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 엄마
브라질로 이민 가면서 윤희 엄마는
아끼던 도자기와 예쁜 접시를 내게 선물하였다
나라가 어지럽던 시대
아버지와 오빠들이 있는 먼 나라로 떠난다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남매를 기르던 윤희 엄마
아래, 윗집으로 정 붙이며 살던 때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세상살이에는 서툴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창 젊었던 시절이었다
벌써 몇십 년 전 일, 오래된 안부가 궁금하다
나는 그때 그에게 무얼 주어 보냈던가
받기만 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멀고 먼 나라에서 수십 년 묵은 세월이지만
진열장에서 반짝이는 아직도 예쁜 그의 선물처럼
건강한 얼굴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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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엄마는 브라질로 떠날 때 귀히 여기던 그릇들이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가지고 갈 수가 없었겠지요. 이삿짐을 모두 선박으로 옮겨야 했는데 그러다가 파손되기 쉬웠을 것이고, 책임지지 않으려고 받아주었을는지도 의문입니다.
누구에게 주고 갈까 생각하다가 아네모네가 뽑힌 것입니다. 내가 귀히 여기던 만큼 귀히 여기고 그 물건의 가치를 자기처럼 아는 사람, 자기처럼 아끼고 사랑할 사람으로 적격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주면 안심이라고, 마치 사돈이 될 만한 사람을 물색하여 자식을 맡기고 가듯이 맡기고 갔습니다. 윤희엄마가 사람을 보는 눈이 있네요. 아네모네는 지금도 반짝반짝 진열장에 넣어두고 귀한 물건의 새로운 주인으로 사랑하면서 원주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혼란으로 내 나라에 머물지 못하고 멀리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 친구의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김재규 씨의 최측근 부하였습니다. 장래가 보장된 육군 대령인가 되었었는데 그 후 나라를 떠났습니다. 내 친구는 시문학 출신 시인이었고 그의 시집 <당신의 군복>이라는 시집이 발간되었을 때 나는 축시를 낭송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초청하여 최일선을 애들까지 데리고 가서 구경도 했습니다. 뉴욕으로 망명하여 악세서리 가게를 할 때도 가서 만났었습니다. 지금도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윤희엄마는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할까요? 운명이라고 할까요? 이제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 고국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내 친구를 생각하면서 윤희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윤희엄마를 보내면서 아네모네도 무엇인가 이별의 선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도 “나는 그때 그에게 무얼 주어 보냈던가/받기만 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듯이 거기 버금가는 귀한 것을 선물했을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만약 여기서 “나는 무엇을 주었다”라고 했다면 이 시는 싱거워지고 방향이 틀어집니다.
마치 거래를 끝내듯이 “그가 A를 주기에 나는 B를 주었다 끝”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시에 아무런 여운도 없어지게 됩니다. 나도 무엇을 준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윤희엄마가 내게 남기고 간 유산처럼 지금도 진열장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 그처럼 좋은 선물을 나도 주었던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선물은 금방 없어지는 물건이 아니라 두고 오래오래 기념하는 물건입니다. 대대손손 이어간다면 더욱 좋겠지요.
요즘은 선물의 개념이 많이 변해서 영원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초콜릿 선물도 있고 빼빼로데이 선물도 있으니까요. ‘오늘이 선물처럼 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치 오늘이 오지 않고 어제로써 마감될 줄 알았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의외로 기대를 넘어서 내게 온 귀한 것. 그것을 선물로 생각합니다. 오래 기념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도 누구에겐가 선물처럼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오늘 아침이 선물처럼 왔습니다.
첫댓글 선생님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오늘이 선물처럼 왔습니다. 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저절로 되뇌게 됩니다.
이승만 시대에 이기붕 밑에있던 윤희 할아버지는 배로 일본을 거쳐 브라질로 가고, 그 후 오빠들도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후 몇십 년 이곳에 살던 친정어머니와 윤희 엄마도 식구들과 브라질로 떠났습니다. 이웃사촌인 좋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제 친한 친구도 외국으로 가면 친구를 그 나라에 뺏기는 것 같습니다. 전화하면 마음은 헤어질 때와 같으나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러 안부만 묻고 끝납니다. 그 후 많은 날이 지나 그들도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제가 아끼던 뭔지 모를 선물?을 그도 간직하고 있을지요. 두어 장 달력을 넘기면 한 해가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십시오. 미리 새해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