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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났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봄과 가을이 없다는 항구 도시인 전북 군산으로 이사 간 것이다. 어린 시절이 돛을 달고 떠나고 사춘기가 막 닻을 내리던 시기였다.
14살 소년에게 고향의 품이란 지구의 무게와 맞먹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 떠나온 고향 때문에 마음이 길을 잃은 날엔 선창가에 나아가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 건달처럼 주변을 배회하던 바닷바람이 역한 비린내를 풍겨왔다. 타향이란 그렇게 땅 냄새부터 다른 것이다.
아버지는 군산의 선창가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재기를 노렸다. 퀘니히스베르그 주부들은 철학자 칸트가 자기 집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맞추었다던가. 칸트만큼 아니 칸트를 능가할 정도로 정확하고 성실한 분이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성실성은 돌아가신 뒤 몇십 권의 거래 장부로 남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의 거래 내역 속에 깨알 같은 글씨가 아버지의 생의 여정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난 벌써부터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삶은 진지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꿈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혼동하기 쉽지만 진지한 것과 진실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난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아버지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살리라.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에게 유일한 취미이자 식도락이 있다면 그것은 틈틈이 복어 요리를 즐기시는 것이었다. 복어 요리를 드시기 위해 아버지는 이따금 제2 명산옥이란 한식집으로 발걸음을 하시곤 했다. 제2 명산옥은 당시 군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큰 음식점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복어의 독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복어 요리를 먹다가 독에 중독돼 황천객이 되었노라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나돌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항목 가운데는 복어 식도락도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세상에 하고 많은 음식을 두고 왜 그런 위험천만한 음식을 드시는 걸까.
마침내 복어 맛을 보다
3년 전 여름이었던가, 전업작가를 꿈꾸며 충북 제천 백운면 모정리에 내려와 생활하던 소설가 임영태 선생댁에 놀러 간 적이 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임영태 선생은 1994년 장편소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민음사에서 주는 제1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소설가다.
임영태 선생의 초대로 간 게 아니라 부인 이서인씨의 초대를 받아 간 것이다. 그 역시 몇 권의 소설책을 상재한 소설가다. 이서인씨가 수차례 "형 한 번 놀러 와" 하고 권하는 것을 마냥 모르는 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임영태 선생과는 그때가 초면이었다. 수인사를 끝내자마자 이서인씨가 집안에 있던 제천 막걸리 몇 병을 가져왔다.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금세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낮술에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속설이 그냥 폼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오후 4시쯤, 집안에서 아직 치다꺼리할 것이 남은 이서인씨를 빼고 임영태 선생과 둘이서만 먼저 제천 시내로 나왔다. 제천 시내 보건소 근방에는 이서인씨가 운영하는 카페 '나무 물고기'가 있었다. 전업작가를 꿈꾸고 시골로 내려왔지만 막상 생활이 되지 않자 행여 생활의 방편이라도 될까 해서 냈던 카페였다. 카페에 앉아 임영태 선생이 손수 끓여주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근처 음식점으로 갔다.
식사를 주문하던 임영태 선생이 내가 생전 입에 대본 적이 없는 복어찌개를 시켰다. 나는 본래 입이 무척 짧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군대 생활할 적만 해도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아 국에 든 멸치까지 건져낼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가 애써 시킨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복어찌개를 안주로 해서 소주 3병을 마셨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복어찌개를 들면서 난 복어 요리에 심취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맛본 복어찌개는 무미건조한 맛이어서 아버지의 식도락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낮에 마신 막걸리와 소주가 소통합을 이룬 다음 무모하게 출정식이라도 벌이려는지 관자놀이가 자꾸 두근거렸다. 밤 10시쯤. 서울에서 손님 한 분이 내려왔다. 제주 4·3사건을 형상화한 장시 <한라산>으로 필화를 입은 바 있는 이산하 시인이다. 알고 보니 이서인씨와 이산하 시인은 아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술집으로 공간 이동을 한 뒤에 본격적인 술자리가 벌어졌다. 나만 조금 처졌을 뿐 세 사람 모두 탁월한 술꾼이었다. 줄곧 마셔대는 바람에 넷 다 대취해서 나중에는 임 선생의 소설 제목 그대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
술자리의 끝이 늘 그렇듯 막판에는 노래방에 갔다. 나는 본디 노래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하지만 우리 음악과 친숙해지려고 일부러 뽕짝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월도 있다. 난 노래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힐 게 아니라 보다 밝고 환한 곳으로 나와야 한다고 믿는 축이다.
그러나 그 늦은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이 노래방 말고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모두가 취해있는 상태라면 술을 깨기 위해서라도 노래가 필요할 것이다. 노래 속에는 삶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힘과 함께 술을 깨게 하는 힘도 있으니까.
나나 임영태 선생보다 가슴 속에 끓이고 사는 것들이 훨씬 많았던 탓일까. 일행 중에서 이산하 시인과 이서인씨가 가장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특히 스테이지를 장악하고 격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산하 시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투사는 노래방에서도 투사인가. 그러나 정작 나를 감동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임영태 부부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당신은 잘 부를 수 있어"라고 끊임없이 서로 격려했다. 세상에, 노래 하나 부르는데도 그토록 많은 격려가 필요하다니! 팔불출을 자청하듯 임영태 선생은 내게 "아내는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귀띔하듯 말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말했지만 나도 이미 아는 사실이다. 노래방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을까. 백운면 임 선생의 집으로 돌아오자 시간은 새벽 4시를 지나 있었다.
내가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계는 규칙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며 내 입맛대로 세상이 조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을 떠보니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가 넘어있었다. 불규칙한 세계에 대응하는 방편의 하나로 나 역시 불규칙하게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임 선생에게 그만 가야겠다고 했더니 제천 시내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난 이왕 온김에 천등산 박달재를 걸어서 넘어봐야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넘어보겠는가.
집 앞에서 임 선생 부부와 작별한 뒤 모퉁이를 돌자 거기서부터가 바로 박달재였다.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술에서 덜 깬 온몸을 흔들어 깨우듯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박달재를 넘어서 제천 시내까지 먼 거리를 걸어 나왔다.
우린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
세상 모든 일이 죄다 그렇듯이 처음이 문제일 뿐이지 그 다음은 쉽다. 그날 이후 복어 요리를 맛볼 기회가 자주 생겼다. 그렇다고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 방의 빈대가 독 난다'는 말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복어 요리는 여전히 나를 매혹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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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복. 충남 강경의 복어요리 전문점 수족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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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물론 조리하는 사람에 따라서나, 어종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맛본 복어의 맛은 담백하긴 했으나 약간 맹숭맹숭하게 느껴졌다. 내가 짜고 얼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전라도 음식에 깊숙이 길든 탓인가?
복어 요리를 먹을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곤 했다. 겨우 요런 맛에 그렇게도 매혹되셨더란 말인가. 혹시 우리 아버지가 70년대 초에 드시던 복어와 지금 내가 맛보는 복어 맛 사이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정일근 시인의 시 '사는 맛'은 복어의 밋밋한 맛에 실망한 내게 넌지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복이 빠진 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의 맛을 들이다 고수가 되면 치사량의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이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 정일근 시 '사는 맛' 전문
사람들은 왜 그런 복어 요리를 좋아하는 것일까. 복어 요리는 철갑상어 알인 캐비어(caviar)와 트뤼프(truffle. 송로버섯), 푸아그라(foie gras, 거위의 간)와 더불어 세계 4대 진미 식품의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복어 속엔 간의 해독작용을 강화하고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좋은 메티오닌과 타우린 같은 함황아미노산의 함량이 아주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먹을 만큼 담담한 맛이 뛰어난 복어에는 알과 난소, 간장, 혈액, 표피 등에 독이 들어있다. 청산가리의 1천 배에 달할 만큼 치명적인 독성이다. 그러므로 일단 복어 독에 중독되면 30분 이내에 입술과 혀끝 등이 마비되기 시작하고 독이 서서히 중추신경을 침범하게 되면 호흡마비를 일으켜 결국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무미건조한 삶으로부터의 망명을 위하여
70년대만 해도 복어를 먹다가 독에 중독돼 죽었다는 얘기는 별로 희귀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복어란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인식이 대중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복집도 많을뿐더러 복 중독으로 세상을 등졌다는 뉴스도 전해지지 않는다. 세월을 따라서 복어의 독을 제거하는 기술도 크게 진화한 까닭이다.
정일근 시인은 독을 제거한 복어 요리에 대해 "복이 빠진/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일본에선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는 폭넓은 정보를 전하면서 치사량의 독까지 맛으로 먹을 줄 알아야 진짜 복어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라는 시인의 진술에 동의한다면 독을 뺀 복어를 먹었던 나는 아직 복어를 먹었다고 말할 수 없는 셈이다.
시인은 "복어에 독이 있듯이 사람살이에도 독이 있다"고 말한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이 그것이다. 그 독을 빼고 나면 무미건조한 삶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런 맛을 두루뭉술 '스트레스'로 간주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 빠진 복어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는 맛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 등 삶의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자극을 구한다. 엽기적 살인 등 자극적인 뉴스, 간통이나 치정 등 자극적인 주제를 다룬 연속극, 인신공격에 가까운 자극적인 댓글 등….
약간 자조적으로 말한다면 쉽게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삶을 늘 쉽게 살아 버릇한다면 자기 생에 깊이를 축적한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나이테 없이 어떻게 나무의 아름다운 표면이 존재할 수 있으며, 삶에서 얻은 옹이 하나 없이 어떻게 아름다운 중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여름밤 임영태 부부는 내게 많은 것을 보여줬다. 복어 맛을 처음 알려 주었고, 부부가 평등하게 산다는 것과 더 나아가 사랑이라는 게 결국 상대방의 자아를 처지지 않도록 북돋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으며 사는 맛이 무엇인가를 두루 보여주었다.
전업작가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실험을 꿑낸 임영태 부부는 내가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리에서 힘든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정리에서의 하룻밤은 내게 영영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세월은 흘러도 추억은 늘 불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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