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입문 용어 정리
■ 진리표준논쟁
마오쩌둥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마오의 후계자였던 보수파 화궈펑(華國鋒)과 개혁파의 대표주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벌였던 논쟁을 말한다.
1 화궈평은 마오쩌둥이 결정한 정책은 옹호되어야 하고 그가 내린 지시는 계속 준수되어야 한다는 양개범시론 (兩個凡是論)을 내세우면서 마오의 사상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주장하고,
2 이에 반해 덩샤오핑은 마오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이기 때문에 마오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논박하였다. 그는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상해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개방 정책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78년 진리표준논쟁과 그 정치적 의의
■ 농가생산청부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
농가생산청부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는 1980년대 초반 농촌 및 농업부문의 개혁을 특징짓는 제도로써 농촌 집체 소유의 토지를 개별 농가에 위탁하여 생산, 경영하게 하는 제도이다. 농가에게 생산만을 위탁하는 포산도호(包産到戶) 방식과 토지경영까지 위탁하는 포간도호(包幹到戶) 방식이 있었다. 농민들은 정부가 설정한 최소 생산물을 제외하고 남은 생산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처분할 수 있게 되어서 개혁개방 초기 농업생산력 향상과 농가 소득 증가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방식은 1978년 안후이성 샤오강촌(小岗村) 농민들이 비밀리에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농촌 저변에서 유사한 방식이 확산하고 생산량이 증대하자 정부가 이를 사후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 개혁개방
덩샤오핑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 전개했던 일련의 개혁적 조치를 통칭하는 말이다. 농촌과 도시의 경제 및 사회체제를 변화시켰던 ‘개혁’과 해외의 자본과 기술의 유입을 도모하고 자국 경제를 대외수출 지향적인 체제로 변모시키고자 했던 ‘개방’을 함께 일컫는다. 개혁개방 정책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으며, 구체적인 방침은 이후 각 부문의 상황에 따라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제시되었다.
1 점진주의 : 摸着石头过河。
2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은 매우 조심스럽고 점진적인 과정
3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적절한 설명방식이 아니다.
■ 경제특구
중국의 경제특구는 저렴한 노동력을 비교우위로 삼아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통해 수출가공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시도에서 탄생했다. 1980년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을 시작으로 1988년 하이난이 추가되었다. 경제특구는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실험이자, 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과 인접한 대외개방의 창구로서, 그 자체로 개혁개방을 상징하게 되었다.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동남 연해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4년 연해 지역의 14개 항구도시로 개방이 확대되었다.
CHINA REPORT ⑤ 중국경제특구
2016.10.25 중국경제특구의 태동 경제특구는 핵심적으로 중국 개혁개방 정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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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묘백묘론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용어이다.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이 결정된 후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 방문에서 돌아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不管黑猫白猫, 捉到老鼠, 就是好猫)”고 외쳤다. 이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계획경제이든 상품경제이든 상관없이 채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흑묘백묘론은 “공동 부유의 원칙하에서, 일부 사람들, 일부 지역부터 부유해지라”라는 선부론(先富論)과 더불어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인 개혁개방 사상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 사회주의 초급계론
개혁개방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논리 중의 하나이다. 개혁개방에 따라 시장과 상품경제의 확산이 본격화되면서 상품·시장 요소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존재함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덩샤오핑은 아직 사회주의가 초급단계, 저발전 단계에 있으므로 낙후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생산 관계 중심주의’에 대비하여 ‘생산력 중심주의’로 볼 수 있으며, 이후 장쩌민 시대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이론적 바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향진기업
1980년대 초반 가정연산승포책임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가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후 농업생산량이 증가하고 지역 시장이 발전한 결과, 농촌에는 소규모 경공업 위주의 농촌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는 초기 자본이 마련되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중반부터 향진정부의 주도 하에 해당 지역의 농민 노동력과 농업생산물을 활용하는 소규모 기업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를 ‘향진 기업’이라 일컫는다. 향진기업 대부분은 집체소유제 형태를 띠었으며, 1992년 9월까지 전국적으로 약 550만 개가 설립되었다. 연해 지역 및 대도시에 인접한 농촌지역에서는 향진산업화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반면, 내륙지역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한다.
■ 개체호
개체호는 중국 도시지역에서 소규모 상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7명 이하의 자영업체를 일컫는다. 이러한 개체호는 개혁개방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불리며 비판의 대상이었다. 1978년 개혁개방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직장을 안배 받지 못한 사 람들이 자영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개체호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국가는 1984년 이들 개체호를 합법화시키면서 7인 이하의 종업원들만 고용하도록 규정하였다. 개체호 활동은 주로 국영기업 등 대기업이 참여하지 않는 소규모 제조업, 판매업, 서비스업 등에 집중되었다.
■ 사영기업
1980년대 중후반 상품경제가 확산하면서 개체호 활동도 번성하였지만, 7인 이하의 종업원을 고용해야 하는 규정이 기업 발전에 제도적인 장애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7년 에 국가는 비(非) 국영기업이면서도 8인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 범주를 마련하여 제도적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따라 신설된 기업범주가 사영기업이다. 사영기업은 이후 1인이 투자·경영하는 독자 기업, 2인 이상이 투자·경영하는 동업기업(合伙企业), 주주의 출자액 에 따라 책임을 구분하는 ‘유한책임공사’로 세분화한다.
■ 천안문 사건
1989년 6월 초 정치 개혁을 주장하며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 민들을 인민해방군이 탱크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을 일컫는다. 4월 중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의 추도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기숙사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는 것으 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 민주화와 사회 개혁 등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대되었다. 학생 시위는 노동자와 공무원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이는 당시 빈부격차, 물가상승,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 개혁개방에 따른 부작용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 정부는 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3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국제적십자협회는 사망자의 수가 2,000여 명에 이른다고 발표한 바 있다. ‘6.4 운동’, ‘천안문 사태’, ‘천안문 민주화운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위로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对策)
중국의 중앙-지방 관계를 논의 할 때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개혁개방 이후 다양한 권한이 지방과 민간으로 이양되었는데, 결과적 으로는 각 지방정부가 자기 지역의 발전을 위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 ‘지방 발전주의’ 또는 ‘지역 이기주의’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지방정부는 자기 지역의 이익을 위해 중앙정부의 정책을 활용 하거나 무시하는 전략으로 대처했다. 즉 때로는 중앙의 정책에 반대되는 지방 차원의 대책을 수립 함으로써 자기 지역의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지방정부의 활동 양상을 지적하는 말이다.
■ 남순강화
1992년 1월 덩샤오핑이 동남부 해안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을 지속해 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언론을 통해 재천명한 정치적 행보를 말한다. 이 일련의 연설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문제는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잣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삼개유리우(三個有利于), 즉 개혁개방이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 중국의 종합적인 국력 강화, 그리고 인민들의 생활수준제고라는 목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을 지속해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공표하였다.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주춤했던 개혁개방은 남순강화를 계기로 다시 광범위하게 추진되었으며 그 이후 중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 하해(下海)
시민들이 단위제도 하에서의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을 통해 비즈니스, 즉 개인 사업에 뛰어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바다에 뛰어들어 살아남고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창업을 바다에 뛰어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크게 두 차례에 걸친 하해(下海)의 흐름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1980년대 중반 개체호(個體戶)가 발전하던 시기에, 두 번째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1990년대 중반이다. 남순강화 이후의 하해 현상은 그 규모와 열기 등 모든 면에서 1980년대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였다.
◎ 하방(下放)은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혁명세력 또는 주자파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정치/행정 일선에서 축출하고 시골에서 노동을 통해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일종의 숙청 방식 이다. 하향(下鄕)은 문화대혁명 시기 도시의 젊은이들(知靑世代)을 농촌과 산간벽지로 내려보낸 캠페인을 말한다. 하해(下海)는 개혁개방 이후, 특히 남순강화 이후의 창업 열기를 가리킨다. 하강(下岡) 은 ‘실업’을 의미한다.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은 1990년대의 경제개혁을 대표하는 논리이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은 다시 가속화되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은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제기되어 1993년 3월 29일 제8기 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에 명기됨으로써 중 국 경제체제개혁의 기본원리로서 확립되었다. 사회주의 틀 안에서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수단과 사상을 사실상 제한 없이 수용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 농민공
농촌 호구를 지니고 있으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일용직 등에 종사하 는 이주노동자를 통칭한다. 농민공들은 주로 도시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원만한 작동에 필수적이지만 힘들고 임금수준이 낮으며 노동환경이 열악한 직종에 종사한다. 도시 호구가 없으므 로 교육, 의료, 주택 등 도시의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없는데다 호구지를 이탈했다는 비합법적인 신분으로 인해 도시 내 고용 상태도 불안하지만, 농촌과 농업 상황이 열악하므로 도시에 잔류하고자 한다.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는 현상을 민공조(民工潮)라고 하는데, 1990년대 초중반 이후 도시 농민공의 숫자는 급속하게 그리고 지속해서 늘어났으며, 2013년 말 전국적으로 약 2억 7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 삼농(三農) 문제 : 2000년 후베이성 농촌의 당 간부가 지도부에 보낸 편지에서 “농민은 아주 고 달프고, 농촌은 매우 가난하며, 농업은 정말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라고 언급하며 농촌 상황이 매 우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 사용한 용어로서, 이후 중국의 열악한 농촌, 농업, 농민 상황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 역시 삼농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농민 생활을 향상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해오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농촌의 경제 사정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 하강(下岡)
문자 그대로는 “작업대에서 내려온다”라는 의미로, 중국의 특수한 ‘실업’ 형태를 가 리키는 용어이다. 중국은 단위(單位) 제도를 통해 도시의 노동 연령층에게 직장을 제공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장경제가 본격화 됨에 따라 중국 정부는 사영기업 및 외자기업들과의 시장 경쟁에서 밀려 점차 부실해지던 국유기업을 대상으로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며 상당수의 국유기업을 민영화하였다. 이렇게 국가가 국유기업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도시의 수많은 노동자가 직간접적인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를 ‘실업’ 대신 ‘하강’이라 칭하였다.
■ 외국인직접투자 FDI
자본은 그 출처를 기준으로 국내에서 조달될 때는 내국인 투자, 외국에서 조달되는 경우는 외국인 투자로 구별된다. 외국인 투자의 경우, 투자 목적에 따라 간접투자와 직접 투자로 구분되는데, 외국인간접투자는 이자수익이나 배당금을 목적으로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가리키며, 외국인직접투자는 실질적인 기업경영과 지배를 위한 투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외국인직 접투자(FDI)는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생산요소를 해외로 이전시켜 해외 현지의 생산요소와 결합하 여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기업 활동의 형태라 할 수 있다. FDI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 데, 현지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 브라운필드(brownfield) 방식과 현지에 완전히 새로운 생산 시설을 짓는 그린필드(greenfield) 방식이 있다. FDI를 유치하고자 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해외자본 도입에 따른 효과가 큰 그린필드 방식을 선호한다.
★ 중국이 WTO 가입에 적극적이었던 이유 :
1 FDI 유치 규모를 늘려 개혁개방을 가속함으로써 이른 시일 내에 GDP 규모를 안정적인 수준에 올려놓고자 했다.
2 가장 기본적인 경제 성장 전략은 수출중심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WTO 체제 외부에서는 관세 및 수출 품목 등의 측면에서 불리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3 WTO 가입을 통해 중국 기업과 금융의 국제신인도를 향상해서 해외 무대로 진출하고자 했다.
4 WTO 가입을 통해 각종 규정을 국제 수준에 맞춰나감으로써 국내의 각종 제도 개혁을 심화하고자 했다.
■ G2 국가
“Group of 2”의 약자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정치 및 경제 등의 측면에서 세계 양대 강국으로 간주하는 미국과 중국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1 경제학자 F. 버그스텐(Fred Bergsten)[2005] 2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 W. 페섹(William Pesek)[2006]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G2는 무 엇보다도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었음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와 유사 하게 세계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용어들도 있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4개국이 신흥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과 관련된 브릭스(BRICS)[2003], 21세기 세계 경제 발전을 중국과 인도가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과 관련된 친디아(Chindia)[2005], 그리고 미국과 중국 경제가 불가분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돌입했음을 지적하는 차이메리카(Chimerica)[2007]등이 그것이다.
■ 세계화(또는 전지구화 globalization)
세계화 (또는 전지구화 globalization)은 국제 사회에서 상호 의존성이 증가함에 따라 세계가 단일한 체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 민족국 가의 경계가 약화하고 세계사회가 경제를 중심으로 통합해 가는 현상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 되고, 그 속에서 상호의존성이 심화함을 뜻한다. 세계화의 과정은 경제적, 과학·기술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측면이 맞물려 있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유가 폭등을 경험한 이후 경제 분야에서 자본과 생산 설비의 전지구적 이동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세계 금융시장이 전산망으로 연결된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중국에서는 전구화(全球化)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1980년대에는 외국인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引进来” 방침이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引进来”와 더불어 중국 기업과 자본, 문화 등의 해외 진출을 추구하는 “走出去” 방침이 세계화 전략으로 거론되어오고 있다.
■ 대중화권(Greater China)
Greater China 또는 Greater China Region으로 불리며, 중국, 홍콩, 마카오, 타이완을 통합해서 부르는 용어이다. 주로 경제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사용되며,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용어는 1930년대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지칭하면서 등장했으나, 1970년대 말 이래 중국 대륙과 홍콩, 타이완의 경제적 연결이 긴밀해지면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 중국 대륙과 홍콩, 마카오, 타이완 간의 경제적인 연계와 통합 측면을 강조하면서 사용했다. 정치적인 통합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Chinese-Speaking World'나 ‘Sino phone World’라는 용어로 대 체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 정협(政协)
정협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의 약칭이다. 1949년 9월에 창립되어 중국 내 ‘협상 민주’를 실현하는 기구이다. 정협은 중국 내 여러 당파와의 협상 및 각계각층 의 의견을 조정하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삼고 있으며, 개혁개방으로 사회가 분화되고 다양한 이해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각종 정책도 복잡한 이해관계의 조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협은 상충하는 이익들을 조정하는 기능에 더욱 치중해 왔다.
■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와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연례회의를 가리키는 말 이다. 이 두 기관은 각각 중요한 사안에 대한 회의를 거쳐 법률을 제정하거나 [전국인대] 공산당의 주요 정책과 의결사항을 토론하기 위해 [정협] 매년 3월 초순에 베이징에서 전체 회의를 개최한다. 전년 11월에 개최되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의 결정 사항과 국가의 주요 정책이 약 10 여일간 개최되는 이 두 기관의 연례회의를 통해 구체화한다. 1998년 이후 이 두 회의는 각각 3월 3일과 3월 5일부터 개최되고 있다.
■ 국무원(国务院) : 중국 헌법상 국가권력의 최고 집행기구이자 행정기관으로서 중앙정부이다. 중 국 국무원은 총리 책임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와 위원회의 부장 및 주임 등으로 구성된다. 현재 국무원에는 25개의 부와 위원회, 16개의 직속 기구, 4개의 사무기구, 13개의 직속 사업 단위 등이 존재한다. 국무원은 공산당의 정책과 전국인대의 법과 규정 집행을 담당하며, 여러 행정 법규를 제정하는 입법적 기능도 동시에 담당한다. 중국공산당은 국무원을 비 롯해 각급 인민 정부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기에, 공산당-국가체제로 중국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 중공중앙(中共中央)
중국공산당의 중앙 조직을 통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중앙위원회를 가리 키는 약어이다. 중국공산당은 약 8,500만의 당원 중에서 약 2,500명 내외의 전국대표를 선출하고, 그중에서 다시 약 35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여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상급 조직 으로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 그리고 7∼9인의 최고지도자로 구성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두 고 있다. 공산당의 중요한 정책적 결정은 보통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결정되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중공중앙의 결정’으로 부른다.
■ 태자당파
대장정, 항일투쟁, 내전 및 건국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원로들과 당, 정, 군부의 고위층 관료들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어떤 조직을 통해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부모를 매개로 한 비공식적인 인맥 관계를 통해 얽혀 있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등의 분야에서 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최고 실권자 시진핑도 태자당파로 분류된다.
■ 상하이방
주로 상하이에서 당과 정부의 요직을 역임한 사람들과 상하이 출신의 인사들로 얽혀져 있는 계파를 말한다. 특히 상하이 당서기를 역임한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후원하에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 중앙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그가 상하이를 연고로 얽혀 있는 그의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세력이 확대되었다.
■ 공청단
14세 이상 28세 미만의 공산당 청년당원과 예비당원의 대중 활동을 지도하고 엘리트당원으로 성장시키는 임무를 담당하는 공산주의청년단(共産主義靑年團)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1920 년 8월 사회주의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으며 1925년 1월 공산주의청년단으로 개칭되었다. 중국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며, <中國靑年報>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 고 있다. 공청단 제1서기를 역임했던 후야오방(胡耀邦) 이래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으며, 이후 제1서기를 역임했던 후진타오(胡锦涛)가 국가주석 및 당 총서기로 선출되고 공청단 출신 인사들이 중앙 요직에 중용됨에 따라 상하이방, 태자당과 함께 공산당 내 3대 정치엘리트 세력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공청단 출신의 정치엘리트들은 해외 유학 경험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넓고 개혁적인 성향이 강하며 청렴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 지구(地區)
중국의 지방행정 편제의 한 층위로, 성(省) 바로 아래에 해당한다. 중국의 행정체계 는 위로부터 중앙, 성·시·자치구, 지구(地區), 현(縣), 향진(鄕鎭)으로 편제되어 있는데, 조직의 위계 서열의 측면에서 볼 때, 성급은 한국의 광역자치단체(도, 특별·광역시), 현은 기초자치단체(시, 군, 구), 향진은 읍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성급과 현급 사이에 지구급을 편제한 이유는 상당수 성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너무 커서 그 하부의 수많은 현급 행정단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어려 웠기 때문이다. 흔히 지구급을 줄여 ‘지급’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 행정단위를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 조조(條條)·괴괴(塊塊)
계획경제 시기에 특정 부서의 중앙-지방간 수직적 네트워크와 특정 지역 내 다양한 부서 간의 통합을 가리킬 때 쓰이던 용어이다. 1 조조는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 들이 수직적으로 결합한 양상(예를 들어, 교육부-교육국-교육과)을 가리키는 용어로 흔히 계통(系 統)으로도 불렸으며, 2 괴괴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분야를 담당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통합된 양상(예를 들어, 칭다오시의 경제, 건설, 교통, 교육, 복지 등의 담당 부서들이 시 정부를 중 심으로 통합된 것)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계획경제 시기에는 조조가, 개혁개방 이후에는 괴괴가 상대적으로 중시되었다.
■ 분세제(分稅制)
각종 세수(稅收) 자원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분담하여 관리하는 제도로서, 1994년 흔히 금세공정(金稅工程)이라 불리는 조세제도 개혁의 결과로 확립되었다. 지방정부가 모든 세금을 걷어서 중앙에 상납하던 이전의 방식과 달리, 중앙과 지방 정부의 세수입원을 항목별로 구분하고 각각 징수하여 각자의 재정수입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분세제가 실행된 이후, 중앙의 재정이 대폭 확충됐지만 지방 재정은 대폭 감소함에 따라 지방정부는 ‘재정 이전’이라 불리는 중앙 정부의 교부금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 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뜻의 성어로,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비의 위인됨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했을 때 일부러 자신을 낮추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하여 조조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때를 기다렸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에는 덩샤오핑 시대의 대외전략을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되는데, 덩은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내부적으 로 국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는 당시 서구 열강들에 대항할 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한 중국에 매우 현실적인 전략이었으며, 이후 고도의 경제 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강국의 반열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중국몽(中國夢 Chinese Dream)
2012년 시진핑은 개혁 심화를 위한 미래 발전의 웅대한 청사 진으로 ‘중국몽’을 제시했다. 실제로 과거의 미국이 추구했던 ‘American Dream'처럼 중국 인민은 물론 세계 시민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추구하는 책임감 있는 대국이 되겠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몽이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으로 지난 200년간 꿈꿔 왔던 바이며, 2021년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과 20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0주년 때 이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경제력이나 정치력뿐만 아니라 문화력 등 소프트파워를 강조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 중화타이베이(中華臺北 중화대북)
중화타이베이 또는 차이니즈타이베이(Chinese Taipei, 약칭 TPE)는 현재 중화민국(타이완)이 국제기구에 가입하거나 국제행사에 참여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큰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무대에서 타이완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 국 가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국호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이나 타이완 공화국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국호로서의 ‘타이완’(臺灣, Taiwan)을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의 국가 등 중화민국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된 다. 이 명칭은 1971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대부분의 국제 조 직이나 행사에서 채택해오고 있다.
■ 양안(兩岸) 관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이후 분단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간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 각 방면의 관계를 가리킨다. 양안(兩岸)이란 자연스럽게 군사분계선의 역할을 하게 된 타이완 해협(臺灣海峽)을 사이에 두고 서안(대륙)과 동안(타이완) 으로 마주 보는 관계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용어는 분단국가인 양자의 관계는 ‘두 국가의 외교’ 가 아닌 ‘특수한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34개 성·시(省·市)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통일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반면, 중화민국은 대륙 본토를 공산당의 반란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 중국의 양안 관계 정책 : 1954년 이래 ‘하나의 중국’ 정책
◎ 타이완은 중국 영토 [23번째 省] : 中華民國, 中國, 臺灣政府 등 용어 사용 금지
- 1978년 이후 ‘일국양제’ 정책
◎ 1978년 중공 11기 3중전회의 후, 1979년 1월 전국인대 명의로 [告台湾同胞书 타이완 동포 고함]
◎ 1982년 전국인대의 ‘3통’ 정책 [通邮,通航, 通商] 제안
◎ 이후 일국양제(一国两制) 정책 정립 1992년 ‘92컨센서스’에 의한 ★‘一中各表일중각표’[一个中国, 个中个表]
◎ 중국과 대만의 반관반민 기구에 의한 상호 합의
◎ 一中各表 :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각자의 표현/해석을 따름.
★ 타이완의 입장(양안 관계) : 역대 총통 및 대중국 관점의 변화
◎ 장제스(蔣介石) [1948~1975] : 漢賊不兩立
- 1946년 이후 ‘중화민국’의 정통성 및 재통일 주장 ; 1971년 국제연합 탈퇴
◎ 장징궈(蔣經國) [1978~1988] : 三民主義統一中國(삼민주의 통일중국) ; 3불정책
- 3통과 일국양제 정책에 대해 ‘三不정책’ [不接觸불접촉, 不談判불담판, 不妥協불타협]
◎ 리덩후이(李登輝) [1988~2000] : 一國兩府/兩治(일국양부/양치) ; 一中一臺 (일중일대)
: 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타이완
- 직접선거 등 민주화 조치; 대륙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독립 추구의 움직임, 1992년 ‘92컨센
공식(共識)’에 의한 ‘一中各表’
◎ 천수이볜(陳水扁) [2000~2008] : [民進黨] 一邊一國, 해안에 하나의 국가가 있다.
-‘하나의 중국’원칙대신 독립노선 추구; UN가입시도;양안관계경색
◎ 마잉주(馬英九) [2008~2016] : 一中各表 원칙 견지; 新3불정책 ‘(신)三不정책’
- [不統불통, 不獨불독, 不武불무] ; 중국과의 관계 개선 ; 차이완(Chiwan)
◎ 차이잉원(蔡英文) [2016~현재] :
- 有溝通 : 소통함, 不挑釁 : 도발 없음, 沒意外 : 의외의 이벤트 없음 : 홍콩 사태 이후 독립 성향이 강해지고 있음.
■ 92컨센서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반민·반관(半民·半官) 단체들이 양안 관계의 성격과 원칙에 대해 서로 합의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흔히 일중각표(一中各表)의 원칙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대원칙을 공유하되 그에 대한 표현이나 해석은 각자의 방식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후 타이완 독립의 기치를 내건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으로 선출된 이후 ‘일중각표’의 원칙이 다소 흔들렸으나, 현재까지도 이는 양안 관계의 핵심적인 대원칙으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타이완에서는 ‘각자의 표현/해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 일국양제(一国两制)
1980년대 초반 덩샤오핑이 제안한 중국의 통일정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라는 단일한 국가 안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공존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타이완과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제안했으나, 타이완의 거부로 타이완과의 관계에서는 아직 채택되고 있지 않으 며,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중국에 반환된 홍콩과 마카오를 대상으로 실행되고 있다. 홍콩에서 실시되고 있는 일국양제 정책은 현재의 체제를 50년 동안 유지하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분야에 서 고도의 자치를 향유하고, 홍콩 사람들이 직접 홍콩을 통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50年不變, 高度自治(고도자치), 港人治港(항인치항)
■ 행정장관
중국에 소속된 특별행정구의 최고 행정수반을 이르는 말이다. 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과 마카오에는 최고 행정수반으로서 행정장관이 선출되었다. 임기는 5년이며 1회만 연임할 수 있다. 현재 행정장관은 ‘선거위원회’를 통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2017년 행정장관 선거 부터 간선제를 직선제로 변경하는 안이 중국 전국인대에서 의결되어 마련되었지만, 이로 인해 2개 월여의 홍콩 도심 점령 시위 등 각종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 중화민족(中華民族)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중화’는 ‘중국(中國)’과 ‘화하(華夏)’의 첫 글자를 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일반적 인 생각과 달리, ‘중화민족’이라는 용어는 상당히 최근인 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1902년에 량치차오(梁启超)가 처음 사용하였으며, 1912년 쑨원(孙文) 역시 중화민국을 5족(5族)이 연합한 중화민족 의 국가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시기에 ‘중화민족’이란 용어가 만들어지고 널리 확산한 것은 다른 민족들의 협력 없이 한족들만의 힘으로는 근대적인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당시의 최대 과제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 소수민족 식별사업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을 분류하고 확정했던 사업을 가리킨다. 신중국 수립 후 국가는 초대 헌법 제정을 위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1954년에 개최하고자 했다. 전국인민대표를 각 지역, 직종, 계급 및 민족의 대표들로 선출하고자 했는데, 당시까지 만 해도 중국 내에 몇 개의 민족이 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국무원은 1953년에 제1차 전국인구조사를 겸해 민족을 분류해내는 사업을 했는데, 이 사업은 1964년의 제2차 인구조사에서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공통의 지역, 언어, 경제생활, 풍속 습관이라는 4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각각의 집단들을 ‘민족’으로 확정하였다. 1979년 윈난 지눠족(基諾族)을 마지막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4가지 기본원칙
◎ 민족간 평등의 원칙
-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우호 합작의 대가정을 이룬다.
- 한족 중심의 반대 : 민족통합과 소수민족의 국가 의식 강화에 기여
◎ 민족 구역 자치의 원칙
- 소수민족 집중 거주 지역에 대해 자치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자치권을 부여한다.
◎ 분리독립 불가의 원칙
- 소수민족의 분리 및 독립 요구는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 소수민족 정책의 근본 : “하나의 중국”
◎ 통일전선의 원칙이다.
- 이는 전 국토의 64%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거주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진 것을 반영한 것으로 현지 유력자를 통한 간접통치의 형태를 띠고 있다.
■ 소수민족 전쟁
중국 소수민족 정책은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으나, 그런데도 다음 네 가지 기본원칙은 줄곧 견지되었다. 첫째는 ‘민족 간 평등의 원칙’으로 한족을 포 함한 모든 민족이 평등하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민족 구역 자치의 원칙’으로 자치행정기관을 설치 하여 일정한 범위 내의 자치를 허용하는 원칙이다. 셋째는 ‘분리독립 불가의 원칙’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소수민족의 분리와 독립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넷째는 ‘통일전선의 원칙’으로 소수민족의 고유한 풍속과 신앙은 인정하면서 현지 지도자들을 제도권의 권력구조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이 네 원칙은 문서상의 원칙일 뿐, 평등의 원칙과 자치의 원칙은 실제 현실 과정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 옌볜(延邊)
일반적으로 말하는 옌볜은 중국 지린(吉林)성에 있는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 自治州)’를 가리킨다. 옌볜 자치주의 면적은 약 43,500km²로 지린성 내 동쪽 지역 1/4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도(州都)는 옌지(延吉)시이다. 옌볜 자치주 내의 조선족 인구수와 구성 비율은 1990년대 이후 줄곧 감소하고 있다. 1953년 조선족의 숫자는 55만 명으로 자치주 인구 92만 명의 60%에 달 했으나, 1990년에는 208만 명 중 82만 명으로 40%, 2013년 말에는 228만 명 중 80만 명으로 35%밖에 되지 않는다.
■ 오족공화(五族共和)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으로 쑨원은 한족,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 장족 5개 민족이 협력하는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쑨원은 5개 민족이 합하여 하나의 나라가 되고,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을 민족의 통일이라고 하였으며,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결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쑨원 사후 장제스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한 민족 관계를 구상한 바 있지만, 쑨원도 역시 실질적으로는 한족 중심의 국가 건설을 모색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 뉴스(新闻) 생산의 3대 기본 축
◎ 신화사 : 중국 언론사 중 거의 유일하게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해외 소식을 국내로 보급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 인민일보 : 신화사로부터 생산된 뉴스들을 중요도에 따라 선별해서 당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보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민일보 기사 중 25%는 신화사로부터 얻은 것이다.
◎ 중앙전시대 : 신화사와 인민일보 등 주요 기관에서 생산된 보도 자료 등을 영상 뉴스로 제작하 여 전국으로 송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발달 이후 뉴스 유통에서
1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고, 특히 근래 들어
2 3대 기관의 영향력도 감소하는 추세이다. 실제 중국 정부가 1990년대 이후
3 신화사와 중앙전시대를 점진적으로 민영화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 신화사(新華社)
중국 내의 뉴스를 선별하여 국내외에 보도하는 것으로, 중국 관련 뉴스를 일차 적으로 생산하는 기관이다. 중국 당-정부 요인의 발언을 독점적으로 전달할 때도 많아서, 중국의 국영 선전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31년 11월에 홍색중화통신사(紅色中華通訊社)라는 이름 으로 설립되어, 1937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 CCTV(中央电视台)
중국 중앙텔레비전 또는 중국 중앙전시대(中央电视台)의 영문 명칭 China Central Television의 약칭으로, 국무원 산하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国家新闻出版广电总局)에서 관리 하고 운영한다. 1958년 개국했으며, 1990년대부터는 국가지원금의 축소에 따라 광고를 방영해오고 있다. 45개의 중앙 채널이 있으며, 각 성·시(省·市)별로 위성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 인민일보(人民日報)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대표적인 당 기관지이자 중국에서 가 장 영향력이 큰 신문이다. 신화사가 취재한 국내외의 주요 사건에 대해 당의 시각에서 해석하여 보도함으로써 다른 언론들의 보도 방향의 가늠자로 기능하기도 한다. 1948년 6월 허베이성에서 창간되었으며, 1949년 베이징으로 이전한 후 공산당의 기관지가 되었다. 7개의 언어로 세계 각 지역에 있는 독자들을 겨냥한 해외판도 발행하고 있으며, 1997년 1월에는 <인민망(人民网)>이라는 인터넷 포털사이트도 개통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 웨이보(微博)
중국의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이 제공하는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로 ‘중국의 트위터’로도 불린다. 중국의 포털사이트 시나(Sina; 新浪)가 2009년 8월 처음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제한과 검열로 인해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중국 진출이 좌절되자 시나 웨이보가 급속 하게 성장했으며, 이후 중국의 다른 포털사이트들도 웨이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시나 웨이보는 2012년 1월 23일 춘절에 1초당 메시지 32,312건을 돌파하며 트위터의 기록(25,088건/초)을 깨 뜨렸다. 이러한 전파력으로 인해 공식 언론매체들이 전달하지 못하는 사실을 신속하게 전파하기도 하고 중국의 부패와 부조리를 널리 고발함으로써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지만, 동시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확대재생산되는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인터넷과 함께 웨이보에 대해서도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의 단계를 설명하는 외교용어로서, 비동맹국 간의 외교관계로는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 한·중 간 협력의 틀이 양국 간의 차원을 넘어 아시아 및 글로벌 차원에서의 사안으로 확대되고, 양국이 정치, 경제, 안보,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협력을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2008년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외교관계를 격상하 였으나, 이 관계를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과 교류가 뒤따르지 못했다.
■ 한·중 FTA
한국과 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을 말한다. 2004년 한중 FTA 문제가 처음 거론된 이후, 양국 정부는 2012년 5월 2일 베이징에서 회담하고 FTA 실무협상 개시를 선언하였으며 지속 적인 협상을 전개해오고 있다. 한국은 공산품, 중국은 농산물 시장의 확대에 협상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중 FTA 협상이 체결되면 양국 간의 경제적 교류 규모가 대폭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러나 동시에 농업 부문의 경쟁력이 약화하는 등 한국의 산업구조가 크게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이해관계와 함께, 개별 업종과 계층별 이해관계를 최대한 고려하 여 FTA 실행에 따른 피해가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
■ 한류(韓流)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홍콩,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특히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문화가 향유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처음에 한류는 한국의 TV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한국의 패션, 생활방식, 전통문화 등 문화 일반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 한중 인문 유대
한중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내실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2013 년 양국의 정상회담에서 합의하여 발표되었다. 양국 간 교류의 양적 확대보다는 질적인 차원에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양국의 국민이 역사 및 문화를 포함하는 ‘인문’을 매개로 교류를 진행함으로써 상호 간의 이해와 공감의 영역을 넓히고 공통의 가치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문 유대 강화를 위한 주요 사업으로는 인문 분야에 관한 공동학술작업, 청소년 인문 교류, 지방자치 단체 간 교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