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부석사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영주로 향하다
아직 단풍이 제대로 물들기 전인 10월 초, 오직 부석사를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주로 향했다. 영주는 안동이나 예천과 같은 경북 북부 지역의 도시가 그렇듯이 양반 문화가 잘 남아있는 도시다. 부석사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뒤에 소수서원이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되면서 영주는 세계문화유산을 두 개나 보유하고 있게 되었다. 주말 짧은 시간 동안 부석사를 본 뒤 소수서원을 비롯한 영주의 양반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국립공원 이야기 48 - 순흥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으로 남아있는 조그만 고을이지만, 순흥은 조선시대인 1463년 (태종 13년)에 도호부로 격상될 정도로 큰 도시였다. 과거에는 조선 2대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가 부임하고 1457년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순흥도호부가 폐지되고 이웃한 군현에 분할 편입되었다. 1683년 (숙종 9년)에 다시 순흥도호부가 복구되어 순흥부 또는 순흥군으로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남아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에 단행된 부군면 통폐합 정책으로 영주군에 통폐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큰 도시였던 순흥이 몰락하게 된 사건인 단종 복위 시도는 당시에 조선을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순흥 땅에는 주세붕이 ‘소가 있는 숙수사 옛터’라 묘사한 곳이 있는데, 소백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죽계천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는 곳에서 만들어진 큰 못을 의미한다. 소 옆에 있던 숙수사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큰 절로 전국에서 참배자가 찾아오던 사찰이었다. 주세붕이 갔을 때는 숙수사가 이미 불태워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아있었다. 거찰이던 숙수사가 불태워진 건 1457년 단종 복위 시도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해, 순흥에는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유배를 가 있었다. 1453년에 세조가 단종을 보위하는 김종서를 제거하고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조카 단종의 편에 서서 모반을 꾀하다 유배된 것이다. 1455년에 수양대군이 결국 왕위를 선양받게 되자 이듬해인 1456년에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이배 되었고 단종은 산 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다시 한번 모반을 꾀하였다. 1457년 순흥부 부사로 있던 이보흠과 모의해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고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를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거사 전 관노의 고발로 계획은 무산되었고, 격노한 세조는 관군을 보내 순흥도호부를 혁파하였다. 그때 숙수사도 불타 없어지고, 모반에 참여한 순흥 사람들은 관군의 칼에 목숨을 잃고 그들의 시신은 숙수사 옆 소 (沼)에 수장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앉아
지금은 지방의 작은 도시에 불과한 영주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한 아름다운 도시다. 소수서원을 비롯한 다양한 유교 유적이 있는 순흥 땅은 예부터 살기 좋은 큰 고을이었으며, 소백산에서 내려온 수많은 계곡은 풍요로운 들판에 물을 공급하였다. 이런 영주 땅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건 자명한 일이었으며, 조선 시대 이전에도 숙수사를 비롯한 큰 절이 들어섰다. 하지만 숙수사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해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소수서원이 세워져 지금은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 영주가 자랑하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은 부석사가 되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 사찰이다. <삼국유사> 의상 전교조에는 의상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하던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따라왔는데, 의상이 반대 세력 때문에 부석사를 짓지 못하자 바위로 변해 물리쳐 창건을 돕고서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현재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부석사로 진입하는 천 관문인 천왕문 앞에는 통일신라 시대 세워진 당간지주가 서 있다. 1m 간격을 두고 동쪽과 서쪽을 마주 보며 서 있는 당간지주는 절의 영역을 표시하는 깃발인 '당'을 걸어두는 긴 장대인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돌기둥이다. 높이 4.28m의 당간지주는 마주 보는 안쪽의 앞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뒤 양쪽 옆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가늘고 길면서도 위가 좁아져 안정감이 있으며,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을 마주 하기 위해서는 안양루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누하진입'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낮추면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추어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부석사의 대표적인 건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은 신라 시대 건립 이후 고려 현종 7년 (1016)에 고쳤다가 공민왕 7년 (1358)에 불타 버렸다. 고려 우왕 2년 (1376)에 원응이 고쳐 짓고 조선 광해군 (1608~1623) 때 새로 단장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 수리할 때 그 기록이 발견되었다. 다만 목조건물은 지은 지 100~200년이 지난 뒤에 수리하기 때문에, 이 건물은 13세기 초나 이르면 12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은 앞면 5칸・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기둥 위에만 놓은 주심포식 구조이다. 가운데가 위아래보다 굵은 배흘림기둥의 머리와 접시받침인 소로의 굽은 각각 건물 안쪽으로 약간 휘었고, 벽면도 안으로 약간 구부러졌다. 특히 팔각의 활주가 받치고 있는 4곳의 추녀 아래 기둥은 가운데 칸의 기둥보다 조금 높은 '귀 솟음' 수법으로 세워져 경쾌해 보이며, 처마 끝도 더 솟아 제법 멋스럽게 굽은 처마선을 이루었다. 무량수전은 장식적인 유소가 적고 나무를 짜 맞춘 수법이 견실하여 주심포식 양식의 기본을 가장 잘 담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무량수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아름다운 석등이 서 있다. 법당 앞에 석탑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구조지만, 부석사는 석등 하나만 달랑 놓여 있어 다른 절과 다른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높이 2.97m인 석등은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각 면에 2개의 연꽃잎 모양 안상을 새긴 바닥돌 위에 큼직한 연꽃무늬와 귀꽃을 조각한 아래 받침돌이 놓였고, 그 위로는 전형적인 팔각의 가운데 기둥이 있는데, 기둥의 굵기나 높이는 적당하면서도 아름답다.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 받침돌 위에는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사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보살상을 정교하게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 있어 경쾌해 보이며,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와 같은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석등의 앞에는 낮은 바닥돌 위에 1단의 긴 사각형 돌이 놓였는데, 앞면에는 4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평평한 윗면의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가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높이 5.26m의 석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을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석탑은 다소 높고 넓은 편이지만 짜임새 있고 정제된 모습이어서, 신라 석탑 양식을 그대로 담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꼽힌다.
무량수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의상의 초상을 모신 건물인 조사당을 만날 수 있다. 1916년에 수리할 때 발견된 글에는 이전의 것을 고려 우왕 3년 (1377)에 고쳐 세웠다고 한다. 조선 성종 21년 (1490)과 24년에 다시 고쳐 지금에 이른다.
조사당은 막 쌓은 받침돌 위에 세운 앞면 3칸・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무량수전처럼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기둥 위에만 올린 주심포식 구조이다. 건물이 작기 때문에 기둥의 배흘림은 약하고 기둥의 머리와 접시받침인 소로의 굽이 직선화되는 등 구조는 아주 간결하다. 건물 안의 가운데에는 의상의 초상이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에는 사천왕, 제석천, 범천 등을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고려 후기의 벽화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고려 시대 회화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희귀한 채색 그림 중 하나이다. 조사당의 동쪽 처마 아래에는 의상이 꽂은 지방이가 자란 것이라는 나무가 서 있다.
부석사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무량수전 앞에 앉아 영주의 풍요로운 땅을 바라본다. 주말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를 찾아 경내는 점점 더 혼잡해지지만 부석사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흐뭇하기만 하다. 몇몇 사람들은 경주 양동마을이나 안동의 병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후 사람들로 가득 차 그 가치를 잃었다고 폄하하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이탈리아의 베니스나 프랑스의 파리가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해서 그 가치를 잃는 것일까? 문화유산의 가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그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잘 보존될 가능성도 커지는 법이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역사 유적들이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파괴되어 가는 예가 무수히 많다. 김포 장릉의 경우도 말도 안 되는 아파트 공사로 인해 유적의 가치가 훼손되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으로 인해 장릉의 가치가 살아날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백산의 또 다른 상징인 철쭉을 찾아
부석사는 소백산의 자랑이며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소백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건 부석사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쭉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 물으면 곧바로 소백산이라 답할 수 있다. 아침고요수목원과 같은 수목원에서도 철쭉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의 관리 없이 자연적으로 핀 소백산 철쭉의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소백산 국립공원의 상징 그림에도 철쭉이 그려져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5월 말이 되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백산을 접하고 있는 자치단체인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에 철쭉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늦봄에 단양이나 영주를 찾으면 좋다. 내가 찾은 곳은 충북 단양으로 철쭉이 만개해 소백산 능선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 때였다.
참고문헌: https://ncms.nculture.org/confucianism/story/2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