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이 Ⅰ
양상태
산은 가까이 다가가면 언제나 포근히 감싸며 안아주고, 바다는 찾을 때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웅크린 가슴을 활짝 열도록 도와준다.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제주도를 찾는다. 집에 틀어박혀 찾지도 못할 자신을 막연히 찾기보다는 숲속에 오롯이 나를 던져 보거나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내 마음속 나침반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어 좋다. 더 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도라고 생각한다.
보통 제주도에는 일주일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짐을 꾸려서 목포로 가서 배에 차를 선적하고 간다. 닷새 이상 머무를 계획이면 렌터카 비용이며 항공료를 감안하여 이 방법이 매우 경제적일 수 있다.
강정 포구 끝자락에서, 남쪽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섬 중에, 운도(雲濤)를 찾아 날아 보기도 한다. 구름과 바다의 오묘한 조화를 만끽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또한 아래쪽 바다로 내려와 방류한 남방 돌고래 ‘비봉이’를 찾아 깊은 물속을 상상의 나래를 펴고 헤엄쳐 본다. 그러다 보면 구름을 몰고 가는 바람결에 머릿속 잡념과 고뇌가 씻겨 나간다. 스트레스를 먼나무 우듬지에 걸어 보거나 피라미드 꼭대기 위에 올려 보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근심이 있다면 선인장 가시 위에 걸쳐 보거나 기도하는 성모님 손위에 살포시 놓아 보기도 한다.
밤이 되면 검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크레인으로 한껏 들어 올려 보다가 깊은 바닷속으로 밀어 보기도 하며 나중엔 백록담에 풍덩 담가 버리기도 한다.
지난 이른 봄에 아내를 꼬드겨 제주도 ‘한 달살이’를 하러 다녀왔다. 평소 아내가 귀찮아하며 싫어했던 설거지와 청소를 안 해도 된다는 사탕발림으로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하며 따라와 주었다. 아내가 평소에는 생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주도에서는 참돔과 장어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어 주었다. 이것은 내가 아내에게 베풀어 준 변화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제주도에서는 가급적 하루에 한 곳씩만 다니기로 했으며, 유명 관광지는 피하기로 하였다. 서귀포 남단에는 ‘가파도’와 ‘마라도’라는 섬이 있는데, 돈을 빌리면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성산일출봉 근처 ‘광치기 해변’은 수장水葬을 하던 풍습으로 떠밀려 온 관棺을 치우기 바쁜 해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비가 와야 폭포 구실을 하는 ‘엉 또 폭포’, 멧돼지들이 많이 출몰하여 물을 마시는 내 천(川)에서 유래된 ‘돈내코’, 용천수가 흘러서 바닷물과 직접 만나 수영장을 만들어 놓은 ‘논지 물’, 참된 감귤 체험장이라고 생각하는 ‘서귀포 농업 기술센터’, ‘추사 유배지’를 두루 둘러보았다.
무심코 바다를 바라보다가 유영하는 돌고래를 찾아볼 수 있는 남원 ‘큰엉 해안’, 월령리 ‘선인장 자생지’와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에서는 아름답고도 큰 자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숲속에 드러누워 별생각 없이 마냥 하늘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아내가 바위틈 이끼 때문에 미끄러져 또 다른 추억을 안겨준 ‘곶자왈 도립공원’, 모슬포 일대와 중문까지 훤히 내다보이는 ‘군산 오름’, ‘송악산’과 ‘알뜨르 비행장’,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에 온 서복 일행이 처음으로 도착했다는 정방동의‘서복전시관’ 등을 돌아보며, 모처럼 아내와 많은 이야기 속에서 지난 일을 회상하며 사랑을 확인하고 다져 나갔다.
신혼여행 때 묵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허니문 하우스’도 찾아가 보았다. 바닥이 마루이었던 화장실과 다다미 거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카페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쉽기는 하였지만 작년 여름에 묶었던 ‘KAL 서귀포호텔’을 배경 삼아 셀카를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돌아오는 날 새벽에는 한림항 수산물 시장에 나가 경매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중개인에게 신선한 생선을 사서 집으로 부치기도 하였다.
별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하양 노랑 파랑,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의 아름다운 별들이 검푸른 하늘에서 이마를 타고 어깨로 내려와 미끄러진다. 이렇게 많은 별을 여유롭게 볼 수 있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가슴이 세차게 뜀박질하더니 철렁 내려앉는다. 아! 시간이 아니라 계절이 통째로 가고 있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매미도 봄과 가을을 모르고 삶을 등진다. 순간순간에 지나치는 시간과 밤낮의 바뀜, 나아가 계절의 순환마저도 무감각하게 살아온 지난날에 비해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이 턱없이 짧은 것은 분명하다.
한 달을 제주도 자연 속에서 같이 웃어주고 나를 토닥이면서 절대 내 편이 되어준 아내가 진정으로 고맙다. 다른 곳에서 한 달살이를 또 계획하고 있다.
그 기다림과 설렘만으로도, 오늘 내가 이렇게 숨 쉬고 있는 삶 자체로도 깊이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또 다른 환경에서 생활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나를 안내하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