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본다 / 유안진
짧지 않게 살았는데도
순간만 같았다 싶고
많은 이들을 만났을 텐데도
한 사람뿐이었다 싶고
우연마다 기회였을 텐데도
허투루 흘렸다 싶고
많은 걸 누렸을 텐데도
늘 춥고 허기(虛飢)졌다 싶은 날
겨울나무 여윈 가지 끝
바람 떨며 매달린 마른 잎과 마주 본다
한나절 내내
오독 / 이기철
나무가 직립하는 데는 백만 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라고
겨울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나무의 마음을 읽는 데는 참 오래 걸린다
사람보다 먼저 땅을 차지했을 나무
사람보다 먼저 경사를 딛고 일어선 나무
나문들 어찌 제자리에만 서 있고 싶겠는가
나비 날아가는 것 보면 얼마나
날아가고 싶겠는가
그래서 나무는 온종일 가지를 흔든다
아직도 바로 서지 못하고 구불구불한 나무 곁에서 곧게 선 나무는
자벌레도 송충이도 없다면 그는
생을 포기했을 것이다
누구 있어 내게 묻는다
나무를 이렇게 오독해도 되는 거냐고
그렇다 나는 나무를 오독한다
아니다, 나는 인생을 오독한다
오독이 나를 생생히 물들인다
- 이기철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울컥 / 송종찬
겨울나무가 얼어 죽지 않으려면
울컥하는 것이 있어야겠다
마룻바닥에 울리는 통성기도나
남몰래 흘리는 눈물 같은 것들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밀고 올라야겠다
눈과 눈이 고사리손을 마주잡고
빈 들을 건너가는 겨울밤을 나려면
울컥하는 것들이 있어야겠다
다시 볼 수 없는 북방의 여인이나
갈 수 없는 설움들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얼굴에는 신열이 올라야겠다
빈 겨울들에는 바람이 들이치고
쓰러지는 겨울나무들이여
- 송종찬 시집 <첫눈은 혁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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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몇 년 동안 디아스포라가 되어 국경 밖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야 할 곳,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어쩌면 사철 햇살이 따사로운 한반도가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곳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불편한 소식들 때문에 때로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국경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만주, 연해주는 먼 곳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몸부림쳐야 하지만 분단은 우리가
뛰어넘지 못할 공간은 아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순정한 마음, 자작나무의 환한 빛, 폭설을
뚫고 피어나는 시베리아의 들꽃 같은 기운만 있다면
봄은 끝내 오리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필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