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32. 상상 테마31 - ‘A 안에 B가 산다’ 문장 구조로 상상하며 시 쓰기
@ ‘A 안에 B가 산다’ 구조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A 안에 B가 산다’는 대상과 동일화를 이루기 위해 펼치는 상상 중에 하나다. 필자는 이미 『시클』에서 이 동일화 방법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다.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일화란 단순히 말하면 존재와 존재의 ‘같아짐’이다. A의 상태를 A의 행위나 A의 태도로 표현하면 신선함을 줄 수 없기에 유사성이 존재하는 B라는 대상을 끌어와 비유하거나 동화나 투사를 활용해 확장하면 된다.
동화(同化)는 타 대상의 속성이 자아 안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타 대상을 자아화 하는 방식인데, ‘나는 오늘부터 절벽이다/ 내 안엔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수직으로만 자라는 가파른 무작정이 있다’라고 표현했을 때, 자아(나)를 절벽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동화이다. 자아 안에 다른 존재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동화인 것이다. 투사(投射)는 반대로 자아가 타 대상 안에 들어가 타 대상의 일부가 되어서 타 대상의 속성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화자가 자신 속에 존재하는 정서나 태도 등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 타 존재에 이식시켜 그곳에 존재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타 대상 안에 존재하게 되는 과정은 투사지만 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과정은 동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백 년을 바위 속에 살자/ 바위의 사상이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라고 표현하면 처음엔 ‘나’가 ‘바위’ 속에 들어가 살기에 투사지만 나중엔 ‘나’가 ‘바위’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동화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난 그날 밤 아버지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할퀴고 찌르며 숨통을 조였다/ 아버지는 악몽을 견디듯 나를 견디다가 잠에서 깨어났다”라고 표현하면 투사 후에도 동화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 『시클, 고요아침, 2015, 313~316쪽.
이런 동일화 방법 중에서 ‘대상이나 타자 안에 살고 있는 화자를 체험하라’라고 쓴 소제목의 장(章)이 바로 ‘A 안에 B가 산다’와 같은 상상이다. 어떤 존재 안에 이질적인 대상이 살고 있는 형태를 상상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안에 구름이 산다’ ‘구름 속에 아버지가 산다’ ‘새 안에 뱀이 둥지를 틀었다’ ‘심장 속 슬픔이 자신을 증명한다’ ‘우리 안에 우리 아닌 것들만 산다’ 등의 문장이 거기에 해당하는 방식이다.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거푸집 / 하린
밀착된 온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바깥 마음이 틀어지지 않게 자세를 유지합니다 무언가 새어나가는 느낌을 감내합니다
오직 두려운 건 기포가 생기는 일
틀을 구성할 수 없다는 염려마저 지웁니다
아침의 참견이나 저녁의 충고에 신경 쓰지 않고 모월 모일까지 껴안습니다
이젠 끝까지 눈을 뜨지 않는 태도만 남깁니다
당신들이 등 뒤 무의식을 추론하고 내가 나의 안부를 묻습니다
태양도 달도 없는 암흑 속에서 발견이 태어나도록 내버려 둡니다
쉬운 인간 하류 인간 부끄러운 인간 뻔한 주석이 탄생할 것입니다
나의 슬픔은 마침내 화석이 될 수 있을까요
아, 그런데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숨이 막힙니다
3일 만에 1.5평 고시텔을 빠져나왔는데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일몰을 들킨 나의 슬픔이 배고픈 나의 슬픔이 치욕을 허겁지겁 삼킵니다 ―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거푸집」에 적용된 ‘A 안에 B가 산다’는 ‘거푸집 안에 슬픔이 산다’이다. 필자는 형과 틀을 가진 거푸집에 금속 주물이 아닌 슬픔을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펼쳤다.
1.5평 고시텔에 살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이를 먹어버린 화자가 가질 수 있는 건 패배 의식과 슬픔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잠깐 고시텔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 시 창작을 가르치는 학교에 출근해야 하는데 집하고 너무 멀어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아주 저렴한 고시텔을 알아보게 되었다. 공동 주방,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실이 있는 곳으로 잠을 자는 방은 겨우 1평~1.5평 밖에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방의 개수는 30개가 넘었다. 그들은 오직 필자처럼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닭장 같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돈의 문제였다. ‘아, 30명의 저렴한 인생들’, 철새처럼 아주 잠깐 머물다 가기도 하고 1년 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틀이 정해진 고시텔을 필자는 거푸집으로 보고 화자의 굳어가는 슬픔을 상상했던 것이다. 이 시의 장점은 바로 그런 비극적 상상을 통해 얻어진 고시텔의 이미지를 슬픔의 고체화(죽음 이미지)로 변환해서 표현한 점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슬픔은 원래 관념이다. 그런 슬픔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거푸집과 거푸집의 특성을 객관적 상관물로 활용했다. 무엇이든 거푸집에 한번 들어가면 틀 속에 고정되고 그 틀의 방식대로 굳어가게 된다. 그런 1차원적 특성을 활용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탄생했다. “마음이 틀어지지 않게 자세를 유지합니다/ 무언가 새어나가는 느낌을 감내합니다” “오직 두려운 건 기포가 생기는 일” “아침의 참견이나/ 저녁의 충고에/ 신경 쓰지 않고/ 모월 모일까지 껴안습니다”가 그런 구절인데 거푸집의 특성과 잘 맞물리고 있다. 거푸집 안쪽의 특성과 더불어 바깥의 속성도 활용했다. 바깥은 ‘안쪽이 잘 굳어질까’를 생각하면서 안쪽을 진단하는 자리다. 그래서 “당신들이 등 뒤 무의식을 추론하고/ 내가 나의 안부를 묻습니다” “쉬운 인간/ 하류 인간/ 부끄러운 인간/ 뻔한 주석이 탄생할 것입니다”와 같은 구절이 탄생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 적용된 상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푸집과 고시텔을 비유적 상상력으로 결합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루저’로 살아가는 화자의 상태를 극단으로 체험한 것이다. ‘루저’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존재다. 그것이 더욱 슬프다. ‘존재감이 하나도 없을 때의 슬픔’, ‘루저’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비참함이다. 3일 만에 “고시텔을 빠져나왔는데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상태에 놓인 화자. 그들은 화자가 3일 동안 고독한 ‘단식’에 들어갔는지, 들락날락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 만의 삶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아, 그런데 “알몸을 들킨 나의 슬픔”이 너무나 배고 고프다. 치욕적이다. 그래서 필자는 “배고픈 나의 슬픔이/ 치욕을 허겁지겁 삼킵니다”라는 구절을 마지막 부분에 배치했다.
* 또 다른 예문
여우의 탄생 / 김온
내 안에 여우가 살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당신을 향해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것도 점점 좁혀가는 것도 왜 지금이여야 하는지도 뒤늦게, 정말 뒤늦게 알았어요 꼬리가 둘로 갈라지면 불사(不死)의 존재가 된다는데 머리가 아홉 개라고 착각하는 당신은 정작 꼬리가 하나도 없어요 뒷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요 나의 습성을 알 거라고 자신하지 말아요 내 안에서 밀고 당기는 힘을 가졌다면 의심을 품은 존재로 오백 년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길들이기 쉬운 건 자존심 조화처럼 건조한 안쪽을 숨길래요 끝내 야생이 될 수 없다고 믿으며 구름에 흘리듯 여우를 숨겨 놓을래요 육회를 무칠 때 고등어를 토막낼 때 내가 몰래 웃었던 걸 당신은 알았나요 신통한 둔갑술로 전설의 고향 속을 서성이면 당신의 착각도 무럭무럭 자라겠죠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제가 살던 굴을 향해 돌린다는 수구초심(首邱初心)에서 초심은 결코 당신이 아니에요 이젠 영하50도에서도 견디는 북극여우가 될래요 당신은 너무 많은 급소를 나에게만 들켰어요 - 《시산맥》 2021년 봄호
내 몸에 자석이 있다/ 박찬세
정신을 놓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 침대 위다 여기가 어딘지에서 어떻게 왔지로 뒤척이는 때이다 기억이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뱀장어처럼 꿈틀대는 때이다. 그때마다 내 몸에 자석이 있는 건 아닌지 짐짓 심각해 져 보는 것인데 가끔 빗장 걸린 내 가슴이 활짝 열릴 때면 내가 키운 날짐승들이 무거운 날갯짓으로 이곳저곳 나를 부리고 다니다가 너무 많이 뱉어버린 말들을 물고 새들은 날아가고 내가 한껏 새처럼 가벼워지면 집이 풍기는 자장을 읽고 척하고 붙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 몸에 자석이 있다 생각하니 의문이 풀린다 공중화장실 둘째 칸만 가는 것이나 단골 식당 메뉴판 아래만 앉는 것이나 서점 시집 코너에만 머무는 것이나, 쇠막대에 자석을 문지르면 자석이 되듯이 내가 문지르는 곳마다 내가 심어 논 자성이 나를 당기고 있었던 것 당신을 만나면 말보다 먼저 안고 싶은 것도 당신이 나에게 착 달라붙는 것도 우리가 뜨겁게 살 부볐기 때문이고 자성이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낯간지러워 불러도 쉬이 대답 못 했던 자기라는 말 이제 내가 당신에게 불러주고 싶다. 갓난아이에게 사람들이 달라붙는 것이나 가족이란 언어도 이제 다 알겠다 울고 싶을 때마다 왜 하늘을 올려다보는지 알 것 같다 - 《리토피아》 2015년 봄호
구름 이식 수술 - 감정노동자 J에게 / 고광식
오늘은 녹아내린 얼굴에 새털구름을 이식하는 날 이식편을 양쪽 뺨에 그물처럼 늘려 놓으면 구름 보조개가 혓바닥을 끊임없이 빨아들일 거야 흙탕물은 피부를 자극하며 어디로든 흘러갈 거야 구름 입자 하나씩 이식하는 손가락마다 묻어나는 물방울들 실내 온도와 조명 각도 때문에 사람들의 욕설도 녹아내릴 거라 생각해 표정은 봉합술로 하얗게 빛나고 가슴은 그늘져 어둡고 막장드라마 화면으로 들어가던 순간 뺨은 모두 녹아내린 거야 각종 구름이 날아다니는 저녁 맨홀처럼 둥글게 열상 입은 붉은 노을을 벗겨 내야지 이제 혓바닥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성층권을 넘는다 해도 두렵지 않아 구름은 진피 조직을 자극하며 차오르고 구름 보조개가 거리의 혓바닥을 재배열할 테니까 - 『외계 행성 사과밭』, 파란, 2020.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