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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서남쪽 자락 아래서
답사를 다녀온 지 열흘이 넘었네요.
참여가 저조해서 편치않은 마음을 내보이기도 하면서 간 답사였는데, 막상 떠나니 단촐한 답사는 즐겁고 평안했습니다.
이래저래 좁은 속을 내보인 것만 푸른 하늘 보기가 더 부끄러웠습니다. ^^
조촐했던 수도권 군위답사의 첫날 답사는 송림사에서 시작했습니다.
군위는 팔공산 북쪽이고 산의 서남쪽인 송림사는 칠곡군입니다. 동쪽에 영천, 남쪽에는 대구를 두고 동서로 길게 뻗은 팔공산은 그 주변이 온통 불교문화의 보고인 불국토이죠. 팔공산 양쪽에 조계종 교구 본사인 은해사와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위세를 알 수 있듯이, 산의 동서남북을 뺑 돌아가며 절집들과 국보, 보물이 즐비해서 팔공산 한 바퀴만 돌아봐도 우리 불교문화의 대략은 파악할 것 같습니다.
또한 팔공산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왕건이 견훤과 피 터지게 싸우다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나는 쓰라림을 겪었던 곳이고, 몽골의 침입 때는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팔만대장경 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동화사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지휘하고 훈련한 총본부였고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현대 들어서 6.25 때 팔공산 주변은 대구 사수를 두고 피아간에 처절하게 싸웠던 비극의 현장입니다. 그해 8월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참혹한 전투가 벌어질 때, 팔공산 북쪽은 다부동 전투, 신령 전투, 영천 전투 등은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서도 최고의 격전지였던 쓰라린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몇 년간의 해체 보수를 거쳐 말끔해진 송림사 오층전탑
우리나라에 온전한 형태의 전텁은 5기 밖에는 없습니다. 작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은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기 쉽고 해체를 할 경우, 요즘처럼 촬영, 정밀 스캔 등의 기술이 없던 예전에는 원형대로 복원이 쉽지 않았지요.
송림사 오층전탑도 여러 차례 보수 흔적이 있지만, 비교적 통일신라시대의 원형을 간직한 탑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높이가 4.5m나 되는 상륜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꽃혀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합니다.
상륜부 맨 아래에 사각의 동판 노반에는 작은 종(풍령) 4개가 달려 있고, 그 위로 금동으로 만든 복발, 앙화, 3개의 보륜, 용차 보주가 차례로 찰주에 꽂혀있습니다. 찰주는 나무를 다듬어 만들었고 겉에 동판을 씌워서 만들었습니다(상륜부는 1959년 보수 때 원형대로 모조한 것).
거북 사리함 뚜껑은 어디로?
1959년 보수 때 2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가 들어 있던 거북 모양의 사리함이 대웅전 앞에 놓여 있습니다. 뚜껑을 도난당해 지금은 새로 만든 뚜껑이 올려져 있습니다.
탑을 처음 세울 때 사리장치도 봉안했을 터이니 사리함도 통일신라 시대 유물일 텐데, 사리장치만 박물관에 가고 사리함은 이렇게 방치(?) 하다가 뚜껑을 분실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리함 뚜껑을 열면 사리장치가 들어있던 사각의 공간이 있습니다. 사리공 안으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에 덮이는 안쪽에 사각의 턱이 둘려 있습니다.
송림사 전탑 사리장치 얇은 금동판으로 장식이 화려한 사각의 집처럼 꾸몄습니다. 그 안에 녹색의 유리잔과 그 안에 역시 녹색 유리의 사리병이 들어있습니다. 보물 제325-4호로 국립대구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기성동 삼층석탑
송림사에서 멀지 않은 곳 밭 한가운데에 잘생긴 통일신라 시대의 잘생긴 모범생 같은 탑 한 기가 있습니다.
명색이 보물 제510호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진입로도 없어서 밭둑과 밭고랑 사이를 걸어가야 하네요.
법성사라는 절이 있었던 터라고 하는데 아직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탑 하나만 덩그러니 옛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이고 높이도 제법 되어서 당당한데, 파손도 별로 없어서 방금 세수하고 나온 남학생 얼굴같이 해맑은 모습입니다.
하♡트 같은 안상이 새겨진 탑
모범생 같은 기성동삼층석탑을 평범하지 않게 하는 것은 윗 기단 전체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 모양의 안상 때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는 모서리 기둥(우주 隅柱)과 받침기둥 (탱주 撑柱)이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과감하게 규범을 탈피해 커다란 안상을 각 면마다 새겨놓은 개성이 돋보입니다.
이렇게 윗 기단 면석 전체에 안상을 새긴 것은 부산 범어사 탑 말고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한티순교성지
칠곡에서 팔공산의 서쪽 자락을 넘어 군위로 넘어가는 고개인 한티에는 조선말 참혹했던 순교의 역사가 있습니다.
1800년 정조가 급서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를 앞세워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이듬해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박해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그 후로 정치 상황에 따라 강압과 온건을 반복하며, 1886년 프랑스와 수호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포교의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탄압이 심해질 때마다 신자들은 더 깊고 더 멀리 숨어들어 그들의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게 팔공산자락의 높고 깊은 산골인 한티에 모여든 신자들은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교우촌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의 참혹한 칼날을 피할 수 없었지요. 갑자기 들이닥친 관군들의 칼날에 수십 명이 한자리에서 몰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순교의 현장에서는 늘 처연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관군이 들이닥쳤을 때 피신했던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살해된 시신들과 불타버린 마을은 참혹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시신들을 그곳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현재 한티성지에는 30여 기의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습니다.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바위 벼랑. 높이 수십 미터의 바위 벼랑의 아래쪽에 석굴이 있습니다.
아래는 국도에서 바라본 석굴 모습입니다.
군위삼존석굴
팔공산 남쪽에서 군위로 가려면 전에는 팔공산 서쪽 자락의 고개인 한티를 굽이굽이 넘어야 했었습니다. 지금은 터널을 통과하면 금방 갈 수 있지만 우리는 한티를 넘었습니다.
대구의 여름장마님은 한티를 오르며 더운 여름에는 이곳에 오르면 시원해서 자주 찾았다며, '대프리카'의 여름나기 일면을 들려줍니다.
한티성지에서 한티 정상에 오르니 휴게소에 차가 가득합니다. 이곳은 팔공산 주능선의 서쪽 끝으로 여기서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팔공산 능선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가면 가산산성에 닿습니다.
휴게소에 차가 많아서 그냥 차를 돌려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길에서 팔공산 꼭대기의 군 시설들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2석굴암?
도로변에는 '제2석굴암'이란 표지판이 자주 보입니다. '군위삼존석굴'이란 공식 명칭이 분명히 있는데도 아직도 '제2석굴암'을 쓰는 걸 보면 그만큼 경주 석굴암의 존재가 대단하다는 뜻이겠지요.
산골동네 주민들이 치성이나 드리던 곳이 1962년에 학계에 보고됐고 이 해에 바로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으니, 세상에 일려진 지도 근 6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만들어진 시기도 경주 석굴암보다도 100년 가까이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제2석굴암'이란 표현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마애불 → 천연석굴(삼존석굴) → 축조석굴(경주 석굴암)
인도나 중국에서 성행했던 석굴사원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습니다. 경주 골굴암이나, 양산 미타암 등에서 볼 수 있지만, 굴의 깊이나 크기에서 그냥 자연석굴에 불상을 안치한 정도여서 석굴사원이라 하기에는 좀 약하지요.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석굴을 파는 대신 바위에 얆게 조각한 마애불이 성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동굴을 가공해서 불상을 안치한 삼존석굴은 인공 축조석굴인 경주석굴암의 선행 양식으로서, 마애불과 축조 석굴암의 중간 연결자로 미술사적인 위치가 대단히 중요한 유물입니다.
시기적으로도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경덕왕 10년(751)에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된 경주 석굴암보다는 100년 가까이 앞섭니다.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본존불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협시하고 있는 아미타여래 삼존불입니다.
본존의 항마촉지인은 우리나라 불상 중 최초로 나타난 항마촉지인이고, 좌우의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습니다. 목걸이와 팔찌를 끼고 U자형의 주름을 기린 옷차림 등 장식이 많으며, 날씬한 몸매를 비튼 삼곡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무렵 새롭게 당나라에서 도입된 양식입니다.
그런데 본존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의 '근본5인'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정각(正覺) 성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인이죠. 그런데 석가모니불이 아닌 아미타여래라니 뭘까요?
우리는 흔히 불상의 수인만으로 불상의 명칭을 결정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인 자체는 그 불상이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의 표상일 뿐, 이를 가지고 불상의 명칭을 확정하기에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아미타불의 경우에도 아미타 9품인 뿐만 아니라 선정인, 설법인 또는 항마촉지인으로도 나타내고 있지요. 그래서 아미타불과 석가여래의 조각상을 수인만으로 명칭을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지권인=비로자나불은 예외이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경우는 특정한 수인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시대별로 보면 삼국시대에는 여원·시무외인이 유행하였고(백제 서산마애삼존불의 본존을 기억해 보시면). 통일신라 8세기에는 주로 항마촉지인이, 9세기 이후 지권인이 유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더 다변화된 형태가 나타납니다. 불상의 명칭에 따라 수인의 형태가 정립된 건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생겨났고. 조선시대 불상은 항마촉지인이 가장 많습니다.
원래 모습이 궁금한 모전석탑
삼존석굴 앞의 화강암을 작게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입니다. 네모난 집 모양으로 단층으로 쌓았는데, 원래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고, 무너진 탑을 이런 모습으로 복원했을 겁니다. 탑 주변이 판석으로 덮여 있어 기단의 모습도 확인할 수 없으니 원래의 탑 모습이 더 궁금할 따름입니다.
삼존석굴 들어가는 길옆에 한옥으로 화장실을 짓고 있는데, 마침 흙벽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옥의 흙벽은 주로 대나무, 나무, 싸리나무, 수수깡 등을 엮어 골조를 만들고(위 사진), 황토와 썬 볏짚을 물에 개어서 골조 안과 바깥에서 벽을 메웁니다(아래 사진). 이를 '맞벽치기'라고 합니다.
띄워쓰기도 없는 "면서기추천맛집"이란 글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아무렴요! 도지사, 군수보다는 면서기가 동네 맛집은 더 잘 알지요~~ ^^
대율리 한밤마을
삼존석굴에서 멀지 않은 돌담마을로 알려진 한밤마을이 있습니다. 대율리라는 행정지명보다는 한밤이란 마을 이름이 정겹습니다. 원래는 '일야一夜', '대야大夜'라는 뜻의 한밤이었는데 나중에 '대율大栗'로 바뀌었다는데, 한자로는 바뀌었지만 우리말로는 한밤이기는 매한가지라 재미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높은 팔공산을 등지고 있어서 북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지형이다 보니 마을 전체가 북향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구불구불 돌담길로 이어져 있어 정겨운데 돌담 길이를 모두 합치면 4km가 넘는다고 합니다.
고려 때부터 남양홍씨에 뿌리를 둔 부림홍씨(缶林洪氏, 부림 : 대율리가 속한 면 소재지인 부계의 옛 지명)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입니다.
대율리 대청(大廳), 한밤마을의 중심에 정면 5칸이나 되는 큼직한 맞배지붕 건물에 넓은 마루가 놓여있습니다. 원래 이 일대는 절이였고 종각이 있던 자리에 조선 전기에 세웠던 건물인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인조 때 다시 지었으며, 효종 때와 숙종 때 중수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관청이나 사찰이 아니 마을 중심에 이런 널찍한 공동의 건물을 가진 마을이 부럽습니다.
남천고택
대청 옆에는 한밤마을 터줏대감 격인 남천고택이 있습니다.
원래 으리으리하던 고택은 해방 후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었고 대문채도 옮겨지면서 방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 등이 남아 있는데 주인이 잘 관리하고 계셔서 깔끔합니다.
쌍백당(雙栢堂) 사랑채 대청 상부에 적혀있는 상량문으로 보아 조선 현종 2년(1836)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사당과 잣나무 두 그루 제일 안쪽의 사당 옆에는 큰 잣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왼쪽 나무는 15년 전 태풍 매미 때 왼쪽의 큰 가지가 부러져 풍채가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당호 쌍백당(雙栢堂)이 이 나무들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주인께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채의 정면 3칸의 대청 위는 전체가 넓은 다락으로 되어있고 그래서 건물 높이도 높습니다. 보기 드문 양식 같습니다.
산수유 아래서
고택에 도착하니 주인인 홍석규 선생님이 차(茶) 선생님과 다담을 차려놓고 기다리셨습니다.
빨간 산수유 아래서 보이차와 홍차를 마시면서 마을과 고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주인장께서는 예전에는 마을에 300여 호가 살아서 늘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이제는 학교도 폐교가 되었다며 서운해하셨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등 TV프로그램 촬영이 많았다면서 관련된 에피소드도 들려주셨고, 언론에 많이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하시며, 그에 따른 어려움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마을에는 빈 집들도 보입니다.
일요일 아침 고택에서 아침을 먹고 나니 봄내님 일행이 일찍 오셨네요. 한밤마을의 아침 공기가 참 맑고 시원합니다.
숙소를 떠나려는데 평소 사진찍기를 좋아 안 하시는 아직미정님께서 어인 일로 한 장 찍자며 포즈를 취하십니다 ^^
한밤성안
한밤마을 초입의 폐교된 초등학교 앞에는 200년 넘게 자란 소나무 수백 그루가 돌담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천 평이나 되는 넓은 송림인데 풍수상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송림(裨補松林)으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송림 안에는 당산나무도 있고 돌로 세운 솟대도 있어 오래전부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장소였습니다.
아쉽게도 일정상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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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다렸습니다
유장하고 명쾌한 답사후기를
역시나
기대에 딱 맞춤으로 올려주시네요
시간을 두고 찬찬히
그 날의 감흥을 곱씹으며
감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보지 못한곳 마치 갔다온듯 합니다.
어느날 답사에서 한밤마을 고택을 지날때... 저 돌담 사이로 수호신인 구렁이 한마리 지나는것을 보았지요^^*
오랜 추억이 돋습니다.
단체사진들은 마치 가족 나들이 한듯 자연스럽고 멋집니다^^
사진이랑 설명이랑 사진속 답사배움님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해보입니다..
고즈늑한, 여유로움 딱 답사배움입니다.
열정이 넘치는 모습...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속 서기가추천하는 맛집의 저 똥광 은 뭘까요?
잘 봤습니다. 혼자서 송림사와 전탑, 남천고택을 보고 대율리 돌담을 돌고 삼존석불 갔던 기억에 참 반가운 답사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