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הָא֖וֹר 하 오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빛을 비추기 위한 토대요 바탕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인간의 실존 인식의 바탕이며 그 토대 위에 비로소 존재의 빛은 비출 수 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는 빛의 원리는 신약에서 구체적인 주석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듯 신약의 빛은 로고스에 거한다.
빛이 비추는 곳은 우리 내면 세계다. 성경은 한결같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경의 독자들이 창세기 1장에만 도착하면 성경 읽기가 왜곡된다. 우주창조의 굳건한 믿음에 시선을 고정한다. 우주창조의 신화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우주의 세계, 그 신비는 예나 지금이나 인생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심어준다. 우주 질서의 오묘함은 인생의 지혜로 쉽게 풀리지 않는다. 고대 점성술의 발달은 천체의 신비에 심취한 이들에 의해 이룩된다.
우주 가운데 충만한 모든 숨쉬는 것들은 우주의 천체 운행 원리에 종속된다. 그 만큼 우주 운행원리는 인간의 생존에 관한 절대조건이다. 하여 인간의 의식은 천체의 운행원리에 종속되어 형성되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천문학은 심성학의 거울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자를 생각할 때 우주 창조의 주체자로 신을 상정하는 것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는 우주 신비의 세계가 하나의 비유로 등장되고 있을 따름이지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비유는 소우주(Micro Cosmos)의 세계, 곧 인간 내면의 영적 탄생과 성숙, 그 인식과 세계의 분화, 통합의 전 과정을 칠일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히브리문학의 소산이다. 소우주에 대한 히브리 선견자들의 비밀스런 서책(秘書)인 셈이다.
요한과 바울도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나타나 있는 빛의 이해, 등장하는 비유들이 이를 잘 알려준다. 물론 구약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신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빛’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대목은 모두 인간 의식의 내면에 비취는 로고스의 빛을 일컫는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네게 있는 ‘빛’이라는 말씀들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은 로고스의 좌소가 ‘아르케’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또한 이 로고스가 하나님을 향해(프로스) 있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이 말씀이라고도 단언한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 때 만물은 인간의 내면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창세기 1장의 내용 전체를 말한다.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이라고 일컫는다.
창세기의 빛과 요한복음의 빛이 서로 다를 리가 없다. 이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바 창세기 1장 3절을 인용해서 인간의 심전(心田)을 설명하는 고후 4:6절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말씀으로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만들었다고 선전한다. 말씀은, 모름지기 말씀이라는 것은 인간 의식의 세계를 일깨우고 성숙하게 하고, 정신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말하다'에서 '말씀'이라는 명사가 나왔다. '레고'에서 '로고스'가 나온다. 거창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 벌거숭이 임금님의 우화처럼 소박하게 읽으면 사실이 더 잘 드러난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은, 그리고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언표는 그러므로 비록 물리적인 세계의 바다와 산과 하늘을 이야기하지만 말씀과 연관할 때 그 모든 자연 현상은 의식에 투영된 의식의 다양한 변화에 대한 비유다. 지나친 견강부회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겠으나 좀 더 살펴보면 너무도 자명하다.
시인의 모든 언어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지 저 자연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 서정주의 시에 등장하는 '한 송이 국화꽃'은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소쩍새'는 모두 비유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 아닌가? 여행자가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함을 노래하고 자연의 웅장함에 탄성을 남기는 기행문을 썼다고 하자. 거기 그랜트캐니언을 경험하는 그 사람, 그 때의 감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물론 거기 소재로 등장하는 수많은 자연 만물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실재한다. 그럼에도 텍스트는 글 쓴 이를 언제나 드러내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도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고, 히브리인들에게 전승되어 후대의 사람들 무의식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세계관이라함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7)
‘마음을 비추는 빛’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 말하는 까닭은 창세기 1장에 대해 많은 왜곡이 있어 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빛이 있으라’는 이 깊은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깃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로소 처음 시작,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수면에 운행한다'는 창세기 표현은 하나님은 곧 로고스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선언과 맞물린다.
이 점에서 동양의 할아버지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도 옳지만 서양의 한 철인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한 말도 참으로 옳다. 이 두 언어는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 도를 지식으로 정의하려 한다면 그 정의 속에 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는 로고스 속에서 존재한다. 이 때 로고스는 결코 노자가 경계하는 지식의 옷에 머무는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빛의 처소는 로고스다.
마음을 일깨고 그 땅을 경작하는 것은 도가 아니고서는 가능치 않다. 로고스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어를 먹고 산다. 정신은 언어에 깃든 존재의 자극과 충동에 의해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우리의 육체는 남녀의 결합에 의해 자녀를 생산하지만 정신은 로고스에 깃든 사람들의 빛에 의해서만 태어나고 또 계승된다. 언어가 정보의 매개수단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언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다. 로고스는 정신에 하나님의 얼을 배태케 하는 생명의 씨를 담아 전달하는 씨알이다. 정신의 씨알을 전달하는 다른 매개체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 비로소 창조의 나래를 편다. 하나님의 창조는 오늘도 바로 거기서 출발하고 열매 맺는다. 빛의 처소는 곧 로고스다. 흑암의 처소 또한 언어다. 흑암도 언어를 통해서 그 자신을 유포시키고 세계를 점령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뜻은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으로 있는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말씀은 말씀의 창조세계가 있다. 말씀이 빚는 세계, 곧 말씀은 근본 안에 머물고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며 하나님은 곧 말씀이다. 말씀은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창조해 간다. 인생은 말씀으로만 거듭나고 로고스에 의해서 정신이 살아난다.
성경은 말씀이 존재의 집임과 동시에 말씀의 창조 세계가 펼쳐지는 위대한 휴머니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인간이 신의 세계에 동참할 때 도달한다. 인간은 신격을 통해서 그 존재의 의미가 완성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고백한다. 이 때 일컫는 말씀은 결코 정보전달 언어가 아니다.
침례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요 빛이 아니다. 빛에 대한 증거는 빛 자체가 아니다. 빛은 빛이 빛이다. 그 빛은 각 사람에게 비췬다. 그 빛은 곧 흑암 가운데 ‘빛이 있으라’는 것으로, 다시 말하지만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다. 인생들은 여기서도 빛을 그 때, 거기 있었던 예수에게 고정시킨다. 그 때 거기 있었던 예수에게 고정시키게 되면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의 비밀은 알 수 없게 된다. 종교적 예수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밖에 있는 존재다. 그를 일러 빛이라고 하면 그것은 새로운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빛은 인간의 내면, 곧 자기 땅에 와서 비추는 빛을 일컫고 있다. 침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손가락이요, 그 빛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와 있다. 그러므로 그 때의 그 예수는 이를 알려주고 드러내는 스토리다.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상(자기 땅)은 그를 알지 못한다. 이 빛에 대하여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자기 땅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접치 않는 것이다.
인생들의 신격과 비껴가는 엇박자의 삶은 늘 그렇게 되풀이 된다. 인생은 언제나 빛의 싹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 밖에 있는 빛을 영접하려는 것이 모든 종교가 범하는 우요, 우상이 만들어내는 일들이다. 예외 없이 하나님도, 예수도 언제부터인가 밖으로 밀려나 있다. 성전밖으로 유폐시켜 버렸다.
요한은 말하기를 빛은 이미 자기 땅에 와 있다고 한다. 땅은 인생의 마음이다. 마음에 와 계신데 마음과 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혹된 마음의 세계다. 찢어내고 벗어내야 할 마음의 세계다. 속살이 드러나지 않은 표면의 세계다. 이면에 있는 빛을 영접치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있으나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0-11)
제자들이 예수에게 “왕국이 언제 올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예수가 “왕국은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왕국이 여기 있다, 왕국이 저기 있다고 떠벌일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왕국은 땅 위에 널리 퍼져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도마복음 말씀 113)
‘빛이 있게 하자’는 창세기의 선언은 비로소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창조의 첫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요한의 말대로 이것은 혈통(하이마토스)으로나 혹은 육정(데레마토스 싸르크)으로나 혹은 사람(아네르, 남자)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창조(바라)라고 한다. 혈통으로, 혹은 싸르크의 의지로 진행되는 것, 남자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인생들이 지으려는 바벨의 세계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과는 상관이 없다. 저마다 인생들이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제 날들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인생들의 날이 아닌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은 인생들의 그 날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시작되는 어느 한 날이 비로소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간섭되기 시작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갈 때에 빛이있으리로다(슥 14:7)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빛이 있고서부터 하나님의 첫 날은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빛이 비추었다고 해서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겨우 하나님의 첫날이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빛의 태동과 어둠의 분리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는 생명의 싹을 틔워가며 튼튼히 해가는 창조의 경륜이다.
모름지기 빛 가운데만 머무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두움과 빛의 반복 속에서만 생명의 싹은 틔워지고 튼실해져 간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속에서만 건강한 생명은 유지된다. 상대 세계의 한계상황 가운데 던져지는 것은 결코 신의 저주가 아니다. 빛을 비추고 어두움에 처하게 하는 것은 생명을 키워 가는 신의 강보(襁褓)인 셈이다.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빛과 어둠의 일정한 반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추어보더라도 빛과 어두움은, 낯과 밤은 서로 상대적이며 동시에 서로를 떠바쳐주는 상호 존재의 기반이다. 빛은 어두움 때문에 빛이요 어두움은 빛 때문에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책망 받을 것은 곧 빛으로 나타나고 빛에 머물고만 있으면 곧 그 빛은 곧 어두움이 되고 만다. 생명은 고형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도 지으신 자요, 어두움도 창조한다. 빛과 어두움은 서로 극단에 머물면서 한 가지로 생명을 키워간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생들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실존적 자각이 시작될 때 그것을 토대로 하여 시작된다. 그같은 자각이야 말로 처음 발광하는 빛이다. 어둠에 놓여 있다고 하는 절망과 한계 경험 속에 빛의 씨눈은 배태된다. 비로소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게 하자(Let there be light)’는 선언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 비로소 그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게 되는 상대 세계가 열린다. 구분과 경계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면서 인생들을 초극하게 하기 위한 나뉨과 분리가 시작된다. 이는 상대 세계로 고착케 함이 아니다. 상대 세계에 머물고 있는 실존을 극복케 하기 위한 배려다. 나뉨은 분리를 목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면서 비로소 공중의 권세 잡은 세계와 하늘의 빛의 세계에 대한 나뉨과 분별의 눈이 열린다.
이것이 첫째 날 베레쉬트 안에서 하늘의 어두움을 찢고 빛을 비추는 개천의 일성이다. 곧 하늘이 처음 열리고 있는 시원(始源)이다. 하늘이 열리고 있는 천둥소리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