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직공원에 무등산을 바라보면 광주 천변에 세워진 남북 5칸 동서 4칸 크기의 희경루(喜慶樓)가 거의 완성되어 이제 단청만 남았다. 강기정 광주시장의 의지로 500년 전 사라진 광주의 상징으로 웅장하고 화려하며 동방의 으뜸이라고 입을 모은 희경루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본다.
광주는 고려말 이래 정3품의 목사(牧使)기 임명된 고을이었다. 그런데 신보안(辛保安)이란 사람이 세종 임금 때 부임해왔다. 그때 토성품관 계층으로 부만호를 역임한 노흥준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광주를 본관으로 지역의 유력한 인사인 노흥준에게 소매(小楳)라는 예쁜 첩이 있었다. 그 예쁜 첩을 본 목사가 중매쟁이를 통해 간통을 했다. 한 번으로 끝났을 간통이 횟수가 늘고 무려 2년 가까히 늘어 나자 노흥준과 가까운 친구 김전(金專)이 목사와 소매가 방안에 가끔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어느 날 노흥준이 뒤를 밟아 함께 있는 방을 덮치자 소매는 창을 넘어 달아나고 노흥준은 방안에 있는 목사를 산정없이 구타를 하고서 소매를 끌고 와 머리를 가위로 깎고 방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노흥준은 다음날 퇴근하는 목사를 만나 다시 폭력을 휘둘러 문제는 커졌다. 당시 수령과 지방 세력과의 사소한 일로 다툰 일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7월에 목사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의 사인에 대해 목사를 수행한 오한(吳漢)이 노흥준의 구타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자세한 말을 하지 않고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사를 치료하던 의원은 이질로 죽었다고 진단을 내렸고 오한은 자세한 말을 하지 않는체 감옥에서 자살해 버린다. 이 사건 외에 목사의 부정부패 혐의가 드러났으나 노흥준이 목사를 구타한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전라 감영의 조사를 거쳐 중앙에 보고 되었다.그 결과 노흥준은 고을 수령을 업신여긴 죄에 걸려들었고 1420년 (세종 2년) 부민고소 금지법에 해당되어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노흥준은 장형 1백대와 3천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고(변방 함경도 경원) 간통 사건을 알려준 김전도 장형 백대 노흥준의 죄를 밝히지 못했다고 전라 감사와 전라 도사도 함께 파면되었다. 이것으로 사건이 끝날 줄 알았는데 격노한 세종은 광주 목을 무진군으로 강등시키면서 장흥 도호부 산하로 귀속시켜버린다.
종 4품의 무진 군수로 바뀐 광주는 치욕이었다. 이 사건은 전국으로 퍼졌고 부민고소법의 첫 시범 케이스로 다른 지역의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광주 사례가 언급되어 부끄럽고 창피한 일은 광주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강등은 10년 정도 지나면 원상 회복이 된 것이 사례였지만 세종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 세월이 2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마자 참다 못한 광주 지역 인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뭉치면서 서울에서는 광주 출신 왕족 순성군 좌의정 황보인 이조 판서와 핵심 측근들을 이선제를 중심으로 로비에 들어 갔고 그리고 문종의 며느리(단종의 부인) 세종의 막내 며느리가 정읍 칠보 출신으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들리며 광주에 와 있는 부근의 수령들이 합세했다.
문종에게 보내 상소문
" 전하 주상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크게 은혜를 펴므로 온 나라의 신민이 다 환한(渙汗)의 은택을 입었으나 본 군 무진주는 한 사람의 애매모호한 일로 억울함을 참아 온 지 20여 년 오래되었으니 매우 통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광주 목으로 회복하도록 허가하여 갱신할 길을 열어 주소서"
성품이 너그럽고 유연한 문종은 상소문을 받고 이 사건을 이조에 보내 재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필문 이선제 아들 5형제가 과거에 급제 정부 요직에 핵심으로 있으면서 이리 저리 뛴 결과 무진주가 광주목으로 딱 20년만에 원상 복구되었다. 그 다음 날 조보(朝報) 요즈음 관보에 해당된 왕명의 직인이 찍힌 조보가 도착되자 광주 군수와 백성들은 환호했다. 그 조보를 받은 광주는 그 기쁨을 나누고자 막 완공된 동북루(고을 수령이 연희를 배풀고 행사 때 쓴 누각)의 이름을 함희상경(咸喜相慶)에서 글자 두 자를 따와 희경루라 했다. 광주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던지 현판을 당대의 문신 신숙주에게 부탁 희경루 현판을 썼고 1567년 (명종22년) 광주목사로 온 최응룡이 과거 급제자 동기생 5명을 불러 연희를 배풀고 그 행사 장면을 화공에게 그림으로 남기도록 했다. 다행이 그림이 지금 국가 지정 보물로 동국대 박물관에 있어 희경루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다시 지어 우리 광주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희경루가 일제 강점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시 복원되었으니 그 자리가 신숙주 보안집에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새 건물과 비싼 땅값에 제자리에 짓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복원되어 반가운 일이다.
시간이 되시면 사직공원 밑 천변에 세워진 희경루에 가보시기를 단청은 4년 후 나무 찐이 빠진 후 한다고 한다. 다시 희경루 탄생을 축하 드린다.
(한국사의 새벽을 열다. 김덕진 교수의 조선사연구. 광주읍지. 민학회 광주이야기 참고 자료).
첫댓글 경사로군요
복원중인 휘경루 다시 좀 찾아보니
맞어 맞네,
그 현판은 조선 문종 실록에 있는 신숙주 희경루 글자를
집자해서 현판을 만든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