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6.3.12.(토)
참석자: 통통한 토끼외 1인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화산> 봉동> 소양> 임실> 오수> 남원> 구례> 사성암> 용서폭포> 순천향매화마을
상서호> 낙안읍성> 금둔사> 벌교> 소록도> 거금대금> 득량만 강골마을 > 율어> 외서>
주암호 > 석곡> 곡성> 남원> 성수> 진안> 주천> 금산> 진산> 대전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이른 봄꽃을 구경하고자 남도로 향했지난 아직 이른감이 있습니다. 다음주 정도야 되야 개화가 한창일듯
합니다. 광양쪽은 여기보다 상태가 더 좋다하는데 아직은 이른감있습니다. 산수유도 이제 피기 시작합니다.
홍매화 구경도 노렸지만 이미 철을 놓친듯합니다. 지난주 추위와 비로 많이 진듯합니다.
남도의 꽃구경은 축제기간을 피해서 평일 아침 일찍 다니면 호젓한 만에 그 멋진 풍경을 혼자 독차지 할수
있습니다.
고흥반도는 이번에 처음 들어가봤는데 벌교에서 들어가는 15번, 27번 국도는 쭉쭉뻗은 50km구간이 원없이
달리기 딱 좋은 코스라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소록도 병원은 차량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복귀도 돌아돌아서
왔는데 도로상태는 최상이며 날이 더 포근해지만 본격적인 라이딩의 시즌이 다가온듯합니다.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 대전에서 1시간 반만에 오수에 도착....첫 휴식을 합니다.>
< 옛날 교과서에 읽었던 '주인구한 개'의 이야기의 고향 오수~~~ 플랜더스의 개, 파트라슈 아닙니다~~!!!!>
* 오수의견비가 있고, 의견문화제가 개최되는 시민들의 안식처 *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을 애완이 아닌 반려 동물로 바꿔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인간을 잘 따르고,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이러한 반려동물의 역사는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먼 신리시대에도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오수면의 오수의견이야기이다.
임실에서 남원으로 가는 춘향로로 10km쯤 가면 오수면이 나온다. 오수라는 지명은 이 고장에 구전되어온 전설과
관련되어 '보은의 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오수 시장 옆에 있는 원동산 공원에는 의견비와 동상을 세워, 주인에
대한 개의 충성과 의리를 기리고 있다. 최근에는 오수에서 임실쪽 1.2km지점 4차선 도로변 오암리에 새로운 의견상을
세워 작은 공원으로 조성하여 휴식공간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 주인을 살린 충견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
신라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를 몹시 사랑한 그는 출타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주인이 장에 다녀오면서 술에 만취되어 귀가길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때마침 산불이나 번지던 불길이 주인근처로
오자, 다급해진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자, 물 속에 뛰어 들어가 온몸에 물을 묻혀
주인 주변을 적시는 일을 수백번 반복하여, 불길을 겨우 막았다.
그리고 나서 개는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개의 의리에 감탄한
나머지 개를 묻어주고, 무덤에 지팡이를 꽂아 놓았다. 그런데 그 후 싹이 나서 큰 나무로 자랐다. 의리있는 '개나무'
고장이란 뜻으로 그 이후 오수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수면에서는 지역사회 개발과 지역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희생과 충성이 담긴 의견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정신을
길이 보존 시키며, 명견명소로 인정을 받고 지역을 널리 알리고자 매년 4월에 다채로운 의견문화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수의견공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오수에서 남원지나 구례로 넘어가는데.....구례 산동에 산수유 마을이 있쬬~~~ 산수유가 이제 피기
시작했습니다. 본 사진은 2014.3.23.자 산수유 사진입니다. 올해도 그쯤에서 가시거나 19일즘 가시면
절정일듯합니다.>
<2014.3.에 산수유마을 산동에서~~~>
<2014.3.에 산수유마을 산동에서~~~>
< 남원과 구례의 멋진 꽃구경은 과거 사진으로 대체하고 오늘 첫번째 기착지인 사성암에 올라 주변경치를
조망합니다.>
< 사성암 약사전을 배경으로 후배를 담아봅니다.>
< 부처님 뵈려 가파른 길을 한참을 걸어 갑니다. 버스에서 내려도 한참입니다. 경사가 급경사이니 부츠신고
오시는 분들은 각오하세요>
[사성암]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 22)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산은 바위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겨서 명명된 이름이다. 『사성암사적 四聖庵史蹟』에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 도선국사
(道詵國師), 진각(眞覺), 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원효바위라는 좌선대가 있는데,
원효대사가 좌선하던 자리이다.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은
법당인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데,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불가사의한 전설이자 자랑이다.
약 25m의 기암절벽에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약사발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약사전의
건축양식은 금강산 보덕암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마애 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사성암은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죽마리 오산(鰲山)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오산은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이다.
『봉성지 鳳城誌』에서는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였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등 12비경으로 절경이 뛰어나다.
또한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문집 圓鑑國師文集』에도 오산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오산 정상에서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던 곳”이라 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찰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이며, 암자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
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 초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귀목나무(수령 800년)와 7개의 바위가 원을 그리면서 놓여 있는 곳이 있으며, 약수물 마실 곳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찰 입구에서 4.2km의 거리에 있으며, 법당 왼편에 지장전, 산신각, 도선굴, 소원바위, 좌선대,
귀목나무가 있다.
* 544년(성왕 22) 연기조사 창건. 문무왕 재위기(661~681) 원효대사가 의상과 함께 수행. 원효바위(좌선대),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그린 구례사성암마애여래입상(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이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암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성암 오르는 길을 다시 되짚어 봅니다.>
<멀리 구례구역과 섬진강 그리고 황전천이 만나는 곳이 한눈에 보입니다.>
<담쟁인지 바짝마른 나무줄기에 소원을 담은 첫원짜리 지폐가 매듭되어 매달려 있습니다. >
< 무슨 소원이 담겨 있을까요??
< 사성암은 여느 암자와 달리 비탈과 절벽에 세워져 돌계단이 많습니다.>
< 오산 산신령님......호랑이도 산신령님도 인자하게 느껴집니다. >
< 삼대(지리산, 섬진강, 구례평야)삼미(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의 고장 구례가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구례와 빨치산]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삼천리 한반도를 달려 반도의 남쪽에 용트림하여 우뚝 솟아 깊고 광대하며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언제나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감싸고 품어 왔다.
왕조의 권세가들이 민중을 핍박하거나 외세의 침략이 끊이질 않을 때 민중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최후의 저항을 펼쳤던 것은 지리산이 그만큼 깊고 넓어 투쟁과 생존의 기본 조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단지 높고 큰 산만의 개념이 아니라 민중의 이상향을 실천할 수 있는 낙원이요, 또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 정책을 막 폈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투쟁한 의병들이 지리산의 실상사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웠던 이야기가 지금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일대에 사는 촌로들을 통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지리산은 이른바 빨치산이 지리산을 무대로 투쟁하기 전에도 이미 반제국주의 타도의 주요한 거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빨치산(partisan)’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유래하였는데, 파르티란 도당·동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과 동의어인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이 보다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어쨌든 한국의 현대사에서
빨치산이라는 뜻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전후에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타도하여 공산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지리산을 대표로 하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좌익 집단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빨치산 활동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일제 말기에 일단의 애국지사들이나 징병과 징용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빨치산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좌익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훗날 지리산 빨치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이현상이 해방 전부터 지리산을 은신처로 일제와 투쟁한
것은 이러한 지리산의 환경적 특징으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조직적으로 은거하여 유격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는 이른바
여순 반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 경, 여수 주둔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 짐지회
등의 좌익계 군인들이 제주도 폭동 진압에 출동을 거부한다는 표면적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약 3천 명의 반란군들은 지방 남로당 당원들의 지원을 받고서 일시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 학구, 광양,
벌교 등 세 방면으로 진격하여 22일 아침에는 지리산 자락의 구례와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반란군과 남로당 당원들은
지서, 관공서 등을 습격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 간부, 우익 인사, 지주 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여 당시 전라남도
남동부 지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14연대의 반란에 놀란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황급히 반란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난 뒤, 전투사령관 송호성이 지휘하는 군대가 진압 작전을 벌였다. 10월 23일 반란군에 대한 토벌
작전이 성공하자 14연대 반란군 패잔병들은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의 문수골, 화엄사계곡,
산청 근처의 웅석봉 등지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지회가 이끄는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지리산에 입산한 시점부터 지리산과 빨치산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김지회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1948년 10월 25일 지리산 문수계곡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난 뒤 함양·하동·순천·구례·
남원 등지에 출몰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 분자를 죽이고 지주의 집을 약탈하였으며 산간 지역에 유격전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9년 4월 9일 국군은 뱀사골 반선 지역에서 김지회 부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당시 김지회가 이끈 패잔병들은 약 1천여 명 정도 되었는데, 반선 전투에서 김지회·홍순석 등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사살되고 패잔병들이 괴멸했을 때 남은 패잔병들은 약 2백여 명이었다. 군경에 쫓긴 이들은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지리산 일대의 남로당 세력과 연계하여 이른바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였다.
한편 구례 유격대장 박종하는 여수·광양·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사령부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 1949년 6월 하순 박종하는 50여 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
중이었던 국군의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과 기관총 5정, 소총 70여 정, 실탄 수만 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했다.
1949년 9월 박종하는 또 1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 중인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백여 명과 소총 7백여 정 등 대대 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 투쟁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14연대 반란군의 정치위원이었던 이현상은 박종하 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출신의 패잔병들과 세력을 합쳐
지리산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그에게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지서를 습격하고 보급 투쟁을 전개하면서 무기 수리와 폭탄 제조 공장을 운영하였으며, 또 지리산
일대의 해방지구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하여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지리산 자락에 거주하는
양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선전 활동도 병행했다.
그들이 이처럼 지리산 유격 투쟁의 초기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산간 주민들의 동조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양민들은 빨치산들이 실시한 토지 개혁에 크게
고무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했다고 생각한다. 또 당시 북한에서 남한의 빨치산을 지원할 목적으로 파견한 이른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남파유격대’의 일부가 지리산까지 내려와서 지리산 빨치산의 유격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리산 빨치산은 1950년 1월에 산청군 화개면에서 국군 70여 명을 기습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과
경찰은 추위를 이용하여 민간 부락과 빨치산의 통로와 소통을 차단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을 단행하였다.
빨치산들은 혹독한 추위에 보급로가 끊긴 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950년 6월 초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더 이상 유격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잔여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월북을
결심했다. 그들이 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중 무주에서 인민군이 38선을 무너뜨리고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현상은 대전에 가서 인민군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났는데 김책은 그에게 후방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현상은 즉시 유격대를 이끌고 다시 남하하였는데, 이때부터 빨치산의 투쟁과
운명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빨치산과 그 아픔이 서린 지리산 [빨치산과 그 아픔이 서린 智異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800년 먹은 귀목나무와 처마...>
< 사성암 바로 옆 골짜기에 있는 용서폭포......아는 사람들만 간다는 그 폭포 입니다.>
< 용서폭 가는 길에 핀 부지런한 매화>
[용서폭포]
전라남도 구례군과 경계를 이루는 순천시 황전면 금평리 용서마을 뒤쪽의 동주리봉(690m) 서쪽 기슭에 있다.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폭 약 100m, 높이 약 50m의 수직절리(垂直節理)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이다. 건기에는 대체로 말라 있으나
우기에는 풍부한 수량의 폭포수가 장쾌하게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
용서폭포 주변의 절벽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암벽등반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암벽에 개척된 등반 루트는 총 68개이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 폭포 아래쪽 평지에 여러 개의 작은 야영장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서폭포 [龍棲瀑布] (두산백과)
< 현역시절에는 5.10은 가볍게 해결했는데.....이젠 바위 보기만해도 어지럽습니다. ......>
< 용서폭포 밑에 부지런하게 핀 산수유>
< 순천향매실 마을 개화현황입니다. 이곳이 가장 많이 핀 부분입니다. 여행참고하세요>
<부지런히 달려 도착한 금둔사, 통도사나 선암사, 화엄사 그리고 금둔사 홍매화!!!!!>
< 금둔사의 매력포인트 홍매화~~~개화상태도 놓치고 사진으로 표현도 안되고~~~~ ^^;>
< 다기는 보이는데 스님이 안계셔서 얻어마시진 못하고 사진으로만 담아 봅니다.>
<금둔사 전경>
< 금둔사에서 정감 가는 풍경>
<홍과 백이 이뿌게 어우러져있습니다.>
< 꽃과 꽃이 겹치니 보기 좋습니다. >
<금둔사에서 봄꽃을 느끼며 벌교로 향합니다.>
< 낙안읍성을 뒤로하고 벌교읍내로 들어와서 점심을 먹습니다. 벌교에서 꼬막정식은 비추입니다.가격대비
꼬막상태나 양이나 기대에 한참 못 미칩니다.>
<벌교에 오면 남도여관을 그냥 지나칠수 없죠>
[남도여관, 보성여관]
[네이버 지식백과] 구 보성여관 - 등록문화재 제132호 (대한민국 여행사전, 2009. 3. 20., 터치아트)
[금융조합]
금융조합은 대한제국 때에 설립된 서민금융기관이다. 1907년에 설립되어 1956년 7월에 대한민국의 농업은행의 모체가
된 서민금융기관으로 신협과 비슷한 성격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 5월 지방금융조합규칙과 지방금융조합설립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고, 그해 8월에 광주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그 후 1910년 6월까지 불과 3년만에 금융조합은
130개로 늘어날 만큼 급증세를 보였다. 영농자금 대부, 농산물 위탁판매, 종자나 비료 등의 구매와 분배 업무를 맡았다.
지방금융조합은 겉으로는 신용조합임을 표방했으나, 제국주의의 경제적 지배를 위해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고 농촌의
화폐정리사업, 납세선전, 농사지도 장려사업 등 정책사업을 추진하는 말단기관의 역할을 했다.
금융조합은 1914년과 1918년의 법령 개정으로 촌락과 도시에 금융조합을 설치하고 각 도 금융조합연합회를 결성하는
등 점차 체제를 정비했다. 초기와는 달리 구매·판매 사업을 제한하고 농업자금 이외의 대부사업도 추진하는 등 금융사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발전시켜 나갔다. 1938년 말에는 조선식산은행에 버금가는 거대 금융기관이 되었다. 1945년까지
912개의 조합이 있었으며 1956년에 농업은행의 설립으로 대한금융조합연합회가 해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융조합 [金融組合]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종합, 굿모닝미디어)
[홍교]
반원형의 아치가 다리를 받치고 있는 벌교 홍교는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지금도 주민들이 내를 건널 때
이용한다고 하니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다리이다. 다리 아래로는 물때에 따라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원래 이 자리에는
나무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이곳의 지명이 별교라 지어졌다 하는데 조선 영조 때 홍수가 나면서
다리가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시 다리를 놓았는데 그때 만든 다리가 홍교로 선암사의 스님이 이곳에 와서 감독하였다고 하며
그 기록이 지금 선암사 승선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홍교비에 함께 새겨져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1980년대 초에 보수공사를 하여 옛 다리의 모습과 새로 고친 흔적이 대비되니
살펴보면 되겠다. 아치 아래 중간에는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건축학적으로 이 자리는 아치를 만들 때 마지막 돌을 넣어
전체를 고정시키는 중요한 자리라고 한다. 여기에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용을 형상화함으로써 물난리를 예방하고자 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옛날에는 용의 코끝에 방울을 달아놓아 바람이 불면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지금 종은 간데없으니 소리도
들을 수 없어 마음속으로 상상을 해볼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벌교 홍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벌교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바로 30분 만에 도착한 소록도.....>
한센병 환우의 아픔이 서린 작고 아름다운 섬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 해서 소록도라 불리는 이 섬은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직도 약 7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라 여느 관광지의 흥겨움이나 소란스러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녹동항에서 바라보면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운 1㎞ 거리에 있다. 4.4㎢의 작은 섬이지만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백사장이 아름다운 소록도해수욕장과 일제 시대 강제수용되었던 한센병 환자들이 손수 가꾼 것으로 알려진 중앙공원 등
볼거리가 많은 섬이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소록도 선착장에 내리면 지정된 도로를 따라 섬 반대편의 소록도 해수욕장까지 갈 수 있다.
해변을 감싸 안으며 시원스레 하늘을 바라보는 소나무 숲과 갯바위들이 멋진 경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소록도병원이 있는 곳으로
가면 한센병 환자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활자료관과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시비,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등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제2안내소 앞에는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자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수탄장이 있다. 한센병 환자의 자녀를
강제로 격리해 놓고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에 있는 이 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날 수 있게 했는데 그것도 전염병을 우려해
서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길가에 마주 서서 눈만 마주칠 수 있었다 한다. 실제 한센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다. 최근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찾기가 더욱 쉬워졌다. 단, 일몰 후 출입은 통제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록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 소록도 입구에 도착해서 소록병원에 가보려 했지만 입구에서 외부차량은 통제를 하는 통에 그냥 솔밭에서
걸어보기만 합니다. 한센병 환우들이 일제시대에 당했던 고통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
[한센병]
나병은 BC 600년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BC 200년 중국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구약성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에는 문둥병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 확실하게 알려진 시기는 500년경이며, 12세기에 유럽
지역으로 퍼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 한센병의 기원은 동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동아프리카의 나균은 인도로 전파되고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으로 그리스로 전파되어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한센병 환자의 분포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부 아메리카 등 열대 지역과 아열대 지역에 환자가 많고, 특히 인도는 단일 국가
중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과거 나병(癩病)이라고도 하였으나 한센병(Hansen's disease)이라고 명명한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아우메우에르 한센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1874년 'Bacillus leprae'라 명명함으로써 유래하였다. 말초신경과
피부에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풍병(風病)·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 하였다.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랫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그러나 전세계 인구의 95%는 한센병에
자연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균이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나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한센병은 비록 제 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센병 [leprosy, 癩病] (두산백과)
<득량만의 바다는 잔잔하기만하고 고요하며 아름답지만 소록도에서 쳐다보고 있기에 더욱더 슬프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어릴때만해도 문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는데, 병에대한 그릇된 인식과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이 소록도가 더욱 가슴아프게 느껴집니다.>
< 멀리 거금대교를 달려 내려오는 후배>
< 오늘의 터닝포인트 거금대교>
<득량만에 갇힌 조성천에 무성한 갈대와 슈퍼테레네>
< 흐르던 물이 둑에 잠기고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잡는 물길.....>
[득량만 간척지]
2번국도를 따라 벌교에서 보성 쪽으로 가다 보면 넓은 벌판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가 쌀 증산을 위해 만든 대표적인 간척지로,
전남 보성군 조성면과 득량면에 있다. 내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목사님에게 허락을 구해, 덕산교회 종탑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종탑의 고도가 낮아 바다가 잘 드러나지 않고 간척지 전체가 보이지 않아 아쉽다. 더 높은 조망점을
찾아 KBS중계소가 있는 방장산(536m) 정상에 몇 번 올랐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매번 허탕만 쳤다. 임도 입구를 찾기 힘드나,
방장산 정상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다.
득량만을 가로지르는 4.5㎞의 득량만방조제는 1937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남해로 직접 유입하는 득량천과 조성천은 유역 면적이
좁아 이 넓은 농경지에 물을 댈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성강을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고, 이 물을 간척지로 보내기
위한 2.2㎞ 길이의 터널을 뚫었다. 보성강저수지 쪽의 고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반대편 득량면에 유역 변경식 발전소를 함께
만들었는데, 이것이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보성강발전소이다. 이 발전소는 2번국도 변에서 보이는데, 보성강발전소라고 하지만
보성강 유역에 있지 않다. 다만 발전용수가 보성강의 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득량만간척지 (앵글 속 지리학 (하), 2011. 12. 15., 푸른길)
< 우리가 저 수많은 갈대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단지 1년을 사느냐 80년을 사느냐~~ 그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 율어를 지나 외서면으로 들어가는 길에 잠시 쉬며 시골풍경을 담아봅니다.>
< 전라도에서 흔히 보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
< 집에서 본 산수유 꽃망울>
꽃을 보러 650km를 달렸지만 정작 바닥을 뒤지면서 보는 꽃은 아파트 화단에 핀 산수유, 매화 그리고 낙엽에 덮힌
녀석들이랍니다.
항상 그렇듯이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제사 보이는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놓치고 사는것들이 있는지 한번 주변을
여유를 갖고 되돌아볼 일입니다.
첫댓글 이 코스를 하루만에 다 가신건가요? 대단 하십니다. 잘 봤습니다^^
투어계획이 주요 포인트를 보고 이동하는게 컨셉입니다...다 오밀조밀 있어서 가능 합니다
벌교에서 소록도까지 30분만에 가셨단글보고 헉 했습니다 ㅎㅎㅎ
거리상 그 시간에 가면 좀 거시기 한데 길도 좋고 차량도 없고...비유하자면 편대비행했다고..ㅋ생각 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광양매화마을은 외길 이어서 죽음이죠.
모터싸이클도 못움직일때가 있죠.
ㅎㅎㅎ
이렇게 구비구비 방방곡곡 다 찾아댕기시고... 좋습니다
덕분에 좋은곳 코스 생각하게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