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기 비류왕 6년, BC13년.
七年 戊申 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曰 夫婦之道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骨未冷而忽復再娶乎 太后聞而悲之曰 吾有罪於沸流矣 溫祚慰之曰 母之再嫁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亦何嘗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未已故也 碧蘿以荇人王女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孝友慈愛能使沸流浹洽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親執饋事 以慰將士 夙興夜寐 疲勞益甚 遂得疾而薨 故群臣上下莫不痛之 春秋三十四 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 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欲傅其國 臨薨謂王曰 我死勿更娶以若兒輩 國政可委溫祚 而內事可委女輩 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視內事故也 三月 王與葱姬北巡郡邑 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6년 戊申(BC13년) 왕후 碧蘿(벽라)가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였다. 群臣(군신)들은 繼后(계후, 새왕후)를 맞아 들이길 청하였다. 왕이 참지 못하고 말하길 "부부의 도리는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인데 비록 서로 따르지 못할망정, 어찌 차마 骨(골)이 식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다시 새장가를 간단 말입니까?" 라고 하자, 太后(태후)가 듣고서 비통해하며 말하길 "내가 沸流(비류)에게 죄가 있도다." 라고 하니, 溫祚(온조)가 위로하여 말하길 "어머니가 재가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다시 장가들지 않는 것은 또한 어찌 최선이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형수를 사랑하는 정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라고 하였다. 碧蘿(벽라)는 荇人王(행인왕)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고, 太妊(태임)의 덕을 갖춰서 효도하고 우애하고 자애로와서 沸流(비류)로 하여금 마음에 흡족함을 줄 수 있었다. 큰 어려움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몸소 식량공급을 담당하여, 장사를 위로하였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부지런히 일해서 피로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마침내 병을 얻어서 돌아 가신 것이다. 이 때문에 군신상하가 모두 애통해 마지 않았다. 나이는 34살이였고,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절색이라서, 마한왕이 자주 사신을 보내 딸들을 요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溫祚(온조)의 아들 多婁(다루)를 양자로 삼아 나라를 전하고자 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왕에게 말하길 "제가 죽거든 젊은 애들처럼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국정은 溫祚(온조)에게 맡길 수 있고, 內事(내사)는 딸들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이 때 장녀 葱姬(총희)가 나이가 이미 16살로 왕후를 대신하여 內事(내사)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월, 왕과 葱姬(총희)가 북으로 군읍을 순수하여 변방의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甘兒(감아)에게 명하여 들어와 內事(내사)를 맡아 보게 하였다.
*비류왕 6년이 맞음. 원문의 오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6년.
六年 秋七月 辛未7)晦 日有食之
6년(BC13년, 戊申)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安忍骨未冷而忽復再娶乎
= 어찌 차마 骨(뼈)가 식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再娶를 되풀이한단 말입니까?
비류의 처가 碧蘿(벽라)라는 여자였는데, 荇人王(행인왕)의 딸로서 , 딸만 3명이라서 아들이 없었으므로, 溫祚(온조)의 아들 多婁(다루)를 양자로 들일려고 했었다는군요.
젊은 나이에 죽자, 군신들이 여자를 들이라고 하니, 비류가 화가 나서 말합니다.
"어찌 차마 骨(뼈)가 식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再娶를 되풀이한단 말입니까?"
처가 무덤에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새로운 여자를 娶라고 하니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장면이죠.
위의 해석문은 몇 년전에 백제왕기 PDF파일이 흐려서 잘 보이지도 않아서 해석을 중단했다가.. PDF파일이 새롭게 스캔이 되어서 5년만에 해석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백제본기에서는 일식 기사로 생략해 버려서, 없는 내용입니다.
쭉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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