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1열왕기 18,41-46 마태오 5,20ㄴ-26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이기양 요셉 신부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오 5,20ㄴ-26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또 그렇게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누구나 한 번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맞을 수밖에 없지요.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은 참으로 엄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잘 살아야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마땅해 하시고 늘 야단치셨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는데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지요. 물론 잘못되고 편협한 율법의 해석으로 예수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 지은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엄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5,21)는 말씀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놓고 가르치고 계시지요.
살인이라면 우리는 단지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정법도 그 정도에서 죄 값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단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적인 언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까지도 갚아야할 죄라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 욕 안 해보신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또 지금도 가끔 감정이 격할 때는 마음이나 언어로써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특히 언어적인 폭력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함부로 내뱉는 언어적인 폭력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정신적인 폭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험한 말을 하며 치고 받고 싸웠다고 합시다. 심하게 싸워서 한 사람이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5주 동안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한두 달이면 육신의 상처는 없어지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50년이 지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며 또 언어로써 내뱉는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단호하게 이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감정과 정서는 언어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책임질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함부로 쉽게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흉기가 될 수 있지요. 말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인류 역사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되고 그 양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회서 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상꾼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고 네 혀로 올가미를 놓지 마라.”(집회5,14) 하지만 혀로 사람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반대로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쉽게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또,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말로 입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물리적 폭력에서가 아니라 언어 폭력에서 비롯되지요. 형제지간에 갈등이 심화되어도 몸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험한 말로 심각하게 싸우지요. 생각만 해도 벌떡 일어나는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를 사목하면서 신자들을 해치고 상처를 주며, 그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갈등은 혓바닥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악의 뿌리인 혀가 결국 사람을 잡는 것이지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말한 본인은 곧 잊고 말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그 말이 평생 남아서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그 어리석음이 모두 ‘말’을 통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언어로써 드러나고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일생을 ‘배’라고 볼 때 내 일생을 조정하는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바로 ‘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혀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기도 하고, 반대로 생명의 바다로 안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 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습니까? 죽이는 말이 더 많습니까? 혹시라도 내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죽음의 바다로까지 내몰린 이웃이 있다면 중앙 법정에 넘겨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마음으로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이 상처받은 마음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말, 또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 화해를 샘솟게 하는 말,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오 5,20ㄴ-26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이란 상태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 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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