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年大旱逢甘雨(칠년대한봉감우) 칠년 큰 가뭄에 단비 만났을 때.千里他鄕逢故人(천리타향봉고인) 천리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났을 때.
無月洞房華燭夜(무월동방화촉야) 달 없는 밤 신혼 방 촛불 밝힐 때.
少年登科揭名時(소년등과게명시) 소년시절 등과하여 이름 걸릴 때.
네가지 기쁨(四喜)' 또는 '인생의 4가지 기쁨(人生四喜)' 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 위 시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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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벋고 계신 최치원 초상화
큰 시인(孤雲)이 운(韻)도 갖추지 않고 시를 지었을까요?
중국 사람들이 한시를 '당시(唐詩)'라 부르는 건, 唐代에 들어 와서 한시가 비로소 격식이 갖춰지고 심지어 과거시험에도 필수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크게 융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풍토에서 공부한 고운선생이 한시의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압운(押韻), 즉 짝수 구(句)의 마지막 자를 같은 운으로 일치시키는 것 조차 잊었을까요? 제2구 끝자 人(인)과 제4구 時(시)는 같은 운이 아니며, 제1구와 제 2구의 시순을 바꿔 놓아도 운이 일치하지 않는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위의 시가 고운이 지은 걸로 둔갑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유때문이라 생각합니다.
1) 고운 선생에게는 수많은 설화와 야담(野談)이 따라 다니는데, 위 시가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머나 먼 이국 땅(중국)에 유학한 그의 행적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천리타향' 이라던지 '소년등과(少年登科)' 와 같이.. 일반 대중들이야 한시의 엄격한 규율에는 별 관심이 없고 스토리의 앞뒤 연결이 잘 되고 흥미가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겠지요.
2) 어떤 설화에는 고운 선생이 과거시험 보러 가는 도중 하룻밤 주막집에 유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중국 서생이 5언시로 '大旱逢甘雨 他鄕逢故人 洞房華燭夜 登科揭名時' 라 읊조리기에, 그 앞에 2자씩을 덧붙여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더욱 황당한 이야기로는 이 시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했다는 둥.. 그러나 위 시가 고운이 지은 거라는 확실한 물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이 시를 과거시험 답안지로 썼다는 건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3) 비슷한 설화가 고려의 글쟁이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그리고 조선조에는 사육신이며 학자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정조 시절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등의 뒷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유독 우리나라에 이런 야담이 끊이지 않는 건, 우선 이야기가 재미있고 비록 엄격한 규율에는 맞지 않지만 한시가 등장하니 유식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춘향전에서도 멋드러진 한시 한수가 등장하듯이..
久旱逢甘雨(구한봉감우) 오랜 가뭄에 단 비를 만났을 때.
他鄕遇故知(타향우고지) 타향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
洞房華燭夜(동방화촉야) 신혼 방에 화촉 밝힐 때
金榜*題名時(금방제명시) (과거시) 금방*에 급제자 이름이 오를 때.
*금방(金榜) : 옛날 과거에 급제했다는 내용을 노란종이에 기록하고 그 위에 임금의 옥쇄가 찍힌 명단.
위 시는 같은 '人生四喜'란 제하로 중국의 용재수필(容齋隨筆)이란 책에 남송의 홍매(洪邁, 1123~1202) 작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북송 말기 사람으로 알려진 왕수(汪洙, 생몰 미상)가 지었다고 설도 있습니다. 따라서 비슷한 시가 중국과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 중 굳이 위의 시를 소개한 것은 그래도 운(韻, 知와 時)을 맞추어 지었고 원산지(?) 냄새가 풍기는 시라는 거지요.
十年久旱逢甘雨(십년구한봉감우) 십년 오랜 가뭄에 단 비를 만났을 때.
萬里他鄕遇故知(만리타향우고지) 만리 타향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
和尙*洞房華燭夜(화상동방화촉야) 땡중이 동방에서 화촉을 밝힐 때.
敎官金榜題名時(교관금방제명시) 교관이 금방에 (과거) 급제자 이름을 올릴 때.
*和尙(화상) ; 스님을 낮추어 부르는 말
보다시필 앞 구절에 2자씩을 보탠 시로, 명나라 헌종 때 왕수남(王樹南, 생몰 미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대륙답게 스케일(?) 커진 데다가 느닷없이 땡중(和尙)도 등장합니다. 통상 5언시 각 구의 앞에 2자를 넣어 7언시를 만드는데, 재미삼아 뒤에 글자를 덧대는 경우도 있다네요.
久旱逢甘雨 一滴(구한봉감우일적) 오랜 가뭄에 단 비를 만났을 때.. 한방울
他鄕遇故知 債主(타향우고지채주) 타향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 빚쟁이
洞房華燭夜 夢中(동방화촉야몽중) 신혼 방에 화촉을 밝힐 때.. 꿈속에서
金榜題名時 重名(금방제명시중명) (과거시) 금방에 급제자 이름이 오를 때.. 동명이인
고운선생이 직접 지은 시 중 최고의 절창 한 수 붙이면서 끝내려 합니다. 짝퉁과 Fake news가 난무하는 요즈음 정치판에 부디 맘과 몸을 온전히 보존하시기를..
가을 밤 비는 내리고(秋夜雨中) / 최치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로이 시를 읊조릴 뿐,
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은 삼경 깊은 밤 비는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잔 앞 마음은 만리 고향으로 가네.
♣최치원(崔致遠, 857~?)은 당나라에 유학한 통일 신라 때의 학자이자 시인으로 호는 고운(孤雲). 그가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7년만인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그 후 당나라 지인들의 도움으로 문객(文客)으로 또는 미관말직을 얻어 출사의 꿈을 키우다가, 황소(黃巢)의 난에 한 토벌사령관<高騈>의 도움으로 그의 군막에서 벼슬을 하며 그 유명한 토황소격(討黃巢檄)으로 문명(文名)을 떨친다.
최치원은 조국에 봉사하고자 29세의 나이로 돌아왔으나, 신라는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온갖 증상, 즉 권력암투, 골품제도에 따른 신분차별, 유학파에 대한 시기 등에 절망하고 가야산으로 잠적한다. 혹자는 백 살에 신선이 되어 학처럼 날아갔다고 하고, 혹자는 자살했다고도 한다. 최치원은 당나라 있을 때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사후에도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다. 이규보(李奎報)는 ‘당서(唐書)에 최치원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 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동국이상국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