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관한 시모음 38)
12월은 /하영순
나에게
칭찬하는 사람 거리를 두고
항상
회초리든 사람을 가까이 하면
매사 형통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
쓴맛 보다
단맛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
더러는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쑤세 뭉치 같은 세상
가만 두어도
또 한해는 간다.
세월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이 이름지어
세월이 간다고 하니
나도 따라 갈 수밖에
십이월 /유홍준
싸구려 커튼을 치고 책상을 앉힌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이 가난한 방에서 나는 입술을 닫는다
사철나무 꼭대기에 새 몇 마리 날아와 앉았다 간다
너희에겐 명상이 없다 심사숙고가 없다
오래 입 닫고 있지 못하는 새여 오래 날개 붙이고 있지 못하는 새여 움직임만이 살아 있음의 증거, 그러나 이 가난한 방에서 나는 입술을 닫는다
무엇인가를 쓴다
무엇인가를 읽는다
어떤 문장 밑에 밑줄을 그으면 그 밑줄, 오랏줄이 된다
막막한 지평선이 된다
커튼을 밀치고 길게 멀리 사라지는 해나 바라본다
머리통이 작은 낙타와 대상(隊商) 몇 사람, 쓸쓸하다
헛것으로 보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살얼음이 낀다
이 가난한 방에서 나는 입술을 닫는다
12월의 짐 /이원문
남은 한 달
12월의 첫날인가
이 마지막날 잃으면
어느 길이 놓여질까
내린다 하면서
못 내리고 있는 짐
버린다 그 몇번
못 버리고 안은 짐
이 모두 내 것이 아닐진데
몇 년을 더 짊어질까
끝 보이는 눈 앞의 길
해 기울어 석양인데
12월의 시 /장수남
겨울바다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넌. 겨울새 되어 하늘높이
날아가고 싶었을까.
첫눈내리는 오후
하얀 정원 눈꽃 속에. 핀
등대지기 젖은 눈동자
파도는 포옹하고 싶다.
해묵은 시간들의
추억은 아름다웠다.
잿빛그림자. 기적 울리면
십이월의 종착역.
겨울 섬 하나
초승달 은빛 살. 내려놓고
절름발이 남은 시간
십이월은 견인되었을까.
12월이 왔다 /소천 염규식
한 해의 끝에 서 있다
나에게는 숨어 있는 어둠이 다가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달력이 죽고 나자 한 장의 달력
쌓아온 한 해의 나의 영혼의 쓰레기
낙엽처럼 날리리라.
휴식조차 없는 삶 속에서
겨울날 저무는 둑길을 거니는 처량함
왔다. 12월이
누군가 앉았던 벤치 한 구석
그리고 외로움 하나
얼마나 더 오랫동안 12월을 만날 수가 있을까
그래도 사계 중의 하나이니 싫어도 만나야겠지
12월의 이 겨울엔
나의 의식의 빈 공간에 쌓인 회한
흰 눈이 내려 덮어주기를 바란다.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아쉬움도
조금은 이 겨울에는 쉬어가면 좋겠다.
12월 /은파 오애숙
그리움의 물결 저만치 가고 있어
그저 흘려 보내려니 자꾸 아쉽네요
아이들은 자라나 어른 되는 빙점 앞에
숙연해 지고 있어 반성의 깃발 올리나
내 년 이맘 땐 사뭇 다르겠다는 결론에
이 팬데믹 잘 이겨 보려는 심연입니다
이 아침 조용히 인생순리 그 이치 따라
모닝커피 향기 속에 나를 내려 놓고서
안개와 같은 이 터널 사랑으로 녹여내
고지 향하기 위해 신탁의 미래 봅니다
그리움의 물결 저만치 가고 있기에
아쉬움 간직하며 12월의 창 엽니다
2021년 12월의 문턱에서 /성백군
한 장밖에 안 남은
달력, 이리 뒤적 저리 뒤적
2021년을 되돌아보다가
산행을 결심했습니다
산마루에 올라 뒤를 돌아보는데
나를 따라온 길은 벌써 치매에 걸린 걸까
마디마다 굽이굽이 그리움처럼 아스라하고
옆은 바람, 낯선
왼쪽 오른쪽 뺨이 아직 시린데
앞은 절벽입니다
가든 길이 끊겼다네요
그래도
해는 지고 날은 저물어
골짜기에는 어둠이 무저갱 인양 깔리는데
코로나 19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은
세상을 먹겠다고 신이 나서 펄펄 뜁니다
반딧불처럼 반짝입니다
손 내밀어
잡아 보아도 잡히지 않고
마음 열어 담아 보려 해도 담기지 않으니
이제는 이 짐 다 내려놓으렵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2021년을 가볍게 넘기는 은혜를 입고자 합니다
12월 끝자락에서 /윤보영
12월 끝자락입니다.
올해 마지막 달이 되었다고
인사 나누며 반갑게 맞이했는데
송년모임과 한 해 마무리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솔직히
12월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앞으로만 걷고 있는 12월처럼
우리 일상도, 막힘없이
앞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12월이
세월 속으로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한 해가 다가서듯
한 살이 많아지면
더 성숙된 나를 만나게 되겠지요.
성숙된 내가 올해처럼
웃으며 12월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남은 시간
아름다운 마음으로 채우겠습니다.
12월 눈이 내리는 날 /안희선
알고 있나요
아니, 기억하고 있나요
약속한 사랑을 만나러 갔던 길을
유난히 추웠던 날에 하얗게 내리던 눈을
그대 이외에는 모든 게 멈춘 듯한 시간을
아름다운 빛만 하얗게 꽃 피우던 날을
저 하얀 눈도 언젠가는 녹아지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란 잠시 뿐이라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미련 곰탱이 같은 가슴도 있어서
하늘 내리는 눈송이마다 하얀 그리움으로
아직도 그대를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단 것을
내 안에 하얀빛으로 고요하게 남은 그대여,
나를 잊은 빈 마음이라도 좋으니 오세요
아니면, 그대의 하얀 그림자라도 보여주세요
저 하얗게 내리는 눈처럼
12월, 그대에게 /이영균
나는 아직 그대를 못 보냅니다
흰 눈이 무릎을 덮는데 어찌 가렵니까
눈길에 절름거리며 사라지면
힁한 계절
나만 홀로 남겨지려니
서러워서 그대 못 보냅니다
옥빛 하늘아래 위풍당당하던 그대
그 화려했던 순간들 다 시들어
한잎 두잎 낙엽이 되었구려
천하의 절경과 풍요 다 무너져
간 곳이 없이
저렇듯 눈밭에 벌거숭이로 섰구려
곤하였던 길 하얗게 덮으며
지난 한 해 화려함 되새길 그대
나목이려니 생각하니
서러워서 나는 그대
정녕 못 보냅니다
흰 눈이 다 녹고
남겨진 가지에 새순 움 틔울 그날까지
찬란한 봄 기약하며 나는 기다릴 테요
가려거든 저 눈 다 녹아
싸리 빗질로 길 훤히 열리거든
꽃피는 봄날에나 사뿐히 가시구려
섣달의 마음 /이원문
보내는 송년 어디쯤 갔나
그렇게 쓸쓸히 나뭇가지에 걸치더니
섣달그믐 음력에는 얹는 나이에 주눅 든다
싫어도 얹는 나이 이것이 세월인가
아니면 그 세월에 얻는 것이 인생인가
욕심에 해야 할 일 하루가 짧아지고
담어도 채워도 내일이 모자란다
돌아보면 서운한 모진 시간들
못 내린 이 무거운 짐 언제 내려놓을까
잡히는 살가죽 늘어나는 주름살
굵어진 열 손마디 무엇을 더 집으려 하나
발꿈치의 굳은 살 더 멀리 가자하고
거울 속의 흰 머리 물들여 달라 조른다
십이월 /김일영
숟가락 하나까지 다 드러낸 까치집
까치가
산동네 집들을 둥지 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걸음이 피식 꺼질 것 같은 노인이
달력 두루마리 양쪽에 끈 묶어
괴나리봇짐 지고 언덕길을 오른다
지독하게 느린 걸음까지 노인이 다녀오는 시절
마을공동제사, 상봉신청기간
흠뻑 만져보지 못한 세월의 얼굴
건망증 앓는 걸음이
시절을 짊어진 노인을 태우고
산동네 계단을 간신히 오르고 있다
까치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섣달의 비 /이원문
흉년을 알리는
섣달의 비가 될까
눈 수북히 쌓여야
겨울잠이 될 것인데
과수는 그렇고
정월 보름 지나면
논밭을 어떻게 하나
해충 또한 더 많을 것인데
논 두렁 밭 두렁
쥐불 놓기는 하는데
봄부터 가뭄 오면
그 물을 어서 끌어오지
비 내릴 때 비 오고
눈 내릴 때 눈 내려야
흉년이든 풍년이든
쌀가마니나 건질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