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후기에서 좀 빠질려고 눈치를 보는데 귀신 같은(?) 우리B반 회장님과 총무님이 막걸리 한사발 주고는
윽박질러서 후기라고 한 번 써 봅니다.^*^
이미 성실하신 분들이 후기글을 몇 편을 올려 놓으셨네요.
그저 참고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
세세한 답사 후기는 제가 아니라도 많이 쓰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이번 답사에 귀에 들어온 두 가지에
대해서만 한번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처음 우리가 집합한 동래향교의 반화루(攀化樓)입니다.
1. 반화루(攀化樓)
반화루는 이제 교재나 교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알고 있습니다.
이때, 반(攀)은 ‘붙잡고 오른다’는 뜻이다.
용은 임금을 말하니 뜻은 통하겠다.
이 말은 반룡부봉(攀龍附鳳)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출전은 한서(漢書) 권100전(傳) 제70서전(敍傳)이다.
그럼 옛날 중국의 역사 속으로 가본다.
[이야기1]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비천한 출신으로 본시 진(秦)나라 패현(沛縣)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었는데,
진승과 오광이 봉기를 일으키자, 유방은 번쾌(樊쾌), 소하(蕭何), 하후영(夏侯영) 등과 사람들을 모아 패현의 현령을 죽이고
진승의 봉기에 호응하였다. 훗날 이들은 한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번쾌는 원래 개를 잡아 개고기를 파는 백정이었는데, 유방의 처제 여수(呂須)를 아내로 맞아들여 유방과 인척이 되었다.
유방이 황제가 되자, 번쾌는 황제의 인척으로서 무양후(舞陽侯)에 봉하였다.
하후영은 본시 관아의 마부였는데, 그는 명을 받들어 사람을 보내기 위해 사수(泗水)를 지나다니다, 종종 마차를 세워놓고
유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가 매우 가까웠다.
유방이 봉기하자, 휴양(휴陽) 사람 관영(灌 嬰)이 귀순하여 왔다. 관영은 원래 작은 장사꾼이었는데, 유방을 따라 다니다가
그의 심복이 되었다. 유방이 나라를 세우자, 하후영은 여음후(汝陰侯)에 봉하여졌고, 관영은 영양후(穎陽侯)에 봉하여졌다.
훗날, 유방이 서쪽 함양(咸陽)으로 진출하자, 진류(陳留)의 하급 관리 역이기(酈食其)는 유방에게 진류지방을 차지할 계책을
제공하여 많은 병력과 군량을 보충하게 하고, 자신의 동생 역상(력商)을 유방에게 천거하였다. 역상이 유방에게 4천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오자, 유방은 그를 부장(副將)으로 임명하였으며, 역상은 많은 공로를 세웠다. 유방이 황제에 오르자,
역상은 곡주후(曲周侯)에 봉하여졌다.
한서(漢書)의 저자는 열전 제11에서 번쾌, 하후영, 관영, 역상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번쾌 등 네 사람은 모두 비천한 출신이었는데, 유방과 관계를 맺어, 마치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를 붙잡고 오르듯이 제후에
봉하여졌다(반룡부봉 병승천구. 攀龍附鳳, 幷乘天衢).”
[이야기2]
후한의 광무제가 아직 즉위하기 전, 제장은 빨리 즉위하여 제호를 일컫기를 원했으나 승낙하지 않고 있을 때, 경순이 앞으로
나와 즉위를 권하며 말하였다.
“제장들이 가족과 영토를 버리고 싸우기 위하여 대왕을 따른 것은 ‘그 계획이 대왕이라는 영웅을 따라 큰 공을 세워서 뜻을
이루려는 강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其計固望其攀龍鱗 附鳳翼 以成其所誌耳)
이미 공이 이루어진 지금, 천자(天子)로 즉위하지 않는다면 제장은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는 대왕을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3]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를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제갈량(諸葛亮)은 한중(漢中)의 넓은 지역과 촉(蜀)을 점유한
유비(劉備)에게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건의한다.
유비(劉備)는 충신이라 자신은 한(漢)의 신하인데 어찌 반역을 할 수 있는가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시국은 온 천하가 붕괴되어 각 제후(諸侯)들이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재덕(才德)을 겸비한 많은 인재들이 죽음도 불사하고 주군을 섬기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용을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듯이(攀龍附鳳) 군왕에 의지하여 공명을 세우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주군께서 계속 사양하시면 모든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요, 그들은 떠날 것입니다."
결국 유비(劉備)는 건안 24년 7월 한중왕(漢中王)에 즉위했다.
[유사어 계견승천(鷄犬昇天)에 대하여]
계견승천(鷄犬昇天)의 이야기는 신선전(神仙傳) 회남왕편(淮南王篇 卷5)에 실려 있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은 팔공(八公)이라는 신선으로 부터 불로장생의 선단(仙丹)을 제조하는 기술을 전수 받았다.
고생 끝에 기술을 연마하여 그는 곧 대낮에 승천하게 되였으며 골육지친(骨肉之親) 300여명도 함께 승천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기르던 개와 닭들도 약 그릇에 묻은 약 그릇을 핥아 먹어 역시 함께 날아올라 갔다.(鷄犬지藥器者 亦同飛去)
중천에서 "꼬끼오"하는 소리와 "멍멍멍"개 짖는 소리로 한참 동안이나 어지럽게 들려 왔다고 한다. 한 사람이 출세하게 되면
그에 딸린 사람들도 뒤 따라서 그의 덕을 보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一人得道 鷄犬昇天)
[검색인용, 일부편집]
두 번째는 충렬사 위패의 공신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충렬사에 모셔진 위패의 좌측에 ‘병조판서 정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분이 송강 정철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해서 필자도 궁금해서 조사해봤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다른 분입니다.
위패에 모셔진 분은 丁哲이니 한자가 송강 鄭澈과 다릅니다.
두 사람의 임진왜란 때의 활약을 살펴보겠습니다.
2. 임진왜란 때의 정철(丁哲)과 정철(鄭澈)
정철(丁哲, ?∼1595)
본관은 창원. 자는 사명(士明), 호는 청은(靑隱). 성균관사성 정득우(丁得雨)의 7세손으로, 조부는 월천공 정계생(丁戒生)
이고, 아버지는 통사랑 정순원(丁舜元)이다. 임진왜란 당시 함께 참여했던 정린(丁麟)은 아우요, 정춘(丁春)은 종제(從弟),
정대수(丁大水)는 종질(從姪)이다.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하였다. 수문장으로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은 즉시 정린·정춘·정대수 등과 만금(萬金)의 재산을 내놓아 의병을 모집하여 좌수영에 투탁하므로 이순신(李舜臣)은 “공의 일문에 의사가 어찌 그렇게 많은가!”
하며 삼군에 자랑하고 쾌거를 격려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진격에 참가하여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정운(鄭運), 송희립
(松希立) 등과 함께 자주 전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순천부사 김언공(金彦恭)과 함께 진주 제석당산성(帝釋堂山城)에 주둔하여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초계군수에 제수되었다. 1595년(선조 28) 부산전투에 출전했다가 적탄에 맞아 동생 정린,
조카 정언신과 같은 날 순절하였다. 이러한 사실(史實)이 『공신록(功臣錄)』, 『창의록(倡義錄)』, 『삼강록(三綱錄)』
등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훈일등공신(宣武原從勳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1847년(헌종 13) 가곡에 사충사(四忠祠)를 세워 향사하였다.
1862년(철종 13)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1866년(고종 3) 병조판서의 증직과 함께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으로 사충사를 이설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주향으로 하고, 정씨사충을 병사(倂祀)하여 오충사를
건립하고 추모하고 있다.
반면 동명이인(同名異人)이고 가사 문학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의 임진왜란 때의 활동사항을 비교해보자
송강 정철(鄭澈, 1536 ~ 1594)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은 평양에서 선조를 맞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왕명을 받고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가 되어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쪽으로 내려갔다.
1593년 체찰사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전라감사 권율(權慄)의 모함으로 북쪽의 조정으로 복귀한 뒤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
왔다.
그러나 귀국 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뜻이 없는 것처럼 거짓 보고된 동인의 모함을 받자 사직을 청하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으로 물러나 우거하다가, 1594년 12월 18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검색인용, 일부편집]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발발 후 2년 째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온 것 외에는 기여한바가 없었다는 얘기다.
정철이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대한 욕구 불만적 출세욕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욕망 때문에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주관하는 등 당파싸움에 중앙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역사적, 인간적
측면에서 존중할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문학적 측면에서 작품성을 후세에 칭송받을지 모르지만 내용은 단순히 임금에게 구애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문학적 자질을 아부하는데 사용했다고 할까.(필자 견해)
이율곡도 정철의 처신이 심히 불편해서 이렇게 한마디 했다.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상한 송강은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지극히 다혈질적 인물이었다.
그가 술을 좋아 해서 쓴 장진주사(將進酒辭)를 필자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오늘은 문학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의 기여도를 얘기하는 것인데 동명이인인 정철(丁哲)보다 별로 기여한바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해서 장진주사 정도는 안 되지만 졸작으로 한 성질 하는 그를 위로하고자 한다.
친구 만들기
청현/서태일
처음 만나
술 석 잔 부어 주고는
친구 하자 하네
한잔
한잔
마셔보세
소주든 막걸리든
도연명陶淵明
이태백李太伯
되어보세
시인이든 술고래든
백설白雪 같은
흰 머리카락
많아진 지 오래인데
하룻밤
새벽이슬쯤
무슨 상관이 있으랴.
[맺 음]
답사에 교수님 그리고 각반 회장님, 총무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상은 몇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더 아름다워집니다.
같은 향기를 맡으며 어울릴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노고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2014.4.14.
淸顯 書
[참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습니까?]
[이 음악은 제 조카가 작곡한 곡입니다~ㅎ/가수: 일랍]
첫댓글 서태일 선생님이 답사지의 세부적인 내용을 보충해 주시니 부경문해 9기들은 복도 많습니다.ㅎㅎ
저도 송강의 문장력은 감탄하지만 정치인으로선 별로....
^*^감사합니다. 교수님!!~~
역시 우리 서태일선생님의 담대하시고 호탕하신 성격에 어울리시는 아주 시원시원합니다.(윽박질기를 참 잘했슴다.ㅎㅎ)
그렇잖아도 반룡부봉(攀龍附鳳)과 계견승천(鷄犬昇天), 충렬사에 모셔진 정철이라는 분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소상히 알게되서 감사드립니다. 얼마전에 극락암에서 저희 통도사포교사회의 회장님이 읽어주신 도연명의 몸이 그림자에게(形影神)라는 한시가 떠오르네요. 역시 9기의 서태일선생님 참 멋지십니다.감사합니다..^^
^*^이제 다름 답사할때 후기 쓸 분이나 고루시지요~~
태일선생님 ~~ 특공대 출신이라고 하셨나요 ? 참으로 든든합니다 ^^
9기 님들 복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과 함께 공부하게 되어서요 ^^
하루 15번웃으라고 했는데 태일 선생님의 글 읽어면서 세번이나 웃었습니다.
후기 꼭 올리시라고 윽박 지르길 참 ~~ 잘했네요 ^^
덕분에 행복합니다 ^^
^*^우리 총무님 부탁을 내가 안들어 줄수가 없질 않습니까?
그리 수고가 많으신데.....ㅎ
옴마야.. 우째 이리도 소상히 글을 잘 쓰시나요. 너무 어려워서(?) 전 공부 못합니다.
반룡부봉 -- 옛날이나 지금이나 줄 잘서고 빽이 있어야 출세하는 세상..
한나라 고조 유방(본명이 유계로 알고 있는데 야도 요새말로 놈팽이고 그 밑의 동생들
백정, 마부,잡상인 그 당시엔 미천한 신분의 패거리들.. 천운인가?
아니면 귀족출신 항우가 바보이거나 한신이 바보 멍충이..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진승의 반란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황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느냐고~ㅎ
이것은 천제의 사상에서 인간의 사상으로!
인간의 사상중에서 지배와 피지배는 바뀔수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태일선생님 ~~ 조카 작품 음악 들을려고 해도 뭐가 잘 안 되요
휴대폰에 담아 오실수 있나요?
^*^그냥 "일랍"이라고 치면 뮤직비디오 등 음악관련 자료가 나옵니다~~
내려받기는 '엠넷'에서 가능할듯~~
그리고 쳥현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
ㅎㅎㅎ뭐가 그리 궁금한게 많습니까?
청현(淸顯)은 제가 존경하는 스님에게서 법명으로 받은 것인데
호(號)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으로 조선시대 청백리를 일컫든 말이기도합니다...ㅎ~
감탄 ...전문가 수준이시네요. 복습 잘했습니다.
^*^부끄럽구로~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막걸리 한잔이면 이런 멋진 답사기 볼 수 있나요??? ^^
ㅎㅎㅎ절주하려는데 자꾸 유혹하시오면~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 정철하면 송강보단 우리 충신 정철을 먼저 기억해야겠군요^^
앗!! 젊은피다!~ㅎ
역사의 인물에 우린 잘못알고 있는게 많지요.
처칠은 인도 국민 2백만명을 굶겨 죽였는데 그를 위인이라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