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와 사육신 박팽년의 인연
신라 38대 원성왕이 하루는 걸음걸이 속도가 똑같은 사내 둘을 나라 북과 남에서 걷게 하였다.
이들이 만난 곳에 큰 절을 짓고 탑을 올렸다. 국토 정중앙이라 하여 중앙탑이라 이름하였다.
충북 충주시에 서 있는 칠층석탑이다. 마침 폭설이 쏟아진 날이었다. 하얗게 변한 천지사방
한가운데에 서서, 충주 땅에 남아 있는 옛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하나인
박팽년 사우(祠宇), 신장(神將)으로 추앙받는 임경업 사당 충렬사, 그리고 조선 육군 사령관
신립의 흔적이 남은 탄금대다.
박계창의 꿈
조선 선조 때 사람 박계창은 경상도 달성 묘골에 살았다. 고조부 기일에 박계창이 꿈을 꾸었다
꿈에 마당에 인기척이 들리기에 나가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다섯이 자기 할아버지와
함께 사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깨어나 생각하니, 함께 사당을 찾은 혼(魂)들은
고조부 박팽년과 함께 죽은 동료들이었다. 이름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였다.
훗날 사육신이라 불리게 된 사내들이다.
박계창은 제사상을 다시 차려 여섯 어른을 함께 제사 지냈다. 혼들이 찾아왔던 사당은 하빈사
(河濱祠)라 이름 지었다. 훗날 낙빈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974년 낙빈서원은 육신사(六臣祠)로
중창되었다. 자, 삼족(三族)과 삼대(三代)가 멸망했음이 당연한 이 역적들에게 어찌하여 후손이
있었으며 충주 땅은 사육신과 어떤 식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계유정난과 사육신
조선 집현전은 왕립학술원이었다. 당대 최고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던 연구소였다. 그 가운데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과 유성원(柳誠源)과 이개(李塏)와 하위지(河緯地)와 신숙주
(申叔舟)가 뛰어났다. 박팽년은 문장은 물론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가야금도 잘 타고 즐겨 타서
호가 취금헌(醉琴軒)이었다. 별명은 집대성(集大成)이었다. 세종이 죽고 병약한 문종도 요절했다.
세자 이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열한 살이었다. 너무 어렸다.
그 사이를 제대로 파고든 사람이 문종의 동생, 유(瑈)였다. 수양대군이라 불린 이 사내는 1453년
계유년 정적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이더니 2년 뒤 조카 홍위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
1456년 음력 6월 2일 신숙주를 제외한 집현전 최고 학자 5명과 무관 유응부가 단종 복위를 계획했다
. 거사 당일, 함께 거사를 꾸몄던 김질이라는 자가 세조에게 고자질을 했다. 피바람이 불었다.
동참한 유성원은 그날 집에서 목을 칼로 찔러 자살했다. 생육신 남효온이 쓴 '추강집'과 세조실록으로
이후 일주일을 재구성해본다.
세조가 박팽년을 직접 심문했다
. "나를 섬기라." 박팽년이 답했다. "한 번도 나으리[進賜·진사]를 섬긴 적 없소이다."
세조가 물었다. "내 녹을 먹는 신하[臣]라 칭하지 않았더냐."
박팽년이 대답했다. "그런 적 없소이다." 박팽년 집과 사무실을 수색해보니 충청관찰사 시절
그가 작성한 서류에는 신하 신(臣) 자 있을 자리에 클 거(巨) 자가 적혀 있었다.
다락방에는 세조 정권이 준 월급봉투가 쌓여 있었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처벌은 신속했다.
나흘 뒤인 6월 6일 역신들의 아지트 집현전이 폐지됐다. 다음날 박팽년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무관 유응부는 배를 지져대는 인두가 식자 "달궈서 지지라"며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유응부는 세조를 족하(足下)라 불렀다. '자네'라는 뜻이다.
그다음 날 반역자들이 수레에 묶이고 소에게 사지를 묶여 찢겨 죽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시신이 한 번 더 처형됐다. 여자들은 노비로 끌려갔다. 문집은 모두 불태웠다.
삼족이 멸했고 삼대가 멸했다. 6월 9일 우의정 이사철이 찬미가를 불렀다.
"전하께서는 천 년의 운수를 타고나고 덕은 백왕(百王)의 으뜸이시라."
사건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사육신의 부활
그러던 와중에 선조 때 경상도에서 기적 같은 소식이 올라왔다. 박팽년의 손자가 있다는 것이다.
정조 때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임신 중이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가 친정이 있는 경상도 달성 관비로 내려가 아들을 낳았다. 마침 여종 또한 아이를 낳으니
딸이었다. 여종과 이씨는 딸과 아들을 바꿔 비(婢)라 이름하고 비밀리에 키웠다. 박비는 죽음을
피해 지금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숨어 살았다. 그러다 성종 때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관찰사로 부임해 이 사실을 알고 자수시켰다. 이덕무에 따르면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일산(一珊·'구슬'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박일산의 손자가 바로 사육신 꿈을 꾼 박계창이다. 훗날 1691년 숙종 17년 사육신 여섯 명은
모두 관직을 회복하고 명예를 회복했다. 왕실 정통성에 큰 흉터였던 사육신 사건은 그렇게
봉합되었다. 사육신 사당은 박팽년 후손이 모여 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있다
. 여섯 사내를 기리는 비석은 육각기둥이고, 비석을 받치는 귀부는 머리가 여섯이다.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는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이 시신들을 수습해 묻었다는
묏자리에 만들어졌다. 역사는 가끔 영화처럼 굴러가기도 한다. 더 영화 같은 역사는 지금부터다.
충주로 다시 가본다.
박팽년 사우와 임경업 사당
1707년 숙종 33년 박팽년의 10세손 박경여가 충청도 청안 현감으로 부임했다.
청안은 박팽년의 고향 회덕과 가깝다. 박경여는 박팽년의 사당을 임지에 세웠다.
지금 충주 땅이다. 사우 외삼문에는 박팽년과 아들 박순, 손자 박일산 충신 정려문이 서 있다.
주택가에 숨어 있다.
충주는 무속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장군, 임경업의 고향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이후 무장
임경업에게 적은 청나라뿐이었다. 오로지 청을 적으로 삼다가 명으로 망명한 뒤 간신배의
모략에 걸려 조선으로 압송돼 곤장을 맞고 죽었다. 청을 배신하고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다.
1646년이었다. 고향 충주에는 사당 충렬사가 있다. 박팽년 사우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거리다.
중심을 지킨 두 사내의 사당이 지근거리라는 사실도 기이하지만, 그 배경은 더욱 기이하다.
모사꾼의 변절로 인해 사육신이 죽었다. 변절자 이름은 김질이다. 190년 뒤 우직한 장군
임경업이 한 간신배의 모략에 누명을 쓰고 죽었다. 이 간신배 이름이 유자광, 임사홍과 함께
조선 3대 간신으로 꼽히는 김자점이니, 바로 사육신을 배신한 모사꾼 김질의 고손자이다.
충신 무리와 간신배 무리가 200년 만에 만난 것이다. 제멋대로 굴러가는 듯 보여도, 역사는
패턴이 있다.
패장의 충절, 탄금대
천 년을 서 있는 중앙탑에서 남한강을 타고 동진하면 탄금대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부대 저지 임무를 맡은 조선 육군 사령관 신립이 전사한 절벽이다.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리 두려워했던 문경새재를 버리고 달천변 진흙탕에 배수진을 쳤다가 투신자살한
군인이다. 본인은 물론 8000여 정예부대원이 몰살했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탑과 비석이
탄금대에 서 있다. 옛 기록은 물론 현대 군사학자도 이해 불가능한 작전으로 전사한 장수의
충절을 기리는 기념비들이다. 문득 눈발이 멎었다. 신립이 투신한 달천이 중앙탑 옆으로 흘렀다.
사위(四圍)가 고요한데, 거기 흘러간 역사가 여간 복잡하고 쓰린 것이 아니었다.
출처 :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