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이 시편은 첫번째 권고로 서두를 연다.
신자들은 역경에 처한 상태에서, 신앙이나 정직함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자들이 풍성한 형통을 누리는 것을 볼 때, 자신이 너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라는 명령이다. 불평한다는 것은 근심한다는 것이며, 가슴앓이를 하고 핏대를 올리며 초조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율법 파괴자들이 말 위에 높이 앉고 순종하는 백성들이 수렁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을 볼 때, 시기의 불을 지피기 쉽다. 여호와의 모든 행위가 의로우심을 확신하는 경건한 만족감을 지니고 가장 역설적인 섭리들을 직시하는 것은, 오직 은총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가장 좋은 고기가 개들에게 돌아가는 반면에 사랑받는 자녀들은 그것을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야 한다는 것을, 육신적 판단으로서는 참아내기 힘들다.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동일한 권고가 다른 형태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멸시받으며 또한 깊은 시련에 직면할 때, 아담에 속한 우리의 옛 자아는 자연히 부자와 대인을 시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의식할 때, 마귀는 가증스러운 이유들을 가득 준비하고서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곤경의 폭풍우는 심지어 인간성이라는 크림마저 굳어버리게 할 수 있다. 악인들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득 채워진 그들의 식탁과 화려한 소지품들에 우리의 궁핍한 눈길이 이끌리기란 너무나 쉽다. 리본과 화환으로 치장된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살진 황소를 누가 시기하겠는가? 본절의 권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사악한 부자들은 단지 잡아먹기 위해 피둥피둥 살찌운 짐승들과 같기 때문이다.
2절.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사망의 낫은 예리하다. 초원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신속하게 낫이 들이닥친다.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파멸은 신속하고 갑작스러우며, 분명하고 압도적이며, 또한 돌이킬 수 없다. 풀은 그것을 베는 자를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다.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채소의 싱싱한 자태는 태양 열에 의해 단번에 말라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인의 모든 영광도 죽음의 시각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망이 사악한 자를 풀처럼 베어 죽일 것이며, 진노가 그를 건초처럼 말려버린다. 그는 죽고, 그의 이름은 썩어 없어진다. 끝없이 자랑하던 자에게 닥치는 종국이 그 얼마나 철저한가! 불과 한 시간 동안밖에 살지 못하는 곤충이나 태어나는 날에 죽고 마는 하루살이로 인해 안달할 가치가 있겠는가? 신자들 속에는 영원토록 살아서 거하는, 부패하지 않는 산 씨앗이 있다. 어찌 그들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육신과 그 영광을 시기해야 하겠는가?
3절.
"여호와를 의뢰하여." 여기에 두번째 권고가 나오며, 이는 해당 상황에 걸맞는 것이다. 믿음은 불평을 치유한다. 사팔뜨기 눈으로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그래서 시기심에 사로잡힌다. 믿음은 보다 분명한 시각으로써 사물의 실제적인 면을 보게 하며, 그래서 평안을 얻게 한다.
"선을 행하라." 참된 믿음은 적극적인 순종을 수반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불평을 없애 주는 근사한 처방이다. 불만의 녹을 제거해 주는 거룩한 활동 속에는 기쁨이 있다.
"땅에 거하여." 이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불평의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고, 만족과 안식을 주는 약속의 땅에 거할 것이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 우리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마음속에 천국이 있는 자의 경우에는, 그의 가정에도 천국이 임할 것이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혹은 (목자의) 돌봄을 받을지어다. 성실하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필수품들이 보장된다. 선한 목자는 모든 신자들에게 목양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진리를 먹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영속적 잔치가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나 현세적으로 결핍 상태에 처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진리를 음식으로 삼으라"는 권면으로 이해한다. 분명 이것은 훌륭한 격려이며, 게걸스러운 시기심을 영원히 몰아내 준다.
4절.
이 세번째 권고는 한단계 더 진전을 보인다. 처음에는 불평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그러고 나서 적극적인 믿음을 명령하였다. 이제 거룩한 소원을 품고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고가 나온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여호와를 네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으라. 악인들은 육신적인 것들을 기뻐한다. 설사 그들이 그렇듯 허망한 우상들로 자신을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그들을 시기하지 말라. 당신의 보다 나은 기쁨을 바라보고, 당신에게 주어진 보다 숭고한 몫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우라. 어떤 의미에서는 악인을 본받으라. 그들은 자신의 몫을 기뻐한다. 그런즉 당신의 몫을 기뻐하도록 유의하라. 그리하면 그들을 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불평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가장 고상하고 황홀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동기를 얻게 된다. 우리는 여호와의 모든 성호, 태도, 말씀, 혹은 행위 등을 기뻐해야 하며, 마치 심오한 미각으로 진미를 맛보는 식도락가처럼 우리의 영혼은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즐거워해야 한다.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즐거운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또 다른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만을 바라며 간구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유 행동을 허락해도 무방하다.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된 상태이며, 이제 그들은 자신이 갖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본문의 "소원"이란 변덕스러운 소원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을 가리킨다. 자연적인 본성이 바라는 것들 중에는, 은총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결코 간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많다.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러한 깊은 바람들은 약속에 근거한 것들이다.
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인생의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당신의 현재적 불평거리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여 당신이 나아갈 길의 모든 진로를 그분께 의탁하라. 걱정을 던져 버리고, 당신의 뜻을 포기하며, 스스로의 판단을 복종시키며, 모든 것을 만유의 하나님께 맡기라. 시기심을 몰아내는 데 있어 이것은 그 얼마나 훌륭한 약인가! 이 네번째 권고는 그 얼마나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해주는가! 매일 거기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그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인가!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만일 우리가 확신 가운데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면 우리의 앞 길에는 기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평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