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동색
이형국
노부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느릿느릿하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힘겹다. 안경 낀 할머니가 반걸음쯤 앞장서서 오른손으로 영감님 왼손을 끌며 식탁 쪽으로 다가간다. 영감님은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몸을 30〬 쯤 굽어진 모습으로 한 손을 잡힌 채 따라가는지 끌려가는지 분간되지 않지만,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있다.
팔십 세를 넘은 듯한 두 분의 체구는 모두 장대하였다. 식당 배식 코너 입구에서 배식을 도와주던 종업원이 달려와 노부부에게 배식 코너 가까운 자리로 안내했다. 내가 앉은 식탁의 건너편 식탁이다. 나와 마주 보는 의자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는다. 잠시 후 식사가 준비되었는지, 노부부에게는 종업원이 식탁까지 날라드린다. 일반인은 셀프 배식이다.
두 분 모두 비빔밥인 듯하다. 배가 고팠는지, 늙어 음식 욕심이 남다르신 건지 푹푹 떠서 잘도 잡수신다. 할아버지는 등 굽어 끌려가는 걸음걸이와는 다르게 팔 동작은 장정처럼은 아니지만 곧잘 하셨고, 할머니는 수전증이 있으신지 숟가락이 물결처럼 흔들리지만, 흘리지도 않고 입 안으로 정확하게 직행하신다. 나는 김밥을 씹으면서 건너편을 주시했다. 혹시나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될까, 고개를 잠깐씩 두리번거리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일행이 일어나기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뜨면서, 노부부에게 맛있게 단단히 잡수고 가시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부모님 살아생전과 같은 모습이다. 내 어머니, 아버지도 저러했었으니까. 일행과 함께 조금 떨어진 야외 쉼터로 가서 준비해 온 커피를 나눠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 이젠 너무도 멀리 계신 분, 사진이나 머리로 그리지 않고서는 뵐 수 없는 분이다.
어머니 사진은 내 책상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성경책 맨 앞 장에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 사진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형제에게 두루 물어보았으나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내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니, 아쉬운 대로 거울에 서서 아버지의 옛 모습을 끄집어내어 본 적도 있다. 나이 오십이 넘으셔서 집에 정착한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한풀이하듯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다. 댓 발짝 앞선 아버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어머니, 지금의 나와 아내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어머니는 우리를 보면 일러바치듯이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너거 애비하고는 다시는 같이 안 다닐란다. 뭐가 그래 바쁜지 멋대가리 없이 고개만 뻣뻣이 쳐들고는 혼자 가대니 내가 어예 따라가겠노.”
우리는 예, 예 대답만 할 뿐 고개 돌려 웃기 바쁘다. 내일이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바람 쐬러 나가자며 아버지 손을 잡아끌고 계실 테니까.
식당에 가면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숟가락 내려놓으실 때까지 시중드셨다. 노래방에라도 가면 그저 아버지에게 노래시키지 않을까 봐, 너 아버지 노래 그거 ‘XX’시켜라고 채근하셨다. 둘러앉아 고스톱이라도 치는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패를 느슨하게 들고 치기 쉬운 패들을 내주고 있었다. 누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 지르지만, 얼굴은 온통 웃음으로 물들었다.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부부라는 정이 그토록 두터울 줄이야,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세월이 되니, 아내와 나도 부모님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물려받는가 보다. 일흔이 넘긴 시점에서 일흔을 넘기신 부모님의 그 당시 모습을 회고해 보면서 그리움과 꿈에라도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젖은 미소를 짓게 될 줄이야.
아내와는 지금도 수시로 말다툼한다. 삐쳐서 한동안 말도 나누지 않지만, 그러는 동안 마음속에는 후회가 가득 찬다. 눈치를 보면 안다. 아내도 마찬가지의 마음이란 걸. 얼마 전 몸을 다쳤다. 몸은 다쳤지만, 나는 아내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계기가 됐다. 자기 몸도 건강치 않으면서 나를 일으키고 눕히는 걸 체험하면서 통증이 희열로 바뀌기도 했다.
젊었을 적, 우리는 미처 부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내가 그때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그날 서로 손을 잡고 끌고 끌려가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태초의 인간애와 생존을 보았다. 연상된 부모님에 대한 회상에서 느낀 부부애와 소유 본능을 느꼈다. 그렇다, 초록의 색깔은 그 노부부의 모습에서도, 부모님의 회상에서도, 내 남은 삶의 여정에서도 같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