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잊게 한 창작열
오키나와 인근 오락가락하던 태풍 카눈이 진로를 북으로 정했다는 팔월 초순 화요일은 입추였다. 봄이 온다던 길목에도 상당 기간 추위가 남았음에도 입춘 절기를 앞당겨 끼워두었다. 입하도 그랬거니와 입추도 아직 늦더위가 제법 남아 있음 직한데 ‘가을’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입추부터 가을이라는 게 아니라 가을이 오는 징후가 엿보이기 시작하는 무렵이 적확한 의미다.
평소 교류가 있는 지기로부터 폭염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지만 근교 숲길을 걸어보십사 제의가 와 동행이 되고자 했다. 아침 식후 배낭을 추슬러 둘러메 현관을 나서 이웃 동 뜰에서 꽃을 가꾸는 꽃대감을 만났다. 친구는 이른 아침 꽃을 피운 철포백합을 사진으로 닮아 시조를 한 수 지어 모닝 카드로 보내왔다. 근래 친구가 모닝 카드에 적어 보내는 시구의 운율이 날로 돋보여 갔다.
꽃밭에서 꽃대감과 밀린 안부와 함께 모닝 카드 내용으로 환담을 나눈 뒤 나는 나대로 일과 수행을 위해 길을 나섰다. 버스 정류소로 나가 이웃 아파트단지 사는 지기를 만나 팔룡동에서 차를 몰아온 또 다른 지기의 차에 동승했다. 운전자는 출근 시간대라 시내 도로가 혼잡해 정한 시간을 맞추기 힘들더라고 했다. 우리는 사전 행선지 조율이 되지 않아 차내에서 어디로 갈지 정했다.
이동 거리가 멀지 않은 불모산동에 차를 두고 저수지 안쪽 계곡으로 가자고 해 동의를 구했다. 창이대로를 따라 달려 성산구청에서 한화테크원을 지나 불모산동 저수지 안쪽 개울가에 차를 세웠다. 나는 올여름 몇 차례 더위를 식히려 불모산 숲길을 걷다가 계곡에서 몸을 담그고 나왔다. 거기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기 좋은 곳이나 사람들이 잘 몰라 한적한 편이다.
용제봉의 몇 갈래 물길이 저수지로 모여드는 개울을 건너 산비탈을 개간한 텃밭을 지났다. 길섶에 꽃을 피운 해바라기에 암끝검은표범나비가 날아 앉아 곁을 내주어 사진에 담아봤다. 텃밭 구역을 지나 나에겐 익숙한 등산로를 따라 걸어 불모산터널 곁으로 올라 상점령에서 오는 숲길에 합류했다. 불모산터널 입구 위 개울에는 중년 부부가 일찍부터 발을 담가 더위를 잊고 있었다.
개울을 건너 성주사 방향으로 더 나아가질 않고 불모산이 정상부에서 골을 지어 흘러내린 계곡으로 향했다. 지정 등산로를 벗어나 국수나무를 비롯한 검불을 헤쳐가는 개척 산행으로 내가 몇 차례 들린 계곡을 찾아갔다. 혼자 비밀스럽게 다녀간 알탕지에 일행과 더불어 찾기는 처음이었다. 계곡에는 지속된 폭염으로 수량이 줄기는 해도 발을 담그기에 부족함이 없는 물이 흘렀다.
계곡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공간이었다. 신발을 벗어 맑은 물웅덩이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혀 준비한 다과를 들었다. 두 지기는 올여름 무더위에도 연길을 거쳐 백두산을 등정했고 멀리 진도에서 개최된 시인학교를 다녀온 후일담을 나누었다. 창작 열기가 대단한 한 지기는 근작 시조 예닐곱 수를 프린트로 출력해 와 이미지 형상과 운율의 자연스러움을 맞추려 생각을 모아봤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잊고서 한동안 시조 운율을 다듬느라 시간을 보냈다. 점심때가 지나는 즈음이라 계곡에서 빠져나와 성주사로 가는 숲길을 걷다가 불모산동 저수지로 가는 등산로로 내려섰다. 불모산터널을 앞둔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니 아까 차를 둔 저수지 안쪽에 이르렀다. 기축골의 한 식당을 찾아가니 회사원 단체 배식을 마친 뒤라 상차림이 어려워 시내로 나왔다.
신월동으로 와 주택가 식당에서 가성비 좋은 불고기 비빔국수로 점심을 들었다. 식후는 의창구청 갤러리서 열리는 성민애 조각가의 개인 작품전을 관람했다. 동행이 되어준 지기와 연이 닿은 작가였다. 경주에 작업실을 둔 작가는 석재를 깎고 갈아 금강산 이야기와 오이디푸스의 생 등을 조형으로 빚어냈다. 초면으로 뵌 조각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나의 식견이 모자람을 느꼈다. 23.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