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3년 8월6일 경기도 포천군 운천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빨리 나오고 싶어서였는지 예정일보다 빨리 15일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님 이야기로는 태어날 때 머리가 말랑말랑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기들보다 털이 많아서 원숭이 갔았다고도 하셨습니다. 어머님께서 몸을 추스린후 신길동 집으로 왔습니다. 7세 다른 친구들과같이 유치원아닌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유치원이라는 명칭이아닌 주산학원 미취학 반이었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이지만 교회에 출석 하게 된 것 또한 7세때입니다. 충일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제자신의 역사상 가장큰 사건이 일어난것도 7세때입니다.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어려웠던 가정이 아버지의사고로인해 더욱더 악화되었고, 어린나이에 저는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왠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하셔야했기에 저와오빠는 둘째 고모댁에서 할머니댁에서 지내는 날이 더많았습니다. 1990년 신길동에 위치한 영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됩니다. 1994년 초등학교 5학년까지 신길동에 살았고, 5학년 11월에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사를 하게됨에 따라 등원초등학교에 전학을 가게됩니다. 초등학교 시절까진 집안이 어려웠다는 것을 빼고는 다른여느 아이들과같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냅니다. 1996년 등원중학교에 입학을하였습니다.중학교 1학년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그때부터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좋아하게되었고, 학교에 좋아하는 아이도생겼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웃음이나는 풋사랑이었지만 그당시엔 큰고민 거리였습니다. 제가중학교1학년때 H.O.T 라는 남성 5인조 가수가 등장했습니다. 그땐 그들이 어찌나좋았었는지 지금생각하면 혼자 왜그렇게 좋아했었나 웃음도 나옵니다. 요즘 가수들로 비유하자면동방신기라는 가수보다 많은 인기가있었습니다. 아마 제나이또래 친구들중 조금이라도 안좋했던 사람은 없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3때 고등학교 진학문제를 두고 정말 많이 생각하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대학 진학때 보다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중3이면 누구나하는 인문계로갈 것인가 실업계로갈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부모님들은 인문계를 가길 원하셨지만 솔직히 그당시 많이 고민했지만 저의선택은 실업계학교였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도 저정도의 성적이면 인문계를 가라고하셨지만 저보다 두 학년이 높은 오빠의 인문계 학교생활을보고 안타까운마음도들고 왠지 자신이없었습니다. 또한 기도도 많이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다치시고 식물인간으로 계실 때 기도한 것 보다도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결과 주님께서는 저를 1999년 미션스쿨인 경복여자 정보산업고등학교에 보내주셨습니다. 실업계고등학교의 특성상 취업준비를 했습니다. 고3초 대학이란곳을 가야겠다는 결심이서 학교공부와 수능공부를 따로시작했고, 정반대의 과목을 같이한다는 힘든 점이 가장힘들었습니다.그리고 수능으론 대학못간다는 주변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도 힘들게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고, 2002년 그리스도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2학년까지 마친후 집안사정상 2004년 두학기 동안 휴학을 하게되었습니다. 휴학을 한후 아르바이트를 하게되었는데 오래동안 일했던 아르바이트 두군데 모두 크리스찬인 이었고,제가 세상에 많이 흔들릴때 그 두곳에서 저를 마음을 많이 잡아주었습니다. 제가일했던곳은 캔모아라는 생과일 전문점이었고 다른한곳은 2001아울렛 7층에 있는 어린이 소극장입니다. 지금도 소극장에서는 토요일이면 아르바이트를 하러가고 있습니다. 2003년 1월1일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서 계속 좋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사람은 짧으면짧은 저의 23년째를 향하고 있는 인생의역상서 빼놓을수 없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를 아시고 앞으로도 저와함께하실 주님도 제인생의 역사에선 빼놓을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2005년 현재 그리스도 대학교 3학년에 재학중입니다.
2. 가족의 역사
저희 가족의역사는 1981년 부모님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연애결혼이 아닌 중매결혼을 통해 알게되셨고, 그때 저희아버지는 27세 셨고, 어머님은 18세 셨습니다.
무려...9세 차이이십니다. 어머님의 집안사정상 빨리 결혼을 하셔야하는 어려운 상황이셨기에 일찍 결혼 하셨습니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시고 만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하셨지만 정말이지 행복하게 잘사셨다고 부모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분의 결혼생활후 집안은 많이 어려웠지만 두분은 정말이지 행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음해인 1982년 2월 3일 저희 오빠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다음해인 1983년 제가 응애~하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저희 가족 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던 기억은 1988년 88올림픽때입니다. 그때는 여의도가 공원이아니라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탈수있는곳 이었습니다. 올림픽기념으로 행사가있었는데 꽃으로 예쁘게 전시를 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진을 많이찍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집에있는 앨범이 그기억을 다시꺼내게끔 합니다. 1989년 8월5일 한여름입니다. 휴가철이고 저의 생일이 다음날인지라 가족이 함께 할머니댁에 가게되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아버지는 친구분 집에 도배를 해주기 위해서 일찍 나가셨고, 오빠와저는 할머니댁에서 사촌오빠들과 놀고있었습니다. 그날 늦은 밤이었습니다. 저는 사촌오빠가 선물로준 미미인형이 그려진 요술 필통을 가지고 놀고있었습니다.
갑자기 할머니, 어머니, 고모님들이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 옷을 급히 입으시고 나가시는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 아무것도 모른체 자고있라고해서 어린마음에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둘째 고모가 저와 오빠를 데리고 어디로 갔습니다. 그곳은 병원이었는데 아버지가 누워계셨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신지라 들어갈순 없었고, 밖에 작은 창문으로 볼수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식물인간으로 계신 몇 달간은 어린저에게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고, 어머니께는 더더욱 힘든시기였습니다. 그때어머님 나이는 계산해보면 26세입니다. 어머님께 감사드리는건 제가 병원에 있을때 다른 어른분들이 나이도어리고 남편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새인생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오빠와 저를 바라보시곤 끝까지 아버지를 지키셨습니다. 몇 개월후 의사선생님도 깨어나는게 기적이라고 하셨지만 주님이지켜주셔서 정말 기적으로 일어나셨고, 처음 며칠동안은 말씀을 못하셨지만 그후엔 저희모두를 기억해주셨고, 말도 할수있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호칭을 안게 되셨습니다. 나쁜일은 같이온다고들 합니다. 아버지가 조금나아지려할 때 제가 아퍼서 일년동안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희집의 가장이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정말이지 남에게 부끄러운일을 제외하시곤 안해보신일이 없으셨습니다. 식당은 물론 흔히말하는 노가다, 가정부, 보험설계사, 웅진아이큐 관리자 ..등등 많은일을 하셨고, 저녁에도 나가서 일을 하셨습니다. 정말많이 힘들어하셨지만 차츰차츰 저희가정은 안정적이 되었습니다. 오빠와저도 삐뚤어진길로 나가지 않고, 어머님 하시는일에 적극적으로 도왔고, 초등학교2학년때부터 어머님이 동네 부업거리를 나눠주는 부업장이 되셨을때에도, 어버지와 오빠 저는 정말 열심히 도왔고, 그때부터 나름대로의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용돈이란걸 받을수가없으니, 돈을 집에서 번것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음식솜씨가 좋아 제가 4학년때 동사무소 식당에서일을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집안의 어려움을 아신분이 동사무소에 도움을청해 지금살고있는 집으로 이사를 할수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이사를 오신후에도 여전히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다치신 후유증으로인해 운동을 하지않으시면 몸이 굳으셔서 항상 밖에나가 운동을 하셨습니다. 오빠와 저는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6학년때부터 어머님은 아버님과 같이 빚을내어 작은 두평남짓되는 곳에서 반찬가게를 하셨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어머님은 정말 음식솜씨가 좋으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사도 잘되었고, 몸은 많이 힘드셨지만 얼굴엔 미소가 있으셨습니다. 장사가 잘되니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여 오빠와 저는 일을 도왔고 역시 조금씩의 아르바이트비를 주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반찬가게를 하여 모으신돈으로 작은 슈퍼를 하게되었고, 그 주변의 주택들이 재개발을 한다하여 손님이 없어지고하여 다른곳으로 옮겨 슈퍼를 하였습니다. 지금하고 있는 슈퍼는 4번째 슈퍼입니다. 정말 속이상하는 것은 대형마트들이 생기면서 손님이 많이줄었고, 100원200원 비싸다는 이유로 아주머니께 쓴소리 듣는 부모님을 볼때 너무 속이상하였고, 정말이지 이마트 만든 사람이 싫었습니다.이마트가 생기고 잘되니...이런저런 마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어머님은 따로 일을 나가시고 아버지께서 작은 슈퍼를 지금 하고계십니다. 아버지 몸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항상 밤이면 저또는 오빠가 가게를 정리해드리고 문을닫고 아버지를 모셔옵니다. 고3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리는건 아버지가 장애인 1급이시고, 많이 힘드신데도 어머니가 더힘들거라고 감싸시고, 저희앞에선 불평 하지않으시는 아버지가 너무존경스럽고 감사합니다. 전 아버지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같고, 그어느 아버지보다 더멋지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저희와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삶을 어느정도는 포기하신 어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물론 어머니또한 멋지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저희오빠는 영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윤중 중학교 입학하였다가, 이사를 하게되어 마포중학교에 전학가게 되었습니다. 저희집에 있는 비디오는 오빠 때문에 생긴것입니다. 저희부모님은 유난히 조건제를 좋아하십니다. 예를들면 오빠나 제가 가지고싶은걸 걸고 시험성적이 80이상이다 그러면 원하는걸 사주셨습니다. 저희오빠때까지 고등학교를 연합고사를 통해 배정받았습니다. 오빠는 비도를 너무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그래서 부모님은 집앞에있는 마포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사준신다고 하셨습니다. 붙었습니다...그리고 지금제가 이렇게 타자를 치고있는 컴퓨터..역시..오빠 때문에 생겼습니다. 오빠가 처음 수능에서 패배를 맞보고 재수를 하게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서울에있는 대학에 들어가면 컴퓨터를 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명문대는 아니지만 재수후 오빠는 명지대학교 경영정보 학부에 입학하게되었고, 입학식과 동시에 하이마트가셔서 컴퓨터를 주문하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제가 어린시절부터 많이 힘들고 어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누가물어보면 항상 행복하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오빠를 만난것에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정은 돈은 남들보다 적었지만 가정의 행복과 화목만큼은 다른가정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 너무도 많았지만, 저희 네식구는 잘 이겨냈고, 앞으로도 행복하고 화목하게 잘살것입니다.
3. 이스라엘 역사
1. 시대별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1) 성조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셈족의 일부로 기원 전 19 - 17세기에 시리아 초원을 유랑하며 목축을 하던 유목민이었다. 그들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사악,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시대를 성조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를 탈출하게 된 그 뒷 배경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이주를 신앙적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있던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것은 고향과 친척등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약할 수 없는 앞 날을 믿음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살던 곳을 떠났다. 이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과 자손의 번영을 약속하시고, 계약을 맺으셨다.
(2) 이삭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 약속의 살아 있는 표시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결실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그에 따르는 의무와 축복은 이삭에게 계승된다. 그리고 이삭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에사오가 장자 상속권을 야곱에게 넘김으로써 계약과 의무와 축복은 야곱에게 계승된다.
(3) 야 곱
하느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인 축복을 야곱에게 주셨다. 야곱이 야훼와 대결함으로써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창세기 32,23 - 28)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혈육간의 질투로 인해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고 후에 야곱의 가문도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
2) 모세와 출애급
야곱과 그의 아들이 이집트로 이주한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새 왕조가 이집트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 모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히브리 男兒는 태어나는 즉시 죽이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누이의 기지로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파라오의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을 박해하던 한 이집트인을 죽인 문제로 에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를 뵙고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자기 민족을 구해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야훼의 도움으로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임을 체험케 한 결정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