 화평케하는 자로 부른다. 그러나 또한 에이레노포이오스는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강력한 통치자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노포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마 5:9에 한번 나온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는 일반적인 안녕이나 하나님과 평화가 아니고 인간의 화합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에게 복이 선언된다. 하나님은 저들이 자기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을 자녀라고 부른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Foerster).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
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
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
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
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
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
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
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
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여기서 의 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짜 의 를 말하며 그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것을 말합니다
diwvkw(1377, 디오코)
뒤쫓다 run after, 추구하다 pursue, 박해하다 persecut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디오코(Homer 이래)는 디오(divw: 도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재촉하다'라는 의미에서 ① '빨리 움직이게 하다(탈 것, 마차), 여행하다, 타고가다, 저어가다'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서두르다, 급히가다', ② '박해하다, 쫓아내다, 고소하다'
(b) '열심히 따르다'라는 의미에서 ① '어떤 사람을 뒤쫓다, 추적하다', 자신을 어떤 자에게 '소속시키다', ② 비유적으로 주의나 대의를 '열심히 추구하다' 또는 '장려하다',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다, 얻으려고 애쓰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디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11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 단어들을 번역하지만 주로 히브리어 라다프(추적하다)를 번역한다. 이 단어는 본래 적군에 의해(출 15:9), 또는 적의를 가진 사람에 의해(창 31:23) 추격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서 70인역본에서는 관계, 즉 예를 들면 사회정의(신 16:20), 평화(시 34:14),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라는 뜻에서의 정의 등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박해하다'라는 의미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디오코는 신약성경에서 4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디오코는 눅 17:23에서 '서두르거나 급히 가다'를 나타낸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빌 3:12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b) 디오코는 가장 보편적으로 종교적 의미, '박해하다, 쫓아내다'를 나타낸다.
① 특히 하나님의 사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2에 의하면 이미 선지자들이 경험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행 7:52에서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한다.
②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16).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역시 핍박을 받는다(마 10:23; 마 23:34). 이 관계는 요 15:20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한 때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은(고전 15:9; 갈 1:13, 갈 1:23; 빌 3:6) 영광의 주님이 그를 주님의 사자로 만든 후 그 자신이 박해를 겪었다(갈 5:11). 딤후 3:12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항상 박해가 관련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③ 박해는 시험이다. 박해를 피하는 것은 전하는 말씀을 타락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갈6:12). 기독교 신자들은 핍박을 받는 동안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데 특히 도전을 받는다. 그들은 축복의 말로 박해자의 증오를 맞아야 했다(롬 12:14; 마 5:44).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특히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도움과 힘과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고후 4:7이하). 바울은 핍박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핍박을 감당함으로써 사도의 본보기를 보였다(고전 4:12).
눅 21:12; 갈 5:11; 딤후 3:12에서 박해는 시험(test)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③ 그러므로 박해는 특권이다. 박해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편에 있다는 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10이하).
(c) 디오코는 고전 헬라어의 마지막 의미 '추구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롬 9:30-롬 9:31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의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친절한 대접(롬 12:13), 상호 간의 평화(롬 14:19; 벧전 3:11; 히 12:14), 거룩함, 사랑(고전 14:1), 선을 행하는 것(살전 5:15), 의(딤전 6:11; 딤후 2:22)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다.
(참조: J.H.Thayer; A.Oepke; G.Ebel).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
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
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
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
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
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
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이상 팔복의 사전전 의미와 주석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뜻들입니다 잘 읽어 보시고 성령의 가르쳐 주심을 구하며 묵상해 보세요 팔복이 진짜 복입니다 그 복을 지금 누리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가볍게 여기셔서는 안되지요 천국에서 천국으로 끝나는 이 복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을때 천국을 얻게 됩니다 팔복은 1-8까지의 과정이며 단계입니다 내 자신이 어디만큼 와 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천국... 천국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얻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안에서 변질된 복음으로 인해 복을 잘못 이해 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금요모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참 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계22: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22:14]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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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