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정종 가계도
태조 - 신의왕후 안변한씨 한경민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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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대 국왕 정종(1357~ 1419, 63세)은 태조 이성계의 차남으로 세인들이 인물을 평할 때 아주
쉽게 ‘아~ 대타로 임시로 왕에 잠시 있다가 물러난 사람’ 혹은 ‘아우 방원이 때문에 평생 기구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왕’이라 간단히 말한다.
과연 이 분의 인생이 그들의 생각같이 기구한 운명, 비운의 왕이 맞는 말일까??
정종!! 이 분의 삶을 찬찬히 보자~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고려 때 이미 부친을
따라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실록에 나타난 인물평이다. 최소 장군의 부관 이상 무인이다.
이성계의 여섯 아들 중 장남 진안대군 방우는 처음부터 위화도회군을 반대하는 등 부친과 뜻을
달리하고, 개국도 반대하였다. 결국 부친이 조선을 건국하게 되자 미련없이 개성을 떠나 철원으로
도망치듯 피신하여 살다가 개국 이듬해 1393년 술병(소주병)으로 죽었다 한다.
이렇게 정종은 실질적인 장남이었지만 10살 아래의 동생 방원(5남)의 힘과 위험을 미리부터 인지하고 일찌감치 국왕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권좌에서 물러난다. 그리고는 태종 방원이 베푸는 상왕에 대한, 형님에 대한, 위협요인 자진철회에 대한 보상과 자격으로 평생 안락한 삶을 산 현실 타협주의자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힘든 일을 긍정적인 마인드 컨트롤로 이겨나가는 심리요법이다.
정종은 주어진 현실의 난제를 슬기롭게 실천하여 극복한 인물이다.
역사의 관점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것이다. 보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영민한 부인의 권유를 받아들여 보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처음에는 도성 밖 서쪽 15리
양주(楊州)에 있는 연희궁에 머물렀으나, 역시 “측간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고 아우 방원의 눈앞에 완전히 안 보이는 것이 생명 유지의 으뜸인 것을 스스로 깨닫고는, 더 멀리 고향근처로 내려간다.
더욱이 모친이 잠들어 계신 ‘제릉’ 인근과 멀지 않으니 간간이 모친 묘소나 돌보면서 조용히 살겠다는데 더 이상 어떠한 구실도 필요 없는 완벽한 궁합이다.
그렇게 정종은 연희궁을 떠나 개성 인근에 인덕궁을 짓고는 좋아하는 격구, 사냥, 온천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정안왕후 김씨와 더불어 천수누림의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왕후가 먼저 1412년에 승하하였고, 정종은 1419년(세종원년) 63세에 승하하여 왕후 곁에 장사지내며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살아 2년 2개월 국왕을 지냈지만, 사후에는 왕조 내부에서 조차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명나라가
내려준 ‘공정왕’으로 불리웠고, 다만 능호만 ‘후릉’으로 받았었다. 이후 종묘에 배향된 것은 사후
260년이 지난 1681(숙종 7년)에 ‘정종’의 묘호(廟號)를 받으며 두 분의 신위가 종묘에 오른 것이다.
정종의 제왕복은 비록 짧았지만 특히 처복과 자식복은 넘쳐흘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정안왕후를 통해서 적자는 보지 못하였지만 10부인에서 17남 8녀의 자식을 두었다.
이런 분이 ‘평생 기구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왕’ 이라고?
기구할 수 도 있겠다. 부인 열 명에 자식이 스물다섯이면 여러 가지로...
來世에 그런 삶을 보장해 준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사람 손들어 보소?? ... ^^.
:: '후릉' 쌍릉의 능침이 사초지 위로 보인다. 비각은 없어지고 탄흔이 남은 비석만이 남아있다.
:: 조선초기 왕릉형식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석물이 모두 2 Set 이다.
:: 왕릉 능침의 하단부를 12면으로 둘러 싼 병풍석이다. 12시신상의 하나이나 조각 마모로 확인불능.
전주이씨는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왕가이므로 가문의 번성기를 따로 기술할 필요가 없다.
전주이씨 계파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 목조대왕의 다섯 왕자부터 사도세자의 세 왕자(은언군, 은신군, 은전군)까지 도합 125파계가 있었는데 현재 105파계로 분리되었다 한다.
현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는 89개파라 한다.
이러한 전주이씨의 1백여 派 중에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密城君,침= 세종 서5남)파이다.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 정종 서10남)파가 부자(父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가는 명가로 치부된다. 덕천군파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세종 적5남),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종 서4남), 정승 1명과 숱한 문,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
(孝寧大君派, 태종 적차남) 등이 전주이씨의 으뜸 명가이다.
정종 자식들은 태조의 진안대군(장남), 익안대군, 회안대군파와 함께 상위 서열에서 장남 의평군파를 필두로 14개파의 파시조를 이루었고, 위에 나열된 으뜸 명가 중 덕천군파, 선성군파가 정종 직계손이며, 모든 후손들이 당당 전주이씨 가문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 조경단 - 이성계의 21대조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壇, 전주이씨 발상지. 덕진공원 내.
:: 정종 제 2부인 성빈지씨 단소 (경기 고양 오금동), 덕천군, 도평군의 생모.
:: 정종 제 3부인 숙의지씨의 아들 선성군 묘역 ( 경기 하남 덕풍동)
:: 효령대군 청권사 및 묘역 일원(강남구 방배동).
태종의 차남으로 '혹시나?' 하셨다 '역시나'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 광평대군파 묘역 - 강남 수서동 알토란 같은 곳이나, 그냥 있었으면 강남역, 선릉역 부근이었다.
초입의 '필경재'는 성종 때 지은 <전통건조물 1호>이다. 녹천 이유(숙종 영의정)의 11대 종손이 궁중
요리 전문 한정식집을 운영 중이다.
※인물소개:: 지 윤( ~ 1377): 본관 충주, 고려말 무신. 친원파로 막강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다.
이인임과 정권을 잡았으나 후에 이인임과 최영 일파를 제거하려다 역으로 처형당했다.
이성계의 아들들과 세 딸이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에게 출가한 부인은 정실로써 2남 1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보냈지만, 다른 두 딸은 모두 정종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성빈지씨는 슬하에 덕천군과 도평군을 두었고,
동생 숙의지씨는 의평군, 선성군, 임선군과 함양옹주를 슬하에 두었다.
이들의 외할배 지윤은 첩이 30명이었다니까...
※연희궁(衍喜宮):: 조선 최초의 이궁으로 세종이 부왕 태종을 위하여 정식으로 준공한 궁이다.
개국 초 하륜에 의해 도읍지 후보로 거론되었던 장소로 이궁지어 사용하였다.
세종 이후 이궁 및 서잠실로 사용되다가 연산군이 흥청망청 연희장으로 삼았다가 후에 폐쇄하였다.
위치는 연세대학교 내, 연희IC 인근, 연희동 106, 107 일원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또하나’가 살고 있는 연희동(延禧洞)의 유래가 되었다는 야그다...
[출처] 제2대 정종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