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시인 김삿갓 마지막편 ●
※ 150회 ※
☆ 김삿갓의 기행(奇行). ☆
지리산(智異山)은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에 걸쳐있는 엄청나게 큰 산(山)으로 둘레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個)의 고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남원(南原)은 서쪽(西쪽)에 해당(害黨)하고,
함양(咸陽)은 북쪽(北쪽) 고을이고,
진주(晉州)는 지리산(智異山)의
남쪽(南쪽) 고을에 해당(該當)하였다.
이렇듯 크고 넓은 산(山)을 넘자니 다리가
불편(不便)한 김삿갓으로선 정상(頂上)으로
올라가는 건 감히(敢히) 엄두를 낼 수는
없었기에 산(山)허리를 걸어 넘어
진주(晉州) 방향(方向)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옛날 진시황(秦始皇)이라는 이는
영생불사초(永生不死草)를 구(求)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쌍(百雙)을
동방(東邦)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였던 방장산(方丈山)이
바로 오늘날의 지리산(智異山)인 것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산(山)이 높고
골짜기들도 하도 복잡(複雜)하여,
옛날부터 속세(俗世)와 인연(因緣)을 끊은
도인(道人)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김삿갓이 수많은 골짜기를 건너며
깊은 산(山)속으로 들어오다 보니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산골짜기 바위틈에
난데없는 시체(屍體)가 하나 걸려 있었다.
어느 산중(山中)에서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사람시체(屍體)가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
내려오다가 바위틈에 끼어버린 것이었다.
(저런! 깊은 산(山)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물에 빠져 죽다니. 저럴 수가!)
김삿갓은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섬뜩해 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죽은 사람은 승복(僧服)을 입은 것으로 보아
스님이 분명(分明)하였다.
승려(僧侶)들이 죽으면
열반(涅槃) 또는 입적(入寂)이라 하는데,
저 스님은 어쩌다가
이처럼 비참(悲慘)하게 익사(溺死)했을까?
사지(四肢)를 오그린 채 바위틈에
쥐새끼처럼 옹색(壅塞)하게 끼어있는 몰골이
너무도 측은(惻隱)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에라! 시주(施主)는 못 하더라도
바위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스님의 시체(屍體)를 건져 올려,
평평(平平)한 바위 위에
편(便)히 뉘어 주기나 하자.)
그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두루마기를 벗어젖히고 시체(屍體)
인양(引揚) 작업(作業)을 시작(始作)했다.
물이 줄곧 흘러내리는 바위틈에 끼어있는
시체(屍體)를 햇볕 따듯한 바위의 위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본시(本是) 죽고 나면
통나무처럼 뻣뻣해지는 법(法)이다.
그러나 건져 올린 시체(屍體)는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은 탓인지, 별로 뻣뻣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체(屍體)를 등에 업어 올리기는 싫어,
저고리의 등줄기를 움켜잡고
질질 끌어올리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김삿갓은 시체(屍體)를 햇볕 잘 드는
바위까지 끌어 올려놓고 나니,
이왕(已往)이면 무덤까지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눈을 들어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그곳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명당(明堂) 형국(形局)이 분명(分明)하고
시체(屍體)가 놓여 있는 바위 부근(附近)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우뚝우뚝 솟아 있어서, 그 바위들이
마치 무덤 앞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처럼 보였다.
김삿갓은 죽은 사람이
승복(僧服)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스님인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어느 절에 사는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시체(屍體)를 물속에서 건져 올려놓고 보니,
우연(偶然)하게도 그곳이 바로
명당(明堂)자리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고(自古)로 명당(明堂)자리는
동남향(東南向)을 제일(第一)이라 치는데,
이곳은 좌향(坐向)부터가 동남향(東南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自己) 운명(運命)은
자기(自己)가 타고난다고 하더니,
이 스님의 유택(幽宅)은 바로
이곳임이 분명(分明)한가 보구나!)
김삿갓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瞬間),
“양후산립(陽煦山立)”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옛날부터 인품(人品)이 온화(溫和)하고
행실(行實)이 단정(端正)한 인물(人物)을
“양후산립(陽煦山立)”이라고
칭찬(稱讚)해 오는데,
시체의 주인공은 비록 익사는 했을망정,
평소에 소행이 단정했기 때문에
명당자리에 눕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아무려나 시체가 누워 있을 자리를
제대로 찾아 주었으니, 이제는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야 할 판국(판局)이었다.
옛날 시인(詩人)들은 서로 헤어질 때
대개 송별시(送別詩)를 주고받았다.
그때의 시를 “양관곡(陽關曲)”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돌아가신 스님에게 주는
“양관곡(陽關曲)”을 이렇게 읊었다.
청용재좌 백호우 (靑龍在左白虎右)
◎ 좌청룡 우백호로 명당자리 분명한데 ◎
천지동남 유좌향 (天地東南流坐向)
◎ 물의 흐름 동남이니 좌향도 좋을시고 ◎
구두벽파 입단갈 (龜頭碧波入短碣)
◎ 물가에는 거북 머리 비석도 서 있어서 ◎
안족청천 내조상 (雁足靑天來弔喪)
◎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문상을 오는구나. ◎
이렇게
송별시(送別詩) 한 수(首)를 읊조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합장(合掌) 배례(拜禮)하며
작별인사(作別人事)를 고(告)했다.
"소생(小生) 김삿갓은
고승(高僧)께서 뉘신지는 모르옵니다.
그러나 명당(明堂)자리를 택(擇)해
정성(精誠)껏 모셨사오니,
일체(一切)의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하시어 부디 극락왕생(極樂往生)하시옵소서.
상향(尙饗)"
이것은 실로(實-)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기행(奇行)이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51) ●
☆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김삿갓이 물에 빠져 죽은 스님을
형식적(形式的)으로나마 장사까지 지내 주고,첩첩산중으로 또다시 걸어가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어디선가 늙은이가
대성통곡하는 곡(哭)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정(無情)한 친구(親舊)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자네가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만 가버렸으니,
이 무슨 기가 막힌 일이란 말인가!"
(응? 이게 무슨 소릴까?)
김삿갓은 길을 가다 말고,
귀를 유심(有心)히 기울여 보았다.
저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넋두리는
분명(分明) 사람의 소리였다.
김삿갓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가,
너무도 뜻밖의 광경(光景)을 보고
기절초풍(氣絶초風)할 듯이 놀랐다.
높다란 벼랑 아래 풀밭에는 뼈와 가죽뿐인
호호백발(皜皜白髮)의 노인(老人)이
하나 쓰러져 있었는데,
그와 똑같은 또래의 호호백발(皜皜白髮)의
늙은이가 시체(屍體)를 부둥켜안고 슬픈
목소리로 넋두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보세요, 어르신네!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김삿갓은 가까이 다가가 노인(老人)과
시체(屍體)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호호백발(皜皜白髮)의 늙은이는 울음을 그치고 김삿갓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들릴까 말까 한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정노인과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는 윤노인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60대에 영생불사하는 신선이 되고자 속세를 떠나서
이곳 지리산에 들어와
영지버섯과 나무 열매, 풀뿌리 등
오직 초식생활을 해오며,
백살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잘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鄭) 노인(老人)이
영지(靈芝)버섯을 따려고 높은 벼랑에
올라갔다가 그대로 벼랑에서 떨어져
즉사(卽死)했다는 것이다.
노인(老人)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시체(屍體)를 부둥켜안고
넋두리를 계속(繼續)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심(無心)한 친구(親舊)야.
어떤 일이 있어도 3백(百) 살까지는
같이 살자고 하던 자네가
백(百) 살도 다 못 살고 죽어 버렸으니,
혼자 남은 나는 어쩌란 말이냐!"
김삿갓은
그런 넋두리를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只今) 눈앞에서 넋두리하는
늙은이는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람이라고 말할 밖에 없겠지만,
뼈와 가죽만 남은 데다가
눈알만 반짝거리는 것이,
사람이라기보다는 귀신(鬼神)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럼 에도 앞으로 2백 년(百年)을
더 살아갈 예정(豫定)이라니
도대체 사람의 생명(生命)에 대한 욕심(欲心)은 어디까지 가야 만족(滿足)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가신 노인(老人)께서는
올해 연세(年歲) 얼마나 되시는지요?"
"이 사람이 나보다
세 살이 아래이니까 올해 아흔여덟이지.
3백(百) 살까지 살려면
아직도 2백 년(百年)이나 남았는데,
이 친구(親舊)가 비명횡사(非命橫死)했으니, 이런 원통(冤痛)한 일이 어디 있느냐 말일세."
김삿갓은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였다.
사람이 백 년(百年)을 넘겨 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윤(尹) 노인(老人)
자신(自身)은 이미 백(百) 년(年)을
넘겨 살아왔을 뿐 아니라,
아흔여덟 살에 죽은 친구(親舊)를
비명횡사(非命橫死)라 말하니
그래도 말이 되는 것일까?
"아무려나 친구(親舊)분이 돌아가셨으니까,
매장(埋葬)을 해드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내가 기운(氣運)이
없어 땅을 팔 수가 없네그려.
미안(未安)하지만 젊은이가
무덤 좀 파줄 수가 없을까?"
무덤을 팔 기운(氣運)조차 없는 사람이
2백(百) 살이나 더 살겠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삿갓은 노인(老人)을 대신(代身)해
광혈(壙穴)을 손수 파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鄭) 노인(老人)을 땅속에 묻게 되자,
윤(尹) 노인(老人)은 김삿갓에게 생각조차
못 했던 청탁(請託)을 하고 나왔다.
"여보게, 젊은이!
이 친구(親舊)하고 나하고는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해 온
평생(平生) 동지(同志)라네.
이 세상(世上)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동지(同志)였지만 우리 두 사람은 저승에서도 동지(同志)가 되기로 약속(約束)했단 말일세.
단짝 동지(同志)의 마지막 길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도 섭섭하니 자네가 혹시 글을 알고 있거든 만장(輓章)이나 한 틀 써주게나."
김삿갓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좋습니다. 마침 종이와 먹이
제게 있으니 만장(輓章)을 써드리지요."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卽席)에서
만시(輓詩) 한 수(首)를 써 갈겼다.
동지생전 쌍동지 (同知生前雙同知)
◎ 그대와 나는 살아서는 쌍 동지였는데 ◎
동지사후 독동지 (同知死後獨同知)
◎ 그대가 죽어서 나는 외톨 동지가 되었네. ◎
동지착거 차동지 (同知捉去此同知)
◎ 그대 단짝 동지인 나도 데려가 주게. ◎
지하원작 쌍동지 (地下願作雙同知)
◎ 이제는 저승에서 쌍 동지가 되고 싶네. ◎
윤(尹) 노인(老人)이
“동지(同志)”라는 말을 하도 뇌까려대기에
김삿갓은 짓궂게도 일부러 “동지(同志)”라는
말만 가지고 만장(輓章)을 써 주었다.
그리고 만장(輓章) 속에는
(영감님도 친구(親舊)를 따라 빨리 저승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뜻도
포함(包含)되어 있었는데,
윤(尹) 노인(老人)이
글을 볼 줄 알았다면
김삿갓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윤(尹) 노인(老人)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네도 나처럼 오래 살고 싶으면
이 산(山)속에서 신선도(神仙道)를 닦으며
나와 함께 살면 어떻겠는가?"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였다.
김삿갓은 어름어름하다가는
윤(尹) 노인(老人)에게 붙잡혀 버릴 것만 같아 부랴부랴 걸음을 옮겨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갈 길이 바쁜 사람입니다."
김삿갓은 산(山)길을 걸어 내려오며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해 보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윤(尹) 노인(老人)은 생(生)에 대한 애착(愛着)이 이렇게도
강렬(强烈)한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世上)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인(本人)도 모르게
부모(父母)가 만들고 낳아 주셨으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인생(人生)의 출발(出發)은
본인(本人)의 뜻과는 아무 관계(關係)도
없이 시작(始作)된 것이다.
그러면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 역시
자기(自己)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인명(人命)은 재천(在天)”
이라고 일러오지 않던가?
따라서 내 목숨은 틀림없는 나의 것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땅에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오랫동안 살 수 없는 게,
모든 인간(人間) 수명(壽命)이다.
우주(宇宙)의 입장(立場)으로 본다면,
사람은 하루살이와 같은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전(前)에 작별(作別)한
윤(尹) 노인(老人)은
3백(百) 살까지 살고 싶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와
선도(仙道)를 닦는다고 하였다.
사람의 명이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도를 닦는다고 과연 3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인가?
설령 3백살까지 산다손 치더라도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3백 년을 산다는 게
무슨 뜻이 있을 것인가?
일찍이 어떤 시인(詩人)은
"인생(人生)은 아침 이슬과 같다." 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슬픈 운명(運命)을 지고 태어났다고 했다.
이렇게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아침이슬 같은 존재이다.
이런저런 두서(頭緖)없는 생각에 잠겨 길을
가고 있었으니 김삿갓은 자신(自身)도 모르게 인생이 참으로 보잘 게 없는 듯 느껴졌다.
김삿갓은 그 순간분명시를 한 수
읊었으련만 전해오는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뿐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52) ●
☆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운명)
어느덧 진주(晉州)에 도착(到着)한 김삿갓은
우선(優先) 촉석루(矗石樓)부터 찾아갔다.
진주성(晉州城)
남쪽(南-) 벼랑 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矗石樓)는 그 아래로는 남강(南江)물이 도도(滔滔)하게 흐르고,
강(江) 건너편 우거진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강(江)가에는
하얀 모래밭이 길게 이어져 있어,
자연의 풍경이 마치 한 폭(幅)의
살아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왜적과 우리 관군이 운명을 걸고 싸운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었다.
왜적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왔었지만 충청 병사 황진과 경상 병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등이 전력(全力)을 기울여 방어(防禦)해 오다가,
마침내 세 장수(將帥)가 모두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한 곳이 이곳 촉석루(矗石樓)이다.
이처럼 촉석루(矗石樓)는 역사적(歷史的)으로 유서(由緖) 깊은 곳인지라 다락 위에는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의
현판(懸板) 시(詩)가 수없이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다락 위에 걸려 있는
시(詩)들을 모조리 읽어 내려오다가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이었던
홍만조(洪萬朝)의 시(詩)를 소리 내어 읊었다.
기암천척 기고루 (寄巖千尺起高樓)
◎ 천 척 높은 벼랑 위엔 다락이 솟아 있고 ◎
하유장강 인불유 (下有長江咽不流)
◎ 벼랑 아래 긴 강에선 여울이 흐느낀다. ◎
금일경과 정전지 (今日經過征戰地)
◎ 지난 일 꿈이련 듯 싸움터는 말이 없어 ◎
모운잔설 입변수 (暮雲殘雪入邊愁)
◎ 저무는 구름 쌓인 눈 모두가 시름이네. ◎
촉석루(矗石樓) 위에서 강(江)을 굽어보니,
어느덧 가을이 깊어 공중(空中)에는
낙엽(落葉)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 멀리 성벽(城壁) 밑에서 하얀 연기(煙氣)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아마도
어느 촌가(村家)에서 저녁 짓는 연기(煙氣)리라.
(오늘도 어느새 하루해가 또 저물어 오는구나.
오늘 밤은 누구의 집에서
신세(身世)를 져야 하는고?)
김삿갓은 예전에는 아무리 날이 저물어도
잠자리를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어느 집에서나 찬밥 한술 얻어먹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근래(近來)에 해소병(咳嗽▽病)이
시작(始作)되면서부터
사정(事情)이 크게 달라졌다.
찬 방(房)에서 자게 되면
기침이 심(甚)하게 날 뿐만 아니라,
전신(全身)에 이상(異常)한 동통(疼痛)이
발동(發動)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삿갓에게 따듯한 방(房)에
재워 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아무려나 어디선가 밥을 얻어먹어야 하겠기에,
다락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별안간(瞥眼間)
누군가가 앞을 막고 나서며
"아니 이거, 삿갓 선생(先生) 아니오?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不相逢)이라더니,
삿갓 선생(先生)을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도 상대방(相對方)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거,
노형(老兄)은 우국지사(憂國之士)가 아니오?
우리가 평양(平壤) 연광정(練光亭)에서
만나고 나서 이거 몇 년(年) 만이오?"
우국지사(憂國之士)도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감격(感激)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연광정(練光亭)에서 만난 것은
벌써 10여 년(餘年) 전(前) 일이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 이번에는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우(奇遇)가 어디 있단 말이오!"
10여 년(年) 만의
해후상봉(邂逅相逢)이고 보니,
서로가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唐捐)한 일이었다.
김삿갓이 “우국지사(憂國之士)”로 부른 사람은 “이북천(李北天)”이라는
본명(本名)을 가진 풍객(風客)이었다.
평양(平壤) 연광정(練光亭)에서
김삿갓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땅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임진년(壬辰年)에 왜놈들한테
침략(侵略)을 당하게 된 것은,
그때의 벼슬아치들이 사색붕당(四色朋黨)에만 정신(精神)이 팔려,
나라를 걱정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전국(全國) 각지(各地)로 돌아다니며 임진왜란때의
유적지를 샅샅이 돌아보고 나서,
파사현정의 대(大) 정치가가 될 생각이오."
그때 이북천(李北天)의 우국지정(憂國之情)이 너무도 출중(出衆)하였기에
김삿갓은 농담(弄談) 삼아
"오늘부터 노형(老兄)을 ‘우국지사
라고 부르는 게 합당(合當)하겠소."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한 과거(過去)를 가진
두 사람이 10여 년(年)이 지나서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서 다시 만났으니
피차(彼此)가 기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많이 늙었지만, 우국지사(憂國之士)도
백발(白髮)이 성성(星星)해진 걸 보니
그동안 많이 늙으셨구려."
"인정사정(人情事情)도 없이
밀려오는 세월(歲月)을 낸 들
어찌 막아낼 수가 있겠소이까."
그러더니 우국지사(憂國之士)는
호주머니 사정(事情)이 넉넉한지,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나누며 쌓였던
회포(懷抱)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합시다."하고
김삿갓을 술집으로 잡아끄는 것이었다.
김삿갓도 술을 마다할 턱이 없었다.
남강물이 바로 눈앞에 굽어 보이는
촉석루(矗石樓) 담벼락 밑에
“유천(流川)”이라는 주막(酒幕)이 하나 있었다.
김삿갓은 우국지사(憂國之士)와 함께
주막(酒幕)으로 들어서다가 간판(看板)을
보고는 주모(酒母)를 나무라 주었다.
"이 사람아!
전쟁터(戰爭-)에서 군사(軍士)가 많이
죽은 것을 ‘유혈성천(流血成川)’이라고 한다네.
여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왜놈들을 많이 죽인 곳이니까,
이왕(已往)이면 주막(酒幕) 이름을
‘유혈성천(流血成川)’ 이라 할 일이지,
왜 그냥 ‘유천(流川)’이라고 했는가?"
그러자 주모(酒母)가 웃으면서 대답(對答)했다.
"그러잖아도 주막(酒幕) 이름을
‘유혈성천(流血成川)’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비참(悲慘)하다고 해서
‘유천(流川)’이라고 했다오."
김삿갓은 술이 거나해져 오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라
우국지사(憂國之士)에게 물었다.
"참, 노형(老兄)은 그 옛날 임진왜란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파사현정의
정치가가 되겠노라!’
호언(豪言)했던 일이 있지 않소?
만약(萬若) 그때의 장담(壯談)이
그대로 실현(實現)되었다면
지금(只今)쯤은 정치가(政治家)가 되었어야지
옳은 일인데 도대체 그 꿈은 어떻게 되셨소?"
우국지사(憂國之士)는
뜻밖의 질문(質問)에 씁쓸하게 웃었다.
"허! 허! 허! 그것은 젊은 날의 객기(客氣)에
지나지 않았던 호언장담(豪言壯談)이었지요.
시대(時代)가 영웅(英雄)을 만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시운(時運)”이란 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잘 되었소이다. 옛글에
‘영웅(英雄)은 만인의 적(英雄萬人之敵)’
이라는 말이 있습디다.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사면서
그까짓 영웅(英雄)은 되어서 무엇 하오?"
"삿갓 선생(先生)은
워낙 달관(達觀)하신 양반(兩班)이니까
영웅(英雄)을 우습게 여기시겠지만
나 같은 속물(俗物)에게 영웅(英雄)이란
그야말로 대단하게 보이는 인물(人物)이라오.
그러나 영웅(英雄)이 되려면 반드시
시운(時運)이 따라야 하는 거예요."
우국지사(憂國之士)는 그렇게 탄식(歎息)하며 술을 한 잔 벌컥 들이켜고 나더니,
즉석(卽席)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 한 편을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지사봉시소 (志士逢時少)
◎ 지사가 때를 만나기 어려움은 ◎
가인박명다 (佳人薄命多)
◎ 미인이 박명 하는 것과 같도다 ◎
생평무소사 (生平無所事)
◎ 내 평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
두백내하하 (頭白奈何何)
◎ 머리가 백발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
김삿갓은 그 시(詩)를 들어보고,
우국지사(憂國之士)는 아직도 속세(俗世)의
미련(尾聯)을 버리지 못했구나 싶어,
적이 슬픈 기분(氣分)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미련을 떨쳐 주기 위해
얼른 이렇게 말했다.
"소동파(蘇東坡)의 시(詩)에,
생전부귀 초두로 (生前富貴草頭露)
◎ 살았을 때의 부귀는 풀잎 끝의 이슬이요. ◎
신후풍류 맥상화 (身後風流陌上花)
◎ 죽은 뒤에 풍류는 밭두렁의 꽃이라네. ◎
라는 말이 있소.
노형(老兄)이나, 나나
우리 이미 백발(白髮)이 다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무엇을 바랄 것이오.
그저 남은 나날을 모든 것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떠나서 살면 되겠지요."
우국지사(憂國之士)는 김삿갓의 말에서
새삼 느낀 점(點)이 있었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삿갓 선생(先生) 말씀이
진실(眞實)로 옳은 말씀이시오."
김삿갓은 술을 마셔가며,
우국지사(憂國之士)에게 물었다.
"내일(來日)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할 판인데,
노형(老兄)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여기서 남해(南海) 섬들이 멀지 않으니,
그쪽을 한 번 돌아볼까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意味深長)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도 나와 마찬가지로
종신(終身) 운수객(雲水客)이 분명(分明)하구려.
우리가 이번(이番)에 헤어지면
언제나 또 만나게 되려는지"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올시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알겠소이까?
운수(運數)가 좋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대답(對答)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만날 기회(機會)가 또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삿갓 선생(先生)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하고 이번에는
우국지사(憂國之士)가 김삿갓에게 물었다.
김삿갓은 잠시(暫時) 생각하는 빛을 보이다가 "나는 건강(健康)이 좋지 않아서 이번 겨울만은 따뜻한 지방(地方)에서 편히 쉬고 싶지만 그럴 만한 곳이 있어야 말이지요."
우국지사(憂國之士)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그렇다면 마침 잘 됐소이다.
강진(康津) 고을에 안복경(安福卿)이란
진사(進士) 친구(親舊)가 있소.
내가 그 친구(親舊)에게 편지(便紙)를
써드릴 테니 이번 겨울은 그 친구(親舊)
집에서 편(便)히 쉬시도록 하시오."
"고맙소이다.
그렇게 폐(弊)를 끼쳐도 괜찮을 사람인지요?"
"그 점(點)은 염려(念慮) 마시오.
그 친구(親舊)는 돈도 많지만,
풍류(風流)를 이해(理解)하기 때문에
삿갓 선생(先生)이 찾아가시기만 하면
소홀(疏忽)히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삿갓은 몸이 하도 괴로운지라,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호의(好意) 대로
하리라 결심(決心)을 하였다.
그나저나 내일(來日) 아침이면
우국지사(憂國之士)와 작별(作別)할 것을
생각하니 김삿갓은 우울(憂鬱)한 마음을
금할(禁-)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국지사(憂國之士)에게
술을 권(勸)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번(이番)에 헤어지면
영원(永遠)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豫感)이 드는데 노형(老兄)은
어떻게 생각되시오?"
"삿갓 선생(先生)은 무슨 말씀을 하시오?
설사 내일(來日) 죽는 한(限)이 있어도
사람은 모름지기 희망(希望)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左右)로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어차피 헤어져야 할 것이오.
우리가 두 번(番)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지 모르니, 내가 이별(離別)의 시(詩)를
한 수(首) 읊기로 하겠소."
우국비가사 (憂國非歌士)
◎ 비분강개 잘하는 우국지사와 ◎
상봉촉석루 (相逢矗石樓)
◎ 촉석루 다락에서 다시 만났는데 ◎
한연응단첩 (寒烟凝短堞)
◎ 차가운 연기는 담섭에 아롱지고 ◎
낙엽하장주 (落葉下長洲)
◎ 가랑잎은 모래밭에 딍굴고 있소. ◎
소지위기권 (素志違其卷)
◎ 우리의 본래의 뜻은 서로가 틀려도 ◎
동심기백두 (同心己白頭)
◎ 마음은 하나건만 이미 백발이 되었소. ◎
명조남해거 (明朝南海去)
◎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
강월오경추 (江月五更秋)
◎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 오리요. ◎
영원(永遠)한 이별(離別)을
상징(象徵)하는 구슬픈 시(詩)였다.
우국지사(憂國之士)도
그 시(詩)를 듣고 나자 가슴이 메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沈默)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당나라의 시인(詩人) 고적(高適)이
친구(親舊)를 멀리 보내며 읊었다는
시(詩)를 서글픈 목소리로 읊어대었다.
십리황운 백일훈 (十里黃雲白日曛)
◎ 누런 구름 길게 뻗어 하루해가 저무는데 ◎
북풍취안 설분분 (北風吹雁雪紛紛)
◎ 북풍에 기러기 날고 눈발이 사납구나 ◎
막수전로 무지기 (莫愁前路無知己)
◎ 가는 곳에 친구 없다 걱정하지 마오. ◎
천하수인 불식군 (天下誰人不識君)
◎ 천하의 그대를 어느 누가 모르리오. ◎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뜻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한 번(番) 만난 사람은 생별(生別)이든
사별(死別)이든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김삿갓은 오늘날까지
무수(無數)한 이별(離別) 속에서 살아왔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국지사(憂國之士)와의 이별(離別)처럼
절실(切實)한 비애(悲哀)를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
맥상화개호접비 (陌上花開蝴蝶飛)
◎ 길가에 꽃피고 나비가 날으니 ◎
강산유시석인비 (江山猶是昔人非)
◎ 강산은 같건만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네 ◎
유민기도수수로 (遺民幾度垂垂老)
◎ 망국의 백성은 몇 번이나
점차 늙어갔던가? ◎
유녀장가완완귀 (遊女長歌緩緩歸)
◎ 노는 계집은 노래 부르며
느릿느릿 돌아가네 ◎
맥상산화무수개 (陌上山花無數開)
◎ 길가의 산 꽃은 무수히 피고 ◎
노인쟁간취병래 (路人爭看翠輧來)
◎ 길가는 사람들 다투어
휘장 수레를 보러 오네 ◎
약위유득당당거 (若爲留得堂堂去)
◎ 만약에 머물러도 당당히 갈 수 있다면 ◎
차갱종교완완회 (且更從教緩緩回)
◎ 이 또한 느릿느릿 마음대로 돌아가려네 ◎
생전부귀초두로 (生前富貴草頭露)
◎ 살았을 때의 부귀는 풀잎 끝의 이슬이요 ◎
신후풍류맥상화 (身後風流陌上花)
◎ 죽은 뒤 풍류는 길가의 꽃이라네 ◎
이작지지군거노 (已作遲遲君去魯)
◎ 이미 더디고 더디게
그대는 노나라로 가버리니 ◎
유가완완첩회가 (猶歌緩緩妾回家)
◎ 오히려 노래하며
“한연응단첩 (寒烟凝短堞)
◎ 차가운 연기는 담섭에 아롱지고 ◎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53 ●
☆ 십오야, 내자지, 용도질, 개고알 ☆
(十五夜, 乃自知, 用刀疾, 皆告謁)
“유천(流川)”이라는 주막(酒幕)에서
우국지사(憂國之士)와 작별(作別)한 김삿갓은
겨울을 무사(無事)히 넘기려고 강진(康津)에
있는 안복경(安福卿)이라는 사람
집을 방문(訪問)하자 결심(決心)하였다.
진주(晉州)에서 강진(康津) 고을까지는
몇백 리(百里)가 되는지 김삿갓은
정확(正確)한 거리(距離)를 모르지만,
마음 놓고 겨울을 보내려면 아무리 멀더라도
따듯한 곳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병(病)이 워낙 심상(尋常)치 않은 데다가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만나
밤샘해가며 폭음(暴飮)을 한 탓인지
몸이 천근(千斤)같이 무거웠다.
게다가 날씨조차 갑자기 추워져서
사지(四肢)가 오그라들 지경(地境)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나. 몸이 이래 가지고야
하루에 10리(里)인들 걷겠나?)
김삿갓은
날이 갈수록 몸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절간으로 찾아 들어가
10 여일(餘日)씩 몸조리를 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서당(書堂) 방(房)에서 4~5일씩 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강진(康津) 고을을 향해 조금씩 거리를 줄여나갔다.
이 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 중순(中旬)께 일이다.
김삿갓은 이날도 저녁을 얻어먹으려고
어느 기와집을 찾아가니 마침 그날이
제삿날(祭祀-)이어서 많은 친척(親戚)이
음식을 차리느라고 법석(法席)을 떨고 있었다.
그 집은 돈도 많은 데다가 제사(祭祀)를
지내는 법도(法度)가 엄격(嚴格)한지,
밤이 이슥해 오자 예복(禮服)을 제대로
갖춰 입은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까지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옳지 됐다. 제사를 지낸 뒤에는
으레 음복(飮福)을 나눠 먹을 테니,
그때 나도 맛 나는 음식(飮食)을
푸짐하게 얻어먹을 수가 있겠구나!)
김삿갓은 자기 나름대로 잔뜩 기대(期待)하고, 행랑방(行廊房)에 혼자 누워 제사(祭祀)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복(飮福)을 얻어먹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기대(期待)에 어긋나는 처사(處事)인가.
주인(主人)집 일가친척(一家親戚)들은
제사(祭祀)가 끝나자
안방(안房)과 사랑방(舍廊房)에서
저희끼리만 음복(飮福)을 나눠 먹을 뿐,
김삿갓 따위는 안중(眼中)에도 없는지
김삿갓이 있는 행랑(行廊)채에는 개다리소반(小盤)에
떡 한 그릇, 김치와 숙주나물 한 접시만
덜렁 들여놔 주는 게 아닌가?
(이게 웬일이야, 빌어먹을 놈들!
조상(祖上)의 제사(祭祀)를 지냈으면
음복(飮福)만은 손님에게도
똑같이 나눠 줘야지 옳은 일인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차별(差別)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심보(心보)를 가지고 어떻게
조상(祖上)의 음덕(蔭德)을 바란단 말인가?)
김삿갓은 홧김에 욕(辱)이 절로 나왔다.
그리하여 즉석(卽席)에서
글자를 읽으면 욕설(辱說)이 되는
시(詩) 한 수(首)를 읊어대었다.
연연납월 십오야 (年年臘月十五夜)
◎ 해마다 섣달 보름날 밤은 ◎
군가제사 내자지 (君家祭祀乃自知)
◎ 그대 집 제삿날임을 잘 알고 있노라. ◎
제전등물 용도질 (第奠登物用刀疾)
◎ 제사상에 올린 것은 칼을 잘 쓴 음식이요, ◎
헌관집사 개고알 (獻官執事皆告謁)
◎ 헌관과 집사들은 모두 엎드려 아뢰는구먼.
김삿갓이 병든 몸을 이끌고 고생(苦生) 끝에
강진(康津)에 닿은 것은 그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그믐께였다.
안복경(安福卿) 진사(進士)는
우국지사(憂國之士)의 소개장(紹介狀)을
자세(仔細)히 읽어보더니
김삿갓을 크게 반기면서
"그러잖아도 어젯밤 꿈자리가 좋길래,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삿갓 선생(先生)처럼 고명(高名)하신
어른이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척 피로(疲勞)하신 모양(模樣)이니
어서 들어가십시다."하고
큰 사랑(舍廊)으로 모셔 들였다.
그리고 초면(初面) 인사(人事)를 정중(鄭重)히 나누고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先生)을 직접(直接) 만나 뵙기는
오늘이 처음이나 일찍이 선생(先生)의
선성(先聲)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북천(李北天) 공(公)의
소개(紹介) 편지(便紙)에는 선생(先生)은
몸이 몹시 불편(不便)하시다고 하셨으니,
이번 겨울은 저의 집에서
편(便)히 쉬도록 하십시오.
강진(康津)이라는 곳은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는 따뜻한 곳입니다."
김삿갓은 안(安) 진사(進士)의
특별(特別)한 배려(配慮)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강진(康津) 고을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바라보여서
병자(病者)가 몸을 수양(修養)하는데
안성맞춤(安城맞춤)의 휴양지(休養地)였다.
김삿갓은 안(安) 진사(進士)와
날마다 글 토론(討論)도 하고
산책(散策)도 같이 다니는 동안 그의
인품(人品)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돈이 많아도 교사(驕奢)하지 않았고,
지식(知識)이 풍부(豐富)하면서도
겸손(謙遜)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비록 농사꾼(農事꾼)이더라도
그들과 격의(隔意) 없이 어울리기도 하였고,
훈장(訓長)이 나들이 갔을 때는 서당(書堂)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안(安) 진사(進士)는
안심입명(安心立命) 사상(思想)이
몸에 배어 있는 처사형(處士形)
군자(君子)였던 것이었다.
김삿갓이 거처(居處)하는
안(安) 진사(進士) 댁(宅) 별당(別堂)은
언제나 절간(절間)처럼 조용하였다.
뜰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에는 대나무도 있고
수초(水草)도 무성(茂盛)했지만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自由)롭게
헤엄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의 하나였다.
어느 날 안(安) 진사(進士)는 김삿갓에게,
"선생(先生)!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니
금곡사(金谷寺) 구경 한 번 다녀오십시다.“
하는 것이었다.
금곡사(金谷寺)는
안(安) 진사(進士)의 집에서 5리(里)쯤
떨어진 보은산(寶恩山) 산속(山속)에 있는
낡은 절간(절間)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오랜만에
안(安) 진사(進士)와 함께 나들이를 나섰다.
금곡사(金谷寺) 입구(入口)에는
개울물을 사이에 두고,
30척(尺)이 넘는 어마어마하게 거대(巨大)한 두 개의 바위가 공중(空中)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거대(巨大)한 두 개의 바위는 마치
두 마리의 싸움닭이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서로가 날개 죽지를 움츠리고
마주 노려보는 형상(形像)이었다.
"이 두 개의 바위는
금방 싸울 것만 같은 형상(形像)이구려."
김삿갓이 바위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안(安) 진사(進士)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않아도 이 지방(地方)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두 개의 바위를
‘쟁계암(爭鷄岩’)이라고 불러오고 있답니다.
금곡사(金谷寺)가 번창(繁昌)하지 못하는 것은 이 바위들이 절 입구(入口)에서 싸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삿갓 선생(先生)은 오늘 금곡사(金谷寺)에
놀러 오신 기념(紀念)으로,
이 바위들이 이제부터는 싸움을 아니하도록
화해(和解)를 좀 붙여 주시지요."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고 즉석(卽席)에서,
"그렇다면 내가 화해(和解)를 주선(周旋)하는 시(詩)를 한 수 지어 볼까요?"하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읊었다.
쌍암병기 의분쟁 (雙岩竝起疑紛爭)
◎ 두 바위가 마주 서서 싸우는 것 같지만 ◎
일수중유 해분심 (一水中流解忿心)
◎ 중간에 물이 흘러
서로 분한 마음을 풀어 주네. ◎
실로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발(奇拔)한 착상(着想)이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54) ●
☆ 귀천(歸天) ☆
보은산(寶恩山)은 남향(南向)이어서
산속(山속)이 유난히 따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산속(山속)에서는
어느새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진달래꽃 봉오리가 터진 것을
발견(發見)하자 오랫동안 몸속에 잠재(潛在)해 있던 방랑벽(放浪癖)이 별안간
가슴이 설레도록 용솟음쳐 올라왔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어느새 대지(大地)에는 봄이 왔구나.
나도 이제는 방랑(放浪)의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김삿갓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
그런 충동(衝動)이 느껴져
진달래꽃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안(安) 진사(進士)에게 이렇게 말했다.
"봄이 왔으니,
나도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하겠소이다.“
그리고 즉석(卽席)에서 다음과 같은
작별(作別) 시(詩)를 한 수(首) 써 보였다.
원객유유 임병신 (遠客悠悠任病身)
◎ 먼 나그네 오랫동안 병을 빙자하여 ◎
군가몽은 차봉춘 (君家蒙恩且逢春)
◎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았소 ◎
춘래각자 동서거 (春來各自東西去)
◎ 봄이 와서 동서로 뿔뿔이 헤어지면 ◎
차지간화 시별인 (此地看花是別人)
◎ 이곳 꽃 구경은 다른 사람과 할 것이오. ◎
김삿갓은
길 떠날 결심(決心)을 한 수(首)의 시(詩)로써
안(安) 진사(進士)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안(安) 진사(進士)는 김삿갓의
시(詩)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선생(先生)이 여기를 떠나시다니,
무슨 말씀이시오? 건강(健康)이
쾌유(快癒)하시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지금 길을 떠나시면 안 되시옵니다.“
하며 안(安) 진사(進士)는
기를 쓰고 만류(挽留)하였다.
그러나 한번(한番) 결심(決心)한 것인데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냥 눌러있을 김삿갓은 아니었다.
"나는 워낙 방랑(放浪) 생활(生活)을 끝없이
계속(繼續)하다가 언젠가는 길에서 죽을
운명(運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타고난 운명(運命)대로 살아가려는
나를 굳이 붙잡지 말아 주세요."
김삿갓의 결심(決心)이 이렇다 보니,
안(安) 진사(進士)는 더는 김삿갓을
붙잡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길을 떠나신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하고 물었다.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내가 언제는 갈 곳을 미리 정(定)해 놓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던가요?
봄을 따라 북상(北上)하면서,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와
용천사(龍泉寺)도 구경하고 싶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和順) 동복(同福)에 있는 적벽강(赤壁江)에도 한번 들러 볼 생각입니다."
안(安) 진사(進士)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침 잘되셨습니다.
‘동복(同福)’에는 신석우(申錫愚)라는
막역(莫逆)한 친구(親舊)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親舊)에게
편지(便紙)를 써드릴 테니
동복(同福)에 가시거든,
그 친구(親舊)를 꼭 찾아 주십시오.
그 친구(親舊)라면
선생(先生)에게 모든 편의(便宜)를
정성(精誠)껏 보아 드릴 것입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신석우(申錫愚)라는 사람에게 전(傳)해 줄
소개(紹介) 편지(便紙) 한 장만 받아서 가지고,
기어코 강진(康津) 고을을 떠나고야 말았다.
김삿갓은
몸으로 봄을 느끼자 고집(固執)스럽게
방랑(放浪)의 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머나먼 길을 걷기에는
몸이 너무도 쇠약(衰弱)해 있었다.
그러기에
강진(康津)에서 용천사(龍泉寺)를 거쳐
보림사(寶林寺)까지 2백(百) 리(里)도 채 못
되는 거리를 보름 만에야 가까스로 닿았다.
김삿갓이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가지산(迦智山) 속의 명찰(名刹),
보림사를 구경하고 풀밭에 누워
피로를 풀며 자기 자신의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詩)로 읊었다.
궁달재천등가역구(窮達在天登豈易求)
◎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천명,
맘대로 안 되는 것 ◎
종오소호 임유유 (從吾所好任悠悠)
◎ 나는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아왔노라. ◎
가향북망 운천리 (家鄕北望雲千里)
◎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 리길 아득한데 ◎
신세남유 해일구 (身勢南遊海一漚)
◎ 남쪽에 헤매는 신세 물거품과 같구나. ◎
소거수성 배작추 (掃去愁城盃作箒)
◎ 술잔으로 비 삼아 시름을 쓸어 내고 ◎
조래시구 월위구 (釣來詩句月爲鉤)
◎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 오면서 ◎
보림간진 용천우 (寶林看盡龍泉又)
◎ 보림사 용천사를 두루, 구경하고 나니 ◎
물외한적 공비구 (物外閑跡共比丘)
◎ 내 마음 욕심 없이 스님과 다름없네. ◎
그로부터 10여 일(餘日)이 지나서
화순(和順) 동복(同福)으로
신석우(申錫愚)를 찾아갔을 때는
김삿갓은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극히(極히) 쇠약(衰弱)해 있었다.
50 고개를 바라보는
시골 선비 신석우(申錫愚)는
안(安) 진사(進士)의 소개(紹介) 편지(便紙)를 받아 보고, 김삿갓을 무척이나
측은(惻隱)히 여기며 말했다.
"선생(先生)께서
강진(康津) 고을에 와 계시는 소식(消息)은
풍문(風聞)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집에까지 왕림(枉臨)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행(多幸)히 저의 집에는
조용한 초당(草堂)이 있으니,
건강(健康)을 회복(回復)하실 때까지
푹 쉬시기 바랍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주인(主人) 양반(兩班)께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동복(同福)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적벽강(赤壁江)과 같은 강(江)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강(江)은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적벽강(赤壁江)은 여기서 불과 5리(里)
안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이 적벽강(赤壁江)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조만간(早晩間) 따뜻한 날을 택(擇)해 제가
직접(直接)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적벽강(赤壁江)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러나 나 혼자서 구경하고 싶지,
누구하고 함께 보고 싶지는 않아요.
매우 외람(猥濫)된 부탁(付託)이지만,
내일 아침에 저에게 배를 한 척(尺)
빌려주실 수 없으실까요?"
선비 신석우(申錫愚)는 김삿갓의 무리한
부탁(付託)에 고개를 좌우(左右)로 흔들었다.
"불편(不便)하신 몸으로
배를 어떻게 혼자 타시옵니까?
적벽강(赤壁江)을 내일
기어이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직접(直接)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좋은 경치(景致)를 내 마음대로 즐기려면
옆에 방해(妨害)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옛날 시(詩)에,
화소성미청(花笑聲未聽)
◎ 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
조제루난간(鳥啼淚難看)
◎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다. ◎
이라는 시가 있지요.
이처럼 홀로 자연(自然)과 동화(同化)된
시인(詩人)은 꽃의 웃음과 새의 울음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부디 그러한 느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배 한 척만 알선(斡旋)해 주세요."
김삿갓이 이렇게도 고집(固執)을 부리니,
신석우(申錫愚)로서는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은 적벽강(赤壁江) 나루터에서
김삿갓 혼자만 배를 타게 해주었다.
배는 조그만 놀잇배였다.
물 위에 둥둥 떠도는 배는
노(櫓)를 젓지 않아도 흐름을 따라 조금씩
적벽강(赤壁江)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에
상쾌(爽快)함을 느끼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그윽이 바라보며,
여기가 바로 선경(仙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천장지활(天長地闊)한 대자연
속에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띄워 놓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허심(虛心)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제부터는 밥을 빌어먹으려고 남의 집
대문(大門)을 두드릴 필요(必要)도 없고,
잠자리를 구(求)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헤매고 돌아다닐
필요(必要)도 없을 것 같았다.
(아아, 여기가 바로
나의 안식처(安息處)였구나!)
김삿갓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배 위에 편(便)히 누워
저 멀리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넓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한가(閑暇)롭게 떠돌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무심(無心)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옛 시(詩) 한 수(首)를 연상(聯想)하였다.
운산조조 하처귀(雲山造造何處歸)
◎ 구름은 넓고 넓은 데를 어디로 가는고 ◎
단문공제 채난성(但聞空際綵鸞聲)
◎ 하늘가 아득히 난 새 소리 들려오네. ◎
하얀 구름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 왔다.
이제는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에 겨울 만큼
기진맥진(氣盡脈盡)했던 것이었다.
눈을 감으니 난(鸞) 새 소리가
한결 분명(分明)하게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음의 눈에는 하얀 구름이
더욱 선명(鮮明)하게 나타나 보였다.
(아아, 나의 목숨은
저 하늘가 떠 있는 한 조각 구름과 같은 것,
저 구름이 사라질 때면 나도
이 세상(世上)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
점점 몽롱(朦朧)해 오는 의식(意識) 속에서
문득 ”귀천(歸天)“이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귀천(歸天)“이란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죽는다는 소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귀천(歸天)“이란 말을
떠올린 순간(瞬間), 마음이 그렇게도
편안(便安)할 수가 없었다.
▶ 보탬 : 한 많은 세상(世上) 이승 떠나서
하늘로 가는 길이 이리도 편안(便安)할 수
있다면 뉘 있어 귀천(歸天)을 두려워하리!
이제 마지막 편인 2부-155회가 남아 있고
거기에는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라는
제목(題目)의 시(詩)가 나오지만
그 시(詩)는 김삿갓이 죽음을 직감(直感)하고 미리 써서 남겼던 글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눈꺼풀 움직일 힘도 없이
죽어가는 이가 옆에서 받아 적는 이도 없는
상황(狀況)이었으니 어찌 글로 남겼으랴?
그런데 잠시(暫時) 미리 훑어보니 거기에도
바로 잡고 한자(漢字) 원문(原文)을 찾아
헤매야 할 여러 곳이 눈에 보인다.
그동안 한자(漢字) 오류(誤謬)와 한글 맞춤법, 띄어쓰기 등이 사실(事實) 너무도 엉망이었든 원작가(原作家)의 글
● 방랑시인 김삿갓, 2부-(마지막 회) ●
☆ 승피백운 우화등선
(乘彼白雲羽化登仙) ☆
돌이켜보면 기구(崎嶇)하기
짝이 없었던 50 평생(平生)이었다.
그러기에 혼미(昏迷)한 의식(意識) 속에서
자신(自身)의 생애(生涯)를 회고(回顧)하며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시(詩)를 읊기 시작하였다.
조소수소개유거 (鳥巢獸巢皆有居)
◎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집이 있건만 ◎
고아평생독자상 (顧我平生獨自傷)
◎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 ◎
망혜죽장로천리 (芒鞋竹杖路千里)
◎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릿길 떠돌며 ◎
수성운심가중방 (水性雲心家中方)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우인불가원천난 (尤人不可怨天難)
◎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어 ◎
세모비회여촌장 (歲暮悲懷餘寸腸)
◎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
초년유위득락지 (初年有謂得樂地)
◎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
한북지오생장향 (漢北知吾生長鄕)
◎ 한강가 이름 있는 고향에서 자랐노라. ◎
잠영선세부귀문 (簪纓先世富貴門)
◎ 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 ◎
화류장안 명승생 (花柳長安名勝生)
◎ 장안에서도 이름 높던 가문이었다. ◎
인인래하농장경 (隣人來賀弄璋慶)
◎이웃 사람들 생남 했다 축하해 주며 ◎
조만귀기관개장 (早晩歸期冠蓋場)
◎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했건만 ◎
수모초장명점기 (鬚毛稍長命漸奇)
◎ 수염이 나면서 운명이 점차 기구해져 ◎
회겁잔문번해상 (灰劫殘門飜海桑)
◎ 멸문(재가 되도록 잔인한 위협으로)으로
상전이 벽해되듯 뒤집어졌네. ◎
의무친척세정박 (依無親戚世情薄)
◎의지할 친척 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
곡진야양가사황 (哭盡爺孃家事荒)
◎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황폐했도다. ◎
종남효종일납이 (終南曉鐘一納履)
◎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
풍토이방심세량 (風土異邦心細量)
◎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
심유이역수구고 (心猶異域首丘孤)
◎ 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
세역궁도촉번양 (勢亦窮途觸藩羊)
◎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
시(詩)조차 읊을 기운(氣運)이 떨어진
김삿갓은 잠시(暫時) 뜸을 두었다가,
다시 읊기 시작했다.
남주종고과객다 (南州從古過客多)
◎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
전봉부평경기상 (轉蓬浮萍經幾霜)
◎ 부평초처럼 떠돌아가기 몇몇 해던고 ◎
요두행세기본습 (搖頭行勢豈本習)
◎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
설구도생유소장 (楔口圖生惟所長)
◎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
광음점향차건실 (光陰漸向此巾失)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
삼각청산하묘망 (三角靑山何渺茫)
◎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
강산걸호관천문 (江山乞號慣千門)
◎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
풍월행장공일낭 (風月行裝空一囊)
◎ 풍월 읊는 행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
천금지가만석군 (千金之家萬石君)
◎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
후박가풍균시상 (厚薄家風均試嘗)
◎ 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
신궁매우속안백 (身窮每遇俗眼白)
◎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
세거편상발발창 (歲去偏傷髮髮蒼)
◎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
귀혜역난저역난 (歸兮亦難佇亦難)
◎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
기구방황중로방 (幾口彷徨中路傍)
◎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이던고. ◎
김삿갓은 여기까지 읊조리다가,
마침내 기운(氣運)이 진(盡)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때와 장소(場所)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응구첩대(應口輒對)로 시(詩)를 읊어댄 것은 그의 타고난 천품(天稟)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詩)를 읊을
기력(氣力)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沈默)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배는 가벼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감고 있는
김삿갓의 심안(心眼)에는
홀연(忽然)히 한 조각
하얀 구름이 떠올라 보였다.
그리고 잠시(暫時) 뒤에는,
누군가가 그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승피백운(乘彼白雲) 우화등선(羽化登仙)!
◎ 저 하얀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
"하고
읊조리는 소리가 분명(分明)하게 들려왔다.
김삿갓은 그 소리가 들려 오자,
별안간(瞥眼間) 몸을 꿈틀하며,
"뭐? 승피백운 우화등선? "하고
입속말로 뇌까리다가,
다음 순간(瞬間)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두루 편답(遍踏)을 하며 수많은 시(詩)를 남겨놓은 천재(天才) 시인(詩人) 김삿갓은,
마침내
전라도(全羅道) 동복(同福) 적벽강(赤壁江) 나룻배 위에서 영구(永久) 귀천(歸天)했으니, 때는 지금(只今)으로부터
157년(年) 전(前)인 1863년(年) 철종(哲宗) 14년(年) 3월(月) 29일(日)이요
향년(享年) 57세(歲)이었다.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은 사후(死後)에
전라도(全羅道) 땅에 묻혔다가, 그의 둘째
아들 익균(翼均)에 의해 고향(故鄕)인
영월(寧越) 땅으로 이장(移葬)되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기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216번지로 그의 유택 묘에 주소를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통상(通常) 매장(埋葬)을 하지만,
중앙(中央)아시아의 북방(北方) 유목(遊牧)
민족(民族)들은 새를 숭배(崇拜)하여
장례(葬禮)를 치를 때 조장(鳥葬),
천장(天葬)을 한다.
죽은 영혼(靈魂)이 하늘나라로 접근(接近)하는 가장 지름길을 새라는 동물(動物)로 보았기에,
새가 죽은 사람시체(屍體)를 뜯어 먹도록
함으로써 영혼(靈魂)이 하늘에 가깝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승피백운(乘彼白雲) 우화등선(羽化登仙)"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의 마지막 남긴
말을 해석(解釋)하여 보면,
그의 영혼(靈魂)은 분명(分明)히 새가 되어
창공(蒼空)을 마음껏 훠~얼~ 훠~얼~~~
날아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 사료(史料)와 현재(現在) 화순군(和順郡)의 주장(主張)에, 의하면 김삿갓은
20세(歲)에 방랑(放浪)을 시작(始作)한 이후(以後)로는 가족(家族)과 연락(連絡)을 일절(一切)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金翼均) 을 만나 3차례 정도(井島) 귀가(歸家)를 권유(勸誘)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拒絶)하고 방랑(放浪)을 계속(繼續)했다.
그 후(後) 사실상(事實上) 마지막
방문지(訪問地)인 전라남도(全羅南道)
화순(和順)에 들렀던 중(中) 1863년(年)
[철종(哲宗) 14년(年)] 안(安) 참봉(參奉)의 사랑방에서 죽었으며
화순군(和順郡)의 관계자(關係者)는 김삿갓이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에 머물러서 6년(年) 동안
있었던 것은 역사적(歷史的)인
사실(事實)이라고 주장(主張)합니다.
김삿갓은 방랑(放浪)의 시간(時間)들 속에
세월(歲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1863년(年) 3월(月) 29일(日), 57세(歲)의
나이로 전라도(全羅道)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에서 객사(客死)합니다.
한편 부친(父親)의 행방(行方)을 찾아 헤매던 익균(翼均)은 부친(父親)의 유골(遺骨)을 자기(自己) 집 가까운 영월(寧越)로
이장(移葬)을 해오죠.
1부에 김삿갓이 고향(故鄕)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떠나 방랑생활(放浪生活)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특히나 종반부(終盤部) 에서는 김삿갓이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서 재회(再會)한 우국지사(憂國之士)의 소개(紹介)로
강진(康津)의 안(安) 진사(進士)[안복경
에게 겨울을 의탁(依託)한 연후(然後)에
다시 길을 떠나서면서 안복경(安福卿)이 소개(紹介) 해준 화순(和順) 동복(同福) 신석우(申錫愚)에게
찾아가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生)을 마감하는 것으로, 전개(展開)되는데 이를
수정하지 않은 이유(理由)는 어디까지나 이 글이 팩션 위주(僞主)이지 완전(完全) 팩트의 글이 아니기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별 지구촌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있는 힘든
시기에 모쪼록 건강 하시기를 바라고 끝까지 읽어주신들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