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郢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ㆍ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ㆍ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말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논(論)에서는 말한다.
“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 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석
1 가장 뛰어난 사람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 다음은 가까이하고 기리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업신여긴다. (『노자』 17장)
2 진시황 때 국란(國亂)을 피해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들어 숨은 네 사람의 은사(隱士)를 말함. 호(皓)는 희다는 뜻으로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이렇게 일컬음.
3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파야무지론(波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세 본과 궁(宮)본에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4 요장(姚萇)의 아들 요흥(姚興)이다. 서쪽으로 여륭의 군대를 깨뜨리고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요흥은 사문 승예(僧叡)ㆍ승조(僧肇) 등 8백 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구역경전을 재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여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았다.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어서,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5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이다.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대선사(大禪師)에게 수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추천받아, 함께 중국에 왔다.
6 불야다라(弗若多羅) 삼장(三藏)이다.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는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였다.
7 담마야사(曇摩耶舍)이다.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8 『노자』 39장.
9 그러므로 도가 크나큰 어떤 것이라면 하늘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우리가 사는 지경 중에 네 가지 크나큰 어떤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로 머무른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 2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