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태조 가계도
↓
↓
21세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개국군주 태조① 건국의 뿌리 이덕일 | 제180호 변절과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받는 방향전환이 때론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고려 말 이성계 일가는 대표적인 부원(附元)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북방영토 회수운동에 전격 가담하면서 친(親)고려세력으로 전환되었다.
부원세력에서 친고려세력으로의 극적인 방향 전환이 변방의 일개 무장 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가 조선을 개국하는 뿌리가 되었다.
영조 24년(1748)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공민왕 9년(1360) 부친이 사망하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정정해 주었다. 가동(하인)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절히 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것이다. 부친 장지에 관한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만 25세 때부터 개국을 꿈꾸었다는 뜻이 된다.
이 외에도 건국 조짐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전한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1352∼1409)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서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書雲觀)에 전하던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가 있는데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자(木子)는 이(李)씨를 파자한 것으로 역시 개국한다는 뜻이다.
‘구변진단도’란 ‘아홉 번 변하는 진단(震檀·우리나라)의 그림’이란 뜻의 일종의 도참서(圖讖書)로, 천문(天文)·역수(曆數)·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 서운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선조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본조 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서 고려 서운관에는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흥한다(王氏滅李氏興)는 말도 있었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본조 선원보록’에는 이성계가 잠저(潛邸·즉위 전의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지리산 바윗돌 속에서 얻었다’는 글을 바치고 사라졌는데,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는다(木子乘猪下, 復正三韓境)”는 내용이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는 닭 우는 소리와 세 서까래 이야기다. 이성계가 안변(安邊)에서 살 때 수많은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우는 와중에 허물어진 집에 가서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꾸었다. 설봉산(雪峰山) 이승(異僧)에게 묻자 “닭들이 동시에 운 것은 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지위)요, 세 서까래를 진 것은 왕(王)자란 뜻”이라고 풀이했다.
이 일화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등 여러 문집에 실려 있다. 닭 우는 소리는 고려의 제8대 현종(顯宗·992~1031)의 사적에도 나온다. 현종은 어린 시절 궁에서 쫓겨나 신혈사(神穴寺·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을 때 꿈속에서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다. 술사에게 뜻을 묻자 “닭 우는 소리는 고귀위요,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이니, 이는 즉위할 징조”라고 답했다는 것이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성계의 고귀위 일화의 출처를 짐작하게 해 주는 사례다.
이런 징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국의 물적 토대가 무엇이었느냐다. 이성계는 즉위 후 4대조인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부터 목조(穆祖)로 추존했다. 제후는 4대 조를 추존한다는 원칙 때문만이 아니라 이안사가 건국의 기틀을 놓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3장은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용비어천가' 1장이 “해동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인데, 육룡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뜻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안사는 전주에 있을 때 관기(官妓)를 두고 산성별감과 다툼이 생겨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경흥 동쪽 30리의 오동(斡東·현재의 중국 옌지(延吉) 부근)으로 이주했다.
이안사는 여기에서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지원을 받아 원나라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된다.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것이 개국의 터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 4장은 이에 대해 “야인(野人) 사이에 가사 야인이 가래거늘(해롭게 함) 덕원(德源) 옮으심도 하늘 뜻이시니…”라고 묘사해 이안사의 잦은 이주가 건국의 천명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최근 이성계 가문이 동북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던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옷치긴 가문의 통치지역 내에 있던 고려계 몽골 군벌이라고 보는 논문이 나왔듯이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이안사의 원나라 관직은 원 세조 12년(1275·충렬왕 1년)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이어받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협력하기도 하는 이행리는 '고려사절요'충렬왕 7년(1281)조에 따르면 개경에 와서 충렬왕을 알현했다고 전한다. 이행리가 공손한 것을 본 충렬왕이 “경은 본래 사족(士族) 집안이니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李子春:환조)에게는 형 자흥(子興)이 있었으므로 집안의 종통을 잇기는 어려웠다.
이행리의 아들 이춘(李椿:도조)이 원 순제 지정(至正) 2년(1342) 7월에 죽고 장남 자흥도 그해 9월 죽자 원나라는 자흥의 아들 천주(天柱)가 어리다는 이유로 임시로 숙부 이자춘에게 관직을 이어받게 했다. 이때 이춘의 계처(繼妻·아내가 죽은 후 맞은 아내)인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가 이자춘의 관직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데 이자춘이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종통의 지위를 굳혔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8장에서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사 제명(帝命:원 황제의 명)이 나리시어 성자(聖子)를 내셨나이다”며 장자(長子)가 아닌 이자춘이 종통을 이은 것을 하늘의 간택과 원나라 황제의 명령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천호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자춘은 곧 원나라의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 요양성(遼陽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해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호적)를 작성하면서 원주민을 우대하자 이주민 세력인 이자춘이 반발한 것이다.
중원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원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민왕은 북방 강역을 되찾으려는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을 일으키는데 이자춘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부원세력이었던 이성계 일가는 친고려세력으로 말을 갈아탄다.
공민왕 4년(1355) 이자춘이 입조했을 때 공민왕은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몸은 비록 밖(원나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우리 왕실에 있었으므로 우리 할아버지(祖考)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히 여겼다”며 “내가 너를 성취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
이듬해(1356) 이자춘이 다시 입조하자 공민왕은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유인우(柳仁雨)가 동북면(함경도 일대)을 공격할 때 병마판관 정신계(丁臣桂)를 이자춘에게 보내 내응할 것을 종용했다. 이때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해 고려가 99년 만에 동북면 지역을 회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부원세력이란 꼬리표를 떼게 된다.
공민왕은 재위 5년(1356) 이자춘을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으로 올리고 집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공민왕 앞에서 격구(擊毬)를 하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활약을 펼쳤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만 21세의 격구 천재가 36년 후 고려를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전쟁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이 되다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전통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한다. 이성계 개국군주 태조② 天命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근본적 힘은 군사력에 있었다. 그의 군사력은 원나라 지방 세력의 일부였다. 원나라가 약해지면서 그의 부친 이자춘은 집안의 군사력을 고려에 소속시켰다. 이성계는 탁월한 무력으로 변방을 뛰어넘어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성계 자신부터 힘이 장사였다. 함흥에서 큰 소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데 불을 붙여 던져도 말리지 못했으나 이성계가 양 손으로 두 소를 붙드니 더 이상 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전할 정도다.
삼국사기는 활 잘 쏘는 사람을 부여말로 주몽이라고 했다는데, 이성계가 바로 고려 말의 주몽이었다. 우왕 3년(1377) 경상도 원수(元帥) 우인열(禹仁烈)이 이성계와 서청(西廳)에 마주 앉았을 때 쥐 세 마리가 처마를 타고 달아났다. 이성계가 아이에게 활과 고도리(高刀里:작은 새를 잡는 데 쓰는 살) 세 개를 가져오게 하고는 “맞히기만 하고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나온 쥐를 쏘니 화살과 함께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다른 두 마리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가 태조실록 총서에 전한다.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첫 전공은 부친 이자춘의 사망 이듬해인 공민왕 10년(1361) 8월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으로 15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 도망간 박의 일당을 잡아 죽였다.
이 사건 이후 이성계는 북쪽의 홍건적(紅巾賊)과 남쪽의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국적 무명(武名)을 얻고 민심을 획득해간다. 하북성(河北省)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인 홍건적이 요동으로 진출했다가 원나라에 쫓겨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공민왕 10년(1361) 10월이었다. 반성(潘誠)·관선생(關先生)·사유(沙劉) 등이 이끄는 홍건적 10만 명은 삽시간에 삭주(朔州)·이성(泥城) 등을 함락시키고 개경(開京)까지 위협했다. 공민왕이 복주(福州:경북 안동)까지 파천하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고려에서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삼고 각 도에서 20만 명을 징발해 이듬해 1월 개경에서 관선생과 사유 등을 잡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사절요는 이때 이성계가 20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섰다고 전한다.
이때만 해도 이성계는 여러 무장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공민왕 11년(1362) 2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침략했을 때에야 이성계는 비로소 독자적 무명을 떨친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심양(瀋陽)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을 자칭하던 나하추는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 때 쫓겨난 원나라 쌍성총관 조소생(趙小生)의 부추김을 받고 고려를 침략했다.
공민왕 5년의 북강회수운동은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에 가담한 것이 결정적 전기가 되었으므로 나하추의 침략은 이성계 집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공민왕은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격퇴하라고 명했다.
세종 때 편찬한 고려사 등이 이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것은 이성계가 독자적 무명(武名)을 얻은 계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하추의 부하 중에 갑옷과 투구는 물론 얼굴을 가리는 면구(面具)와 턱을 가리는 이갑(<9824>甲)까지 두른 장수가 있었다. 이성계는 먼저 말을 쏴서 그 장수가 말고삐를 당기느라 입을 벌리게 만들고 입을 쏴 죽였다는 내용도 있다.
정도전이 태조 2년(1393) 납씨곡(納氏曲:납씨가)을 지어 “공을 이룸이 이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년만년 전하리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전투는 조선 개창의 한 명분이 되었다.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나하추를 격퇴한) 그 다음 해인 계묘년(공민왕 12)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해 장(將)·상(相)에 이르게 되었다”며 이성계가 이 전투를 계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계는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에서 왜적을 물리치면서 남방 백성들에게까지 무명(武名)을 드리우게 된다. 이때도 이성계의 신궁(神弓)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자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삼아 보냈는데,
이때 적장 중에 아지발도(阿只拔都)라는 백마 탄 소년장수가 있었다. 그 역시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렸으나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 의형제 퉁두란(古論豆蘭帖木兒:이지란)에게 “내가 투구 꼭지를 맞춰 떨어뜨리면 네가 쏘라”고 말한 후 투구를 떨어뜨리자 퉁두란이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일화는 퉁두란으로 대표되는 여진족 부대가 이성계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음을 말해준다. 이성계 부대는 기마병 위주의 여진족·몽골족 등이 포함된 다민족 혼성부대였기에 강했던 것이다.
훗날인 선조 8년(1575)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치계(馳啓)로 전투 현장인 운봉 동쪽 16리 지점에 황산대첩비를 세우는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은 비문에서 “성스러운 무력의 크고 맑은 공이 높고도 넓으셔서 만민이 영원히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이때의 승전으로 만민이 의지하는 천명이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황산대첩비를 읽고서(讀荒山大捷碑)라는 시에서 “이 거사로 한밤중 골짝에 있던 배 이미 자리 옮겨/위화도 회군할 때를 기다릴 것도 없었도다(此擧夜壑舟已徙/不待威化回軍時)”라고 노래하고, 황산대첩비 발문에서는 “신무(神武)로써 승리를 거둔 것이지 인력(人力)이 아니다”라며 천명의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권근도 건원릉 신도비명에서 “(개국은) 모두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늘이 천명을 내렸을지라도 이를 현실로 만드는 능력이 없다면 한갓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무공을 세운 장수마다 모두 천명이 내렸다고 주장한다면 나라는 안정될 틈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운봉전투는 왜구의 주력이 이미 진포 전투에서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화포 공격에 무너지고 남은 패잔병에 불과했을 뿐이다.
운봉전투로 이성계의 무명이 더욱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이름을 가진 인물은 많았다. 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건원릉(健元陵)조는 “(이성계가)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으니 이 자를 가지고 정국(正國)할 자는 공(公)이 아니면 누구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태조실록에도 실린 이 글은 역으로 이성계 외에도 시중 경복흥과 최영이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개국 시조가 된 것은 이성계에게만 천명이 내렸기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경복흥과 최영은 고려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성계가 공민왕 5년(1356) 부친 이자춘을 따라 처음 개경에 갔을 때는 만 21세 때였다. 그 전까지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원·명(元明) 교체기라는 혼란기 속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허약함을 보았고,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군사는 사실상 사병에 가까웠다. 그러나 군사력이 있다고 500년 고려 왕업을 목적(牧笛)에 부치고 새 나라를 개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국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고, 그 이념에 바탕한 새 정책이 필요했다. 이는 말 위의 사람인 이성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재의 지식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한 불우한 지식인의 머리에 이런 이념과 정책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풍운아 봉화정씨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 부록은 우왕 9년(1383) 가을 정도전이 함경도 함주(咸州)에서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비밀히 말했다고 전한다. 이성계가 “무엇을 이름인가?”라고 묻자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라고 답했지만 그 의미가 개국을 뜻한다는 것은 이심정심(李心鄭心)으로 서로 알아차렸다.
이때 정도전이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인간을 굽어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人間俯仰便陳)”라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와 삼봉집등은 “태조에게 천명이 있음”을 빗긴 말이었다고 전한다.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니 작은 일에 구애받지 말고 대사를 이루라는 뜻이리라. 이 만남이 사실상 조선 개국을 결정지은 계기였다.
이성계의 군사력은 정도전의 이념과 결합하면서 비로소 혁명 무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무력으로 가능하지만 새 체제를 여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불 가능하다. 새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새 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사상은 관념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개국군주 태조③ 과전법 실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갈등이 발생했다. 그간 국사교과서는 철령위를 함경도 원산만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최근 중국 사서(史書)를 근거로 ‘철령위가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복기대,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실제로 명사(明史)오행지(五行志)는 “요동 철령위”라고 표기하고 있고같은 명사(明史)이원명(李原名)열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는 다 고려의 옛 영토이니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이 “그 몇 주는 다 원(元)의 판도에 들어가 있어서 요에 속해 있고〔屬於遼〕, 고려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철령위를 이미 설치했는데, 다시 청한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반대했다.明史李原名 列傳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의 갈등이 철령위 설치로 나타난 것이다
철령이 원산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명나라에서 요동 반환을 거부하자 우왕은 무력 점령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치는 것,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들여 원정하는 틈을 타 왜적이 활개칠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역병을 앓을 것.” 이성계의 원정불가론이 우왕과 최영에 의해 거부되면서 요동정벌군이 꾸려졌다.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도통사인데, 고려사절요는 좌우군이 모두 3만8830명에 심부름꾼(<5094>)이 1만1600명이라고 적고 있다.
태조실록은 “모두 5만이었으나 10만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요동정벌군은 최영이 직접 지휘하려 했으나 우왕이 “경이 가면 나는 누구와 정사를 의논하겠는가?”라며 말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요동정벌군은 그해 5월 위화도에 진을 쳤는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위화도 회군에 대해 태조실록의 남은(南誾) 졸기(7년 8월 26일)는 “무진년(1388)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에 이르러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회군을 건의했다”면서 남은과 조인옥의 아이디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의령남씨 남은· 한양조씨 조인옥은 모두 봉화정씨 정도전과 같은 정치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사주일 가능성이 높다.
드디어 정벌군은 말머리를 돌렸고 당황한 우왕은 자주(慈州)· 이성(泥城)으로 말을 달려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마음대로 회군했는데 너희 대·소 군민들이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회군했던 여러 장수들이 급히 우왕을 추격하자고 요청하자 이성계는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고 거절하고, 군사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 우왕의 가마)를 범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경계할 정도로 대세는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전 교부령 윤소종(尹紹宗)이 이성계에게 곽광전(<970D>光傳)을 바쳤는데,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한(漢)나라 대신이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우왕을 폐하고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고 회유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이성계는 우왕의 아들이 아닌 왕씨를 세우려 했으나 조민수가 “마땅히 전왕(우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명유(名儒) 한산이씨 이색(李穡)의 주장을 명분 삼아 우왕의 아들인 9세의 창왕을 세웠다.
회군세력 사이 권력투쟁의 서전은 조민수의 승리였다. 하지만 회군 정국은 정도전과 조준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이 정도전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다. 고려사 ‘신돈(辛旽)’조는 “요사이 국가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권세 있는 자들이 모두 빼앗고 노비로 삼았다. … 그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질병도 그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을 정도로 권세가의 불법적 사전(私田) 확장이 큰 문제였다.
고려사 ‘식화(食貨)’조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어야 한다”고 적고 있고,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고도 적고 있다.
농업국가에서 자영농의 몰락은 망국(亡國)조짐이었다. 충선왕을 비롯해 공민왕·우왕 등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등을 설치해 사전 개혁에 나선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막대한 사전의 소유자들이 모두 권력자들이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서 주도하는 사전 개혁은 실패했다. 우왕의 요동정벌론은 권력가들의 사전에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에서 요동이라는 새 땅을 얻어 농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조준은 1388년 7월 “전제(田制: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는 것이…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회군 정국을 토지개혁 정국으로 바꾸었다. 조준은 “백성이 사전(私田)의 도조(賭租: 소작료)를 낼 때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사전 혁파를 주장했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따라 글을 올려 사전(私田) 개혁을 청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토지개혁 정국이 잘 짜인 개국 프로그램임을 말해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하(殿下: 태조)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 개연히 사전(私田) 혁파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백성 수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計民授田)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었다”라고 말한 대로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정책이 개국의 명분이었다.
회군 세력이 사전 혁파를 들고 나오자 권세가들의 침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천명의 소재가 확인됐다. 반면 이성계의 경쟁자였던 창녕조씨 조민수는 “사전(私田)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평양조씨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는 <ec2e></ec2e>고려사절요의 기사처럼 사전 개혁에 저항하다가 제거되었다.
이런 와중에 철원최씨 최영의 생질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여주로 이배(移配)된 우왕을 몰래 만나 “역사(力士) 한 사람을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을 제거하라”는 지령과 함께 칼 한 자루를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와 봉화정씨 정도전 등은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가왕(假王: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왕(眞王)을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도 쫓아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세웠다.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영산신씨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조선 개국 뒤에도 계속돼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기록했다. 물론 이는 새 나라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불과하지만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식화지’는 “공양왕 2년(1391) 9월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公私田籍]를 개경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라고 전하고 있다. 모든 토지 문서를 불사른 토대 위에서 공양왕 3년(1391) 5월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이 반포되었다.
원래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제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는 계구수전(計口收田)이었으나 고려사 조준 열전이 “논의에 참여한 자 53인 중에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19인에 불과했다. 반대하는 자는 대개가 권문세족 자제들이었다”라는 표현대로 권세가들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직역(職域)이 있는 자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부전(賦典)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일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 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자평한 대로 과전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천명의 소재가 확인되고 새 나라 개창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베갯머리 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새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왕조의 안정적 유지라는 큰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새 왕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개국 시조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개국에 성공했지만 세자 책봉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부인 강씨의 입김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새 왕조의 앞날에 큰 부담을 주었다.
개국군주 태조④ 역성혁명
의령남씨 남은(南誾)과 한양조씨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태조실록은 남은 등이 돌아와 “전하(殿下:이방원)에게 알리니,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라고 처음에는 이방원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고 전한다.
왕(王)씨가 종성(宗姓)인 나라에서 이(李)씨가 왕이 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봉화정씨 정도전· 평양조씨 조준 등이 기획한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태조실록에서 “이때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서로 다투어 추대하려고 했다”면서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소속되었는데, 왜 빨리 나아가기를 권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천명의 증거인 인심이 토지개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태조실록이 이에 드디어 “전하(이방원)가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이방원은 역성혁명파와 손잡고 부왕을 개국 시조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자신이 앞장서서 고려를 무너뜨리기보다 백관의 추대를 받아 할 수 없이 왕위에 오른다는 모양새를 원했다.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자 태조실록은 어떤 사람이 지리산에서 얻은 이서(異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三韓) 강토를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의(非衣)·주초(走肖)·삼전삼읍(三奠三邑)”이라는 등의 말이 써 있었다고 전한다. 목자는 이(李)씨를 뜻하고, 비의는 경산배씨 배극렴(裵克廉), 주초는 평양조씨 조준(趙浚), 삼전삼읍은 봉화정씨 정도전(鄭道傳)을 뜻하는 것처럼 백관의 추대로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이양 받는 선양(禪讓) 형식을 원했던 것이다.
그해 7월 12일 시중 배극렴은 왕대비(王大妃:공민왕 부인)에게 “지금 왕(공양왕)이 혼암해 군주의 도리를 이미 잃어서 인심이 이미 떠나갔다”면서 폐위를 주청했고, 형식상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했다.
공양왕은 ‘내가 본래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강제로 세웠다’면서 “내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에 어두우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豈無<5FE4>臣下之情乎)’라는태조실록의 토로에서 허수아비 군주의 비애가 묻어난다. 이렇게 공양왕(恭讓王)은 이름대로 공(恭)손히 왕위를 양(讓)보하고 원주로 갔다.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정도전 등 50여 명의 대소 신료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사저로 나갔다. 이때 대사헌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을 띠자 남은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방원이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말릴 정도로 이성계 추대는 대세였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해 질 무렵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황망하여 거조를 잃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즉위 간청을 여러 번 사양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17일 드디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으로 나가 왕위에 올랐다. 7월 28일에야 즉위 교서가 반포되었는데,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매도해 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고는,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라고 찬탈(簒奪)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유신(儒臣)들은 이것이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맞서 싸우는 대신 개풍군 광덕면의 광덕산 두문동(杜門洞) 골짜기에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군사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민심이 돌아서 함께 싸울 세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성계가 지녔던 무장답지 않은 처세가 더해졌다.
동각잡기<는 이성계가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해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고,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소속되고 싶어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같은 책은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가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추는 처신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고, 정도전·조준 등의 개국 프로그램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왕조 백관(百官)들의 추대 형식으로 새 왕조 개창에 성공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양 형식으로 개창되었지만 불안한 신생 왕조일 수밖에 없었다.
신생 왕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속성 확보였고, 그 핵심은 세자 책봉이었다. 그래서 개국 공신들은 개국 직후부터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러나 개국 공신들과 이성계의 생각이 달랐다. 태조실록은 “처음에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세자를 세우고자 청하면서 나이와 공으로써 세우려고 하니 임금이 곡산강씨(康氏:신덕왕후)를 중하게 여겨 방번(芳蕃)에게 뜻을 두었다(1년 8월 20일)”라고 전하고 있다. 강씨 소생의 방번과 방석(芳碩)은 나이로 보나 공으로 보나 대상이 아니었지만 베개송사에 넘어간 이성계는 곡산강씨 소생의 장남 방번(만 11세)에게 뜻을 두었다. 태종실록<은 배극렴이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라고 말하니 ‘태조가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태조가 조준에게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때가 평안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하오니 원하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답했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태조가 종이와 붓을 조준에게 주면서 이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시키니 조준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않았다.(태종실록5년 6월 27일)”
태조실록은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고 무상(無狀)하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기고 사적으로 서로 ‘만약 강씨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막내가 낫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곡산강씨 소생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과 방번만은 안 된다는 공신들의 최대공약수가 방석으로 낙착되어 8월 20일 방석(만 10세)이 세자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향처(鄕妻:고향에서 얻은 부인 한씨) 소생의 장남 방우(芳雨)의 나이 만38세였으며, 공신들과 부친 추대 계획을 세웠으며 개국 석 달 전 연일정씨 정몽주를 격살한 공이 있는 5남 이방원의 나이 만25세였다. 게다가 방원은 물론 차자(次子) 방과(芳果:정종), 사자(四子) 방간(芳幹)을 비롯해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대부분 사병을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상식을 무시한 세자 책봉이 화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무시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는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새 국호를 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성계가 고려 충숙왕 4년(1335) 10월 11일 태어난 곳이 화령부(和寧府:영흥)였다. 명나라는 태조 2년(1393) 2월 “동이(東夷)의 국호 중에는 조선이 아름답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조선을 선택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바로 그들”이라고 고조선을 이은 국호로 생각했다.
새 왕조 개창 직후 이성계가 가장 걱정한 것은 왕씨들의 부활이었다. 이성계 즉위 사흘 후인 7월 20일 왕씨들을 지방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주청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부자와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 부자 등만 전조(前朝:고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외하고 나머지는 강화도와 거제도에 안치시켰다.
그러던 태조 3년(1394) 동래현감 김가행(金可行) 등이 밀양의 맹인 복자(卜者) 이흥무(李興茂)에게 “전조(前朝) 공양왕과 우리 주상 중에 누가 명운(命運)이 나은가? 또 왕씨 중에는 누가 명운이 귀한가?”라고 물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도 새 왕조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하다는 증거였다. 고려는 무려 474년을 버틴 왕조였다. 결국 이흥무가 명운이 귀하다고 말했던 왕화(王和)와 왕거(王등의 목이 베어졌고, 나아가 공양왕과 두 아들도 교살(絞殺)당했다.
이성계는 겉으로는 왕씨에게 유화책을 쓰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왕씨들을 죽였다.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섬으로 보내준다고 왕씨들을 배에 태운 후 뱃사람에게 구멍을 내도록 시켜 빠져 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왕씨들은 ‘전(全)’씨나 ‘전(田)’씨, ‘옥(玉)’씨 등 왕(王)자가 들어가는 성으로 바꾸거나 ‘용(龍)’씨로 변성(變姓)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작 걱정해야 할 대상은 왕씨들이 아니라 한씨 소생의 자기 자식들이었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자식들이 부왕에게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는 해 이성계 “밝은 달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최고 지도자 자리는 일체의 사심이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순간 공적인 가치가 추락하면서 조직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성계는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적인 사연으로 후계자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왕조에 의해 거부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개국군주 태조⑤ 불우한 말년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사불가론(四不可論)’ 중에 첫 번째가 “작은 것이 큰 것을 거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눈에 보이는 곳을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초(楚)·월(越)·강남인들 어찌 용납 않으랴[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라는 이성계의 시구는 그 야망의 크기를 보여준다.
스물한 살 때까지 원나라 소속이었던 이성계는 본질적으로 대륙의 사람이었고, 정도전도 중원을 차지하려는 웅지를 품고 있던 전략가였다.
태조 1년(1392) 10월 정도전은 신왕조 창업을 알리는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흠차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를 보내 “그 마음은 우리 변방의 장수[邊將]를 꾀는 데 있었다”면서 정도전이 요동을 오갈 때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주원장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라고까지 협박했다. 드디어 주원장은 태조 5년(1396) 초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 국서)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다”면서 사신들을 억류하면서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이 표전문 작성자는 대사성 정탁(鄭琢)이라고 거부하자 주원장은 “봉화정씨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라는 국서를 보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태조에게) 옛일에 외이(外夷: 이민족)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을 역사로 논(論)하고…또 도참설(圖讖說)을 인용해 그 말에 맞추었다(5년 6월 27일)”라고 전하는 것처럼 이성계와 정도전은 실제 중원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벌을 단행하면 명과 조선 중 하나는 멸망하는 전면전이 될 것이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남은과 깊게 교결하고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도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 고구려 시조)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는 때(5년 6월 27일)”」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위화도 회군 때와는 달리 철저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태조 6년(1397) 11월 명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 결심을 더욱 굳혔다.
“봉화정씨 정도전과 의령남씨 남은(南誾)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 공격을 권고했기에 진도(陣圖)를 급하게 익혔다(태조실록7년 8월 9일)”는 기록대로 거국적인 정벌 준비 체제에 들어갔다. 진도를 익힌다는 것은 개국과정에서 발생한 사병들을 공적 군사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자신을 제거하려는 철원최씨 최영 등의 음모로 생각한 것처럼 사병을 가진 왕자들도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정도전의 계략으로 보았다.
왕자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시키든지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14일 태조가 병석에 누운 것이 전기였다. 이방원(태종)은 8월 26일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의 요동 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경순공주(敬順公主)의 남편 이제(李濟)마저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혈육과 공신들을 죽인 방원에게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방원이 장악한 상태였다. 방원은 부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생존 형제 중 맏이인 방과(芳果: 정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
동각잡기에서 쿠데타 당일 방과는 “기도할 일이 있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잤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성을 넘어 독음(禿音)마을 집에 숨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태조의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다가 쿠데타가 발생하자 방원 편에 서지 않고 도주했던 인물이었다. 태조는 그해 9월 5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식물 임금이었으나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방과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위안 삼았다.
태조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 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 탄식했으나 자신의 무원칙한 후계자 결정이 비극의 뿌리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성취 자체를 회의했다. 이성계는 정종 1년(1399) 9월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에게 여승이 되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종실록은 “머리 깎을 때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에는 동복(同腹) 형제들끼리의 칼부림인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성계는 승자인 세자 방원에게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꾸짖었다.
정종 2년(1400) 7월 세자 방원이 태상왕(太上王)이란 존호를 올려 달래려고 하자 이성계는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내응한 조온(趙溫)·조영무(趙英茂)·이무(李茂)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성계가 “너희들은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덕으로 여기고 대의(大義)는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세자 방원은 조온을 완산부, 이무를 강릉, 조영무를 곡산으로 귀양 보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려는 이성계에 대해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등은 아무 죄가 없다’고 반대했으나 이성계가 “군신의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이익만 구하는 사람을 믿고 맡기면, 대위(大位: 왕위)를 누가 엿보지 않겠는가? 조선의 사직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정종실록 2년 7월 2일)”라고 일갈했다. 방원이 조온 등을 귀양 보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이성계는 8월 21일 정종과 세자 방원이 헌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연회 때 이성계는 “밝은 달이 발[簾]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明月滿簾吾獨]”라는 시구를 짓고는 방원에게 “네가 비록 급제했지만 이런 시구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산하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뇨[山河依舊人何在]”란 시구를 짓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남은 등의 개국 동지들을 회고하는 시구였다.
정종 2년(1400) 10월 11일 이성계의 만 예순다섯 탄일에 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는 큰 선물을 주었다. 나흘 후 이성계가 신암사(神巖寺)에서 방석과 이제 등의 명복을 비는 큰 불사를 지낼 때 정종 부인 덕비(德妃)와 방원 부인 정빈(貞嬪)이 참석할 정도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다시 냉전 기류로 바뀌었다.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2월 덕수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고 또 직접 태평관으로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방원을 증오하지만 자신이 세운 왕조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딜레마가 이성계에게 있었다. 태종은 황해도 평주 온천까지 직접 가서 이성계를 문안하고 이성계의 탄일에는 죄수를 석방하는 등 부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12월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직접 가담할 정도로 태종에 대한 증오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발버둥쳐도 태종의 왕권은 확고했고, 이성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재위 6년(1406) 8월 전위(傳位) 소동을 벌였을 때 이성계는 “나라를 전하는 것은 국가 대사인데 내게 고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태종실록6년 8월 30일)”고 말할 정도로 태종의 왕권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던 태종 8년(1408) 1월 20일 태조는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렸다. 태종은 죄수를 방면하고 산천에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 쾌차를 빌었으나 태조는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원나라에서 태어나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했다가 자신이 세운 왕조에서 쫓겨난 일흔셋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끝을 맺은 것이다. 원칙을 무시한 후사 책봉이 낳은 불우한 말년이었다.
<조선 왕조>
조선왕조의 계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세종 등의 이름은 왕의 본명이 아니고 왕이 죽은 다음에 후대가 붙여주는 묘호(廟號)입니다. 묘호에 조(祖)와 종(宗)을 붙이는 방법은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태조실록에서 정하였는데,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하는 등 큰 업적이 있는 왕에게는 조(祖)를 붙이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하게한 왕에게는 종(宗)을 붙입니다. 단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런저런 사유로 왕이었지만 집권 도중에 권력에서 실격한 왕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조선왕조가 27대를 이어오면서 총 4번의 구테타가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무인정사(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스스로 태종에 즉위하였고, 이유(수양대군)는 단종을 죽이고 세조가 되었으며, 이융(연산군)은 지나친 폭정 때문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 당하고, 이흔(광해군) 사림들이 인조반정이라는 역모를 일으켜서 폐위됩니다. 총 4회의 구테타 중에서 왕자 스스로가 주도한 사례는 태종과 세조이며, 사림이 주도한 역모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인데, 왕자가 일으킨 구테타는 강력한 왕권확립을 이루었고, 사림이 일으킨 쿠테타는 관료 중심의 권력을 형성하였으나, 당쟁과 특정 가문의 권력 집중 현상을 가져와서 수많은 당쟁과 정치적 숙청이 시작됩니다. 참고로 기타 명칭에 대하여 알아보고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대원군(大院君) : 임금의 아버지 대군(大君) : 정궁이 낳은 아들 군((君) : 후궁이 낳은 아들 공주(公主) : 정궁이 낳은 딸 옹주(翁主) : 후궁이 낳은 딸 [출처] 개국군주 :1 태조 이성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