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서부지역 지연작전(경부축선)
제 1 절 작전 개요
서부 지역 지연작전이란 6.25전재에 참가한 최초의 미 지상군인 제24사단이 경부 국도를 포함한 서부 지역 축전에서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인 제105전차사단, 제3, 제4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연시미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다.
시흥사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한 7월 4일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한미연합전선의 형성"이라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평택-안성선에 전개한 미 지상군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그 이동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분담하여 공동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7월 1일 미 최초부대가 부산에 전개한 날에 대전에서 정일권 총참모장과 미극동군 사령부 전방지휘소에 처치 준장간에 합의가 이루진 것으로 한 미간의 최초 저지선은 남한에서 가장 폭이 좁은 평택-안성-충주-울진선으로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스미스부대가 평택-안성에 전개한 7월 4일 시흥사를 제1군단 사령부로 창설하고 그 예하 혼성된 수도-제1-제2-제3-제5-제7사단을 수도-제1-제2사단의 3개 사단으로 재편성하여 육군을 1개군단, 5개사단 및 3개연대로 개편하여 구두 명령으로 하달 하였다. 즉 제3사단과 제5, 제7사단은 지휘조직이 상실되어 해체하고 그 병력으로 재편된 사단(수도, 제1.2.6.8사단과 제17연대, 제23연대, 기갑연대)과 연대에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
연합전선 형성시 국군의 책임지역에는 제6사단 제19연대가 안성 동측방 송전-죽산에, 동 사단 제7연대가 그 동쪽 무극리-동락리에, 동 사단 제2연대가 충주를 점령하고 있고 제천에는 제8사단이, 그리고 동해안 울진 부근에는 제23연대가 작전 중이었다. 하지만 부대규모가 작아 주요 접근로 위주 방어로 부대간격이 넓어 대단히 취약한 상황이었다.
반면에 인민군은 서부전선에는 제4사단이 제105전차사단(7월5일 승격)을 후속하여 공격을 선도하고 , 그 뒤를 제3사단과 제6사단이 후속하여 남진 중이었다. 중부전선에는 제2사단이 이천에서, 제15사단이 장호원에서 남진 중이었으며 충주방면으로 제12사단과 제1사단이 집중하고, 제천방면은 제 8사단이, 동해안 지역은 제5사단이 각각 남진 중이었다.
이같은 절박한 시기에 7월 5일 미 제24사단의 제34연대가 오산으로 진출한 스미스부대의 뒤를 이어 평택-안성에 전개하고 국군 제1군단의 3개 사단이 진천 -음성-증평으로 투입되어 연합전선은 어느 정도 골격을 갖추었다.
한편, 7월 7일을 기해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 되고 적의 강력한 압박전력에 차령산맥과 금강-소백산맥선에 연하여 차례로 지연전이 주로 경부축선에서 벌어진다. 이제 최소의 공간을 양보하고 최대의 시간을 획득하며, 그 동안 적에게는 최대의손실을 가하면서 아군의 전력을 신속히 회복하는 일이 당면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24사단은 7월 5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 의한 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미 제34연대에 의한 평택-천안 전투, 미 제21연대에 의한 전의-조치원 전투를 수행하였고, 그 결과 많은 인명 및 장비 피해를 입었다. 그후 7월 12일에 딘 소장은 예하 전 부대를금강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전투준비태세가 미비하여 미 제24사단은 죽미령에서 조치원에 이르기까지 잘 싸웠으나 많은 인뭔과 장비 피해를 봤다. 반면 북한군도 많은 전투력 손실을 입고 남진 속도를 일정기간 지연시켜 후속부대들이 전개하는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연작전은 인민군이 주공인 제1군단이 경부축선과 중서부 축선 및 서해안 축선으로 압박을 가하고, 제2군단이 중부 및 주동부 축선과 동해안 도로로 남진하며 압박을 가해와 축선별로 전개 되었다.
따라서 서부지역(경부축선 지연전), 중서부지역, 중동부 지역. 동해안지역 지연전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서부 지역 지연작전 상황도
적6사
적4사 적3사 적2사
수원 김량장(용인)
적15사(-)
적105전차사 적15-50연
죽미령
죽미령전투 미 스미스대대
7월 5일
오산
서정리
평택전투 미제34-1대대 미34-3대대
7월 6일 평택
성환 미24-34연 미24사=국-수도사 진천 수도사
미34-3대대 미34-1대대
천안전투 천안
7월 8일
온양
전의전투 전의 미21-1대대 음성 국 제2사
7월9~11일 미21-3대대
조치원전투 미21-1대대 청주 국1군단
7월 12일 조치원
대평리 미24-19연
공주
미24-34연
제 2 절 전반적인 작전 상황
1950년 6월 30일, 미 트루먼이 지상군 투입을 승인하자, 북한군은 미 지상군이 증강되기 전에 전쟁을 종식시키려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한편 국군은 경부국도를 축으로 서쪽은 미군이 그 동쪽은 국군이 책임을 분담하여한.미연합전선을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군의 지휘권은 맥아더 장군의 작전지휘를 받게 되며, 7월 15일 정식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지휘권을 인계히였다. 지상작전은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1.피.아의 작전상황
가. 북한군상황
북한군의 최초 목표는 제1단계로 서울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6월 30일까지 수원-원주-삼척선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날까지 한강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의 지상군 투입에 당황하게 된다.
이 시기에 김일성은 제2차 작전방침을 발표하여 국군의 방어선을 강행 도하공격으로 돌파할 것을 독려했다. 이때의 작전목표는 영등포 일대에서 국군을 포위섬멸하고, 7월 6일까지 평택-충주-삼척선을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7월 3일이 되어서야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7월 4일에 공격을 재개하여 수원을 점령하고, 계속 오산-평택 방향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곳 수원부터는 북한군 제105전차사단과 제4사단이 선두에서 공격하고, 제3사단. 제6사단은 후속하였다. 제1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ㅏ어 수원, 이천을 거쳐 오천리(이천 서남 9km)에 집결하여 추가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1군단의 제2제대였던 제15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홍천지역으로 투입, 7월 3일에ㅡ여주일대에서 남한강을 도하한 후 음성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북한군 제2군단은 조공 군단으로 중동부지역에서 계속 공격작전을 실시했다. 즉 제12사단은 6월 30일 홍천을 점령한 후 원주방향으로 진출하고, 제2사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을 거쳐 양수리 방향으로 기동하여 6월 29일일에 덕소 일대에서 한강을 도하 한 후 7월 2일 김량장(현 용인)까지 진출해 있었다. 북한군 제2군단의 제2제대인 제5사단(-1)은 동해안 지역에서 제3경비여단이 강릉을 점령한 후, 초월하여 삼척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나. 국군 상황
미 지상군이 투입되ㅐ기전 서부지역은 한마디로 붕괴ㅏ 직전이었고, 중동부 지역은 국군 제6, 제8사단이 비교적 조직적으로 지연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먼저 서부지역 시흥사는 예하 3개 사단이 한강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하다가, 7월 3일에 철수를 하여,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방향인 안양.군포일대에 지연진지를 편성하였고,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방향인 퍈교와 풍ㄹ덕천 일대에 대해서는 예비로 있던 제1사단이 통합지휘하여 혼성 제3사단. 제5사단의 예하 연대와 육사생도대로 지연진지를 편성하여 대비한다.
다음날인 7월 4일, 북한군이 06:00시에 전차를 앞세워 안양방면과 풍덕천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당시에 안양에 있던 수도 및 제7사단 지역을 공격한 북한군은, 군포장에 이르러 국군 제혼성2사단의 반격을 받고 주춤했으나 14:00시에 이곳을 점령하고 수원 쪽으로 남하하였다.
한편 풍덕천 부근에서 국군 제1사단은 전차 동반없이 남하하는 북한군 제3사단에 대해 기습공격으로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수원은 이날 오후 늦게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각 부대는 전선을 이탈하여 남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한편, 중동부지역에서는 국군 제6사단 단독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제6사단은 전쟁 초기에 북한군 제2, 제12사단에 큰 손실을 입히고 지연전으로 원주, 충주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7월 1일경에는 예하 제19연대가 장홍둰 일대에서 북한군 제2사단을 , 제7연대가 음성으로 이동하여 북한군 제15사단을, 제2연대가 충주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맞이하여 지연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8사단은 초기전투 후 대관령을 넘어 제천으로 이동하여 7월 1일 방어진지를 편성했으나 , 육본 명령의 혼란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다가 7월 6일 단양으로 올라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대비하게 된다.
그리고 동해안 지역에서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7월 1일 울진 지역 배치되어 북한군 제5사단 및 제766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하게 되었다.
2. 북한군 작전기도
가. 북한군의 남침계획과 김일성의 작전방침
(1) 북한군의 남침계획
북한군의 남침 기본계획은 "공격집단을 금천-구하리, 연천-철원, 화천-양구 지역에 집중하여 공격작전을 전개함으로서 2일내에 서울 부근의 구군 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고, 그 후 전과를 확대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제1단계 계획은 "서울지역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또한 서울지역 구군의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국군의 후방 3개 사단의 증워늘 차단하기 위해 인제-홍천-수원방향으로 전략적 기동을 실시하며, 작전 종심 약 90km를 5일만에 진출한다" 것이고, 제2단게는 "국군 증원 병력을 격명하고 전과를 확대하여 작전종심 약 180km를 14일 만에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제3단계는 "국군의 잔류병력을 소탕한 후 신속히 남해안으로 진출하여 주요항구를 점령하며, 작전종심 약 80km를 10여 일 만에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2) 김일성 작전방침
김일성은 그 해 9월 15일까지 5차에 걸친 작전방침을 내린 것으로 그들의 "조선전사"에 기록되어잇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부분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는 제2차와 제3차 내용을 소개한다.
제2차 작전방침은 6월 30일부터 7월6일까지의 작전에 관한 것으로, "강하천 장애를 이용하여 국군이 방어를 강화하기 전에 빨리 한강을 도하하여 영등포 일대에서 국군을 포위소멸하고 평택-충주-삼척선으로 진출하여 미군의 전투전개를 파탄시키고 다음작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제3차 작전방침은 7월 7일부터 7월 20일까지의 내용으로 "국군이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연속적인 타격을 가하여 금강과 소백산선을 유지하려는 미군의 기도를 파탄시키고 대전과 소백산 선에의 동남부에서 각개 포위소멸함으로서 남해와 대구방향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나. 평택-충주선에 대한 공격 작전기도
북한군은 김일성의 제2차 작전방침에 따라 6월30일 한가을 강행 도하하여 영등포-수원-평택 방향ㅇ를 주 공격방향으로 지향하여 7월 7일까지 평택-안성-충주-제천-영월선을 점령하고자 했다,
먼저 북한군 제1군단은 국군의 강력한 한강 방어선 저항으로 도하가 지체되다가 7월 3일에 주력부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7월 4일에 수원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오산-평택방향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북한군은 서울 점령에 늦었던 북한군 제1사단을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여 수원-이천-충주 방향으로 전환시켜 홍천-여주 방향으로 이동하여 7월 3일에는 이포, 여주일대에서 남한강을 도하한 후 무극리-동락리-음성 지역으로 진출케 한다.
다음은 북한군 제2군단의 부대 운용이다. 군단의 주공인 제12사단은 홍천을 점령한 후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며 홍천-여주-수원방향으로 진격하여 국군 주력의 퇴로 차단과 후방부대의 전방증원을 차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홍천을 점령한 후 원주에서 충주, 제천방향으로 공격방향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제2사단은 춘천에서 가평방향으로 공격하여 서울의 동측방을 점령하여 국군 병력 증원을 차단토록 하였으나, 6월 29일 덕소-양수리 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기동로를 변경하여 7월 2일에 김량장(현 용인)및 곤지암 방향으로 기동했다. 이때부너 제2사단은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또한 제2군단의 제2제대였던 제5사단(-1)은 홍천에서 원주-제천, 충주방향으로 투입하여 중앙선 및 5번 도로로 증원하는 국군 후방부대를 차단토록 하엿으나 동해안의 강릉지역으로 투입되어 삼척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다. 천안 및 차령산맥에 대한 공격기도
(1) 작전상황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안성을 점령한 후, 김일성의 제3차 작전방ㅊ림에 따라 7월 8일 공격을 개시하여 차령산맥과 금강선을 돌파하고 소백산맥에서 국군의 기본집단을 타격하여 7월 20일가지 전주-논산-대전-문경-울진을 연하는 선 또는 그 남쪽을 점령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전방침은 죽미령 및 평택에서 미 지상군과 직접 전투를 치루고 난 후에 내린 것으로 한반도에 투입된 미 지상군을 조기에 괴멸시켜 축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의 전선사령부에 나타나서 소위 전투방법을 제시하면서 "진출속도를 더욱 강화하라"는 독전명령을 내린 것으로 제3차 공격작전에 비중을 크게 둔 것으로 보인다.
1950. 7. 7일의 전선상황은 다음과 같다.
경부 국도축선에서는 105전차사단과 제4사단이 평택을 점령한 후, 천안공격을 위해 하루 동안 정비를 실시했다. 이들은 군단 주공 사단으로 계속하여 천안-조치원-대전 축선으로 운용할 게획이었다. 그리고 북한군 제2사단은 그 동족에서 구군과 접촉이 없는 가운데 중산리(진천 북쪽)까지 진출해 있엇고, 북한군 제15사단은 동락리 일대에서 국군 제6-7연대의 기습공격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장호원, 금왕 일대까지 진출해 있엇다. 그리고 북한군 제1사단은 제15사단과 합세하여 음성을 공격한 후 충주 방향으로 이동 중에 있었고, 북하ㅣㄴ군 제12사단은 국군 제6사단 및 제8사단에 저지당하면서 충주 및 제천 북족가지 진출해 있엇다. 그리고 북한군 제5사단은 동해안에서 전선사의 직접 통제를 받으며 삼척까지 진출해 있었다.
(2) 공격 작전기도 분석
북한군 제1군단을 주공으로 하여 천안-조치원-대전 축선 방향으로 신속히 공격하여 미 지상군의 방어준비 시간을 박탈하고, 제2군단 에하의 사단들도 중동부 산악지역의 각 축선을 다라 신속한공격을 독려하여 국군의 방어준비 시간을 박탈하고자 기도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투수행에서는 제2차 공격작전과 차이점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군의 공중공격 및 포병화력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대를 분산운용하고, 야간전투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야간 공격시는 일점양면전술에 의해 미군 방어진지의 측후방으로 침투하여 지휘소 및 통신소, 화력지원수단을 우선 파괴하여 방어선을 붕괴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둘째, 북한군 제6사단은 미 항공정찰을 피해 서남부지역으로 은밀히 기동시켜 이 지역을 조기에 점령하고자 하였다. 제2, 제15사단도 계속해서 청주,대전 방향으로 공격하여 한.미군의 전선을 분리하고자 기도하였다.
셋째, 미 지상군 투입에 대한 조치로 3개 경비여단을 보병사단으로 증편하고,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해안방위부대의 편성을 서둘렀다.
3. 맥아더 장군의 작전구상 및 주요조치
당시 극동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기본임무는 극동에서 위기에 부딪쳤을 경우에 일본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즉 1949년 한국에서 미 전투부대가 철수한 후, 맥아더에게는 한국방위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시 오로지 한국에 있는 미 군사고문단과 미국인을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책임만 갖고 있엇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6월 26일에 맥아더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국군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라"고 명령함으로서 6.25전쟁에 대한 책임을 안게 되었다.
가. 맥아더의 작전구상
(1) 미 극동군사령부의 정보판단
개전 초기에 극동군사령부 정보판단은 북한군이 병력은 4개 사단과 3개 경비여단으로 총 7만여 명에, 전차 70대라고 발표하엿다,. 그러나 한강선을 시찰한 직후에는 북한군 병력이 6개 사단과 3개 경비여단, 그리고 2백대에 가까운 소련제 전차라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러한 정보판단을 토대로 맥아더 장군은 미 지상군 투입을 건의 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2) 지상군 투입 건의 및 인천상륙 작전계획 수립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에 나서, 한국군의 전투력을 확인한 후 미 지상군 투입을 미 합참에 건의하였다. 이때 지상군 투입을 고려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엇다.
맥아더는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서 미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자, 주일 미군 중에 한국ㅇ에서 가장 가가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즉각 투입케 하였다,.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을 극동사령부 작전부장 라티트 소장이 주도하는 합동전략 계획 수립에서 작전계획으로 상세히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 1개 연대로 적의 남침을 최대한 북족에서 저지하고, 미 해병대 및 미 제1기병사단을 7월 22일에 인천으로 상륙시켜 부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나. 미 제24사단 투입 명령 및 한반도 전개
(1) 미 제24사단 투입 명령 하달
맥아더 장군은 미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자 ,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즉시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한다. 당시 주일 미군은 제8군 예하에 제1기병사단(칸투지방), 제7사단(혼슈 북부 및 홋카이도), 제24사단(큐슈 중북부), 제25사단(오사카 부근) 등 4개 사단 중이 있었다. 맥아더는 제24사단 사단장인 딘 소장에게 주력에 앞서 특수임무임무부대를 공수하여 북한군을 막으라고 하고, 특수임무부대는 수원에 도착시키되 그것이 불가능하면 부산에 부산으로 수송할 것을 한국에 있는 처치장군에게 일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따라 미 제24사단은 사단 선발대로서 4.2"박격포 2개 소대와 75mm 무반동총 2개 소대로 증강된 보병 2개 중대규모는 대재장이 지휘하에 즉시 공중이동하고, 1개 포대는 대대장 지휘하에 해상이동토록 하였으며, 사단 본대는 해상으로 이동토록 한다.
따라서 미 제24-21연대 제1대대를 모체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최초의 지상군부대로서 한국전에 투입하게 된다.
(2) 미 제24사단의 한반도 전개과정
딘 소장은 선발대로 제21연대 제1대대장(스미스 중령)을 지명하고 , 제52포병대대 A포대를 포함시켰다. 스미스 중령은 밤새도록 부대편성을 실시한 후, 7월 1일 03:00시에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으로 구미모또 기지를 출발하여 08:05분에 이다즈께 공항에 도착한다.
스미스부대는 이날, 7월 1일 08:45분에 C-54수송기 4대로 공항을 출발하여 부산 수영비행장 상공에 다다랐을 때에 일대가 짙은 안개로 착륙이 불가하여 복귀했다가, 다시 이날 14~15:00시경 부산 수영비행장에 착륙한다. 그리고 곧바로 20:00시에 기차로 부산역을 출발하여 7월 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한편 제52포병대대 A포대는 7월 2일 대대장 페리중령이 직접 인솔하여 하카다 항에서 승선하여 이날 저녁 부산에 도착한다. 7월 3일은 선박하역작업과 철도 적재작ㅇ덥을 실시하고, 7월 4일 평택에서 스미스부대와 합류함으로서 특수임무부대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미 제34연대도 7월 2일 밤 부산항에 도착하여, 7월 5일 오전에 평택 및 안성지역에 각각 1개 대대식 전개시켰다. 또한 미 제21연대는 7월 3일 모지와 사세보항에서 승선하여 7월 4일 아침에 해사으로 부산에 도착착, 열차로 북상하여 전의-조치원 일대에 전개 하였다. 마지막으로 쓰지도 해안에서 상륙작전 훈련을 하고 있던 제19연대도 7둴 4일 해상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로 대구로 이동하여 주한미군의 예비 임무를 수행한다. 이로써 6월 30일 밤 미 지상군 투입이 결정딘 지 4일 만에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24사단이 병력과 장비를 한반도에 도착 완료하였다,
다. 딘 소장의 작전복안 및 전투준비태세
(1) 딘 소장의 작전복안
딘 소장은 7월 3일에 일본 아시야 공군기지를 출발하여 10:30분에 대전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처치준장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은 딘 소장은 스미스 부대를 전방으로 진출시켜 적의 진출을 전바에서 지연케 하기 위해, 스미스부대가 3일에 맡았던 평택-안성의 2개 통로에는 제34연대로 교대 배치하기로 하였다.
이에따라 스미스부대는 사단의 전초부대로서 오산 북방 죽미령에 배치하고, 제34연대는 주 방어지역으로 평택-안성선에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며, 이어서 투입되는 제21연대와 제19연대는 금강선에 배치하고자 했다.
(2) 미 제24사단의 전투준비태세
사실 이 분야는 판단자의 주간적 개념이 들어갈 수 있기에 요약에서 제외할 수도 있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격언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사태가 있을 수 있기에 한국 전사책 내용대로 기록을 옮긴다.
(가) 부대 편성 및 주요 장비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군 감축이 진행되면서 해외파병 병력이 줄어들게 되엇고, 더 나아가 충분하지 못한 재정적 지원으로 군 현대화는 미뤄야 했다. 각 사단은 전시 병력인 18,900명의 66% 수준을로 평시 병력인 12,500명에도 못 미치는 , 즉 제24사단은 10,700명, 제1기병사단은 11,300명, 제7사단은 10,600명을 보유하였다.
이에 따라 각 사단의 연대는 2개 대대만을 보유하고, 인가된 전차중대는 어느 연대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단의 중형 전차부대는 M-24경전차로 무장되엇고, 또한 포병대대는 2개 포대만 보유하여 전투력 발휘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군의 소련제 T-34 신형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었다. M-24전차는 북한전차를 격파할 수 없었고, 75mm 무반동총과 2.36" 로켓발사기 등도 효과적인 대전차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나) 교육훈련
당시 일본 점령군으로서 있었던 미 제8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수년 만에 전투부대에서 식민지군으로 완전히 변해버렸다.1946년 후반에 장교와 부사관들의 가족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식민지 군의 생활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사병들의 일본 생활은 하나의 모험을로, 기지 바러 앞에는 새롭고 이상한 문화에 유혹되었고, 이곳의 일본 여자들과 살면서 그들의 유일한 적은 성병이었다.
더구나 과음은 모든 부대와 계급에서 발생하는 문제엿으며, 미 제8군은 전투부대가 아닌 교육훈련보다 점령군대로서 경찰 역활이 훨신 중요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1949년 워커 장군이 지휘를 맡고 나서는"식민지 군"이 아닌 전투부대로서 거듭나기 위해 훈련을 강화해 나가는데 훈련장도 부족하거나 없으며, 제병협동 훈련이나 실사경을 겸한 대대급의 기동과 포사격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즉 제21연대는 6.25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폽졍 실사격과 기동한 적이 없었고, 전차와 협동훈련도 경험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워커 장군은 육군 훈련시험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결과 많은 부대가 불합격하였다.
(다) 장병전투능력 및 군기
제24사단의 장병들의 전투능력은 신분별로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고급간부와 부사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자들로 전투지휘가 훌륭했지만, 초급간부는 개인별 능력이 차이가 많았다. 그리고 병사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리고 전투경험은 전혀 없었다.그들은 복무 훙의 교육과 저 이자 대출을 주요 입대동기로 삼았으며, 이 들 중에는 영창을 들라거리는 불량배도 있었다.
각 연대별 전투력을 비교해 보면 제21연대는예하 2개 대대가 육군훈련시험에 모두 합격한 반면에, 제34연대는 군인이라기 보다는 포로로 취급받을 정도로 군기가 엉망이어 결국 연대장이 해임되고 신임 러브리스 대령은 전쟁 발발 몇개월 전에 부임하였고 이 부대는 2개 대대 모두 평가에 불합격하였다.
4. 국군 총참모장의 작전 구상 및 주요조치
가. 한.미간 연합전선 형성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7월 1일, ADCOM에서 처치 장군을 만나 미 공군의 지원 강화와 국군의 재정비 그리고 장비 및 탄약의 긴급보충 문제 등을 논의 하였다. 이날은 스미스 부대가 부산으로 공중이동 중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날 협의된 내용은, 양 국군은 국군은 가능한 오랫동안 한강방어선을 유지 하고, 미 제24사단의 진출을 엄호한다는 내용과 미 제24사단이 진출한 후에는 경부국도 서쪽은 한국군이 그 동쪽은 미군이 담당하기로 하고 한.미 양군의 최초 저지선은 가장 폭이 좁은 평택-안성-충주-울진선으로 하며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면 극동구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나. 미 지상군 투입 전 국군에 의한 지연전
(1) 시흥사에 의한 오산 북방 지연전
정일권 총참모장은 처치와의 회담 결과에 따라, 7월 2일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평택에 집결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당시에 제6-19연대는 이천 부근에서 접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 제24사단 주력이 평택-안성선ㅇ에 배치될 것이고, 그 선발대는 더 북쪽으로 진출한다는통보에 따라 국군은 경부국도 서부지역은 미군에게 인계하고, 국군은 평택에서 제1군단을 창설하여 진천.음성.증평 일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7월 4일, 북한군이 다시 수원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오후 늦게 수원을 점령한 북한군이 5일 아침에는 필히 오산을 공격할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군단 창설과 사단의 개편을 동시에 진행키로 하고 우선 철수부대에 전선을 엄호하도록 군단작명(제1호. 7월 5일)를 하달 하였다.
이에 따라 제2사단은 제20연대를 발안장(오산 서쪽 15km) 부근에, 제8연대는 송전리(안성북족 15km)에 배치하여 갈곶리(오산 남쪽1.5km)에 전진 배치된 제17연대와 연계하여 적을 저지키로 하였다. 그러나 이 양개 연대는 5일 아침까지도 연계를 맺지 못했다.
(2) 국군 제17연대 평택 이동
당시 대전에 있던 육본직할 제17연대는 6월 29일 국방부로 부터 금강선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정찰 중에 있는데, 6월 30일에 총참모장으로부터 이를 변경하여 평택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제17연대는 금강선에 1개 대대를 남겨두고, 연대(-)는 7월 1일 열차편으로 대전을 출발하여 정오에 천안에 도착하였다. 천안역에서 2시간을 지체하다가 다시 북상하여 평택역에 하차하여 평택 북쪽 8km지점의 서정리로 도보 이동하여 숙영하고, 연대는 성동초등학교에 위치하였다.
다. 유군본부 임시지휘소의 평택 설치 운영
7월 4일, 수원에서 평택으로 이동을 개시한 육군본부는 차량종대가 수원-오산 간에서 아군기의 오폭으로 피해를 다소 입었으며, 목적지인 평택에 도착한다. 그리고 바로 전방제대만 남고 바로 후방제대는 대전으로 이동시켰다.
육본 작전부장 김백일 대령이 임시지휘소를 평택에 설치한 것은 사단의 개편 및 인사명령을 전달하기 위함과, 이날 스미스부대르 비롯한 미 제34연대와 포병부대가 평택에 집결하고 있기에 긴밀한 협조를 위해서 였다.
그리고 7월 5일 오후에 적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오산을 점령하고 서정리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대전으로 이동한다.
라. 국군 제1군단 창설 및 부대 재배치
육군은 7월 5일 00:01부로 제1군단을 평택에서 창설하고, 수도사단.제1사단.제2사단을 예하에 두도록 하고, 제3.제5.제7사단을 해체하였다.
육군은, 제1군단장 먼저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진천으로 이동하여 제6-19연대를 통합지휘하고, 제1사단은 음성으로 이동하여 제6-7연대를 통합지휘하고, 제2사단은 증평으로 이동하여 제1사단 및 수도사단을 지원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사단은 7월 6일 24:00시까지 목적지에 모두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때의 병력 수준을 잠시 보면 수도사단은 2,500-7,855명으로, 제1사단은 4,000-5,603명으로, 제2사단은 1,600-6,845명으로, 제17연대는 1,400명 수준이었다.
제 3 절 죽미령 전투
1. 전투 개요
죽미령 전투는 7월 5일에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스미스 중령)가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북한군 제105전차사단 및 제4사단을 상대로 실시한 전투다.
스미스부대는 미 제24사단 제21연대 1대대 B, C중대와 제52포병대대 A포대를 주축으로 편성되엇다. 이 부대는 지난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3일 평택에 도착했으나, 딘 사단장의 명령으로 다시 7월 4일 야간에 이동하여 7월 5일 03:00시에 죽미령에 도착하여 진지를 편성하였다. 포병은 1.8km 후방지역에 위치하게 되는데 바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진지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스미스부대는, 7월 5일 07:00시경 북한군 전차 8대가 수원에서 남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진전 1.8km까지 유인하여 포병 사격을 실시했으나 적 전차는 파괴할 수 없었다. 이에 75mm anqksehdchdrhk 2.36" 로켓포가 명중시켰으나 꿈적하지않았다.
이에 스미스 부대는 추진 배치된 105mm곡사포 1문이 대전차고폭탄으로 직접조준사경을 실시하여 적 전차 2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적 전차는 아랑곳 하지않고 계속 밀어붙혀 33대가 오산방향으로 내려갔다.
이어서 북한군 보병들이 3대의 전차를 선두로 진전으로 접근함에 편제화기로 사격했으나 역부족이였고, 북한군은 박격포와 야포로 참호 속의 미군들을 맹폭하고 전진하였다.
미군 스미스부대는 이 때가 14:30분 경으로 근접항공지원도 못받고 포병화력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결국 6시간 15분의 사투 끝에 죽미령에서 철수하게 된다.
2. 전투 경과
이곳 전투는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최초로 북한군과 벌인 전투로서 죽미령 일대는 지금 기념관이 세워져 그 당시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북한 전차에 밀리어 후퇴하게 되지만 미군은 사력을 다 해 싸웠고 본진이 들어올 수 잇는 시잔적 여유를 확보하게 했다. 더구나 이 전투로서 소련제 신형 탱크의 위력을 알게 되어 새로운 대전차 무기인 3.5"로케포를 개발하게 되는 중요한 전쟁 포인트점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좀더 상세히 미군의 전투장면을 기록하고, 실제 많은 시간을 이곳 죽미령 일대를 탐문 및 탐색하였고 유해발굴을 이어간 내용을 남기고자 한다.
가. 방어 준비
(1)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투입
1950. 7. 1일 공중수송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7월 2일 08:00시에 기차로 대전역에 도착하여, 대전비행장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당시 스미스부대는 병력이 406명으로 장교 17명에 사병 389명이었고, 장비는 75mm무반동총 2정, 4.2"박격포 2문, 60mm 박격포 4문, 2.36"로켓포 6문이었다.
제52포병대대 A포대는 병력 134명으로 장교 9명, 사병 125명이었으며, 105mm야포 6문에 기관총 4문, 2.36"로켓포 4문, 고폭탄 1,200발, 대전차 고폭탄 6발이었다.
(2) 방어진지 선정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부대는, 대대장 스미스가 7월 2일 지프로 오산에 달려와 죽미령을 방어지역으로 선정하고 오후 늦게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처치장군이 안성과 평택에 병력을 배치하라고 명령함으로서, 스미스부대는 7월 3일 아침에 열차편으로 이동하여 정오에 평택과 안성에 각각 1개 중대씩 배치하고 지휘소는 평택의 국도변에 위치시켰다. 처치장군의 이런 조치는 한.미작전협의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스미스 중령은 7월 4일 오전에 병력을 평택에 집결토록 하고, 포병대대장 페리 중령과 두 번째로 지형정찰에 나선다. 한편 바스장군(포병연대장)이 7월 4일 15:00시경 평택에 도착하여 스미스중령에게 "최초 처치장군에게 건의했던 오산부근의 양호한 진지를 확보하라"라는 사단장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스미스 중령은 부대대장에게 평택에서 오산가지 17km를 이날 중으로 이동할 수송 수단의 확보를 당부하고 포병대대장과 다시 방어지역에 대한 지형정찰에 나섰다.
그런데 사단장이 스미스 부대의 방어편성을ㄹ 평택, 안성진지에서 죽미령으로 변경한 것은 포병부대가 도착하고, 곧 제34연대의 도착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즉 제34연대가 주방어선인 평택-안성선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파단되었으므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전초부대로서 전방으로 추진하여 운용하겟다는 사단장의 작전복안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국도는 7월 4일 오후부터 수원족에서 남하하는 국군의 철수 대열과 피난민 떼문에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스미스부대는 병력수송을 위하여 후방으로부터 징발된 각종 민간차량의 운전사가 부족하여 사병들 중ㅇ에 운전경험자를 급히 뽑아 충당케 함으로로서 평택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스미스부대는 7월 4일 24:00시가 되어서야 평택을 출발하여 오산의 진위교를 통과한 후 차량에서 하차하여, 이곳으로부터는 도보로 걸어서 새벽 03:00시경에 죽미령진지에 도착 하였다.
이렇게 늦게 출발한 이유는 징발된 차량의 한국인 운전수들이 북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ㅇ므로 운전할 줄 아는 병사를 차출하는데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평택에서 오산의 죽미령까지 20km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를 약 3시간이 소요된 것은 도로에 남쪽으로 철수하는 국군과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스미스부대는 7월 2일 08:00시에 대전에 기차로 도착하여, 다시 7월 3일 평택-안성에 각각 1개 중대식 배치하였다가 , 7월 4일 야간에 죽미령진지로 이동하여 7월 5일 03:00시경에 도착하여 진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가운데 북한군의 공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3) 방어진지 편성
스미스 대대는 7월 5일 03:00시경에 진지에 도착하여 2개 소총중대를 좌우측의 횡격실 능선에 배치하여 1번 국도 및 철로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예비가 없이 1,700m 방어정면에 일선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7월 4일부터 내린 비와 야음으로 개인호와 화기의 엄체호 구축은 곤란하여 날기 새기를 기다려야 했다.
제52포병대대장 페리 중령은 스미스 중령과 협의하여 보병진로부터 1.8km 후방인 수청리 입구(국도 서족 150m)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대대장은 이곳에 4문의 포를 배치하고, 1문은 대전차포로 운용하기 위해 포병진지로부터 500m 전방인 90고지 하단(국도 서쪽 50m)에 두어 적의 전차를 직접 조준할 수 있도록 하였고, 1문은 평택에 남겨 두었다. 특히 문제의 대전차고폭탄은 대대가 24발을 보유했으나 A포대가 사세보 항을 출발할 때 이중 6발만을 휴대하였다.
오산-평택간에는 북으로부터 오산교를 비롯하여 갈곶, 야막,하복,진위,탄현(독곡),아곡,지제,통복교 등 대소의 교량이 있었다. 이 중에 오산교, 진위교, 통복교는 전술적 가치가 비교적 큰 교량이었다.
당시 공병학교를 통합 지휘한 국군 제1공병단(윤태일 중령)은 수원에서 마지막 철수를 드러갈 때에 공병감 최창식 대령으로부터 교량푹파준비 지시를 받고 있엇으나 폭파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 참전자들의 증언은 미군부대가 오산 북쪽으로 올라간 바로 그날(7월 4일 야간)과 다음 날 낮에 교량을 폭파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한편 바스장군과 스미스 중령은 폭파준비 중인 국군 공병을 발견하고 중단토록 요구했으나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바스장군이 술회한 바에 의하면 교량폭파 작업을 계속하여 폭약상자를 강물에 집어던진 일도 있다라고 하였다.
나. 대전차 전투
7월 5일 07:00시에 죽미령진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수원까지 볼 수 있었다. 이때 스미스중령은 적 전차 8대가 남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선두전차가 보병진지 1,800m 앞에 도달했을 때에 08:16분에 포병사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적전차는 내려왔다. 이어서 75mm 무반동총(2정)은 보병진지 630m 전방에 도달했을 때에 사격했으나 그덕도 없이 미군 진지에 오히려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2.26" 로켓포가 지근거리(15야드)에서 적 전차의 측면에 22발을 발사 했으나 효과도 없이 적 전차가 08:30분에 죽미령을 넘어섰다.
이번에는 포진지에서 추진된 대전차포 1문이 직사포로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2대의 탱크를 파괴시켰다. 이때 포탑을열고 나오던 적 병이 갑자기 따발총을 진지를 향해 난사하여 기관총 부사수가 전사하였다. 이 불의의 사격으로 전사한 기관총 부사수가 미 지상군 최초의 전사자가 되었다.
09:00시에는 33대의 전차가 모두 넘어서고, 미군 통신선이 절단되어 포병과의 연락이 안된 상태에서 무전기마자 소통이 불량하였다.
이후 포병진지 부근까지 침입한 적 선두전차가 포병진지에 사격을 하고 지나간 다음 본진이 나타나 포병들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진지를 이탈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스미스 대대장과 장교들, 그리고 부사관ㅇ들이 조준하여 사격하면서 공포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적 전차는 도로를 따라 오산쪽으로 내려가 모두 포진지를 통과하였다. 스미스부대의 대전차전은 2시간의 사격전 끝에 보병진지 뒤쪽에서 2대, 포짅지 근방에서 2대를 각각 파괴하였으며, 경과한 듯한 3대의 전차는 완속으로 그들의 주력전차를 뒤따라 갔다.
다. 보병전투
적 전차부대가 보병과 포병진지를 통과하여 남하한 다음, 전선은 잠시 고요하였다. 이때 죽미령에 미군 보병들은 적의 후속부대가 곧 침공하리라 판단하고 진지에서 대기하였다.
적의 전차가 지나간 1시간 후에 10:00시경에 117고지로부터 수원 전방에 적 전차 3대와 차량에 탑승한 보병이 접근한느데 그 길이가 수 km는 되어 보였다. 적 제4사단 예하 16 및 18연대 주력이엇다.
이들 행군종대가 11:45분에 진지전방 900m에 이르렀을 때에 사격명령이 내려지고 포탄이 작렬하여 많은 수의 북한군이 죽어갔다. 그러나 앞 선두의 탱크 3대가 진전 앞으로 다가서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도한 일부 보병이 국도 양측에 산개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사상자가 늘어나고 탄약이 소멸되어 가는데, 통신선의 두절로 포병과의 협조된 화력제공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14:00시경에 적은 보병진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일부는 후방으로 침입해 오면서 일기불순으로로 항공지원은 더욱 기대할 수 없게 되자 14:30분을 기해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그런데 유린된 것으로 알았던 포병이 그대로 진지를 버티고 있으면서 스미스부대는 포병의 가용한 차량 10대에 포병 100여 명, 보병 100여 명 등 200여 명이 분승하여, 맨 앞에는 제52포병대대 연락장교 윤승국 대위가 선도하여 16:00시에 오산을 출발 하였다.
그러나 이동로상에 북한군 전차 3대가 버티고 잇으면서 휴식중에 잇는 것이 목격되어 다시 오산쪽으로 급히 행군대열을 되돌려 안성쪽으로 갈 수 있는 동쪽의 소로를 따라 이동하여 19:00시경에 미 제34연대 제3대대가 배치된 안성에 도착하였다.
이 죽미령전투에서 스미스부대는 약 6시간 15분을 지탱함으로서 미 제34연대의 전투준비 시간 확보에 기여하였다.
3. 전투결과
가. 피.아의 전투 손실
스미스부대가 천안에 도착하여 수습된 인원은 최초 185명이었으나, 얼마 뒤에 C중대장이 65명을 인솔하여 복귀함으로서 250명이 되었으며, 피해는 모두 150명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 낙오병들은 뒤에 평택, 천안, 대전 등지로 나가거나 심지어는 동서해안으로 빠져나가기도 하였으며, 버나드 소위는 12명을 인솔하여 오산전투 2일 후인 7월 7일에 천안으로 나왔는데 도중에 5회에 걸쳐 사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페리중령의 제52포병대대도 15명의 전방관측요원등 31명의 손상을 입었고 7월 7일까지 수습된 인원은 103명이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그들이 밝힌바에 따르면 제105전차사단 문화부사단장 안동수 대좌를 비롯한 42명의 전사잗와 8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엿고, 전차 4대가 파괴되고 2대가 반파되었다고 하였다.
나. 전투 후 전황
그러나 통신구축이 되지않아 평택-안성선에 도착한 미 제34연대늕 죽미령전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7월 5일 자정이 지나 스미스부대원 4명이 성환의 미 제34엱대 지휘소에 나타나 최초로 전황을 알렸고, 때마침 도착한 페리 포병대대장의 상세한 보고로 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습된 스미스부대느 ㄴ7월 6일 대전으로 내려가 7월 9일까지 205명의 보충병과 소요장비로 재편성을 완료하고, 제52포병대대는 곡사포의 재보급을 받고 7월 14일에 대평리부근에 투입된 제19연대의 지원을 위해 다시 출동케 된다.
제 4 절 오산 갈곶리 전투
1. 전투 개요
오산갈곶리 전투는 국군 제17연대가 오산부근 갈곶리(오산과 평택사이)에서 스미스부대 방어진지를 통과한 북한군 제105전차사단 및 제4사단을 상대로 수행한 전투다. 그리고 제17연대는 미 지상군이 투입된 후에 경부국도에서 전투를 치룬 유일한 국군부대이다.
국군 제17연대는 옹진반도에서 초기전투에 철수하여 대전에 집결한 후, 상부지시로 금강선 배치명령을 받고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다 정일권 총참모장의 지시로 금강선에 1개 대대가 남고, 2개 대대는 오산일대 갈곶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당시에 수도사단 군사고문관인 라이트 대령과 스미스부대장의 요청으로, 죽미령으로 진출할 것을 제의 받았으나 계속된 이동으로 병력이 피로하여 거절하였다.
7월 5일, 스미스부대를 공격한 적 전차가 10:00시겨에 전초진지에 나타나 경기관총과 총류탄으로 사격함을로서 갈곶리 전투가 시작되엇었다.
그러나 11:00시경에 적 주력이 배치된 진지 전방에 나타나, 가용화기로 적 전차에 사격햇으나 소용이 없었고 계속하여 서정리쪼그로 남하하였다.
연대자읁 다시 적의 보병부대가 남하할 것으로 판단하고 계속하여 전방 감시중에 16:00시경 적이 무방비 상태로 접근하여, 가용화기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17:00시 경에 철수를 명하게 된다. 연대는 이날 천안으로 철수한 다음 새로운 임무를 띠고 청주로 이동하였다.
갈곶리 전투 상황도
수청말 적 105전차 국17-1-2중
은개부락
국17-1-1중
오산
17:00 적105전차
국17-3대대
국17-1대대(-2)
갈곶리 제17연 지휘소
무봉산
서정리
평택
2. 전투경과
가. 방어준비
(1) 국군 제17연대의 출동 경위
제17연대는 옹진반도에서 첡수하여 대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 29일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금강선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금강선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선정 중에 있었다. 그런데 6월 30일에 갑자기 평택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수정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제17연대장은 이날 20:00시에 국방부장관에게 가서 명령의 진위를 확인결과 새로운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의 명령이라며 그 지시대로 시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상황설명을 듣고, 1개 대대만을 금강선에 배치하고 나머지 2개 대대를 대전으로 집결시켜 7월 1일 열차로 평택을 향해 이동하였다.
제17연대는 천안에서 2시간을 지체하다가 이날 오후에 평택역에 하차하여 8km 전방의 서정리로 도보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숙영하였다. 다음날 7월 2일 탄현(숯고개) 일대에 방어진지 편성에 들어갔고, 연대지휘소는 성동초등학교에 위치하였다.
(2) 우군기에 의한 오폭사고
연대가 진지 배치에 들어가던 7월 3일 오전에 평택역에는 국군에 수송될 보급품의 하역작업이 한참 진행 중에 있었다. 즉 전방 각 사단에 공급될 탄약 20량과 일반보급품 7량, 그리고 공차 10량이 역구내에 위치하여, 우선 탄약부터 하역하여 트럭에 적재하려던 참이었다.
이날 15:00시에 오스트레일리아 공군기 4대가 나타나 이 화차에 포격하기 시작하여 적재한 포탄이 연쇄 폭발하여 삽시간에 평택역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시내의 건물과 인명에도 많은 피해를 입엇다. 이때부터 열차는 그 남쪽의 성환역까지만 운행할 수 있게 되고, 그 북쪽의 평택-서정리-오산쪽으로 올라가는 모든 인원과 장비는 성황역에서 바꾸어 수송할 수 밖에 없었다.
제17연대의 피해는 병력 200명이 사상되고 차량 30대가 파손되엇으며, 연대장 백인엽 대령도 파편상을 입고 후송케 되었다. 따라서 부연대장인 김희준 중령이 연대장 직무대리가 되어 연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오폭사고는 전선이 유동적이고 피아의 식별을 할 수 없는데다가 한국지형을 잘 모르는 항공조종사들의 과오도 한몫 했다.
이후 7월 5일부터 미 제5젅술공군은 2개의 전술항공통제반이 대전에 도착되어 지상 작전에 협조하게 되엇고, 육군본부도 긴급 훈령을 하달하여 "전부대는 7월 5일 이후부터 백색 광목천을 이용하거나 일정한 곳에 백색 페인트를 칠하여 아군부대임을 표식토록 하였다.
(3) 부대 재배치 :탄현에서 갈곶리로
제17연대는 7월 3일에 평택 북방 서정리 부근에서 진지배치 중에 육본 작명에 따라 7월 4일 다시 도보로 8km 북상하여 갈곶리(오산 남쪽 1.5km)로 전진 배치 하였다. 이 당시 지휘는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었다.(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평택역에서 아군기 오폭으로 부상하여 입원)
한편 이날 오전에 스미스 중령 일행이 지형정찰 길에 갈곶리의 연대 지휘소에 들러, 적의 전차를 저지하려면 제17연대도 죽미령일대로 전진배치해 달라고 했으나 빈번한 부대이동으로 인한 혼란과 병사들의 사기 등을 고려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이렇게 되자 스미스 중령은 "그렇다면 우리라도 오산 북쪽으로 추진할테니 뒤에서 우리 진지에 낙오탄이나 덜어지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하며 그곳을 떠났다.
연대는 7월 4일 오후에 갈곶리에 배치를 마치고 탄약재보급을 기다렷으나 전날 평택역 오폭사고로 원활하지 못했고, 이날 밤에 미군이 오산 복쪽으로 전진하고 있음을 목격한 연대자은 그들과의 협조를 위해 일부병력을 추출하여 오산 전방의 은개부락(오산북쪽 1km)에 배치하였다.
(4) 방어지역 편성
연대는 갈곶리-청호리(갈곶동쪽 1km) 부근의 낮은 구릉 일대에 제1대대를 서측으로, 제3대대를 동측으로 배치하였고, 제1대대에서 2개 중대를 차출하여 오산 북족 은개부락 일대에 전투전초로 온용하였다.
연대는 독자적으로적 전차를 방어하기 위해 1번국도를 중심으로 2.36"로켓포 여러 문을 배치하고, 제1대대 제4중대 81mm 박격포와 중기관총도 1번 도로를 담당하고 있는 제3중대에 운용토록 하였다.
나. 전초진지 전투
7월 5일 10:00시에 은개 부락에 배치된 전초진지에서는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적 전차를 목격하고 즉각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다. 이들은 미 포병진지에서 적 전차에 대하여 사격하는 것을 직접 육안으로만 화인할 수 있었다.
전초진지에 배치된 부대들의 사격에도 북한군 전차는 별다른 동요없이 계속 남하하게 되자, 전초는 바러 철수에 들어갔다.
다. 주진지 전투
이날 11:00경에 북한군의 선두전차는 제17연대 주력이 배치된 갈곶리 진지 500m 전방에 나타나자, 연대는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81mm 박격포와 2.36" 로켓포 6문도 국도 주변에 집중 배치하여 적 전차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 전차는 아군의 집중사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사격하면서 서정리 쪽으로 남하하고, 이어서 보병을 동반하지 않은 20여 대의 전차가 후속하였다.
연대는 다시 적의 보병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계속 전방을 주시하였는데, 적의 보병들이16:00시경에 아무 경계 대책도 없이 유유히 아군진지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이미 탄약은 고갈 상태에 이르고 있어 더이상 버틸 전투력이 없었다. 이에 연대장은 철수를 결심하고 17:00시에 안성 평택을 경유하여 천안에 집결토록 하여, 각 대대는 분산 철수하였다.
3. 전투결과
제17연대는 이미 평택역에서 아군기 오폭으로 200여 명이 사상되었다. 여기에 탄약이 제한되고 대전차무기는 효과가 없었다. 더욱이 미군이 철수하는 과정에 협조된 상황이 전혀없이 물로나게 되어 사실상 제17연대도 무력하게 물러나야 했다.
전투 후 제17연대(-)는 7월 6일에 천안에 집결, 7일에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조치원을 경유하여 진천으로 이동하고, 금강선에 배치되었던 제2대대는 7월 11일 까지 이곳을 지키다 미 제34연대에 인계하고 7월 14일에 본대와 합류하였다.
제 5 절 평택-천안 전투
1. 전투 개요
평택-천안 전투는 미 제34연대가 북한군 제105전차사단 및 제4사단과 7월 6일부터 8일까지 치룬 전투다. 이 전투는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주방어선으로 선정하여 기대를 걸었으나, 조기 철수로 딘 소장의 작전 구상을 무력화 시켰다.
딘 소장은 7월 4일, 부산에서 열차로 북상한 제34연대로 하여금 7월 5일 오전에 제1대대를 평ㅌ액에, 제3대대를 안성에 배치하여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연대는 7월 5일 방어지역을 점령하여 전투준비를 하게 되는데, 7월 5일 죽미령에서 무너진 스미스부대의 상황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부대 상황은 제34연대 1대대 지휘소를 방문한 부사단장 바스 장군으로 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페리 포병대대장으로부터 상세히 듣게 되었다. 바스 장군은 이 자리에서 "최대한 버티되 고립 위험시 스미스부대와 같이 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성환에 있는 연대본부로 가서 평택-안성선은 방어에 불리하다고 하며 천안에서 방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사단장과의 통신이 되지않는 상황에서 부사단장의 지시를 다르기로 했고, 당시에 미 제34연대 장병들은 북한군을 경시하여 금번 작전을 국지적 군사행동으로 금방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미 제34연대 장병들은 7월 6일 동이 트자마자 평택 복족 서정리일대에서 적 보전조가 방어진지로 접근하는것을 발견하였고, 북한군은 폭파된 철교에 이르자 우회하여 측방을 공격하고 포병과 전차가 지원사격을 하게 되자 혼란에 빠져 제대로 대응 한 번 못하고 대대장 에이어스 중령은 연대와의 통신 두절에, 어제 바스 부사단장의 지시를 상기하며 천안으로 철수하게 된다.
또한 안성의 제3대대도 접적도 없는데도 천안으로 철수하여 딘 소장의 작전구상을 무력화 시켰다. 이에 딘 소장은 실상을 파악하고 몹시 노여워하며, 7월 7일 안성에서 철수한 제3대대를 북쪽으로 전진시켜 적과의 접적을 유지하도록 하였으나 잔출과정에 적의 매복조의 공격을 받고 천안으로 빠져버렸다.
이에 사단장은 제34연대의 전투능력에 크게 실망하여, 연대장을 교체하였다.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천안남족에 지휘소는 부연대장에게 맡기고 본인은 연대 본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가 예하 병력을 독려 하였다.
7월 8일 06:00시에 북한군이 천안시내를 유린하게 되자 마틴 연대자은 직접 08:00시경 2.36" 로켓포를 이용하여 적 전차를 공겨하다 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연대장 보직 하루만이었다.
연대장이 전사한 제34연대는 혼란에 빠져 에하 대대들은 많은 장비를 유기하고 천안을 철수함으로서 평택-천안 전투는 종료되고, 연대는 천안-공주도로를 따라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이동하게 된다.
평택-천안 상황도
서정리
적 제4사
적 105전차
미 제34-1대대(7.5~7.6) 안성 미 제34-3대대(7.5~7.6)
평택
성환 미 제34연 지휘소
미 제52포병대대
미 제34-3대대 (7.7~7.8)
천안 미제24-34연대지휘소
미 제34-1대대 / 미 제21-1대대 (7.6~8)
2. 피.아의 전투 상황
가. 북한군 상황
북한군은 제2단계 작전 목표선인 평택-안성-영월-삼척선을 점령하기 위해 계속 공격 중에 있엇다. 그들은 죽미령에서 미 지상군의 참전이 확인 됨에 따라 종전과 같은 전차 단독의 진지돌파를 단념하고, 전선의 균형을 도모하면서 보전협동공격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실제로 북한군은 서정리까지 진출한 전차가 다시 오산으로 되돌아갔다.
북한군 제2사단은 7월 5일 아군과 접촉없이 안서을 거쳐 진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고, 제15사단은 장호원을 거쳐 7월 6일 무극리, 동락리 지역으로 은밀 기동을 하다가 구군에 기습을 당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또한 그들 제1사단은 충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제12사단은 충주와 제천으로 기동하였으며 충중에서 국군 제6사단과 교전하였다. 제5사단은 동해안에서 아군과 접촉없이 삼척으로 진출하였다.
나. 미 제24사단 및 국군 상황
서부지역에서,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7월5일 죽미령에서 패하여 안성, 성환을 거쳐 천안에 집결 중에 있었다. 그리고 미 제34연대는 7월 5일 스미스부대가 전투를 실시하는 동안 평택-안성에 도착하여 진지를 편성 중에 있엇다. 그리고 제21연대(-), 제19연대는 7월 4일 부산에 도착하여 전선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서부지역의 국군은 7월 5일 제1군단을 창설하고, 7월 6일 수도사단은 진천, 제1사단은 음성, 제2사단은 증평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다. '
한편, 북한군 제2, 제15사단의 은밀 기동을 저지하고자 먼저 출동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제19연대를 안성에, 제7연대를 동락리로 이동시켜 국군 제1군단의 방어지진지 편성을 엄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2연대는 충주에 배치하여 북한둔 제12사단 일부와 제1사단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8사단은 단양으로 이동하여 남한강 일대에서 방어 배치하였고, 동해안의 제23연대는 접적없이 울진지역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3. 전투경과
가. 방어준비
(1) 평택-안성 전개 과정
미 제34연대는 일본의 큐슈의 사세보에 주둖고 있었는데, 7월 1일 밤에 6.25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사세보항에서 승선을
끝내고, 7월 2일 저녁에 부산항에 도착하엿고, 장비는 하루 뒤인 7월 3일에 오후에 2척의 LST편으로 부산하에 도착하였다. 7월 4일 새벽에 제1대대가 먼저 출발하여 오후에 대전에 도착한 다음, 제24사단장 딘소장의 명령으로 다시 야간 열차편으로 이동하여 7월 5일 05:00시에 평택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북쪽에 잇는 칠괴리와 지제리일대 국도변에 진지를 편성했다.
한편, 7월 4일 저녁에 부산을 출발한 제3대대와 연대본부는 제1대대가 평택에 도착할 무렵인 7월 5일 새벽에 대전에 도착하여, 사단장으로부터 제3대대는 안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연대장은 제3대대를 안성에 배치하고 연대본부는 성환에 위치하였다. 이에 예비가 없는 연대는 제3대대의 L중대를 연대 예비로 성환에 집결 보유하였다.
사실, 이때까지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북한군의 전투력을 대수롭지 않다고 오판하여, 스미스부대가 오산북방에서 능히 적을 저지하여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후속하는 제34연대의 제1,제3대대로 충분히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낼 수 잇다고 판단하였다.
(2) 방어진지 편성 및 전투준비
7월 5일, 05:00시에 평택읍으로부터 4km 북쪽의 방어진지에 도착한 제1대대는 국도를 포함하여 지제리와 칠괴리지역에 배치하고 대대지휘소는 평택읍 북쪽의 국도변에 설치하고, 그 부근에 C중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이날 오후에 도착한 제3대대는 안성읍 동북쪽 94고지 일대와 서북쪽의 용인-안성도로변에 중대를 배치하고, L중대는 연대 예비로 전환되었다. 연대지휘소는 성환에 위치하였다.
한편, 제34연대의 전투준비는 대단히 미흡하여,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불과 두 달 전에 전임 연대장이 보직 해임되어 들어 왔고, 사단장이 제1대대장으로 임명한 제1대대장 아이레서 중령과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성환의 연대본부와는 오산의 스미스부대와 통신이 되지 않았고, 또한 평택의 제1대대나 안성의 제3대대와도 유무선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전령통신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유는 무전기 성능이 좋지 못한 면도 있지만, 유선은 피난민들이 짐을 구리기 위한 노끈 대용품으로 야전선을 절단해 갔기 때문이었다.
초기 6.25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군의 탱크를 격파할 무기가 없다는 것을 미군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죽미령전투에서 스미스부대가 패하면서, 바스 장군이 7월 5일 11:00시에 오산으로부터 평택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이곳 평택-안성 전투진지 시기에 통신 두절로 스미스부대의 전방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3) 대전차 공격 준비
바스 장군은 평택의 제1대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아이레서 중령에게 로켓포반을 전방으로 추진 배치토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7월 5일 18:00시에 처음으로 적 전차와 대결이 벌어졌다. 하지만 적 전차는 끄덕도 없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로켓병이 전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제1대대장은 그때까지 평택에 남아있던 국군 교량폭파조에 통복천 교량을 폭파해 줄 것을 요청하여 육군은 이에 대한 폭파준비를 하게 된다.
(4) 딘 소장의 평택 방문
대전의 딘 소장은 7월 5일 20:00시에 평택으로 달려와 스미스부대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사단장은 그동안의 상화을 보고 받고 종합한 결과 스미스부대가 적의 포위 공격에 전멸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안고 7월 6일 01:00시에 대전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제34연대에 대하여 차후작전에 어떤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이후 제52포병대대장 페리 중령은 제34연대 제1대대에 7월 6일 01:00시에 도착하여 상황을 전파하였고, 스미스중령은 안성 도립병원에서 부상병의 치료를 대강 끝내고 86명의 부대원을 인솔하여 7월 6일 02:00시에 성환의 제34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바로 출바하여 천안을 거쳐 대전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5) 바스 장군의 임시 조치
사단장이 대전으로 떠난 직후인 01:05분을 전후하여 평택의 제1대대 지휘소에 스미스부대 낙오병 4인이 도착하여 스미스부대의 패전 소식을 전함으로서 처음으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바스 장군은 사단장 대리로서 대대장에게 "최선을 다하여 현지를 고수하되, 특히 후방경계를 강화하고 퇴로를 확보하여 스미스부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락"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연대장과 차후 대책을 협의코자 02:30분 전후하여 성환의 연대 지휘소에 도착한다.
여기서 바스 장군이 평택과 안성은 방어진지로 적합치 않다고 하며, 천안으로 집결시켜 방어력을 강화하라고 강조하고 천안으로 떠나자, 연대자은 직접 사단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햇고, 더욱이 포병사령관 대리인 바스 장군이 보병연대장인 자신에게 작전지시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고민했으나, 당시 상황이 긴박하여 이를 승복하기로 하고, 각 대대에 적과의 접촉은 유지하되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현 진지를 확보하다가 천안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바스 장군의 지시나 이를 따른 제34연대의 조치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딘 소장은 이런 결과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 평택 전투
(1) 제1대대의 전투상황
대대장은 7월 6일 새벽에 적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03:00시경 국도상의 교량을 폭파토록 했다. 대대는 스미스부대의 패전 소식에 반신반의하면서 비내리는 밤을 지새웠다. 야전식량으로 아침식사를 들고 있었다.
7월 6일 04:30분경, 짙은 안개속으로 적전차가 남하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적 전차 13대가 파괴된 교량에 이르러 줄을 지어 늘어져 있었다. 바로 4.2"박격포로 사격으 ㄹ가하게 되자 , 적은 85mm 전차포로 대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 단 한명인 대대의 화력지원관인 관측병이 실신하여 화력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대대장은 바스 장군의 충고대로 제2의 스미스부대가 되지 않으려 천안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이어서 대대도 09:00시경 철수하여 성환의 연대지휘소로 이동하고, 지원 중인 국군 공병에게 일선 중대가 평택에집결하는 동시에 즉시로 평택 북쪽의 통복천 교량을 폭파 하도록 하였다.
(2)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 및 바스 장군의 조치
이와 같이 7월 6일 아침에 제1대대가 평택 전투에서 패하여 천안으로 철수해 오자,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12:00시 경에 제3대대를 천안 남족에 진지를 편성하라 하고 연대지휘소도 천안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연대가 보유했던 L중대에게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 후에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천안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이어서 제3대대도 차량으로 철수하여 안성-천안도로를 다라 철수하여 21:00시 경에 천안 남쪽 5km 지점에 도착하는데, 이때 도로 좌측에는 먼저 도착한 제1대대가 바스 장군의 조치로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1대대가 철수한 후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며 철수하라 명받았던 L중대는 바로 제1대대와 같이 철수하여 적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적정을 탐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7월 6일 아침 바스 장군은 성환을 떠나 천안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제21연대 제1대대(스미스 중령이 대대장인 부대)의 잔여병력인 A, D중대 및 본부중대가 열차편으로 천안에 도착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스 장군은 제21-1대대 잔여병력을 삼룡리(천안 남쪽4km) 일대, 1번 국도 동쪽의 무명고지에 배치하고. 이후에 도착한 제제34연대 제1대대를 그 서쪽 106고지에 진지를 편성케 하였다. 또한 철수하고 있는 제3대대도 이곳 삼룡리에 배치하려 핬으며, 이러한 사실을 연대장은 16:00시경에 사단장 딘 소장에게 전문으로 보고 하였다.
(3) 사단장 딘 소장의 지휘조치
7월 6일 16:00시에 제34연대장으로부터 평택-안성선에서 철수하여 천안으로 철수한다는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격노하며, 즉시 천안으로 달려갔다. 딘 소장은 다시 병력을 평택-안성선으로 북상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 적의 기습에 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별명이 있을 때까지 현진지를 고소하라고 지시하고 그는대전 지휘소로 떠났다. 그리고 제34연대장에게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하여 날이 밝은 다음 1개 중대를 경부국도를 다라 북족으로 진출시켜 접촉을 유지하라 지시하고, 7월 7일 날이 밝자 항공정찰을 강화하여 천안 북쪽의 적정을 수집토록 한다.
다른 한편 일본 큐우슈우의 벳푸와 구마모토에 각각 주둔 중이던 제19연대와 제21연대가 사세보항에 집결하여 7월 4일 해상이동으로 부산에 도착하였고, 이 부대들은 장비 도착 및 하역작업을 끝내고 7월 7일 열차편으로 이동하여 제21연대는 대전으로 제19연대는 전략적 예비로서 대구에 집결토록 하였다.
이와같은 조치로 제21연대는 연대본부와 제3대대 뿐인 병력이 정오무렵에 대전에 도착하는데, 사단장이 즉시 조치원에 추진하여 제34연대를 지원하는 동시에 1번 국도 보급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제21연대는 이날, 7월 7일 오후에 조치원에 연대지휘소를, 제3대대를 전의 마을(조치원 북서쪽 10km) 남동쪽 2.5km인 개미고개 좌우측에 지연진지를 점령토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날 극동군사령부로부터 제24사단은 1개 대대를 추출하여 연일비행장(포항)의 공군 제35전투비행단을 경비케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장은 대구의 제19연대 제2대대를 포항으로 이동조치 하므로서 제19연대는 제1대대만 남았다.
그리고 7월 7일 저녁 무렵에 제34연대 지원 포병인 제63포병대대 일부와 사단 전차인 제78전차대대 일부가 천안으로 추진되엇다.
다. 천안 전투
(1) 제3대대의 접적 전진
안성에서 접적 없이 천안 삼룡리에 도착한 제3대대는 1개 중대를 추진하여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라는 사단장의 명에 따라 L중대에 연대 정보수색소대를 배속시켜 성환쪽으로 이동하여 적과의 접촉을 유지토록 하였다.
따라서 L중대는 7월 7일 08:00시에 차량기동대를 편성한 수색소대를 선두로 천안을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천안에는 대부분 피난가고 노인과 경찰 일부만 남아 있었다.
이날 7월 7일 10:30분 경에 다시 사단장은 제34연대장에게 1개 대대를 더 북쪽으로 접적 전진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제34연대장은 제3대대를 추가하여 북쪽으로 접적 전진토록 하고 제1대대에서 일부를 천안으로 이동시켜 안성에서 천안에 이르는 도로를 통제토록 하였다.
(2) 연대장의 교체
딘 소장은 평택-안성선에ㅐ서 제대로 저항 한번 없이 예하 부대를 철수시킨 제34연대장 러브리스를 해임하기로 결심하고, 적임자로 마틴 대령을 지목하고 그를 우선 천안으로 보내어 그곳의 전황을 파악하도록 조치하였다. 마틴 대령이 천안에 도착할 무렵 제3대대는 천안북쪽 부대리(3.5km지점)로 이동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7워 7일 16:00시 경에 연락기가 연대의 동측방과 서측방에 큰 규모의 적 병력이 확인되엇다는 통신통을 연대에 투하 하였다. 안성부근에는 전차(40~50대)와 차량들이 집결 중이고, 미양(안성 서남족 5km)과 성환에도 많은 병력이 집결 중으로 연대의 측면 포위를 기도할 것이라는 위급한 내용이었다.
이에 러스리스연대장과 신임 연대장 마틴은 안성가도쪽을 막고 있는 제1대대의 방어태세를 확인하고자 동행하여 제1대대 지휘소로 갔다. 그곳에서 연대장 교체 명령서를 휴대하고 있는 부사단장 멘노허 장군은 만나게 되어, 연대장의 교체가 이루어 진다.
사단장 딘 소장이 연대장을 교체한 이유는 평태게안성선에서 조기 철수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7월 7일 오후에 확인된 항공정찰 결과를 보고 천안을 확보할 마땅한 가용수단이 없어, 마틴 대령의 지휘역량에 한 가닥 걸고자 하여 부사단장인 멘노허 장군을 천안으로 보내어 교체토록 한 것이다.
(3) 제3대대 접적 전진 전투
7월 7일 아침부터 천안에서 경부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접적 전진을 하고 있던 제3대대는 15:00시 경에 선두의 연대 정보수색소대가 직산(천안 북쪽 6.5km)역 북쪽 700여 m의 삼거리 부근, L중대는 그 남쪽 1.5km 지역에, 그리고 대대 주력은 부대리 부근을 이동 중에 적의 기습을 받고 각각 진지 편성 중에 있었다.
이와 같이 선둥데서 전진하고 있던 정보수색소대가 그 부근의 마을 점거 중인 소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소화기와 박격포사격을 받아, 수색소대는 적과 1:1 규모의 대결인데도 바로 L중대 진지로 철수하게 되면서 3명의 실종자를 발생하였다. 이때 마침 대대의 작전과장인 시거 소령이 중대에 도착하여 그들을 지휘하여 전방으로 나아가 실종 병사 3명을 구출하였다.
그리고 L중대가 직산역 남동쪽 1km 지점에 진지를 접ㅁ령하게 되는데, 이때 그 서쪽의 내동(직산역 남쪽 1km)부근으로부터 적의 화력기습을 받아 교전이 벌어지고, 부대리 부근의 대대 주력도 적의 측방공격을 받아 철수 중이었다.
따라서 제3대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대대에 나와 있던 연대 작전과장 던 소령이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고 그 길로 천안 연대지휘소로 급히 복귀하여 제3대대의 철수 상황을 보고하는데, 그 시각은 새로운 연대장 마틴 대령이 지휘권을 인수한 후였다. 이에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작전과장에게 우선 제3대대를 수습하여 당초의 대대진지를 확보하라고 명령하고, 본인이 직접 연대 본부중대를 이끌고 적정을 확인하러 전방으로 나아갔다.
한편, 던 소령은 연대장의 명령을 따라 제3대대의 작전과장인 시거 소령과 더불어 천안에 집결한 제3대대의 일부를 수습하여 곧 차량으로 다시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동 중에 적의 기습으로 연대 작전과장과 대대 작전과장이 부상을 당해, 병력은 분산하여 천안으로 철수하게 되고, 부상으로 낙오가 된 던 소령은 이날 저녁에 포로로 잡혔고, 시거 소령은 중상으로 끝내 전사하였다.
그 동안에 천안 북쪽으로 달려나가 상황을 확인한 연대장은 제3대대가 유기한 장비와 차량 일부를 회수하여 천안으로 되돌아가, 집결 중인 제3대대로 하여금 천안외곾에서 결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제3대대는 19:00시 경에 천안읍 외곾지대에 방어진지를 새로이 편성하였다. 제1대대는 이날 오전부터 점령한 동북쪽의 안성가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로써 연대는 천안읍을 중심으로 북쪽의 경부 본도, 서쪽의 천안역과 철로를 싸안은 마제형의 진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국도상의 예상 적 전차 접근로에는 대전차 지뢰 800여 발을 매설하여 적 전차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4) 천안 시가지 전투와 연대장 마틴 대령의 전사
천안 외곾지대에서 결전을 다짐한 연대장 마틴 대령은 연대 지휘소를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34연대 제1대대 A중대가 지연진지를 확보 중인 삼룡리 부근으로 이동시키고, 본인은 읍내에 남아서 부대지휘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20:00시 경에 제63포병대대 A포대와 제78전차대대 A중대의 M-24 경전차 1개 소대가 급히 증원되었는데, 연대장은 이들을 연대 지휘소 부근에 배치하여 제3대대를 화력지원토록 하였다.
천안 전투 상황도
1번국도
적 2개 연대 06:00경
수미상의 적 전차
미 제34-3-1개 중대 미 제34-3-1개 중대
미 제34-3-1개 중대
천안읍 제34연대 전방 지휘소
철수 7월 8일 08:30분
미 제63포병 대대-A포대
삼룡리
미 제34-1대대 미 제21연대 -1대대
미 제34연대
7월 7일 해가 지면서 적의 압력이 있엇으나 밤 동안 큰 접전은 없엇다. 그리고 자정 무렵에 적이 보전협동으로 한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포병이 적 전차에 대전차고폭탄을 집중하여 2대를 격파함으로서 그들의 전진을 격퇴시켰다. 연대장 마틴 대령은 제3대대장과 천안 읍내에서 밤을 새웠다. 하지만 삼룡리의 연대본부와 천안의 제3대대 사이에 통신이 곧잘 두절되어 연대 후방 지휘소 요원들도 불안한 가운데 날을새게 되었다.
드디어 7월 8일 06:00시부터 천안 정면에 적의 공격이 재개 되었다.. 성환쪽에서 6대의 전차가 선두로, 북한군 제4사단 제16연대. 제18연대가 서북쪽의 경부본도와 동북쪽의 안성가도를 따라 읍내로 돌입하는데 전날 밤에 매설한 800여 발의 지뢰지대를 유유히 통과하여 읍내로 진입하는 즉시로 미군이 잠복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천안역 검물과 교회등을 포격하였다.
당시 미군이 매설한 지뢰가 단 한발도 폭발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적이 야음을 이용하여 사전에 이를 제거했거나 아니면 잘못 매설되엇거나 불량품이어서 불발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후 천안읍에서 2시간 가까이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적 전차가 좁은 읍내를 휘젖고 다녀 연대의 지휘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에 연대장 마틴 대령은 적 전차의 격파가 선결문제라 판단하고 직접 2.36" 로켓을 들고 읍내 한복판에서 적 전차와 대결하다 08:00시에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이는 제34연대장으로 부임한지 하루만이었다.
미국은 7월 11일 마틴 대령에게 십자훈자을 수여함으로서 그는 이 전쟁 중에 연대자으로서 첫 전사자가 된 동시에 첫 십자훈장 수상자가 되었다.
연대장의 전사에 따라 전황이 악화되고, 제3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동분서주했으나 더 이상 천안에서 지탱할 수 없게 되어 09:00를 전후하여 포병에 연막차자을 요청하고, 병력을 천안에서 철수하게 되고 대대장은 10:00시에 삼룡리에 연대지휘소에 도착하자마자 혼절하여 후송되었다.
(5) 사단장의 지휘조치
사단장은 제34연대 부연대장 웨드링턴 중령으로하여금 병력을 지휘하여, 제63포병대대 A포대와 더불어 행정리 삼거리(삼룡리 남쪽 10km) 에서 공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금강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삼룡리의 제34-1대대(-)와 제21-1대대(-)는 제3대대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본대에 함류토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제1대대 엄호하에 제3대대가 낮 동안 수습된 176명의 병력이 대부분의 공용화기는 천안에 유기한 상태로 광정리(행정리 남쪽 10km)로 철수하여 지연진지를 편성하고, 연대지휘소는 오후에 공주에 개설함으로써 평택-천안 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편 제21연대는 뎡부 본도 전의 마을(개미고개 근처) 에 배치됨으로써 담당하였다.
3. 전투결과
가. 전투 피해
평택 전투에서는 조기에철수하여 전투피해는 거의 없었다. 천안 전투는 제34연대 본부병력과 제3대대 장병들의 피해가 심대하였다.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의 전사, 제3대대 작전과장 시거 소령의 전사, 연대 작전과장 딘 소려을 포함한 60여 명의 포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제3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천안으로부터 탈출 후 정신적, 육체적 탈진으로 후송되고 장병은 175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여기에 박격포와 기관총 등 공용화기는 대부분 유기하였다.
한편, 평택-천안 전투에 참가한 북한군은 제4사단 예하 제16,18연대와 105전차사단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들도 아군의 항공 및 포병사격에 피해가 컸을 것으로 판단되나 공개된 자료는 없다.
나. 전투 후 전황
사단장 딘 소장은 제34연대가 천안에서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의 주공격축선인 경부 국도은 7월 7일 대전에 도착한 제21연대(-)에 맡기고, 천안에서 만신창이가 된 제34연대는 공주 정면으로 철수시켜 지연전을 수행토록하여, 이는 장차 금강선을 연한 방어 편성을 위한 사전 조치였다.
즉 천안을 지난 경부국도는 전의-조치원-대평리-대전으로 이어지고, 또 하나는 무명도로는 행정리에서 곡장 남쪽을 향하여 광정리-공주-논산으로 연결되는데 이들 두 도로는 모두 금강을 통과하게 된다.
따라서 사단장은 적의 도하지저이 대평리(조치원 남쪽 14km)와 공주(대평리 서쪽 14km)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이 두 곳에서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34연대는 공주로 철수하여 강 남쪽에 방어진지를 점령케 하고, 제21연대는 조치원을 확보하여 국군과의 연곌르 도모케하는 가운데, 대구에 있던 제19연대를 대평리의 방어진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따라서 사단장은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여하히 접적 중인 병력을 뽑아서 금강방어선을 점령케 할 것인가 가 문제가 되었다.
대구의 제19연대를 전용할 모색을 하던 중에 7월 8일 오후에 미 제25사단 킨 소장이 주한 미군사령관인 딘 소장의 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서 대전에 도착하였다. 이에 딘 소장은 미 제25사단장에게 한국에 도착 즉시로 대구의 제19연대와 그 이무를 교대하라고 하고, 제19연대를 대전으로 이동토록 하였다.
특히 딘 소장은 제21연대장에게 반드시 조치원을 확보하여 동측의 국군 제1군단이 청주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조치원을 잃으면 국군 제1군단의 서측방 및 후방이 노출되어 보급로를 상실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며 국군 제1군단이 청주에서 철수할 때까지 조치원을 사수하하고 하였다. 그러면서 연대에는 향후 4일간 다른 지원을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 6절 전의-조치원 전투
1. 전투 개요
전의-조치원 전투는 미 제21연대(스테판 대령)가 7월 9일부터 12일까지 경부 국도상의 전의 및 조치원 일ㄷ대에서 북한군 제105전차사단 및 제4사단과 제3사단을 대상으로 수행한 전투이다.
미 제21연대는 제34연대에 이어 일본 기지를 출발하여, 7월 4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7일 대전에 도착한다. 이에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제21연대를 조치원 북방으로 이동하여 제34연대를 지원하고 보급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제21연대는 전의 망르 남동쪽 일대 횡격실 ㄱ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그 후 7월 8일 제34연대가 천안에서 패배하여 철수하자, 제21연대는 전의 -조치원 방향에서 지연전을, 제34연대는 공주방향의 도로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21연대는 혼성 제1대대를 전의 남동쪽 1km 지점에, 제3대대를 전의 남동쪽 2km 지점에 종으로 배치하여 경부국도 및 철로를 통제케 했다. 또한 제21연대는 공중공격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근접항공지원팀을 요청하여 배속받았다.
7월 9일 16:45분에 혼성 제1대대는 전방에 나타난 11대의 적 전차와 수 백명의 병력을 발견하고 포병 및 공중공격을 요청하여 적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다음 날인 7월 10일 06:00시에 북한군 제4사단이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다양한 방향에서 적의 공격이 계속 되어 11:30분 경에 박격포 진지가 유린되고 통신 두절로 포병사격을 지원받을 수 없게 되자 연대장은 제1대대의 철수를 명령하고 제3대대로 제1대대의 진지를 재탈취하도록 하여 원진지를 재탈환했으나 적의 위협이 가중되어 원진지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7월 11일 새벽, 새로 투입된 북한군 제3사단이 제3대대 진지를 공격했다. 이때 북한군은 사전 침투조를 활용하여 하력을 유도하였으며, 후방차단으로 대대는 대대장 젠슨 중령의 전사 등 20%의 손실을 입고 조치원으로 철수한다.
7월 12일, 북한군 제3사단은 공격기세로 몰아 조치원 북방에 배체된 제21연대 제1대대를 동.북.서 3면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미 죽미령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제1대대는 북한군 제3사단을 상대하기란 역부족 이었다.이에 연대장 스테판 대령은 철수를 명하여 제21연대는 모두 금강을 넘어왔다. 비록 전의-조치원선에서 철수를 ㅡ했지만 북한군 제3,4사단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히고 이들의 진출을 4일 간이나 지연시켰다.
한편 제34연대는 7월 8일 천안에서 철수하여 공주방향으로 이동 중에 광정리에 제3대대를 배치하고, 수촌리에 제1대대를 배치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전의 방면에 공격을 하던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10일 공주방향으로 전환하여 7월 11일에야 광정리에 도착하여 제3대대를 공ㄹ격하자, 제3대대는 바로 철수하여 공주 점면에 배치하였다.한편 수촌리에 있던 제1대대는 7월 12일 접적이 없는 가운데 사단장 명에 의거 금강을 건넜다.,
이렇게 하여 미 제24사단 전 병력은 7월 12일부로 금강을 건너와 금강선을 연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자 하였다.
전의- 조치원 상황도
적 3사
적4사 전의 운주산
미 제21-1대대
(7.8~10)
개미고개 일대
미 제21-3대대
보덕리 제11-A포대
미 제21-1대대
조치원 미 제21연대 본부
2. 전투 경과
가. 방어준비
(1) 미 제21연대의 한반도 전개
미 제21연대는 일본 구마모토의 우드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미 제34연대에 이어 두 번째로 6.25전쟁에 투입된 연대이다. 그런데 제1대대(대대장 스미스 중령)는 이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 편성되어 7월 5일에 죽미령 전투를 치루고 대전으로 이동하여 정비 중에 있었고, 그 나머지 A,D 양개 중대와 대대본부 일부병력이 7월 6일 평택 전투가 있었던 날에 천안 역에 도착했는데 마침 이곳에 있던 부사단장 바스 장군의 지시로 천안 남쪽 삼룡리 부근의 진지에 투입되었다. 이를 편의상 혼성제1대대라 한다
그리고 연대본부 및 제3대대는 연대장 스테판 대령이 직접 인솔하여 7월 4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7일 대전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제24사단장 딘소장은 즉시 조치원 부근에 지연진지를 점령하여 제34연대를 지원하는 동시에 연대의 보급로를 확보하라 명령하였다. 이에 연대본부는 조치원에, 제3대대는 전의 마을 남동쪽 2.5km, 지점인 미곡리 부근(조치원 서북쪽 10km)의 진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한련, 제21연대 혼성 제1대대(-)는 7월 8일 제34연대가 천안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시 엄호 임무를 수행하고, 연대장 스테판 대령의 명으로 전의 남동쪽 1km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곳으로 부터 남동쪽으로 1.5km지점에는 제3대대가 있었다.
(2) 전투준비태세
미 제21연대는 미 제24사단 예하 3개 연대 가운데 훈련이 가장 잘된 부대라 할 수있다. 육군 부대훈련시험에서 예하 2개 대대가 모두 합격하였다. 연대는 투입되어 타 연대보다 전투준비를 철저히 했다. 7월 9일 아침 참호를 파고, 포병 및 박격포 운용을 위한 화력계획을 수립하고 제원기록사격도 하였다.
그리고 제3공병대대 B중는 적 전차의 진출속도를 늦추기 위하여 전의에 이르는 교량을 폭파하는 등 전투준비를 하고, 공중공격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근접항공지원팀을 요청하여 배속받았다.
나. 전의 전투
(1) 적극적인 공중공격
7월 8일 천안을 수중에 넣은 북한군 제4사단은 계속 1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여 7월 9일 오전에 전의 마을에 도달했는데, 미군의 공중공격으로 신중을 기하는 듯하여 바로 공격을 하지않아 한낮을 넘기게 된다.
이날 15:00시경에, 혼성 제1대대는 적 전차 11대가 국도와 철로를 따라 전의 마을로 진입하는 것을 관측하여 연대를 지원하는 제11포병 대대 A포대 155mm 곡사포와 4.2"박격포가 적 전차에 사격하고, 이어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한 결과 제5공군의 전폭기 편대가 나타나 적 전차를 공격하여 적 전차 5대가 파괴되고 차량 12대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날 제3, 4전술항공통제단이 황혼무렵에 전의 마을과 평택 사이의 국도에서 200여 대의 적 차량종대를 포착하여 공중 공격으로 100여 대를 파괴했다고 보고 된다. 이에 대해 적 105전차사단 정치 군관이었던 오기완 대위가 증언하기를 전차 15대와 차량 30여 대가 파괴되어 개전 이래 미 공군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2) 혼성 제1대대의 전투 상황
7월 10일, 안개가 자욱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장병들은 06:00시경에 적이 진전으로 접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적은 새벽에 짙은 안개를 이용항여 은밀히 진전에 접근하여 요란사격으로 진지 상태를 탐지한 다음, 07:00시경에 박격포 지원사격하에 공격을 하였다. 이에 연대도 4.2"박격포로 지원사격을 하여 적의 공격을 일단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하에서 적의 은밀 침투조가 우회하여 박격포 진지에 침투하였고, 진지 정면에는 적 전차 1대가 진지 후방을 통과해 갔다. 08:00시경에 안개가 걷히는데 이미 박격포 진지는 유린되었고 적은 전의 마을로 부터 주진지동쪽으로 기어올랐다. 이에 포병사격 요청으로 11:00시경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11:30분 경에는 출격한 공군기가 도로에 늘어선 적 전차를 공격하고 기어오르는 적에게 기총사격으로 다시금 일시적 진지를 지탱할 수 있었다.
한련, 적의 포병화력으로 연대장의 차량 무전기와 포병 관측수의 무전기가 파괴되어 , 바로 그 후방에 있는 제3대대와 제11포병 A포대에서는 제1대대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A포대는 전방 대대 진지가 와해 되엇다고 판단하고 진지 위로 포병사격을 퍼부엇는데, 이로 말미암아 혼성 제1대대는 적과 아군의 포화를 동시에 뒤집어 쓰는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진지를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연대장이 진두지휘로 진지고수를 독려했으나 결국 연대장과 몇 몇 장교와 병사들만 남게 되어 혼성 제1대대를 12:05분경 제3대대진지로 철수케 한다.
이후에 혼성 제1대대는 조치원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점검 결과로 A중대는 181명 중에 27명이 부상하고 30명이 실종되었고, D중대는 3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하였으며 박격포는 모두 유기된 상태로 대대는 전체적으로 220%의 손실을 보았다.
(3) 제3대대의 적극적인 공세행동
7월 10일, 제3대대진지로 철수한 연대장 스테판 대령은 제3대대장 젠슨 중령에게 즉시 역습으로 혼성 제1대대진지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3대대장은 14:00시에 제78 전차대대 A중대의 엄호를 받으며 진출하여, 국도변 동쪽의 진지를 회복하고 서쪽의 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로 사단에 상황을 보고하자, 사단장 딘 소장은 연대장에게 적의 야간 역습이 예상됨으로 병력을 원래의 위치로 철수하도록 하고, 대전에서 정비 중인 혼성 제1대대를 조치원으로 신속히 이동시켜 연대와 합류토록 조치했다.
이날 추가적인 지시로 대구에서 올라오는 제19연대의 진출 보장을 위해 진지를 고수하라는 사단장의 통제오 자정이 되어 대대는 제1대대가 유기한 장비들을 회수하여 원래의 진지(개미고개 일대)로 철수하였다.
이날 제3대대의 공세적인 전투에서 특징적인 것은 제78전차대대 A중대의 M-24경전차가 중전차인 북한군의소련제 T-34전차에는 적수가 못되어 아군 전차 2대가 파괴되고 적 전차 1대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미 공군의 공중강타로, 제5공군이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적의 차량종대에 총 공격을 가하여 전차 38대와 자주포 7대 그리고 트럭 117대를 파괴하여, 이후 적은 주간공격보다 야간공격 위주로 했다.
(4) 제3대대의 와해
7월 11일 새벽에 미곡리 부근의 진지를 다시 점령한 제3대대는 날이 밝기전에 적의 공격을 맞이하게 된다. 적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강력한 공격을개시하엿다. 이는 북한군 제3사단이 새로이 투입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즉 북한군 제3사단은 한강선 돌파이후에는 줄곧 제4사단을 후속하면서 정비와 병력을 보충하여 전투력이 증강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전에 제3대대의 지휘소와 병력배치 상태를 파악하여, 새벽 기습에 먼저 박격포 진지와 통신보급소. 탄약저장소를 파괴하여 통신마비와 탄약의 연쇄폭발로 대대본부 병력 반 이상이 살상되었다.
그들은 1,000명의 병력으로 진지를 포위 공격하며, 부상병의 후송이나 탄약 재보급을 방해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적 전차 및 밀집 병력을 관측했지만 통신 두절로 화력을 요청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적 전차 4대가 06:30분 경에 지뢰지대를 뚫고 방어지대를 돌파함으로서 공황상태로 돌변하면서 정오 경에는 대대 진지는 모두 유린되고 말았다. 이에 대대는 개별적으로 진지를 이탈하여 조치원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대대장 젠슨 중량과 정보장교가 적탄에 전사하고, L중대장과 대대 인사, 작전장교 등이 실종되었다.
이날 대대병력은 최초에 667명이엇으나, 조치원에서 수습된 병력은 장교 8명에 사병 142명이었다. 전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 그러나 7월 15일까지 322명이 실종 중 복귀하여 병력손실을 반감되었다.
다. 조치원 전투
7월 10일 밤에 사단장으로부터 조치원 북쪽 3km선까지의 철수를 승인 받은 연대장 스테판 대령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에게 사단장이 지정한 진지를 점령케 하고, 제3대대는 적과의 접촉을유자하며 철수케 하라고 하엿다.
이에 7월 11일 새벽에 스미스 중령은 B,C 양개 중대를 이끌고 조치원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혼성 제1대대를 통합하여 비로소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어 07:30분경에 국도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여 송곡리(조치원 서북쪽 3km)부근의 \무명 170고지 일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7월 11일 전방의 제3대대가 적과 접적을 유지하며 축차적인 철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제3대대는 정오를 넘기지 못하고 궤멸상태가 되어, 제1대대만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여야 했다. 하지만 적도 미곡리 전투 후에 제3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많은 피해를 입은 듯 더 이상 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한편, 사단장은 제19연대 및 제13포병대대를 대전에 집결토록 하고, 이들이 이동하는 동안 전투상황을 지켜보다 저녁이 되어 제3대대의 참담한 패전 보고를 접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조치원의 운명이 시각을 다투게 되었음을 알고 공병으로 하여금 조치원에서서 금강에 이르는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연대의 철수를 엄호케 함으로서 조치원에서의 철수를 대비한 후속조치를 강구하였다.
7월 12일 오전에 제1대대는 2,000명으로 추산되는 적으로부터 동.서.북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연대장은 제3대대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으로 판단하여 진지 고수를 고집하지 않고, 대대를 조치원으로 집결시켜 차량편으로 금강 남족의 대평리로 철수토록 조치하고 이를 사단에 보고 하였다. 이에 제1대대는 금강을 건너 15:30에 금강 둑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라. 공주방향 지연전
(1) 미 제34연대의 상황
한편, 미 제34연대는 7월 8일 10:00시에 천안에서 철수하여 공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금강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연대장 웨드링턴 중령은 먼저 철수한 제3대대로 광정리 부근의 지연진지를, 연대본부 및 제3대대 철수를 엄호한 제1대대로서 수촌리 부근의 지연진지를 각각 점령하게 하고 연대지휘소는 공주에 설치하였다.
북한군은 이 방향에 7월 10일까지 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전의--조치원 방향의 공격에 주안을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뒷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 당시 북한군은 제4사단이 공주방향으로 공격하고 제3사단은 전의-조치원 방향으로 공격할 예정이엇으나, 제3사단이 7월 10일 밤 늦게 전의 마을로 도착하여 전선 투입이 늦었기 때문에 제4사단을 공주방향으로 공격을 전환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말미암아 제34연대는 이날까지도 별다른 접적없이 광정리와 수촌리 지연진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연대본부 및 직할대 일부병력은 공주 경찰병력과 함께 금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공벼으로는 도로 절단과 교량파괴 준비작업을 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은 전의에서 공주방향으로 전환한 후, 7월 11일에 드디어 광정리의 제34-3대대 진지를 공격고, 대대는 가벼운 전투 끝에 바로 금강을 건너왔다. 수촌리의 제1대대는 경전차 M-24 1개 소대의 지원하에 금강 이북에서 마지막 지연전을 실시하며 적 포병사격으로 전차 2대가 파괴되었을 분 별다는 피해없이 밤을 넘기게 되었다. 한편 적 공격에 대비하여 제3공병대대 D중대는 금강에 이르는 도로의 교량을 모두 폭파하고 도로를 절단하였다.
(2) 국군 기병중대의 활동
천안에서 철수하던 7월 8일에 사단장 딘 소자은 육군본부로부터 지원받은 기병 1개 중대를 미 제34연대에 배속시켜 천안 서쪽(예산-청양부근)에서 적정을 수집하는데 운용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 제6중대(중대장 박인규 중위)는 대전에서 공주로 이동하였다. 이날 아침에 중대는 트럭에 마량과 무전기 1대를 싣고 오후에 공중에 도착하여, 미 제34연대 지휘소에 배속신고를 하고 공주를 기점으로 예산, 청양의 삼각지역을 수색정찰을 실시하여 적정을 수비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이에 제6기병중대는 공주사범학교 정원에 무선통신소를 설치하여 연대와 교신을 유지하며, 7월 10일 날이 밝자 중대장이 직접 제1대를 이끌고 금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여 예산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대에서 적의 흔적을 찾지못하고 공주의 중대모두를 에산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중대장의 지시로 7월 11일 아침 07:00시에 공주의 나머지 2개 소대가 예산으로 향하다, 공주 유구(예산 남동쪽 16km)에서 적 2개 중대를 습격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당시 상황은 기마부대가 금강을 건너 산정리(유구 남쪽 4km)부근에서 아군 지프차를 타고 달려오는 북한군을 기습하여 적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사로잡았다. 이때 포로가 본인들이 북한군 제6사단으로 2개 중대로서 유구를 해방시켰다고 하였으며, 어느 주민이 인민군이 지금 유구에서 우체국장과 의용소방대장을 인민재판에서 죽이고, 유구초등학교에서 환영식을 열고 있다는 정부를 주었다.
이래서 기마 소대는 유구마을 남쪽 어구에 기관총 2정을 추진시켜 엄호토록 조치하고, 주력은 마을의 서남쪽 과수원 고지를 점령하여, 술에 취해 졸고 잇는 적 2명을 처치한 다음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2개 중대 규모의 적을 공격하여 적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는 한시간 만인 13:00시에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는데, 적의 시체가 60여 구 확인되었으며 아군 지프차 1대를 회수하고 차량 2대를 파괴하였다. 아군은 1명이 부상하였다.
3. 전투결과
가. 전투피해
제21연대의 전투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월 10~11일 사이에 제1대대늕 20%정도의 피해를 입엇고, 제3대대가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667명의 병력이 450명여 명으로 줄었고, 2개 대대분의 장비 및 무기와 975명의 보급품을 유기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미군의 효과적인 근접항공 공격을 받아 7월 10일 하루 공격으로 전차 38대. 자주포 7대. 트럭 117대, 수백명의 병력이 격멸되었다.
나. 전투 후의 개황
사단장 딘 소자은 7월 11일 미 제19연대를 대전으로 이동토록 하였으나, 이동이 늦어져 7월 12일 제21연대가 강을 건너 넘어설 때까지 방어지역인 대평리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이에 금강을 막 넘어온 미 제21연대가 재수습ㄷ된 325명으로 금강 남안의 대평리 일대 제방을 연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케 하였다.
이후에 7월 12일 오후 늦게 제19연대가 도착하여 제21연대는 대전 동측방 방호를 위해 옥천 터널 일대로 이동하였다.
한편 공주의 미 제34연대는 7월 11일에 공주로 철수한 제3대대로 공주 북쪽의 금강선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하고, 7월 12일 일몰 무렵에 마지막으로 금가응ㄹ 건너온 제1대대를 연대 예비로 집결토록 하였다.
또한 국군 제6기병중대는 7월 12일 아침에 에산에서 공주로 복귀위해 유구를 거쳐 22:00시에 금강 북안에 도착했으나, 이미 교량이 파괴되어 마필의 도강이 어려워 이에 중대는 강의 서안을 따라 밤새 말을 달려 이튿날 새벽에 부여의 대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배를 구해 가응ㄹ 건넛고, 7월 14일 아침에 공주의 미 제34연대와 합류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7월 14일 야간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평리 정면에, 제4사단을 공주 정면에 각각 전개한 다음 금강도하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의 북한군은 홍성(제6사단)-공주(제4사단)- 치원(제3사단)-주(제2사단 -제15사단)-문경(제1사단)-풍기(제12사단)-영해(제5사단)선을 연하여 진출하고 있었다.
제 7절 유해발굴위한 탐사 / 탐문결과
1. 죽미령 전투
7월 4일에 시흥사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 하자, 스미스부대가 서부전선의 최전선부대가 되었다. 이 부대는 평택을 출발하여 7월 5일 03:00에 죽미령에 도착하였다.
죽미령 고개는 경부국도와 경부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동서의 횡격실 능선이 주봉인 반월봉(117m)을 깃점으로 3개의 고지군이 있으며 지금 그 정상에 전쟁 기념관이 개설되어 있다.
07:00경에 북한군 제4사단이 제107전연대를 앞 세우고 긴 행군제대를 이루며 남진하게 된다. 8대의 전차를 선두로 남진하는데 대전차포인지 2.36"로켓 등의 공격으로 2대가 멈춰섰지만 이내 길 옆으로 밀어버리고 무려 33대의 전차가 보병의 방어거점을 지나 포병진지로 내려 갔다.
적 보병의 우회 포위와 진내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스미스부대는 14:30분경 철수 하기 시작했고 포병부대와 함께 근접진지에 있던 국군 제17연대 병력도 평택을 경유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가 한국전에서 미군과 북한군에 첫 전투였으며 미군은 150여명의 인원손실과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게 된다. 북한군은 42명이 사살되고 부상이 85명이었으며 전차가 4대 파괴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낙동강 전선에서 포로가 된 적 제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의 증언) 미군 또한 북한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 죽미령일대는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10여회의 탐사와 3~4회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야산일대에는 당시 개인호가 그날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으며 주변 지역주민들도 많은 인원이 이 전투를 기억하고 제보하였다. 지금 전쟁기념관이 개설되어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곳의 해설사로 있는 예비역 중령 한분이 무척이나 관심을 갔고 미군유해발굴에 노력했다.
"우리집 조상묘에 국군이 들어 있다."
경부고속도로 동탄분기점에서 봉담-동탄고속도로를 따라 필봉산터널을 빠져 나와 북오산으로 나오면 바로 외삼미동과 세교지구가 나오고 미군 초전비가 있다.
이 고개 언덕에 참전추모비가 서 있는데 예비역 장군이신 백승민 장군의 백씨 문중 묘소가 있는 곳으로 2000년도에 최초로 이곳에서 국군 유해 1구를 발굴 했다.
장군님의 제보로 찾아간 이곳은 최초는 발굴 대상지역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국군이 전투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군이 판쵸우의를 입고 죽었고 그래서 묘지 주인 아버지가 빨갱이들 모르게 살짝 조상묘 날개에 그대로 묻어놨다는 것이다.
처음 전사 지식이 없는 나였기에 반의반신 하면서 인접 보병부대 병력을 지원받아 굴토를 해보니 정말 판쵸우의가 나오고 수류탄과 탄띠까지 그대로 있는 완전 유해였다.
최초는 조상묘를 건들면 안된다고 호통을 치시던 어르신이 먼저 술한잔 따르고 절을 올렸다. 그래서 이 어르신의 제보로 지역 일대를 찾아다니며 많은 노력을 해 왔다. 한신대학교가 있는 양산동의 양산봉에서 독산성-지곶동-석산으로, 석산 구래고개에서 노적봉을 올라 학봉 남쪽으로 탑동에 이르는 서쪽 능선과 필봉에서 금오산을 지나 종합 운동장 방향으로 동쪽 능선등 내오삼미동 일대의 주요 야산과 마을은 다 들어가 보았다.
지역주민 간담회도 세미동과 지곶동 내삼미동에서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의견이 미군이 뭘 모르고 들어와 북한군에 포위되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주였다.
반월봉 꼭대기 부근에 개인호가 많이 있으며 그곳에서 탄피니 시레이션을 주어다 먹었다는 이야기, 전사한 미군이 산이 아니라 산 밑 부분에 방치되어 있었고 미군이 올라 오면서 모두 찾아 갔다는 이야기였다.
포병부대가 있었다는 평택위 갈곶리도 갈곶동에 들러 주민탐문을 해 보았으나 미군이 비내리는데 논속에 들어가 있다 북한군 탱크를 만나 혼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다.
2. 오산-갈곶리 전투
여기서 중요한 한 대목이 있다. 전사에 국군 제17연대가 이곳에 들어가 지원을 했다고 하는데 국군을 본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외삼미동에서 발굴된 유해도 후퇴하다 부상당하여 출혈로 숨져간 용사지, 건제를 가지고 전투한 군인은 아니였다. 하지만 우리 전사에는 상세히도 제17연대가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여 평택까지 올라왔고 역전에서 탄약과 일반 보급품을 하역하는 과정에 호주기의 오폭으로 7월 3일 15:00에 병력 200여명이 사상되고 차량 30대가 파손 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연대장인 백인엽대령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게 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한다고 되어 있다.
이날의 오폭은 역전과 피난민 철수로 등 수원-평택간에 이루어져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7월 5일 부터는 백색 광목천, 또는 흰 페인트로을 이용하여 아군 표시를 하게 되었다.
제17연대는 부연대장의 지휘하에 평택 북방 서정리(형재 서정동)에서 도보로 8km를 걸어 진위천을 건너 갈곶리-청호리선에 병력을 배치하고 스미스부대의 전방 추진요구에 제1대대에서 일부 병력만 차출하여 오산 북방 은개리로 추진 배치 하게된다.
따라서 제1중대가 배치되어 있으면서 제일 먼저 북한군과 미군 포병이 전투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이어서 우리 제17연대 병력도 전투를 했으나 중과부족과 적 전차의 위용에 눌려 소대장 1명 등 2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본대로 후퇴하게 된다.
이어서 본대도 적의 전차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17:00에 천안으로 집결토록하고 철수하여 7월 6일에 천안에 집결, 7일에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진천으로 이동한다. 이때 최초 본대와 떨어져 금강선에 남아 있던 1개 대대는 7월 11일까지 이곳을 지키다 미제34연대에 책임지역을 인계하고 7월 14일에 본대와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대의 마을마다 탐문과정에 국군이 전투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
일부 병력이 왔다 사라지고 미군도 오산에서 내려온 병력은 더운 날씨에 옷을 벗고 있는 경우도 있고 전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소풍나온 모습이었다는 이야기 많았다. 반면에 북한군은 전차를 타고 나타나 씩씩하게 보였고 곧 해방이 된다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평택역의 오폭이 남긴 엄청난 피해 사실은 어떻게 지금 이 지역에 각인 되고 있을까? 이미 운명하였지만 참전용사 고 이종록 중령님이 남긴 증언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평택역에 우물이 있고 그 자리에 전사자를 집어넣고 매몰했다."
이 사실을 확인하러 나는 5번의 탐사 및 탐문을 다녔다. 주말에도 혼자서 전철을 타고 이곳에 찾아와 역전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그 사실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그 당시의 열차는 증기 기관차로 역마다 물과 석탄을 보급하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용사님은 원래 제7사단 소속인데 한강선 방어작전이 종료된 이후에 열차로 재편성된 부대, 제17연대를 찾아가는 중이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이곳에서 그 핏물로 얼룩진 연대를 만나 실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조치원에서 합류하여 진천지구 전투현장에 투입되었다.
용사님은 전쟁중 어느 날에 평택역에 들러 그때 죽어간 인원들의 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았다.이 과정에 지역주민과 역무원들로부터 북한군이 내려가면서 시신을 일부는 철로변 고랑에 묻기도 하고 어느 시신은 우물속에 넣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부역자를 모아서 그렇게 통제하는 것이다.
나는 용사님 생전에 직접 모시고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 미군기지 건설과 연계하여 규모가 커진 평택역은 그 우물자리는 울타리가 처진 상태로 텃밭처럼 변하여 흔적은 없다. 다만 추정으로 그 위치를 철로반원의 협조를 얻어 대략 확인 하였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그 일대를 통제하여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지역주민을 만나기 위해 노인정과 이발소등을 방문하여 이 미스테리를 확인하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지역탐사를 해 보았다.
" 무슨 소리요. 내가 토박이고 나한테 물어요. 101인의 유해?"
그런 어느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과장이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전화하셨습니까? 제가 유해발굴을 통제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왜 101인의 유해를 발굴하지 않습니까?" 막무가내로 언성이 높으셨다.
"존함과 연락처를 먼저 알려주시면 차후에 확인하여 연락드리겠습니다."
"책상에 안장서 전화나 받지말고 평택 현장에 가면 지역에서 다 알고 있는데 뭐하는거요?"
전화번호도 안알려주고 실컷 욕을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이런 이유로 2000년부터 나는 이곳을 찾으려 노력했다. 외삼미동의 미군 최초 격전지를 탐사하면서 현재 이지역 향토사단 사령부가 있는 봉담지역(비봉, 매송)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텀문하는 과정에 비봉의 어느 마을에서 믿을 만한 제보를 받아 달려갔다.
처음 시작되어 별로 갖추어진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제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금은보화였다. 안내를 받아 간단한 제례준비를 하여 찾아간 곳은 동네에 크나큰 묘역이 있었다. 임금님 묘처럼 크게 조성되어 잘 가꾸어진 주변정리등 참전용사님의 무덤이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간단한 제례를 마치고 제보자를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러나 아니였다. 이곳은 이지역 사람들이 전쟁당시에 징집되어 갔거나 자발적인 입대로 경찰 또는 군인이 되어 싸우다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즉 시신이 없는 분들의 영혼을 모아 허묘를 만들어 계속하여 6월이면 지방유지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해 오던 곳으로 어느날 그 유족중 누군가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인원수가 70여명이나 각인되어 있는 돌판을 바라보며 이 동네에는 애국자가 많은 곳이라고 제보자를 치켜세워드리고 현장을 떠났다.
나는 중요한 것을 얻었다. 비록 자비를 들여 약식제례를 올렸지만 시신이 없이 위패에 이름을 새겨서 묘안에 넣고 무덤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에 탐문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태안지역 경찰묘역이나 강경경찰서 경찰 80여명의 무덤, 장사지역 학도병 묘역의 진실공방, 완도지역 지역유력인사의 형님묘소의 유해를 식별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0년 9월에 드디어 실체를 찾았다.
다시 찾은 평택역 우물터자리에 펜스가 처지고 있었다. 지역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땅이 팔리고 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몇이 군복을 입고 주변을 돌고 있는데 나이드신 한분이 배를 내밀고 다가왔다.
"뭐하러 다니시나요?"
"6.25전쟁 당시에 전사한 국군이나 경찰의 유해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요. 잘 만났소. 점심시간인데 국밥 한그릇 살테니 먹으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유해를 빨리 찾아 현충원에 모시고 그 유가족에게 알려주어 원한을 마무리하게 도와 주시요!"
갑작스런 제안에 어정쩡하게 끌리어 평택 서부역 뒤에 있는 골목길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어르신이 바로 전화를 하여 왜 101인의 국군 용사를 찾지 않느냐고 역정(?)을 내시던 분이였다. 국밥집에 앉은 우리는 따뜻한 국밥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 역전 뒤는 왜 돌고 있었지요?"
"혹시 옛날 우물자리를 아시나요. 그곳에 평택역에서 숨져간 많은 시신이 들어가 있다는 당시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있어서 2000년부터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는데 조금전에 만났던 그 펜스속에 우물 위치가 잇다고 당시 역무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았습니다."
"내가 당시 11살로 여기서 줄곧 살았는데 그 사실은 모릅니다. 워낙 북한군이 탱크로 밀어붙여 미군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사실 국군은 몇명씩 모여서 기찻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도 하고 큰부대가 이곳에 주둔하지는 안했습니다. 내가 어린나이라 돌아다니는데 자유스러웠는데 지금 이 동네도 그때는 집이 많은게 아니고 논이 대다수였고 여기 국밥집일대가 몇가구 모여 살았지 띠엄띠엄 집들이 있었지요. 여기 역전일대에 많이 죽은 것도 피난민들이 많아요. 호주기를 쌕쌕이라 하는데 그 비행기가 포탄을 퍼부어 많은 민간이 사망했어요. 그럼 어떻게 치워요?"
"누가 치우지 못하고 내버려두어 동네 개나 당시에는 여우들이 있었다고 하던데 물어뜯고 난리였겠지요. 지방을 돌면서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맞아요. 개들이 주둥이가 벌겋게 되어 미친개들이 날뛰고 시체 썩는 냄새가 워낙 독하여 완장찬 프락치들이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서 여기저기 묻었는데 나도 아버지따라 묻는데 가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 모두 아파트단지가 되었고 철도길에 죽어있는 사람들은 철도길 옆으로 배수로같은 곳에 밀어넣어 덮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곳 우물속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어요."
"그럼 선생님이 말씀하신 "101인의 충혼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정도로 국군이 전사했다면 굉장히 많은 희생이고 기록에 남을 법도 한데 사실 기록이 없어요. 물론 관련 군인이 다 전사해버렸으면 남길 사람이 없어서 묻혀버릴 수도 있지만요."
국밥이 다 먹어가고 우린 일어서 선생님을 태우고 "101인의 충혼비"로 향했다.
평택역에서 그리멀지않은 주택가에 있는 야산에 갔다. 지역주민들의 산책코스로 낮이지만 여러사람들이 그늘을 찾아 벤치에 앉아있기도 하고 아주머니부대들이 일부 걷기도 하는 평화로운 동네 복판에 충혼비가 있었다.
"선생님, 101인의 충혼비란 푯말이 보이질 않는데 어디에서 보셨나요?"
"내가 직접 묘를 만들때는 없었고 소문을 듣고 나도 찾아와서 보았고 10여년 전까지는 이곳에서 추모행사가 있어 오기도 했는데 그후로 오지않았어요. 분명 이곳에 있었는데... "
사실 벌서 70년전의 전쟁이고 지금 살아계신 참전용사님과 그 당시를 기걱하는 지역주민의 연세가 80이상이다. 그러니 그 기억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린 단 1%의 가능성을 찾아서 가야하고 그 제보를 믿어야 한다. 이런 경우가 수없이 많다. 실망도 그래서 없다. 오히려 제보자분이 증언해 주신 참전용사님에게 미안하고 감사해 한다.
우린 선생님을 모시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나 다른 곳에 옮겨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곳일대는 주택가이면서 학교들이 상당히 많다. 초,중,고등학교가 많다는 이야기는 역동적인 동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평택역으로부터 동쪽으로 1번국도가 그 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45번도로와 38번도로가 우회도로로 발달하여 교통의 중심지다. 세교동과 비전동 일대의 평택산업단지와 소사벌지구가 발전하면서 옛날의 모습은 사리지고 있다.
전쟁이 났다는 것은 이미 북하군이 목전에 왔을 때에 알았다. 동네의 몇몇 남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인민해방군이 왔다며 소리지르고 나와서 환영하라고 난리를 치고 다니기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알았다. 전쟁이 나고 무려 2주가 지나가는 싯점이다. 그러니 얼마나 당시의 통신체계나 연락수단이 낙후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부 있는 집이나 공무원 군인 경찰가족들은 전쟁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동네사람 몰래 피난을 떠나기도 하고 한양에서 피난온 일가들이 찾아와 어수선한 시기임에는 틀림없었다 한다.
그런데 완장차고 날뛰는 사람들이 주로 머슴살이하던 사람, 아니면 빈둥거리고 놀던 사람 또는 일부 대학에 다니던 인원들이 앞장서서 해방군이라하니 도대체 누가누구인지 분간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얼떨결에 뒤통수를 한대 맞고 실신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우왕좌왕 하는데 북한군은 마을에 도착하고 하늘에는 난데없는 비행기들이 쌕쌕거리며 나타나 불폭탄을 투하하여 혼비백산하여 숨어들어야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점점 강도가 높아져 가는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모르지만 길거리에 사람이 죽어있다는 소문이 퍼져가고 실제 동네 개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주둥이가 피범벅이 되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제는 동네에 여성동무가 등장하여 집집마다 호구조사를 하고 다니고 밤이 오면 학교나 공회당에 모이라는 빈도가 높아져 갔다. 이미 해가 지면 불빛을 내보내지말라는 강제와 누가 누구를 잡아갔다는 등의 알 수없는 소문이 확 돌아서 밤에는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학교가 정상적으로 문을 열고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이 바뀌어 있고 일제시대에 몰아치던 황국시민 기도문처럼 김일성(사실 그때는 이자가 누군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무슨 독립군 투사인지 민족주의자인지)장군 만세를 삼창하게 하고 일부 선생님은 보이질 않았다. 가르치는 것도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장백산가를 배우고 미제국주의를 까부수워야 한다는 극단적 표현과 들어보지도 못한 인민이 함께 먹고 살아야 한다며 집집이 있는 것을 내놓게 하는 등의 아리송한 미끼로 당시에 많은 소작농들의 인기를 끌어 모았다.
잘살고 이름있는 가문들의 탄압이 점점 거세게 밀어닥쳤다. 이런 이야기는 어느 곳이나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는 기본적인 것이다. 인민군의 지휘부나 내무서원이 위치하는 곳은 실제 인민재판이 열리고 사람을 죽이게 하고 죽은 사람을 갔다 버리게 하는 등의 비인륜적 행위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전국에서 벌어졌다.
그러니 이곳 비산동 일대도 평야지대에 먹고사는 것이 없는자들은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로 본인들에게 땅을 주고 이장이든 통장이든 직함을 주니 완장 두르고 난리치고 다니는 것이다. 있던 집은 기죽어 있고 경찰이나 군인이 있던 집은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어야 한다. 밤마다 아버지가 끌려가 사라진 자식의 행태를 고해야 하고 모른다는 대답에 실컷 매맞고 돌아와야 했다. 주변을 돌아보며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 들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제보나 증언은 듣지 못해도 실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시금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었고 더운 날씨에 일부 어르신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르신 혹시 이 충혼탑 주변에 "101인"의 무덤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거 파내어 새로조성된 평택호 관광지에 안보공원으로 옮겼는지 한참 되는데요."
"선생님 제가 저 밑에 역전에 살고 있는데 얼마전까지도 직접와서 보았는데 그게 왜 그곳으로 갔데요?" 기가막힌 답변에 아저씨가 바로 받아서 다급하게 물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요. 20년도 넘었어요. 아저씨는 그걸 왜 찾아요?"
" 이양반들이 TV에 나오는 국방부 유해발굴팀인데 그분들을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하려 조사하고 있어요. 내가 11살에 전쟁이 나고 그 당시에 평택역 주변에 죽은 군인들을 모아서 묻어놓은 곳이 "101인의 충혼비" 위치인데 당분간 안오다 오늘 와보니 흔적도 없네요."
"벌써 이곳 충혼탑은 포승지구로 옮겨갔어요. 오래된 이야기인데 여기서 시신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
좀더 나이드신 어르신이 휠췌어에 할머니를 태우고 나오신다.
"혹시 이곳에 오래 사셨나요?"
"집안이 이곳에 토박이요만 어쩐일로 군인들이 다 와서 있나요?"
"혹시 이곳 충혼탑 지역에 6.25전쟁 당시에 숨져간 101인의 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시는지요?"
"그걸 왜 물어요. 벌써 오래전에 군에서 다 파가고 아무것도 없어요. 전쟁 끝나기전에 군인들이 왔었어요. 저기서 화장해서 가져갔어요.!"
어르신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렇게 변하고 그런 소문이 막혀있었다니 이해가 안간다고 한다. 하지만 더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동일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평택역으로 돌아오는데 어르신이 본인 집으로 우릴 안내하여 4층인지 5층인지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따뜻한 차한잔에 과일을 먹었다. 이지역에서는 잘살고 있는 유지급으로 본토박이로는 가장 연세가 많으셨다. 일어서는 우리를 따라 포승지구 아산만 유원지에 가시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집에 계시도록 하고 우리는 포승지구 현충탑으로 달렸다.
"101인의 무덤은 없었다."
아산만 유원지에 도착하여 먼저 현충탑을 찾아 묵념을 올렸다. 현충탑 주변에 이런저런 내용이 새겨진 충혼비들이 산재해 있다. 결국 이곳도 평택 시민으로써 전쟁중 숨져간 인원의 경찰이나 군인, 학도병등 다양한 성격의 숨져간 분들의 명단이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101인의 무덤은 없다.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사실 101명이 죽어 묻혀있다면 웬만한 학교 운동장만한 넓이여야 한다. 추론컨데 아마도 전쟁직후에 여기저기 죽어있는 유해를 한곳에 모은 것은 사실익고 그 숫자가 101인이 될 것이며 다만 그 뜨거운 여름날에 제대로 시신이 보존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일시적 묻혔다가 화장처리 되어 국군묘지가 만들어지고 처음 무명용사님들의 유해를 화장하여 지금의 위패실 지하에 모셨는데 그때 봉송되었다고 믿어진다.
"정말 제17연대는 북한군과 전투를 했는가?"
이렇듯 전쟁이 남긴 상흔은 너무나 많은 상처를 안기어 주었다. 과연 외삼미동에서 처음 시작된 미군과 북한군의 전투에 우리 독립연대인 제17연대 일부병력의 평택북방지역 전투 참전사실 여부도 엄밀히 다져보면 국군이 전투하는 모습을 본 지역주민을 우린 만나보지 못했다.
현재 한국전쟁사 제3권 오산-갈곶리전투(361~367p)에 기술된 내용을 보면 상당히 전투를 많이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의문점이 많다. 다만 오스트레일리아 공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피해는 많은 지역주민들이 목격했고 백인엽 당시 연대장도 파편상으로 부상을 당해 후송을 간 것은 사실로 판명 되었다. 참전용사님들도 증언을 많이 했다. 그런데 실제 북한군과의 전투는 들어보지 못했고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제1권185~188p)에도 국군과 전투 기록은 없다.
평택을 지나 오산천 넘어 은계리에 1개 대대가 올라가 전재하여 전초진지 작전을 하고 갈곳~청호리선에서 주진지 전투를 하여 로켓반에서 전사 2명과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행기 오폭으로 2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고 한다면 개전초에 옹진반도에서 배로 서해바다를 탈출하여 온 연대의 전투력이 얼마나 되었는가에 의구심이 든다. 수도권 방어에 참여한 각 부대들의 전투력이 사단별로 겨우 대대병력 수준이라는 사실에 견주어보면 많은 의문점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전쟁기념관에서 기념행사를 하는데 참가하여 보니 기막힌 참전용사 증언이 있다."서쪽으로 서쪽으로 가 바닷가에서 돛배를 타고 제주도에 1개분대 규모가 상륙하였다."
죽미령에서 서쪽으로 계속가면 화성시 팔탄면과 장아면이 나오고 밑으로는 평택 안중면이 나오는데 살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분의 증언이 북한군이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줄 몰랐고 잠깐 갔다 다시 원대 복귀하는지 알았다 한다.
"전투중에 국군이 함께 전투했나요?"
"그 당시에 한국군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우리 주변에는 북한군 밖에 없었다."
그 용사의 답변은 누구누군지 알아볼 사정이 아니였다고 한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북한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본인들은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라 서쪽으로 달려나가다 보니 적이 따라오지않고 모인 인원이 10여명이 되어 무조건 달려 탈출했는데 바다가 나왔단다. 여기서 돛배를 타고 그저 바다로 나가 바람따라 간 것이 제주도였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 부산에서부터 통역을 담당했다는 한국인 대위 한 분이 미군참전용사와 함께 계셨는데 그분 이야기로 국군이 미군병사가 길거리에 부상당하여 있는 것을 제17연대 국군이 포복으로 접근하여 구출해 주었다고 한다. 장소는 오산 근처나 평택은 아니고 성환인지 천안 못미쳐 1번도로변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싸웠다는 국군은 있는데 봤다는 주민은 없는 이 현실이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평택역에 비행기 오폭으로 숨진 국군이나 지금까지 언급한 101인의 묘비에 묻혔던 인원은 제17연대 소속도 일부 있고 또한 한강선 방어를 마치고 미군과의 전선조정으로 중서부전선으로 이동해 가는 국군(고, 이종록 중령은 당시에 제7사단 소속이었고 재편성 되면서 수도사단으로 전환하기 위해 천안으로 내려가다 이곳 평택역에서 폭격을 받았다고 증언)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고 사료 되었다.
'50년 7월 5일부터 시작된 죽미령전투(오산~갈곶리전투:국군 제17연대)는 6일에 평택이 점령되고 8일에는 천안까지 밀려내려가게 되었다. 피해현황이 미군은 스미스 대대장이 인솔하여 천안에 도착한 인원은 406명중 86명이었고 포병부대는 134명이 105mm 야포 6문을 가지고 참여 했으나 얼마가 생환했는지 알 수 없었으며 장비는 모두 유기되었다. 소련군 자료에는 장교 및 사병 6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되어 있다.
4.. 평택-천안 전투
위의 전투는 '50.7.6~8일까지 경부국도 축선에서 미 제24사단의 제34연대가 북한의 제4사단 및 제105전차사단과 치룬 전투다. 사단장인 딘 소장은 7월 4일 부산에서 열차로 북상한 제34연대에게 7월 5일 오전에 평택과 안성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라 명하여 동 연대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으면서 전방으로 먼저 추진하여 죽미령에 올라간 스미스 대대의 전투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철수하는 스미스부대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은 보전협동으로 미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안했고 연대가 바로 북한군이 뒤따라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진지가 유린되어 방어다운 방어작전을 하지 못하고 천안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딘소장은 연대장을 교체하여 마틴 대령을 임명하게 된다.
적의 위력을 깨닫고 3.5인치 로켓포와 105mm 대전차 포탄의 필요성이 제기 되다.
7월 8일에 북한군이 천안에 밀어닥치자 연대장이 직접 2.36인치 로켓포로 적 전차를 공격하다가 적 전차로부터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보직 하루만이었다. 지금 천안 삼거리에 가면 장렬히 전사한 마틴 대령의 추모공원이 있다.
평택 전방에서 급편방어중이던 제1대대는 적의 탱크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대부분의 중장비를 유기한채로 천안 남쪽으로 후퇴하기 급했고 제3대대는 천안 전방 지금의 천안 단국대학교가 있는 곳과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일원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적의 포위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무려 살아서 천안 남쪽으로 탈출한 병력이 불과 175명이고 대대 병력의 2/3가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이 당시에 미 제24사단은 제21연대를 대전으로 제 19연대는 대구에 잔류하다 미 제25사단이 들어오면서 조치원으로 북상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천안의 제34연대는 공주방면으로 철수하게 되고 제21연대가 천안 바로 밑의 전의-조치원으로 투입하게 되며 제19연대가 대평리로 진출하여 금강선 방어에 참여하게 되었다.
금강선 방어선을 선택하게 되는 유엔군
따라서 이전투를 직접 목격한 딘소장과 미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금강선에서 방어할 복안을 갖게 되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의 전투력이 그 이상임을 깨닫게 되며 본국에 105mm 대전차 포탄과 3.5인치 로켓포를 긴급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성환에서부터 천안 그리고 조치원에 이르는 구간이 지금은 개벽하여 그 당시의 전투현장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단국대학교 내 야산이 남북으로 능선이 2~3km 발달 되어 원형이 보존 되어 있으나 미군이 주로 전투를 하고 후퇴하였기에 유해매장에 대한 흔적이나 지역주민의 제보는 미흡한 편이다. 그 이유는 미군은 바로 역습으로 9월에 올라오면서 유해처리반을 투입하여 웬만한 시신은 모두 처리 하였다고 한다. 다만 일부 부상중에 탈출하여 야산이나 계곡 또는 밭언저리에 숨져간 인원이 더러 있었는데 그것은 일부는 북한군의 통제로 수습되어 알 수 없게 되고 일부는 지역 주민이 가지고 있는 시계나 소지품을 획득한 후에 매장해 버려 위치를 찾기가 곤란하다 한다.
5 . 전의 -조치원 부근의 전투
'50. 7. 8일에 미 제34연대의 뒤를 이어 제21연대가 전선에 투입되어 전의-조치원간 1번도로상에서 저지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북한군은 미 제34연대를 추격하여 제4사단이 공주방향으로 우회하고 제3사단이 전면에 나타나 미 제21연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 제21연대는 제1대대를 지금의 개미고개 전방, 전의 면소재지 직후방에 도로를 연하여 배치하고 제3대대를 개미고개 좌우측 능선에 배치하여 적의 보전협동작전을 막으려 했다.
도망치는 제34연대는 지금의 논산-천안고속도로성 정안의 광정리와 의당면의 수촌리에 차례로 저지진지를 운용하며 지연전을 하면서 연대본부는 공주에 들어가게 되고 포병부대는 금강 남안의 공주 검상동 일대에 배치하여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곳 개미고개전투(전의)에서 1대대와 3대대가 워낙 많은 피해를 입고 대다수 무기를 유기하여 사실 전투력 발휘가 제한되었는데 반면 적은 공격하던 제4사단이 후속하는 제3사단과 인수인계과정에 어떤 착오가 생겼는지 바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1~2일의 시간적 공간이 발생하게 된다.
차후에 설명하겠지만 전사책에 나와 있는 내용보다도 실제로는 유구읍 전방의 차령고개, 유구천일대에서도 미군이나 국군이 밀려내려오고 경찰 기마대가 참여하고 등등 이야기가 수 없이 많은 곳이 여기다.
"내가 직접 처음 발굴한 완벽한 유해 1구"
나는 계룡대에서 발굴업무를 하던 '00년도 시절에 전동에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와 달려가 보았다. 본인의 고구마밭에 탄피가 나오고 철모가 나온다는 것이다. 차를 달력보니 개미고개에서 공주에 이르는 627번 지방도에 붙어있는 밭인데 깊게도 묻히지 않고 길과 밭 접합점에 묻혀 있었다. 직접 통제하여 땅을 파고 발굴해 가며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당시에 우리에게 용역계약됨)이 오기를 기다렸다. 발굴은 다 되었으나 전문적인 체질인류학적 판단은 교수팀이 해야 되고 난ㄴ 굴토된 여러 유품을 감수하였다. 탄알도 모두가 모시나칸트탄이었고 야전삽도 미군 것이 아닌 삽날이 각이 진 쏘련제였다.
문제는 철모가 발굴 되었는데 바로 정수리 옆 부분에 명중되어 총알 구멍이 나고 유해도 머리부분에 뻥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철모의 형태가 쏘련제가 아니고 미군 것이였다. 밭을 경작하는 할아버지 나이가 80이 넘어가는데 본인이 전쟁 당시에 목격한 바로는 미군이 후퇴해 가는데 북한군이 쫒아가는 길에 미군이 엄청난 사격과 비행기가 나타나 초토화 시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피난을 그후에 떠나 시체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르고 나중에 서울수복이후에 들어오니 아직 치우지 못한 시신들 몇구가 남아 있어 그저 물골이나 땅이 꺼진 부분이 있으면 그 속에 밀어 넣어 버렸는데 대부분 북한군 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팔둑에 시계가 열개씩이나 있더라~"
처음 시작되는 발굴 사업에 실제로 나혼자 병력을 통제하여 완벽한 1구를 찾아냈다. 전투화도 신고 있는데 전투화나 철모는 북한군 병사는 없다. 만약 북한군이라면 앞선 전투에서 우리 용사님이나 미군 것을 빼앗아 쓰고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사이 동네분들이 몰려들어 나누는 이야기가 북한군이 욕심이 많아서 어떤 놈은 시계를 열개나 팔둑에 차고 죽은 놈도 있고 어디서 구했ㄵ지 달러를 주머니에 가득 가지고 있는 놈도 있고 쌍안경을 차고 있는 놈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놈 등 미군유품을 대부분 몇 개씩 가지고 있더라고 한다. 얼마후에 박사팀이 도착하였다. 나는 유해를 인계하고 현장을 떠나 전의 면소재지로 향했다.
"기타치고 포커하고 커피 마시는 검은 색 군인들~!"
먼저 전의의 노인정에 들러 간담히를 가졌다. 지금은 간담회 비용이 책정되어 많은 지원이 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런 비용이 없어 자비로 하던지 아니면 노인회장님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그래도 기막힌 이 사실을 50년만에 세상에 들춰 낸다는 사실에 흥분되어 모두가 진실되게 간담회에 많은 분이 참가해 주셨다.
"저기 개미고개 전투 할 당시에 그걸 목격하신 분이 계시나요?"
"나는 피난도 안가고 계속하여 여기 살아왔고 실제 전투도 옆에서 다 보았소."
"그러세요. 그럼 혹시 한국군이 전투하는걸 보셨나요?"
"저기 기차에 실려서 떠나는 국군은 많이 보았고 철길따라 걸어서 조치원방향으로 내려가는 군인들을 많이 보았지. 하지만 이 일대에서 국군이 총들고 싸우는 것은 보질 못했소."
"그럼 미군이 개미고개 능선에서 전투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목격하셨나요?"
"무슨 소리요. 싸우기는 코쟁이들 와서는 그 개미고개, 지금 기념지인지 추모비인지 있잖아요? 그 밑 논바닥에 텐트를 치고 발가벗고 노래하고 기타치고 놀려왔더라고."
"덕고개 직전 굴다리에 사람 목이 걸려 목이 떨어져 죽은 경찰을 직접 묻었다."
주변에 일부 어르신들이 맞장구를 치셨다.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적군도 아군도 안보이고 기차가 요란하게 군인들을 실어나르고 피난민들이 기차에 매달려 객실 위까지 꽉 달라붙어 내려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내가 목격하고 직접 아버지와 매장한 경찰이 있어요. 방앗간 옆 논바닥이요"
"네? 왜 목이 떨어져 죽지요?"
"기차가 달리는데 목이 굴다리 위에 걸린거지. 야간에 잘 안보이니까 아차하는 순간에 그렇게 되고 3명이 떨어져 죽었는데 경찰이야. 그래서 나중에 아버지하고 끌어다 저기 물골에 밀어넣고 말았지. 누가 나중에 찾아오지도 않아요. 그런데 여기 길이 그때보다 한 3배는 커지고 방앗간도 없어지고 홍수도 나고 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
기가막힌 이야기다. 제보였다. 전의역에서 691번 도로, 개미고개 근처에서 627번 도로를 이용하면 공주에 이르게 된다. 전사에는 전의와 개미고개 일대에서 주전투가 벌어지고 비행기의 폭격으로 북한군 전차와 차량둘이 엄청 피해를 입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분들의 이야기가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고 한다. 미군들이 군데군데 뭉쳐서 자기들끼리 놀고 목욕도 하고 텐트안에서 포커도 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무슨 전투야, 일방적으로 미군이 진거지~!"
개미고개 밑에 원래 지금의 터널이 아니고 전쟁 당시에 터널이 있었다. 하지만 천장이 일부 주저앉아서 폐쇄되고 그 밑으로 터널이 생긴 것이란다. 터널 안에 들어가니 흙이 쏟아져 내려 일정구간에서 들어갈 수가 없다.
"할아버지 북한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셨나요?"
"그럼요. 북한군이 총을 들고 걸어서 논둑을 이용하고 조천강 둑을 따라 계속 내려오는데 미군은 그저 기타치고 커피 마시고 놀더라니까"
"덕고개 근처에서 실제 전투는 벌어졌는데 순식간에 미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지금 가봐요 그 곳 기찻길 둑방에 당시에 미군이 파놓은 호들이 남아 있을거요"
또다른 어르신이 말을 이어갔다.
"여기 저 언덕에 향교가 있는데 그 때도 향교요. 그곳이 인민군 지휘소가 있었고 미군 포로들이 붙잡혀와 마당에 가득했어요"
"그럼 혹시 그곳에서 죽어나간 사람들 무덤이나 가매장 했다는 이야기 못들었습니까?"
"사실 그 당시에 이곳에 포로들을 잡아 가둬논 집들이 몇이 있었고 빨갱이들이 설치고 다녀 밤에는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 포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십니까?"
"지금도 그 집들이 있으니 찾아가 물어보세요. 앞까지는 알려드릴테니까"
그러자 한 어르신이 본인이 안내하겠다며 일어선다.
오토바이를 타고 앞장선다며 따라 오라 한다. 나는 운잔병과 함께 바로 따라나섰다. 먼저 간 곳이 덕고개 일대였다. 덕고개 일대는 전의역에서 불과 1~2km정도 밖에 안떨어져 있었다. 굴다리도 있고 100~150m정도의 구릉성 야산이 있으면서 여러가지 공원이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공사현장에 들어가 남아 있는 야산의 개인호 실태를 탐사하고 공사관계자를 만나 유해가 나온다면 신고해 달라 부탁도 했다. 이번에는 전의향교 건물일대로 갔다. 주변에 화단도 조성되어 있고 향교 뒷편이 보존되어 있었지만 집단 매장지같은 그런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나와서 3명의 죽은 자를 묻었다는 과거 방앗간이 있던 노루목근처로 갔다. 하지만 경작지가 정리되어 있고 과거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이번에는 개미고개로 갔다.
먼저 폐쇄된 굴입구를 찾아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묵념을 올리고 굴 위로 올라서니 바로 개미고개 전적비가 보인다. 그 전적비 바로 위에 식당이 있는데 주인양반이 계셔서 혹시나 미군들이 자주 오느냐 물으니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혹시 미군이나 국군이 묻혀있다는 소문같은 것 모르시나요?"
"내가 어릴때 이곳에서 살았어요. 바로 길건너 저곳이 미군 대위가 숨져간 곳이고 북한군이 저 밑의 논으로 올라와 미군들은 텐트에서 주로 잠들다 멀살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저 곳에 가면 미군들이 파놓은 호들이 한 20여개 있어요"
"다른 내용은 모르고요?"
"여기 뒤로 올라가면 운주산성이 나오는데 한 500m 가면 호들이 정상부분에 꽉 차있어요. 어릴 때에 그곳에서 탄피같은 것을 주워서 엿과 바꿔 먹었던 기억이 나고 총싸움 놀이도 하곤 했는데 요즈음은 워낙 우거져서 지금도 보일는지 모르겠네요"
"눈앞에 나타나는 개인호들, 산 정상에 200여개가 넘는다"
운주산은 455m 높이의 주변에서 꽤나 높은 산이고 백제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운주산성이 있는 곳이다. 개미고개에서 올라가면 한시간 반 정도 올라서야 한다. 그러나 격전지는 바로 10분정도 올라서면 조그만 고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보면 앞의 전의 일대가 다 보인다. 바로 이곳에만 호들이 즐비하게 구축되어 있다. 나와 마을 어르신은 걸어서 미곡리 마을 쪽으로 산을 내려왔다. 이유는 이 어르신이 어렸을 때에 산 밑부분에 철모와 탄ㅍ들이 많이 있었다 하여 탐사를 해 보았다.
다시 어르신과 마을 노인정으로 돌아와 탐문 및 탐사내용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어느 분이 밖으로 날 나오라며 보자한다.
"그거 유해나오면 뭐 보상이라도 있소?"
하지만 그당시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 죄송스럽지만 없다고 하자 조금은 힘이 빠진 모습으로 "하기야 죽은 사람을 찾는 것인데 돈으로 하면 안되지~"라며 본인이 두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이 어딘지 아신다고 한다.
"감사 합니다. 지금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다음에 오시면 현장에서 알려주겠어요."
"혹시 국군이에요, 아니면 북한군 또는 미군~?"
"알기로는 북한군일 겁니다. 총에 맞아져 부상을 당해 우리집에 숨어들었다 죽어서 아버지가 밤에 옮겨서 묻었지요."
나는 집 전화번호를 받고 노인정에 다시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현장을 떠났다.
2000년 7월이다. "유구에 경찰서장이 말타고 전투하다 전사했다."
'00년 4월 3일 다부동 328고지에서 50년만에 최초로 유해발굴 사업의 첫삽이 올려진 후 많은 제보 전화가 들어왔다. 이 당시에 육본에 나는 혼자서 이 업무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4월 20일에는 정식으로 과가 탄생하지만 그때는 제대군인지원과에 나혼자 기획총괄을 다 하고 있었다. 국방부 6.25전쟁 50주년 기념 사업단이 무려 78명으로 T/F가 구성 되어 있는데 대본영의 우리는 단 한명인 내가 78명을 상대토록 배려(?)하였다. 참 나쁜 군인들 이었다.
전의를 갔다오는데 전화가 왔다. 부대 남문의 민원실에서 민원인이 기다리는데 공주 유구면에서 왔다기에 달려가 만났다. 그랬더니 유구에 많은 전사자가 묻혀 있다며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단숨에 달려가 유구읍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제보자를 만났다. 70대 어른이 몇 명 계시다.
"육본에서 온 발굴통제장교 이중령입니다."
"아 그러세요. 내가 전화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동네 친구들입니다."
"어디에 누가 묻혀 있다고 하신 것같은데 경찰관 경위라고 하셨지요?"
"공주 경찰서에서 말을 타고 왔는데 그 사람은 적 논두렁에 죽어서 나중에 유가족들이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맞은 편 밭언저리에 100여명이 묻혀 있다고 동네 소문이 있습니다."
"국군 기마중대의 전사 :구전사에는 전투기록이 미흡하고 신전사에 기록이 다소 있다."
우린 야산으로 올랐다. 밭과 산이 함께 있는데 예전에는 산이었는데 도시사람이 사서 밭은 일구어 놓고 별로 뭘 심지도 않고 있는 밭이라고 한다. 그러니 설렁 이곳에 가매장 자리가 있다한들 흔적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혹시나 밭을 일굴 때에 어떤 유품이 나왔는지 당시에 포크레인을 운전한 ㅅ람을 수소문하여 찾아서 물어보니 본 것이 딱히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전사에 보면 우리 독립기갑연대의 기마대대 일부가 명에 의해 미 제34연대를 지원하러 공주에 들어왔고 이곳 청양 에산 일대까지 진출하는 과정에 적과 유구 국민학교에서 조우하여 60여명을 사살했다('06.11 발행 한국전쟁사 3권 407p)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95년도 발행한 한국전쟁사 상권 246p에는 국군기병중대가 검상리의 미군 포병대대를 지원했다는 기록만 있었다.
동네분들이 여럿 모여들어 당시를 이야기하는데 말을 타고 경찰이 몇명 나타나 전투를 했고 바로 강 남으로 후퇴해 갔는데 경위 한분이 죽어서 논둑에 있어 그대로 가매장 되었고 그 후에 밤에 그 유가족 되는 분들이 와서 발굴해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국군의 기마대(당시에 대대 본부는 대전에 위치, 6중대가 지원 나옴)가 전사대로 공주에 있는 미 제34연대를 지원 나와서 정보수집차 금강을 올라서 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내려오는 북한군 제4사단 병력을 만났고 적은 설마 오합지졸 후퇴하는 미군이 설마 역습을 하리라고는 생각을 안하고 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다 기습을 받고 많은 인원이 죽었다고 추정은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기마대 복장이 혹시나 경찰과 비슷할 수도 있고 실제 경찰도 국군과 함께 정보수집차 동행할 수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유구읍에서 북서쪽으로 한 5km 올라가면 차령고개가 나오고 지금은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상의 차동터널과 차동휴게소가 위치하는데 동네 분들의 이야기가 전쟁 당시에 바로 차령고개 남쪽에서 올라서는 곳에 집이 한채 있었고 그곳에 죽어있는 군인들이 있었는데 피난갔다 와보니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은 집도 없고 다만 집터같은 곳에 무너진 돌담만 남아 있다 한다. 현장에 함께 동행하여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미군은 주로 유구천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서 내려갔고 충남농원이 있는 명곡천과 유구천이 만나는 신달리와 명곡리 사이 공간에 텐트를 치고 자다 기습을 당하여 차며 텐트를 그대로 두고 미군이 달아난 사실을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국군의 기마병은 보질 못했다고 하니 전사가 사실인지 감잡을 수 없다. 다만 죽어 매몰 되었다는 100여명의 신분에 대해 어떤 분들은 경찰이 죽인 빨갱이족이라 하고 또 어떤 분은 인민군과 지역 프락치가 죽인 양민들이라고도 하고... .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 그러나~"
나는 국방부 사업단과 협조하여 중장비를 사용하는 비용을 염출하였다. 그리고 제32사단에 임무를 부여하여 포크레인으로 묻혔다는 곳을 '50년 8월에 땅 주인과 협조하여 부분 굴토를 하였다. 전수 발굴하기란 부담이 되니 지뢰탐지기를 이용하여 조금의 미세한 신호소리만 나도 그런 곳을 거의 3일간 파내어 정밀분석을 해보았다. 그러나 전투 유품 조차도 하나도 발굴 되지 않았다.
공주경찰서와 청양경찰서와도 협조하여 이곳에서의 경찰의 전투사를 확인하려 했으나 비협조(?)적인 관계로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 동네에 민간인 밭인데 군인이 10여명 매장되어 있다."
이런 와중에 공주경찰서의 한 양심적인 경사로부터 의외의 제보를 받았다.
'내가 어릴때에 살았던 동네에 전쟁당시에 마을사람들이 울력을 나가 시신을 모아서 늘늘히 묻었는데 지금 그밭이 그대로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경찰과 금강의 금남교가 있는 대평리 위의 반곡리에 갔다. 바로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뒤에는 200m 괴화산이 서있는 평화로운 동네였다. 그 당시에는 세종시의 열풍이 가라앉고 있어 소유주와 협조하여 굴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이 주로 한 곳으로 국군이 집중적으로 전투한 곳이 아니였다. 나는 자료 조사를 위해 해당 동네의 어른은 다 만나 해당 밭에 정말 유해가 있느지, 있다면 아군인지 북한군이지, 혹은 미군이 묻혀 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파해쳐 보았고 괴화산에 오르고 부용봉(223m), 꾀꼬리봉(271m)을 답사하였다. 이어서 300m어간의 대전 유성구 수남동 수양산 금병산, 발산리 ㅛㅇ담리 일대의 고지군, 제32사단 신병교육대 뒤산인 국곡리 산정상과 성강리의 국사봉, 공주 마암리의 금강 차안에 대한 탐사를 몇번이고 해봤다. 이 당시는 국군 유해발굴이지 미군의 유해발굴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래도 미군이 얼마가 전사했는데 모르는체 한다면 도의적 책임이라 판단되어 자료를 모으려 죽기살기 쫒아 다녔다.
"북한군이 강을 건너 저 산속에 들어갔는데 미군이 와서 대낮에 통신선을 깔고 있었다."
전쟁이 속성은 꼭 강한자 만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에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우리 한반도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며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긴 전쟁의 기록은 없다. 실제 미군이 죽미령에서 시작하여 평택-천안-조치원으로 내려서는 과정도 처음에는 증강된 스미스 1개 대대가 북한군 정규 사단 및 탱크 사단과 맞붙어 싸웠다.
천안이니 조치원의 개미고개 전투 이어서 금강-소백산맥 선에 이어지는 전투도 미 제24사단이 북한군 2개 군단과 싸운 전투로써 북한군은 사실 이 초기전투(6.28~7.12)에서 수많은 탱크와 병력을 미군의 공군력에 내주어야 했고 이것이 결국 속도전으로 경부축선으로 부산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이곳 대평리도 밀리던 미군이 먼저 금강을 넘어 차안상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대전에서 올라오는 제19연대를 기다리는 형국에 지쳐있는 인원들이 제대로 경계근무가 될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뒤를 쫒는 북한군도 천안과 개미고개 일대에서 무지막지한 미군의 화력을 경험한 터라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대낮에 미군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일대와 근남교 북쪽 일대에서 방어준비중이고 북한군은 은밀하게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합강리와 세종리 노적봉(181m)일대에서 야간을 이용하여 강 이남으로 침투부대가 은밀기동으로 들어갔다.
사실 말은 은밀기동이지만 이곳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는 저 몇백미터 앞에 미군이 방차통을 메고 통신을 깔고 있고 북한군은 그 통신선을 따라 내려와 밤이 되길 기다리다 동네 아이들과 일부 프락치의 도움으로 도보로 넘어갈 수 있는 장소를 택해 많은 인원이 급속도하로 괴화산 일대로 숨어들어 미군의 배후를 차단하고 있었다.
대평동(리) 부동산 중개소에서 만난 한 어른은 본인의 집이 반곡리 맞은 편 강건너 세종리의 형제봉(107m)밑에 있었는데 그당시에 가장 좋은 기와 집으로 처음은 미군 중대장이 들어왔다가 나중에는 북한군 연대장이 들어와 기거하면서 전쟁을 지휘했다고 한다. 강의 북쪽과 남쪽에는 미군과 북한군이 뒤섞여 있어 미군의 포병사격과 비행기 포격으로 수없이 죽어나가 사실 죽은 숫자만 따지면 주변에 미군보다 북한군이 더많이 죽어 뒹굴고 있었다 한다.
나는 실제 묻혀 있다는 밭에 가서 심러져 있는 무우배추를 보며 묵념을 올렸다. 지금 밭 주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굴토를 아무 때나 해도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섣불리 삽을 댈 수가 없었다. 북한군이 대다수란 많은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괴하산에도 많은 개인호가 굴토되어 있고 포병부대가 포위 되었던 발산리 위 야산에도 많은 개인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평리(동) 주변의 강변은 그후 몇차례 홍수로 복개공사가 이루어져 흔적이 남지 않았고 세종시 공사로 인한 많은 지역이 원형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래도 대평동 중심부의 근남면이 있는 곳에서 금남초교에 이르는 구간의 야산에 큼직한 개인호들이 2~3부 능선에 남아서 그당시 전쟁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되는 유해모습, 그리고 우리는 18구의 유해발굴~"
따라서 이곳의 발굴은 '00년도에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발굴은 '02년도에 시작되어 당해년도에 10구, 그리고 '10년도에 7구, '11년도에 1구가 반곡동(리)일대에서 발굴 되었다. 발굴 되는 모습은 대부분 완전유해로 나오는데 갔고 있는 유품이 대부분 미군 것이지만 모시나칸트 쏘련제 탄이 많이 굴토되고 있었다. 문제는 피아판단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정말 곤란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제보 내용은 대부분 북한군일 정황인데 정황만으로 판단은 금물이다. 그렇다고 유럽인종은 아예 아니니 동족간은 무엇이 다르겠는가.
"미군을 따라 함께 후퇴한 국군일 수도 있잖아요. 북한군은 모두 거둬 갔을 것이고~"
제보를 처음에 한 경찰의 질문에 우린 안도의 숨을 쉬며 기병부대도 들어왔고 혹여 건재가 무너진 집단이 의기투합하여 미군과 행동을 함께 했을 수도 있다고 우린 판단했다.
발굴지역 연대장이 임의로 판단, 모두 아군으로 화려하게 나라를 위해 전사한 용사님으로 국방일보에 게재하여 시선을 끌기도 했다. 나는 잘못딘 판단을 되돌리기 위해 유해를 보존하기를 원했지만 당시의 일시적 발굴업무를 맡고 있던 장모 통제관과 부합한 박모처리관이 화장까지 해버려 영원히 되돌릴 방법은 없다.
"달려오는 미군, 합동 발굴을 4~5회 계속하다."
이렇게 되니 당연히 미군이 이 사실을 알고 우리와 합동발굴을 요구해와 우리는 몇차례 지역 부대에서 병력을 지원받아 발굴 작업을 해 보았다. 실제 미군측의 실종자 자료에 이 일대에서 찾지 못한 유해가 10여구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열심히 찾으려 노력하고 발굴병으로 온 지원병력도 본인들이 한번 미군을 찾아 포상을 받을 양으로 덤벼들었다.
"미군 별이 우리집에 머물다 갔다."
영대리 심마골에 멋진 제보가 들어왔다. 해병대 출신의 지역 노인회장이 본인 집이 미군 사단장이 머물고간 곳이라 한다.
"어떻게 기억하세요. 장군이었다는 것을?"
"그때가 나도 10살은 넘어서 전쟁이 났다는 것을 알았고 종손집이라 대대로 먹고사는데 지장없이 잘 살고 있어서 집이 ㅁ자형으로 아주 좋았지. 그러니 들어와 하룻밤을 지나고 간거야"
"그럼 미군장군일텐데 그후에 북한군이 들어와 해코지를 당하진 안했나요?"
"그야 집을 그놈들이 빼앗아 이번에는 그놈들 높은 놈 방으로 쓰고 우리는 옆에 외양간 같은 곳으로 쫒겨 났는데 대신 먹을 것은 잘 먹었어. 그놈들이 갔다 줘서 굶지않고 지냈지."
"혹시 이곳에서 인민군이나 프락치들이 인민재판같은 것을 해서 시신을 묻어논 곳이 없을 까요?"
"저기 지금 밭뚝에 2구가 있고 우리 조상님 묘소 인접에 1구가 있는데 전투화를 신고 있었는지 지난번 수해가 나서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전투화는 한쪽이 나와 그 옆에 놓아두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
우린 바로 어른를 따라 집뒤에 올랐다. 염소가 울타리안에 몇마리 뛰어 다니고 야산 밑에 밭이 있는데 실제 무너진 모습이 그대로다. 또한 나즈막하게 퇴화된 묘소에 갔더니 전투화는 보이지 않고 금속 탐지기를 돌려보니 여기저기 센 소리가 난다.
"어르신, 혹시 묻혀진 분들이 국군인지 북한군인지 아십니까?"
"내가 알기로는 우리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묻었고 국군이 올라오면서 국군의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이라 하던데 정확히는 모르오. 발굴해 보면 아는것 아닌가?" 그 후에 이곳은 내가 떠난 후에 발굴되어 3구가 처리 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군이나 국군 발굴은 되지 않고 있다.
"공주 상왕동 살구정골의 비극"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전쟁당시에 억울하게 숨져간 보도연맹등 좌익세력과 죄수들의 유해를 찾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발굴 활동이 개시되었다.
대전의 산내, 대구 경산의 코발트 광산굴, 함평 광암리, 진주 진성고개 등의 발굴이 진행되고 일부는 종료되기도 하면서 소문으로 돌던 많은 유해가 발굴 되고 숨져갈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확인 되었다. 나는 모든 장소를 다 찾아가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없이 많은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런곳중의 한군데가 이곳 상왕동이다. 인류학적 조사를 책임진 충북대 박선주 교수의 연락으로 찾아간 현장은 정말 섬짓했다.
"꿇어앉아 죽어간 젊은이 들의 유해 310여구"
나는 묵념을 올리고 박교수로부터 관련 내용을 들었다. 제보된 내용이 공주교도소에서 차량에 실려온 인원들이 먼저 온 사람(지역 청년방위대원)이 땅을 파고 이어서 실려온 인원이 연을 엮어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이 호안으로 들어가고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한다.
국군이나 경찰이 이런 짓을 했다고 지금 발굴을 취재하고 있는 오마이뉴스팀은 대서 특필하고 있는데 국군이 후퇴하기 전 '50년 7월초에 저질러진 악행이라 한다. 나는 죄인된 모습으로 경건하게 명복을 빌고 좀더 상세히 이곳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발굴하려 노력했다. 그러던중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되는 상왕동의 발굴현장에 남아 있는 탄피와 유품들이 생각이 나서 다시금 현장을 확인하고 박사님의 조언을 구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탄피는 칼빈이 107개, M1탄피가 527개 였고 탄두는 칼빈이 44발, M1이 82발 이었다고 한다. 클립이 16개 단추류 350여개, 버클 2개 고무줄 2개 등이다. 모두가 총상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시 되는 것이 있다. 내가 주변을 탐문하는 가운데 일부 지역 주민이 "저사람들 빨갱이를 왜 발굴하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 장소는 북한군이 진주한 이후에는 북한군이 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던 우리 경찰이나 국군, 그리고 우익인사를 북으로 철수 하기전에 이곳으로 차량을 이용하여 끌고와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군이나 경찰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숨져간 인원의 유족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에 북한군도 미군 총기류를 들고 있었고 지역주민의 제보 또한 국군포로들이 끌려가 죽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몇천명이 숨졌다는 산내지역의 집단 학살 현장도 실제 당시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불지르려고 삿가지나무를 푸락치의 독려로 했던 장본인을 만났다.
당시에 미군도 많고 국군이나 경찰이 포로로 잡혀와 "너희들도 죽어봐라 이 갓나새끼야"라며 악을 지르며 기관총을 쏘던 그 현장을 지켜본 제보를 직접 들었다.
이런 개연성은 대전교도소 자리도 마찬가지다. 실제 대전 교도소 자리에서는 우익인사 수백명이 죽어 국군과 유엔군이 진격하면서 수습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 당시에 5군데를 굴토하여 300여구가 나왔지만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로 천명도 넘는다고 하니 이런 곳은 재발굴하여 유해 감식을 통한 신원확인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본다.
"다른 제보가 들어왔다. 방아골에 지역 청년 방위대원 수십명이 처형되어 매장되어 있다."
사실 대한민국은 온통 격전지며 억울하고 분통스런 원혼들이 가득하다. 많은 참전용사니들이 남겨준 이야기는 솔직히 그 당시는 자유가 무엇인지 공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가운데 제주도 4.3사건의 여파로 생겨난 여수 순천 군부대 반란사건이 몰고온 사회적 풍파가 너무커서 빨갱이하면 무조건 나쁜놈이 되고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한다.
빨치산이란 김일성군대가 들어온다니 당연히 그 동조자들이라 오해받고 있던 보도연맹이나 지역단위의 좌익이란 사람들은 오제도 검사의 남한내에 침투한 간첩을 색출하여 퇴치한 그 성과의 연장선에서 의심의 대상인 사람들마저 모두 한통속으로 올가매 처리해야 하는 것이 전쟁초기의 후방지역의 준동을 예방하는 길이라는 것은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시작된 보도연맹 가입자 척결등 좌익이라는 사람을 붙들어 처형하는데는 이미 형성돼 있던 청년 방위대가 한몫을 하게 되고 경찰과 군인이 그 후원자겸 종결자로써 참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의 잘잘못을 규명하는 일은 안했다. 다만 그 당시의 사회적 현상이 몰고온 아픔이고 누가 잘못했다보기 보다는 국가라는 주체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이러난 것이라 본다.
일제말부터 태생한 공산주의자 아니 사회주의자란 단어들이 이미 동구파를 휩쓸고 일본내에서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타파하는 혁명적 조직으로 일어나고 그 당시에 조금 배웠다거나 못사는 사람들이 주로 여기에 말려들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소위 신좌경운동의 한 조류이자 우리같이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속에 굶주린 사람이나 조금 눈이 뜨인 사람은 대부분 개혁적인 민족주의자를 흉내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되어 갔다.
이런 와중에 먼저 공산주의에 매료딘 김일성 세력의 북한지역 접수와 그 공작세력은 남한 전역을 흔들고 마침내 전국토의 공산화를 달성하여 스탈린-모택동의 꼬봉역활을 훌륭히 해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으며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기반이 약한 사람들은 현혹되기 쉬웠다. 노동자 농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혁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은 몇몇 공산당원만이 호의호식하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그 시대적 상황이 너무 어두웠다고 봐야 한다.
지금 누가 북한을 인정하며 그들의 노선을 동조하는가. 젊은이들, 아니 요즘은 배움이 많을수록 공산주의를 싫어하며 오히려 정치권에서 그 한표를 얻기위해 약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온갖 포퓰리즘을 내걸고 선동하는 정치권의 선전놀이에 세상이 마치 좌파들의 놀이터인양 되어보이지만 적어도 6.25전쟁을 격은 우리들은 이제는 그러하지않다.
방아골에 들어가 당시를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만나 사실관계를 들어보았다.
할아버지는 피난도 가지않고 전쟁에도 참여하지않았다. 나이는 당시에 25세였지만 병에 걸려서 골골 하고 있어 누구도 옆에 오려하지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났다고 하고 강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가는데 당시 마을단위에 편성돼 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처음 강북지역으로 몰려 갔는데 어느날 해가 지고 있는데 강을 건너오 남쪽으로 도망치고 뒤따라 누군가가 총을 쏘며 쫒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고 한다.
"어르신, 그럼 혹시 도망치던 인원들이 인민군에게 붙잡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으셨나요?"
"듣기야 했지. 하지만 직접 목격은 못했고 여기서 길따라 올라서면 산책길이 계속 되는데 중간쯤 가면 약간 주저앉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 묻혀 있다고 해요."
"어르신 혹시 이동네에 우리를 안내할 사람 한명 소개시켜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 날이 연평도에 북한군이 방사포를 쏘아대던 날이다."
우린 동네에서 한분을 소개받고 또한 몇 분으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더 들어보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일치하는데 그것이 청방대인지 다른 민간이나 국군의 매장터인지는 약간의 의견이 갈렸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올라서 산책길을 따라 걷던중 그 비슷한 위치를 발견하여 집단 매장지로써 가능성은 있다고 판단 하였다.
그러나 우선 국군이란 제보는 없었고 청방대원이나 반대로 죄익분자를 끌어다 죽였다는 말도 있어 발굴은 제한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상왕동 발굴팀도 알고 특히 오마이뉴스팀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발굴하지않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우리와 또 반대의 생각에 혹시나 청방대나 국군이 발굴되면 북한군이 집단으로 총살하고 암매장했다는 누명(?)을 받을까 회피하지는 않을까? 동상이몽의 아픈 판단속에 아직 이곳은 발굴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조사를 마친 우리가 동행해준 분과 마을로 다시 내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서울로 복귀하려는 순간 뉴스에 긴급속보가 떳다. "전쟁이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행정병을 보는 양승호병장이 말년휴가를 가게 되어 있는데 전쟁의 서막이라니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과장님, 걱정 마십시요. 어차피 한번 인생 바로 전쟁터로 가겠습니다?"
사실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는 많은 인원이 사상적으로 약간은 진보쪽에 가깝게 흘러가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반대로 일부는 골수 보수적인 성격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역사를 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발굴단에 들어온 병사들은 모두가 관련학과에서 지원하여 평균 3: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되어 들어오는데 물론 면접시 국가관을 질문도 하지만 우선 발굴단에 오려는 속셈에 진심을 숨길 수도 있다. 그러기에 항상 조심스레 이 인원들에게 유해발굴의 의미와 목적을 주기적으로 교육하곤 했는데 승호군은 반반의 성향을 갔고 있던 친구였다고 본다.
그런데 낙심하고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던 말년휴가 가던 날 신고하고 막 정문을 나서려는데 전쟁이 나서 원대복귀하여 군장을 메고 전방으로 간다는 우수꽝스러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이야기의 실제 결정판이 앞에 서 있다니 침묵이 흘렀다. 차는 벌써 마을어구를 떠나는데 승호군이 "과장님 저 전방으로 가겠습니다."라 한다.
순식간에 함께 있던 강중사와 강주사, 그리고 운전병과 나는 "와~ 짱!"이라 외쳤다.
우린 울고불고 어떻하면 좋냐고 난리날 것처럼 서로 눈치만 보았는데 역시 교육의 힘은 백번 듣는 것보다 이렇게 유해발굴 현장의 모습을 지켜본 젊은이들은 절대 국가를 배반하지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고마웠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놀란 눈동자로 우린 차를 몰아 서울로 서울로 올라서고 있었다.
"지금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은 계속 되고 있는제 지자체별로 예산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는 국가가 부담하고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해야한다고 본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진영논리나 그 책임을 물어 보복하고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기록에 남기며 옳고 글름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말하기가 좀 거북스럽지만 민간인 유해발굴 현장에 우리 국군이나 경찰관련 유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한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조사하여 남겨진 기록에 보면 쉽게 말해서 우익에 해당하는 숨져간 곳도 많다. 그런데 그런 곳은 발굴하지 않고 부득불 민간인 피해지역만 발굴하여 잊을만 하면 구겨진 역사앞에 응어리를 토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좀 더 냉철한 이성으로 옳바른 역사를 기록하고 싶다.
계속되는 적의 공격으로 초기 지연전은 절정에 다라랐다.
"딘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24사단은 죽미령에서부터 스미스 대대의 악전고투와 천안지구 전투에서 마틴 대령의 전사로 북한군의 탱크를 제압하기 위한 새로운 3.5인치 로켓트 포와 105mm 대전차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그 확보에 주력하며 미 제25사단이 연이어 상륙하여 동서 내륙에 전개하게 된다.
반면 국군은 한강선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군 자체를 재편성하여 제1군단 사령부를 창설하고 제3,5,7사단을 해체하며 미군이 국부국도를 따라 방어하는 가운데 국군은 중서부전선과 그 동쪽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며 금강-소백산맥선으로 밀리고 있다.
북한군은 천안과 개미고개 전투에서 비록 미 제24사단 제34연대와 제21연대를 무력화 시켰지만 막강한 공군과 포병의 활력 앞에 선두에 선 제105전차 사단의 탱크들이 수십대 파괴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계속되는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방엍태세에 지상군도 거의 40%가 불능화 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7월 12일을 기해 사실 미군은 금강이남으로 철수하여 방어선ㄴ을 편성하는데 서울에서와 같이 바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7월 14일부터 금강도하 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 무렵의 북한군은 홍성(제6사)-공주(제4사)-조치원(제3사_-청주(제2사)-괴산(제15사)-문경(제1사)-풍기(제12사)-영해(제5사)서능 연하여 진출하고 있었다.
"와 국군이 개미고개에서 40여구 발굴 된다?"
사실 초기 경부축선의 죽미령에서 조치원까지의 지연전에서 국군은 비행기 오폭으로 숨져간 인원이 다수이고 실제 이 구간에서 전투다운 전투가 없는 것이 전사의 기록이다.
있다고 해야 제17연대가 미군지원차 평택 북방으로 지원해 올라왔다가 연대장이 오폭으로 부상을 입었고 겨우 2~3명의전사와 10명 내외의 사상자만 발생한 반면 비행기 오폭으로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공식적인 건재를 유지한 부대의전투기록은 미미하다. 기갑연대의 기마대대가 미 제34연대오 제21연대를 공주북방 유구와 공주, 대평리일대에서 지원했다는 기록인데 사실 이곳에 가서 들으면 국군의 기마대를 본 제보자는 없었다. 오히려 한강선 방어시 서울 강남지역 신정동, 지금 서민 주택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에서는 국군 기마대가 북한군을 기습했다는 제보가 있었다.
또한 미군은 천안북방에서 대대장이 전사하고 천안에서는 연대장이 전사하고 개미고개에서는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건재병력의 50%가까이 인명 피해와 많은 장비, 물자를 유기하게 된다. 내가 주요전투지역을 다 탐사하고 웬만한 마을은 지역주민 간담회까지 해봤지만 미군보다도 북한군이 더 많이 길거리에 죽어 있다는 제보는 있어도 국군은 없었다.
금강 금남교 위 반곡리에서 나온 유해도 지역 경찰의 제보였지만 사실 많은 문제점을 남긴 피아판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역 일대의 탐사결과를 기록에만 남기고 발굴계획에는 포함하지않고 어떤계기가 마련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발굴과장에서 조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들리는 소리가 그 곳을 발굴 한다고 한다.
"발굴 숫자 확보에 바쁜 사람들~!"
이미 조사에서 자료존안과 미군이 주로 전투를 한 곳으로 아군의 전사와는 거리가 있음을 남겨두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곳을 발굴하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놔두라고 당시의 지휘관(박모 대령, 기회주의)이 나에게 부탁한다.새로운 발굴과장(동문 후배 주모 중령)이 의욕적으로 한 번 해보겠다니 지켜보자고 한다. 굳이 맞장을 뜨며 반대할 명분이 뚜렸하지 않아 묵시적 동조(?)를 하고 그 발굴 팀장이 누군지 알아보니 김모상사였다. 이 자는 원 조사과 소속으로 경북 출신인데, 출세지향적이라면 좀 거창하고 상급자 비위를 잘 맞투는 스타일이라 한다.
"무슨 근거로 발굴하려 하는지 알아봐라?" 대구출신 강상사에게 임무를 주었더니 언젠가 조사를 하는데 지역 주민이 국군이 있었다는 제보가 있어 한번 발굴해 보고 아니면 덮어놓겠다고 한단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경부축선을 타고 이동할 때마다 개미고개에 들러 사실관계를 파악하하기 위한 제보자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찾지를 못했다.
드디어 발굴이 시작 되고 '11년도 첫해에 8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12년도에는 박병호 팀장에 의해 30여구가 발굴 되고 이중 두명은 미군으로 인식표가 있었고 실제 미 하와이 유배발굴단에서 신원확인 절차를 거쳐 2명의 유가족까지 식별 되었다.
발굴된 장소는 바로 우리가 탐사하여 기록에 남겨진 바로 고지정상부근에 집단적으로 형성된 개인호 주변내가 두려워서인지 피아판단은 계속 유보되고 있다. 유품은 보니 대다수 미군들의 탄피며 실탄 전투화 등이다. 수류탄이 나왔는데 일부 쏘련제가 있고 대부분 미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미 제21연대 3대대장이 전사하고 대대병력의 과반이 사상되고 대대장이 전사 한다.
반대로 북한군도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했지만 미군의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에 엄청난 피해를 입어 바로 대전을 공략하지 못하고 진격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
여기서 발굴된 유해는 과연 국적이 어디로 되었을까?
우리는 단 한구의유해라도 발굴하고 용사님의 발톱, 머리털 하나라도 찾는다는 신념아래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발굴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국군 전사자로 분류하여 관리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10,000여구의 유해중 신원확인이 불과 150여명에 부과하다. 1.5% 수준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전사에 언급되지않은 실제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수몰 두강다리전투(청원군 예양리)"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곳 일대 전투시 대평리 전투와 공주지역 전투를 알고 있다. 하지만 쏘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조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1권200~204p) '50. 7. 9~11일까지 조치원 전투를 하고 12일 밤에야 조치원을 점령한다. 또한 미군이 부강리 지역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모든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여 13일부터 금강(미호천으로 추정)을 도하하는 공격이 지연되고 14일 하룻동안 도하지점 선정과 화력을 보강하여 15일에는 부강리 서남방(대평리로 추정)에서 금강 도하를 시도하지만 강 남쪽 제방에 강력한 방어력으로 실패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16일에야 사전 침투한 부대와 연결하여 후방도로를 차단하고 17일 새벽에 미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105전차사단 제203연대는 부강리 점령전을 벌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면 1개연대는 제4사단을 따라 지원하러 갔다는 것을 가정할 때에 부강리전투가 갖는 의미가 매우 커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전사에는 부강리지역은 언급이 없다.
"저기 제방밑에 모래톱에 사람을 도쟈로 밀어서 넣고 매몰했습니다."
우리는 금강교나 금남교의 폭파와 미군과 북한군의 경부국도상 초기 지연전을 주로 전사에 나와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잊혀진 중요한 매장 현장이 아직 지역 주민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여기 강촌인데 이곳 강변은 발굴하지 않나요? '16년 어느 여름에 한 제보 전화가 왔다.
"전사에 없는 대규모 유해 매장 강변에 서다"
경부선 철교가 바로 옆에 지나고 동쪽은 미호교가 있는 강외제방에 갔다. 제보자가 복구공사를 한 모래변에 서서 손으로 가리킨다.
"저기 수몰된 다리가 있는 지역이 주 매장 지역으로 북한군이 이곳을 도하하려 하자 미군이 얼마나 많은 포탄을 퍼부었는지 북한군이 겹겹히 쌓여서 죽었다."
"그걸 어떻게 보셨어요?"
"미군이 앞(조치원)에서 내려오고 이어서 얼마있다 북한군이 오는데 이미 미군이 주변에 지뢰도 매설하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 때 나는 신기해서 저기 강둑 위에 엎드려 지켜봤지. 무섭지도 않아. 적들이 강 이남으로 총질을 하는데 조금 있다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고 다리도 절단되어 건너오지 못하게 되었지."
"와 아저씨 그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대단하시네. 그걸 다 지켜 보셨다니."
"그것만이 아니냐. 얼마후에 미군이 올라오는데 도쟈가 와서 임시 다리를 만드는데 죽은 사람이 도쟈를 밀면 쏟아져 나오니 이곳 저곳에 웅덩이처럼 파고 다 집어 넣었어요. 그 때 보니까 시체를 확인도 하는데."
들은 제보 내용으로 보면 모두 북한군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북한군은 초기전투시 입은 병력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이나 기타 도시에서 학도의용군으로 강제 하갱들을 잡아가고 지역에서 노무자로 지게부대를 형성하여 그들의 군수물자를 야간에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전방부대에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다 보니 포로로 잡힌 국군이나 경찰을 총알받이로 사지에 몰아넣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묻혀 있는 시신은 아군, 아니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곳은 몇번의 홍수가 나서 모두 휩쓸려가고 주기적으로 제방공사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가능성이 낮아보이는데 발굴 계획에 포함하기란 거북스러웠다.
나는 강건너 번암리쪽에 있는 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하게 되었다. 아저씨에게 감사의 표시로 점심대접이다. 약간 이곳의 물고기를 사용한 매운탕이라니 꺼림직 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어디인들 피의 냄새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00년도에 오송 강외에서 빨라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본인의 밭 언저리 야산에 국군 제2사단 소위와 일병이 붙여 있다는 제보였다.
당시는 나 혼자 발굴 업무를 통제하고 있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던 시기인데 워낙 강하게 이야기하고 육본에서 가까운 거리라 주말을 이용하여 먼저 가 보았다. 먼저 강외면 에비군 중대장을 만나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파악하고 어르신을 만났다. 주말이라 괜스레 예비군 중대장만 고생하는 꼴이였다. 하지만 나보다 군생활이 후임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중대장으로 인식 되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이렇게 토요일에 나오시게 해서."
"어서 갑시다. 밭 작물을 심기 전에 발굴하여 유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위치를 명확히 아시는거예요?"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 외치는 그 장면을 내가 14살의 나이로 직접 목격했어요."
"그럼 당시에 총살을 감행한 인원이 북한군입니까?"
"아니요. 동네 프락치 대장이요. 지금 그 집안은 어디로 사라져 버려 알 수 없어요. 아마 다 죽었던가 북으로 가고 없을 겁니다."
"네?"
나는 의외의 답변에 놀라서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장교와 병이 둘이나 되는데 어떻게 프락치가 처단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게속 되는 어르신의 이야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들어 있다. 얼마나 못살았으면 그 당시는 머슴들이 많았다 한다. 이 일대가 미호천변이라 토지가 많았지만 지주 몇명이 다 갔고 대부분 소작농이라 붙여먹고 사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전쟁이 나니 설움받던 인원들이 들고 일어나 동네 어른들을 잡아다 빨개벗기고 매질을 가하여 피토하고 죽기도 하고 문패를 갑작스레 머슴놈이 자기 것으로 바꿔 달기도 하고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의 집안은 아예 쑥대밭처럼 뒤져 있는 것 다 가져가고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대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강하나 건너면 청주 흥덕구란다. 야산같은 곳을 조금 들어가니 어르신 밭이 나왔다.
"이 정도에 당시 쫄병이 구덩이를 파고 둘이 들어가 만세를 부른 다음 총을 쏴 죽였지요."
국군 제2사단 병력이라 한다. 어떻게 그걸 기억하느냐 물었더니 프락치 몇이 서서 물어보니 가족관계등은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2사단'이라고만 답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르신의 이야기로는 거의 가로 세로 20 곱하기 30은 되어 엄청 넓은 구역이다.
나는 바로 해당 제37사단에 공문조치를 하여 병력을 지원받아 월요일부터 발굴을 무려 1주일가량 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6. 대전-서천 방면 지연전(차후에 검토하여 식제여부 판단)
사실 이 방면의 전사는 우리 기록은 미흡하다. 과거 기록은 북한군 제6사단이 천안에서 사라져 서해안을 우회하여 서해안을 다라 전남지역 그리고 섬진강을 건너 하동-진주-함안과 마산지역으로 은밀기동하였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08년도에 발간된 한국전쟁사 제4권에 "서남부지역 지연전(제4권 425p)"이 별도 편절되어 세부적인 내용이 그동안의 많은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 작성되어 보완 되었다. 따라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별도 편절에서 기록하고 여기서는 후속하던 북한군 제6사단의 서해안 우회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북한군 제6사단은 공격부대를 후속하여 '50.7월 11일 천안북방까지 진출하여 12일 유구지역에 사단이 집결하였다. 1개연대는 바로 우회하여 서해안방향으로 예산,홍천,서천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부대는 군단의 명에 대전방면 전투력 보강을 위해 다시 연기군 전의 지역으로 전환했으나 다시 14일 밤에 원래의 임무로 복귀하게 된다.
반면 국군과 미군은 서해안지역으로 우회하는 북한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육군본부는 호남과 영남 지역에 대한 후방배치와 부대재편 및 증편으로 이미 5일부로 해체된 제5사단을 광주에서, 제7사단을 전주에서, 제9사단을 부산에서 각각 재편성하고 7월 8일에 영남 및 전남/북지구 편성관구사령관을 임명하였다.
7월 16일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는 날에 전주에 전주 편성관구사령부와 신편 제7사단(제3/9연대: 바로 3연대는 제1교육대, 9연대는 제2교육대로 개칭)을, 광주에는 광주 편성관구사령부와 신편 제5사단(제15/26연대: 바로 15연대를 제5교육대로, 26연대를 제3교육대로 개칭)을 편성하려 했지만 무장할 무기도 제대로 없었다. 지휘관도 신태영 장군이 서남부지역을 총괄하면서 부터 이응준 장군이 제5사를, 원용득 장군이 제7사(민기식 대령이 차후 민부대로 지휘)를 지휘하지만 명목 뿐인 지휘였다. 무기도 없고 병력도 낙오병을 수습하고 과거 청방대나 보국대 등을 임시 편성한 수준이다.
따라서 원용득 장군이 전북 편성관구사령관 자격으로 군/경을 지휘하게 되며 강경지역으로 밀려오는 적을 저지 지연하기 위해 임시 편성된 인원을 "독립대대(300명 수준)"라는 칭호로 강경 좌측 제성나루에서 금강선을 따라 서포리까지 3개 중대를 분산 배치하게 된다.(한곳은 웅포나루)
반면에 경찰은 이리에서 대기중인 전북경찰 1/3대대를 7월 17일 항산나루~다근이 나루에 추진배치하고 12일 북한군의 압력에 청양을 경유하여 금강을 도하한 충남 경찰 제1대대가 서전사의 통제에 들어갔다. 여기에 충남 특경은 17일 장항을 방어하고자 모여든 각 경찰서 혼성병력이 200 여명이 되어 장항으로 진출한 해병대의 통제로 장항 북쪽 15km지점의 성내리로 진출했다가 북한군 제6사단 13연대에 밀려 군산으로 물러났다.
여기에 공주지역에서 물러난 기갑연대 소속 기마중대 병력이 17일 이리 북쪽 황등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27명의 육군본부 요원으로 구성된 특공대가 공주를 거쳐 이리로 이동하였다.
특이한 점은 17일 남원지역에 제30연대(1,500명수준)이 편성되는데 이는 보병학교 참모장이던 김용주 중령이 이응준 소장의 명령을ㄷ 받고 남원군청에 지휘소를 정하고 전북일대 낙오병을 모아 모아 가칭 제30연대를 편성하였다.
충남경찰과 전북경찰이 거의 3개 대대수준이고 무장도 되어 있었고 7월 15일 제주항을 출항하여 7월 16일 08:00에 군산항에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해병 1개 대대가 들어와 해군 군산경비부와 인천에서 철수한 인천경비부 48명, 제17연대 요원 59명 등 혼성부대로 편성 된다. 원래 출동 목적이 "군산항에 비축된 정부미를 안동호(LST)에 적재하는 것을 경비하라" 것이였지만 전방에서 북한군의 압력이 가중 된다는 정보에 따라 장항으로 북상하였다.
여기서 가장 특이할만한 것은 경찰의 분전과 해병대 고길훈 대대의 노력이다.
가. "북한군의 이동을 알지 못했다는 당시의 육군 수뇌부의 판단은 거짓이다?"
쏘련군 군사고문 단장 라조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7월 12일 유구에 내려갈 때까지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으나 그 이후의 예산-홍성-서천방면으로의 기동시에는 우리 항공기의 강력한 공격으로 주간이동은 제한하고 야간 이동을 산악소로를 따라 지정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알면서 왜 방어력을 보강하지 못했느냐의 질문에 답변이 궁색하게 된다. 그 답은 지금 뭐라 정답을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한강선 방어에 무너진 국군의 전투력은 사단 병력이 겨우 몇 개 대대 병력정도 밖에는 안되어 군 재편성 시에 5,7사단을 해체(7월 말에 2사단도 해체)하였다. 1군단에 편성(7.5일 김홍일 장군)된 수도사단과 제1사단, 제2사단은 중서부 전선에 중동부 전선에는 제8사단 제6사단이 동해안은 제3사단 제23연대가 축차방어를 하고 있었다.
"방어할 부대가 없어 다시 제5사와 제 7사 기간요원을 전남북지역에 보내 현지에서 병력충원을 위해 제7사단사령부와(민기식 대령지휘) 제5사단 사령부(이응준 소장 지휘)가 일시적 구두편제되어 현지에서 충원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니 무슨 편제할 무기도 없고 사실 전투 부대화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부대는 지역 청방대원, 과거 호국군, 지역 경찰, 여타한 이유로 지역으로 복귀한 군인을 모아서 편성했다.
제5사단은 여기에 전방 출동시 사단에 잔류한 병력과 이영규 중령부대(이부대)로 임시 편성했다.
제7사단은 불과 1개 중대병력으로 시작하여 제주도에서 올라온 해병 고길훈부대, 김병화 소령부대(김부대), 오덕준 대령부대(오부대) 등으로 임시 편성했으나 사실 기간편성에 불과 하여 경찰이 오히려 인원도 많고 무기도 휴대하고 있었다.
나. "알려지지않은 북한군 105전차사단 제1대대장의 귀순과 북한군 제6사단의 실체"
연기지구 저나전에 이어 대전지구 전투가 끝나갈 무렵에 수도 서울을 전차로 밀어붙이고 제일먼저 서대문 구치소의 철문을 개방한 제105전차여단 제1대대장 김웅(개명한 이름)이 갑작스레 미군에 귀순하였다.
사연이야 너무 길고 귀순동기를 확인하는 과정에 현재 가수인 진미령(원 성은 김이다)씨의 실제 아버지인 당시 1사단 소대장이던 김동석 중위(예비역 대령으로 지금 고인이 되어 동작동 현충원 납골당에 안장되어 있음)가 그 취조에 참가 하였다.
다. "북한군의 전차 운용등 기만전술을 알려준 탱크부대 대대장 김웅"
지금이야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나는 생전에 고, 김동석 대령은 수차례, 고, 김웅 북한군 전차 대대장은 5회정도 만나 식사도 하고 그 6.25전쟁의 숨막히는 드라마를 직접 들었다. 김웅씨는 실제 독소전쟁에도 쏘련군 전차장으로 참여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며 평양에도 직접 김일성에게 신고까지 하고 내려온 베테랑 기갑부대 대대장이다.
갑짜기 사라진 북한군 제6사단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미군의 노력은 계속 되고 있는데 갑작스레 고위 장교가 귀순을 했는데 중국말로 답변을 하니 정상적인 통역장교가 없던 시대에 중국 만주군 출신인 김동석 중위(육 8기)가 갑작스레 음성지구 전투에서 미8군 정보본부에 실려와 김웅과 대면하게 되었다. 나이는 김웅씨가 몇 살 위에다 계급도 높았다.
"스탈린이 아무리 날고 뛰어야 미군을 이길 수 없소. 잘 알 것 아니요?"
"그래서 귀순했는데 미군이 잘 믿어주지 않는 단 말이오."
사실 김웅씨는 일본에서 대학까지 다니던 엘리트 출신이 동경지역에 좌익 검거열풍이 불어 만주지역으로 도피하여 김일성이이와 같은 빨치산 부대원이 되었다. 그러다 함께 쏘련으로 귀화하여 그 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에 침공시 쏘련군 전차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연합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이미 알고 있었고 북에서 내려 올 때는 미군이 참가하기 이전에 남한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내려왔는데 서울에 들어온 '50. 6.28일에 휴대하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미군의 참전 소식을 듣고 귀순을 결심했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이 내용만으로 귀순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고인의 명예에 관련된 내용이니 나는 함구하기로 한다. 따라서 김동식 중위가 미군 정보장교에게 신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 통역을 하고 실제 군법을 받지않고 김동석 중위는 여기서부터 한국군 첩보 장교가 되어 전선에서 김웅씨와 같이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별동대로써 수행하게 된다.
결국 김중위는 한국군 제1사단 첩보부대인 5816부대 장으로, 서부전선 황해도 지역과 강화도에서 활동하고 전후엔 고성지역에서 HID 초대 대장도 하게 된다. 김웅씨는 김동석 중위의 신분보장에 일정기간 함께 임무를 수행하며 맥아더 사령부에 많은 핵심적인 정보를 기여하게 된다.
들은 이야기로는 가장 기여한 것은 '51. 1. 4후퇴시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서울북부지역을 공룡화시키고 청야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바로 중국군 첩보수집부대 소령을 미인계로 유인하여 납치에 성공한 결과로 중공군의 침투계획을 사전에 알아서 맥아더 사령부에 전달 한다.
맥아더가 그 공로를 인정하여 본인이 아끼던 쌍안경 1대를 김동석소령에게 선물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감사하다는 이야기에 옆에 있던 김동석소령을 가리키며 This Man" 이라 칭찬했던 일화가 남겨져 있다.
이 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얻은 김동석은 나중에 김종필과 앙숙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를 일본 만주군이 쏘련군에 항복시 장개석 군대요원이라 속이고 빼내준 사건(?)에 힘입어 5.16혁명이후 부패장교 척결시 사형자 명단에서 빠지고 속초시장 수원시장 목포시장 등을 계속적으로 역임하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내가 들은 실제 이야기임)
북한군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최초, 서울 프락치 30만이 태극기들고 환영하다는 박헌영의 이야기가 거짓임에 놀라(?)서울에서 거의 5일간 머물러 미군의 투입을 보장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곳 천안-조치원 전투에서 '50. 7.12~14까지 미군의 가공할만한 항공기 폭격과 포병화력에 많은 전차와 중장비를 파손당하고 병력의 급감 등 여타한 이유로 밀어 붙이지 못해 미 제25사단과 기병사단의 전개를 보장받게 만들었다.
성공이라면 제6사단의 소리없는 서해안 지역으로 우회하여 부산교두보를 마산측방에서 밀어붙이는 진출인데 결국 이것마저도 김웅과 같은 귀순자들의 전술폭로로 들통이 나서 결국 낙동간선을 마지막으로 밀려 올라가게 되었다.
7. 경부축선의 초기 지연전 결과
국군은 '50년 7월 초부터 미군 지원군과 함께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는 지연작전 방침에 따라 축차 철수하여 7월 14일 미군이 공주-대평리일대의 금강 방어선으로, 국군이 미원-조령-퐁기-영덕 일대의 소백산맥 일대의 방어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이 제19연대(제21연대를 후속하여 12일 들어옴)와 사단포병 주력을 대평리 정면에, 제34연대를 공주방면에 배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맞이하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한국에 상륙한 미 제25사단이 미원-상주 지역으로 전개하고 기병사단이 영동지역으로 올라오는 상황이 된다.
이 순간 국군은 겨우 숨을 돌린 후에 국군을 재편성하여 제1군단이 중서부지역(경부국도 우측에서 소백산맥까지)을, 제8사단이 소백산맥 일원, 제23연대가 울진-영덕지역에서 지연전에 돌입하게 된다. 제2사단은 진천-청주로 내려오는 수도사단의 좌익에서 엄호임무를 수행하다 황간북방에서 미 제25사단 예하 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해체 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면 북한군 제1군단은 대전을 차기작전의 목표로 제4사단이 공주를, 제3사단이 105전차사단의 선도하에 대평리로 진출을 위해 금강도하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그 동안의 전투에서 전투력의 30~40%를 손실하여 서울, 인천, 이천등지에서 강제로 학도의용군을 징집하여 해방전쟁이란 미명하에 전방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국군의 통제권을 맥아더에 넘기는 대한민국~!"
이 싯점에 국군의 재편성(7.5일부 5사/7사 해체, 1군단 창설)과 이어서 7월 8일에는 서해안지구 전투 사령부(신편 7사(전북), 신편 5사(전남) )가 발족(사령관겸 전북지구편성관구사령관에 신태영소장, 전남지구편성관구사령관에 이응준 소장)하여 신편 업무에 들어간다.
또한 지연전의 전개에 따라 중동부의 제6,제8사단이 화령-조령-죽령선으로 물러나자 이들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가 어려워지고 적 제2군단의 주력이 지향됨에 따라 국군도 7월 12일부로 함창에서 제2군단(6/8사)을 창설하고 김백일 장군을 군단장에 임명하였다. 이래서 국군은 제1군단(수도/1/2사), 제2군단(6/8사), 육본 직할에 23연대, 기갑연대로 하는 지휘체계를 구축한다.
"육군을 제1/2군단으로 나누어 지휘통제 시작"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압박과 병력의 손실, 그리고 미군의 추가 전개에 따른 원활한 작전 통제를 위해 7월 20일부로 제2사를 해체하고 제1군단에 1/3사, 제2군단(군단장은 김백일에서 유재흥)에 6/8사, 예비로 수도사로 국군은 상주 동쪽에서 동부전선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따라 제1군단은 작전지역을 미군에게 인계하고 사령부가 의성으로, 수도사와 제17연대는 안동으로, 제1사단은 춘양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진지조정으로 전선이동을 하려할 때에 북한군의 압력에다 제1군단이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양개 사단을 통제해야 하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7월 24일부로 다시 제1군단(김홍일장군)에 수도사/8사로 영주-안동 축선을, 제2군단(유재흥장군)이 1/6사로 문경-함창-상주 축선을, 동해안은 육군이 직접 지휘통제하여 제3사단으로 방어토록 하였다.
그 당시에 전주훈련소에 9천여명, 광주훈련소에 6천여명, 부산훈련소에 5천여명의 병력이 징집 또는 자원입대하여 병력 수준이 최초 전쟁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바로 이 싯점에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인 국군 작전통제권의 주체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상호 협조와 원활한 작전임무 수해을 위해 "작전 지휘권"을 7월 15일에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에 이양했다.
그 후에 '54년 11월 17일에 "작전통제권"으로 바뀌고 이어서 '78년 11월 7일에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 되면서 통제권이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한-미 연합군 사령관"에게 이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