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30. 상상 테마29 - 과일 이미지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세상의 모든 과일들은 미각,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소환한다. 입안에 퍼지는 오미자의 다양한 맛, 땡볕에 익어가는 수박의 진한 색감, 늦가을 포도가 익어가는 냄새, 쭈글쭈글 변해가는 대추의 촉감, 한밤중 홍시 떨어지는 소리, 떫은 감을 우려내서 슬쩍 내밀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등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과일은 시적 소재로서 훌륭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과일 이미지와 관련된 단어들을 나열해 보자. 시다 떫다 달콤하다 향기롭다 발효 숙성 익다 떨어지다 다닥다닥 당도 물리다 크다 굵다 진하다 썩다 솎다 적과 수확 포장 창고 풋 섭취 섞다 물컹하다 껍질 속 씨 주스 갈다 달려있다 송이 숭어리 질기다 존득하다 식감 자르다 마시다 먹다 으깨다 토막 벗기다 뱉어내다 등등…. 그리고 각종 과일 이름과 과일이 들어간 음식, 과일나무 이름까지 떠올려보자. 그런 후 상상을 적용하여 매력적인 구절을 만들어 보자. 예컨대 ‘왜 내겐 떫은 기억만 다닥다닥 열려있는 것일까’ ‘몸과 몸이 만나 발효되는 식초처럼 우린 다른 성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돌풍에 떨어진 어린 과일들의 숨소리가 꿈속까지 굴러왔다’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제제가 된 내가 울곤 했다’ ‘가을을 사랑한 포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를 솎아내고 있는 밤’ ‘과일맛 사탕 속엔 과일은 없고 알맹이 없는 계절이 스스로 당도를 높이곤 했다’ ‘당도가 높던 열두 살과 당도가 사라진 서른 살이 서로 마주 앉았다’ ‘물컹하게 익은 사랑은 터지기 쉬웠지만 우리의 사랑은 단단하고 어색했다’ 등의 구절을 적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그 구절들을 바탕으로 상상적 체험을 하면 나만의 시에 도달할 수 있는 바탕이 이루어진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젤리 / 하린
꿈속에서 너를 검색하면 너는 나오지 않고 네가 자주 가던 과일 가게만 나온다 첨부파일처럼 과일들이 놓여 있다 암호를 걸어 놓은 탓에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단맛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세, 생일엔 엄마가 엄마에게 깎아줄 사과가 당도했던 햇살처럼 난 혼자 중얼거리고만 있다 다 좋아요 전부 다 싱싱해요 그건 만지면 무조건 사야 해요, 어떤 경우든 타인의 체온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내 주변엔 체온 없는 것들이 지천인데….
의미도 계절도 남아있지 않게 봉숭아를 분쇄기에 넣고 간다 젤라틴과 섞고 2시간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전화번호를 뒤적인다 대낮엔 달달한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출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차단을 하거나 클릭을 하거나…, 액정을 추종하듯 터치를 남발한다 트위터에선 새가 지저귀지 않고 페이스북에선 찾는 표정이 넘쳐난다 젤리를 떠먹는다 물컹하고 뭉클하다 눈물로 만든 젤리도 아닌데 심장이 맛을 보는 것 같다 이젠 과일 대신 통조림만을 사야겠다 너와 함께 나누던 3년 전의 과일을 꼭 만나야겠다 ― 《시산맥》 2019년 여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젤리」는 타자인 ‘너’와 주변인들에게 소외당하고 있는 화자의 심리 상태를 과일 이미지와 결합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화자는 ‘너’와 3년 전엔 가까운 사이였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꿈속에서 너를 검색하면 너는 나오지 않고 네가 자주 가던 과일 가게만” 나온다. ‘너’를 생과일들처럼 실물로 만나고 싶은데 오직 기억과 추억으로만 ‘너’가 감지된다. 타인들도 화자의 외로움을 외면한다. “대낮엔 달달한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출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차단을 하거나 클릭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 뿐이다. 이런 관계 지음과 관계 설정 속에서 화자는 과일이라는 코드를 통해 ‘너’와의 유대감을 애써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심리상태마저 허락하지 않고 ‘물컹하고 뭉클’한 슬픔의 맛만 제공해 줄 뿐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별 상황에 놓인 개별자가 느끼는 결핍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신만의 몸짓이다. 그리고 이 시의 장점은 그런 화자의 결핍 혹은 ‘외로움’을 ‘젤리’라는 상관물을 통해 낯설게 펼친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 적용된 객관적 상관물과 상관 현상은 바로 과일과 젤리다. ‘나’는 ‘너’를 갈망하지만 널 만날 수 없다. 그런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것이 꿈속에 등장한 과일 가게 속 과일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 과일들 안쪽으로 다가갈 수 없다. ‘너’가 “전부 암호를 걸어놓은 탓에” 접속할 수 없다. 재회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외면한 채 “단맛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세”로 과일은 놓여 있고, ‘나’는 그저 “처음 과일에 당도했던 햇살처럼” “혼자 중얼”거리고만 있다. “전부 다 싱싱해요 그건 만지면 무조건 사야 해요”라고 말한 과일 가게 주인의 언술도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너’에게 내가 다가가면 ‘너’의 ‘싱싱함’이 사라진다는 말로 들린다.
젤리는 ‘나’의 결핍 상태를 대변한다. 젤리를 만드는 동안 타인들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또 한 번 ‘좌절’을 맛보게 된다. “달달한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현실 속에서 눈물로 만든 듯한, 심장의 맛 같은 젤리는 화자의 외로움을 극적으로 나타낸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외로움’과 결핍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시에 적용된 상상적 체험은 꿈속 상황과 현실 속 상황 두 가지다. 꿈속 상황에선 꿈속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 ‘너’를 감각하기 위해 과일 가게에 가고 있는 ‘나’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암호화된 과일로 인해 ‘나’는 ‘너’와 끝까지 소통할 수 없다.
현실에서의 상상적 체험은 ‘너’와 헤어진 후 결핍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게 한 점이다. 2시간 동안 젤리가 굳어지길 기다릴 때 “달달한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만든 점과 식상하고 무료한 SNS만 있게 만든 점이 바로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 극적 체험이다.
* 또 다른 예문
사과는 둥글고 악수는 어색하게 / 하두자
우리는 날마다 착하게 인사를 하지 동글동글 사과는 접시에서 제 무게를 잘 지키고 있지 입술에 웃음 걸어 놓아도 당신의 손은 언제나 불안해 뜨거운 찌개 같이 끓고 있거든
당신과 나의 세상은 같으면서도 서로가 달라서 가끔은 푸른 다알리아 꽃을 손에 들고 사랑이라는 거품 문 문장으로 당신은 나를 물어뜯고 나는 두통이 멈추길 기다리지 소용돌이에 갇혀서 했던 말과 하지 않은 말들이, 나쁘거나 나쁘지 않는 말들이 귓구멍을 파고 들 때 주어가 되는 사과는 어색한 목적어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키보드나 핸드폰 두드린 손가락이 허공에다 스프레이 뿌려대는 것처럼
한 사람은 말의 사실만 기억하고 또 한 사람은 말의 느낌만 기억했지 당신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어 내가 한 일은 당신이 알고 당신이 한 일은 내가 알아 주먹을 쥔 채 악수를 하고 사과를 받아먹어야 된다는 거지
내 사과는 점점 줄어드는데 당신의 사과는 수북하게 쌓여만 가네 - 『프릴 원피스와 생쥐』, 현대시학사, 2020.
토마토 베끼기 / 박완호
토마토의 불안을 본다, 는 문장을 쓰고 있을 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표를 찍기 전이었다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토마토는, 치명적으로 붉은 생각을 품은, 손바닥으로 살짝 감싸기에 알맞은 크기의, 한번 손에 쥐고 나면 놓치고 싶지 않은, 말랑말랑하고도 질긴 근육질의, 처음인지 마지막인지 자꾸 되묻는 연애처럼 비릿해지는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생즙,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벼락 맞은 나무처럼 창백해지는 유리잔, 피톨처럼 묻은 알갱이들, 엄마, 라고 하면 상투적인 것 같아 다른 발음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본다 사랑, 이라고 쓰면 그게 누구야 하는 질문들 비좁은 틈바구니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토마토와 나의 낯빛이 짙붉게 포개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나는 문득 낯부끄러운 꿈을 꾸다 들켜버린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 -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시인동네, 2020.
복숭아의 출구 / 박수빈
볼 터치를 하고 턱을 가렸지만 튀어나온 목젖 음악에 맞춰 캉캉 치마를 올렸다 내린다 나비와 꽃이 꼭 만나야 할까 새는 경계 없이 날고 바람에 그냥 목욕을 한다 달의 결에 맞닿은 절정의 향기 아니마 아니무스의 엉덩이 비 맞은 살의 냄새 종이꽃 여무는 몽우리 입술과 입술 사이 고양이의 손톱이 숨어있었나 상상임신을 지우는 마스카라가 범벅이다 한입 베어 물수록 진물이 흐르고 자궁이 비워지는 것 같다 새가 앉지 않는 자리 발그스름하게 도착한 껍질이 벗겨진다 몸과 마음이 이끌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드래그 퀸*이 인사를 하고 있다 쇼가 다시 시작된다 *드래그 퀸(Drag queen) : 여장을 하고 음악과 댄스, 립싱크 등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성 소수자 - 『비록 구름의 시간』, 천년의 시작, 2019.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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