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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107 14.06.03 16: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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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마을에는 북향, 서향집도 있다!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3-1> 전통문화, 과학으로 풀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도래마을 배치도

 

 

외암마을을 떠나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을 향하는데 과거 같았으면 걱정이 많은 여정이다. 중앙에 있는 광주시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광주시를 관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광주시를 관통하지 않아도 되는 우회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광주시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나주시 풍산리에 있는 도래마을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전형적인 한옥마을로, 가구 수가 거의 100여 호나 될 만큼 규모가 크다. 또한 마을지(誌)인 『도천동지(道川洞誌)』를 만들 만큼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간직한 마을이다.

마을의 뒷산인 감태봉(140미터)의 양쪽 계곡으로부터 내려온 맑은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도래마을을 통과하여 마을 전면(서쪽)의 농경지로 유입된다. 도래마을 주거지는 세 줄기의 수로를 중심으로 후곡(後谷), 동녘(東歷), 내촌(內村, 내곡(內谷))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도래마을을 ‘도천마을’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마을의 수맥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내 천(川)자 형국을 이루는 까닭이다. 도천의 천(川)의 우리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도래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도래마을은 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풍악산(286미터)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지의 서쪽 사면에 조성되어 전면으로 지형이 낮아져 농경지가 있고 후면에 산림이 위치하여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이다.

마을 뒤쪽에 있는 주산(主山)은 조선 군사가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는 산이라 해서 이름이 식산(食山, 292미터)이라고 부른다. 식산은 밥 ‘식(食)’자 모양으로 가파른 산을 의미하고, 도래에서는 ‘풍산(楓山)’이라고 칭한다.


 

 

도래마을 입구

 

 

일반적으로 마을이 배산임수의 경사 지형에 입지하면 주택의 후면에 경사지가 생긴다. 전통마을에서는 현대처럼 옹벽으로 처리하지 않고 단을 이루는 낮은 둔덕을 만들어 이를 꽃밭 등으로 조성하곤 한다.

장대석, 사고석(四塊石),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계단형의 사면을 축조하고 단에 수목을 식재하여 경사지를 처리한 것을 노단(露壇)이라고 한다. 노단은 비가 내릴 때 경사면에서의 유속을 감소시켜 토양 침식과 양분 유실을 방지하고 토지 전면에 수분을 고루 배분하여 경사지 토양이 건조해 지는 것을 방지한다.

그런데 도래마을은 주거지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옹벽이나 노단과 같은 특별처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주거지 후면과 측면의 가장 자리는 고저차가 크고 경사가 비교적 급하므로 자연 토사각(흙, 모래)으로 사면을 처리했다. 한마디로 도래마을은 그야말로 인공적인 처리가 거의 없는 자연 토착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도래마을의 특성 중에 하나는 방풍림이다. 마을의 우측 전면(북서쪽), 주거지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 높이 10여 미터 높이의 소나무군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특히 후곡 뒤에는 높이 10여 미터의 대나무와 20~30미터의 소나무가 섞여 띠 모양의 방풍림을 이룬다. 이렇게 다른 수종을 섞어 심는 것은 밀폐도를 더욱 높일 수 있어 방풍의 효과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다.

전통마을을 찾아가다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 건물들을 남향으로 건설하는 것은 이해되는 일이다. 사실 집을 지을 때 동?서?남?북향 어느 방향으로도 지을 수 있지만 남향을 주로 하는 것은 북향과 서향 집의 문제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북향은 겨울이 긴 한국에서 태양열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인데 서향인 경우도 이에 만만치 않다. 한 여름철 서향집의 경우 따가운 햇살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지 모르겠다. 에어콘을 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갑자기 올라가는 전기료 청구서를 보면 서향집을 탓해야지 전기료가 비싸다고 투덜댈 일만은 아니다.

선조들이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전통마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남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마을에서 모두 남향집만 있지 않은 것은 좋은 향만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마을에서 자신이 사는 건물의 중요성보다 마을에 맞는 흐름에 순응하여 집을 지었다. 당연히 북향, 서향집도 나오는데 이를 감수하는 것은 기본이다. 전통마을에서 각 개인의 집보다 지형을 어느 자연요소보다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도래마을은 원래 고려시대에 남평문씨들이 형성했고 이후 조선 초기에 강화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조선조에 성천부사를 지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수(洪樹)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 홍이가 남평현령을 지낸 인연이 있는 나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노안면 금안동 반송마을에 터를 잡았으나 홍수의 증손인 홍한의(洪漢義)가 이웃인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의 강화 최씨에게 장가들어 정착함으로써 도래마을이 점차 풍산홍씨의 집성촌이 된 동성마을 즉 씨족마을이다. 일설로는 홍한의(洪漢義)가 이곳에 사냥 왔다가 최씨 처녀를 만났다고 한다.

 

 

양벽정(좌측)과 영호정(우측)

 

 

마을 입구에 ‘영호정’이란 학당이 반긴다. 얼핏 보면 정자로 보이지만 건립당시 ‘도천학당’ 또는 ‘동학당’이라 불리며 학생들을 가르키던 학당이다. 영호정은 이조참판?대사헌?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뽑혔던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 남평현감을 있을 때 세운 4곳의 학당 중 하나로 추정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과거를 준비하며 독학할 수 있는 학당으로 많은 학사와 인재를 배출했는데 임진왜란으로 퇴락하자 1900년경 명칭을 ‘영호’라고 개칭했다. 일반적으로 정자라 하면 사교의 장, 풍류의 중심이었던 것과는 달리 차별화된 학당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전쟁 때 학당은 모두 불에 타고 정자만 남았지만 영호정은 사립학교로도 사용된 전력을 갖고 있다.

도래마을과 관련 있는 유명한 사람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다. 벽초의 조부 홍승목이 이 마을 출신인데 괴산의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중추원찬의(贊儀)가 되어 집안 경력에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그의 아들 즉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 때 금산군수로 있던 중 일제에 항거해 자결한 강골의 선인이다. 벽초가 20대에 겪은 비극인데 이런 배경을 토대로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단 한 편의 소설을 썼다. 그것이 유명한 『임꺽정』이다.

역사 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겨냥했는데 현대인들의 감각으로 볼 때 문장의 구성이 쉽게 읽히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사회생활과 어울려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한 내각 부수상, 북한 IOC 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선 사대부들 ‘남성 공간’ 사랑채에서…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3-2> 전통문화, 과학으로 풀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도래마을이 원래 홍씨의 집성촌으로 사는 사람의 80% 이상이 홍씨였다. 현재는 외성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아직 약 65%가 홍씨다. 그래서 문화재로 지정된 유산들은 모두 홍씨와 관련된다. 홍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51호), 홍기헌 가옥(중요민속자료 165호), 홍기창 가옥(전라남도민속자료 9호)인데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었다.

도래마을은 씨족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종가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원천적으로 종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현재 종가집은 집터만 남았고 풍산홍씨의 홍기응(洪起膺)가옥에서 풍산홍씨 석계공파의 차종손이 종가를 대신하고 있다.

홍기응 가옥은 마을 안쪽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51호로 지정됐다. 상량문의 기록에 따르면 안채는 고종 29년(1892)에 건립됐고, 사랑채는 1904년에 건축됐다. 당대에 도래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흥기응 가옥 안채의 모습. 이 가옥에는 일자형 안채가 가로로 놓이고 안마당을 사이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돼 있다. 이종호 제공

 

 

건물은 서향이며 직선 축으로 배치됐다. 안쪽에 일자형 안채가 가로로 놓이고 안마당을 사이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됐는데 축을 맞추면서도 방향은 직각으로 틀어서 남향이다. ‘ㄱ’자형 구조는 도래마을 전체 전통주택에서 유일하다. 대청마루는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는데, 이는 오후의 강한 서쪽 태양빛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앞쪽에는 솟을대문을 갖춘 행랑채가 배치됐는데, 대문에 문고리가 없는 게 특징이다. 이 집의 구조는 남도 양반 주택의 공간구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다. 각각의 건물에 돌담을 만들어 놓아 독립적인 건물로 했으나,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아 서로 이동하는데 불편함은 없게 만든 것이다.

다른 양반집에 비해 사랑채 앞마당이 좁고 사랑채와 안채의 간격도 좁은 게 흠인데, 일반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장서각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 서고가 있다는 것은 주인이 항상 책 읽기를 기본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의 여닫이 문에는 만(卍) 문양이 새겨져, 주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이종호 제공

 

 

안채는 1892년 건설돼 도래마을에 현존하는 안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자형 6칸 전후우퇴집으로 전체적으로 별단식 공간 구성을 보인다. 가구 구조는 5량가로 전면과 우퇴면만 원기둥이며 나머지는 네모기둥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여닫이 세살창판분합문에 ‘만(卍)’자 문양이 독특한다. 집안에 이런 장식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점을 미루어 볼 때 주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옥의 핵심은 건물의 주인의 행동반경 영역이라 볼 수 있는 사랑채와 안채이다.

사랑채는 살림집 중에서도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는 ‘남성공간’이다.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은 사랑채를 기거하면서 책을 보고 손님을 맞는 사회적 공간으로 활용했다.

사랑채는 대체로 중앙 부분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다. 큰 사랑방을 이어 붙이거나 혹은 뒤쪽에 작은 방을 두기도 하는데 이 방에 주로 서책을 두어서 ‘책방’이라 한다. 사랑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가 기거하는 큰 사랑방과 아들의 작은 사랑방이 서로 마주본다.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모습. ㄱ자형 사랑채에는 장서각이 있어 주인이 책 읽기를 좋아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종호 제공

 

 

안채는 여자들이 집안 살림을 주로 하는 ‘여성공간’으로 여자주인과 며느리, 딸들의 활동무대다. 일상적인 식사준비를 비롯해 제사음식 준비, 길쌈 등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곳에서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안채를 사랑채보다 크게 만든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나뉘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각 방을 차지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엄격하게 구분된 것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주택에 실천하는 목적으로 태어난 조선시대의 독특한 주거형식이다.

곳간에 음식과 종자를 서늘하게 보관할 수 있는 지하저장고가 있다는 건 흥미롭다. 이곳은 현대의 냉장고 같은 개념인데 다른 마을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형태다. 지하저장고는 도래 마을의 다른 집에서도 보인다. 또한 장독대를 담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 먹거리의 기본인 장, 즉 장독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정원시설은 전통적인 조경의 멋을 그대로 보여준다. 누마루와 사랑방을 중심으로 꾸민 사랑마당의 담장 쪽에 작은 정원이 있는데 상징성 위주로 나무를 심었다. 가운데는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석류나무, 동쪽 끝으로 절개와 옛 벗을 상징하는 매화나무, 서쪽 끝에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또한 석류나무 옆에 괴석을 두고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동백나무와 목련을 심었다. 나무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집안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누마루와 사랑방을 중심으로 꾸민 사랑마당의 담장 쪽에 작은 정원이 있는데, 상징성이 있는 나무를 심었다. 매화나무(왼쪽)는 절개와 옛 벗을 상징하며, 연리지(오른쪽)는 부부간이나 연인간의 사랑이나 나눔의 지혜 등을 뜻한다. 이종호 제공

 

 

배롱나무는 많은 이름이 있다. 중국이름은 자미화(紫微花)이며 얼마 전까지 백일홍으로 많이 알려졌다. 이것이 ‘배기롱 나무’를 거쳐 배롱나무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맥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 나무백일홍,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일홍은 백일 동안 꽃이 피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꽃 하나가 백 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들이 연속하여 피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먼저 핀 꽃이 지면 여럿으로 갈라진 꽃대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뭉게구름 피어오르듯이 계속 꽃이 피어오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한 번 핀 꽃이 지지않고 백 일을 견딘다고 본 것이다.

집안에 있는 나무는 한국의 어느 곳보다 자랑할만하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집을 관리하고 있는 홍천성 씨는 집안을 일일이 안내하는데 수령 100년 정도의 커다란 홍매화를 주목하라고 한다. 꽃 필 때인 봄에는 전국에서 관광버스로 사진작가들이 방문하는 명문 나무라고 한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단풍나무이다. 매우 큰 단풍나무인데 놀랍게도 연리지(連理枝)이다.

연리지란 어떤 특정한 나무 이름이 아니라 밑둥이 다른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이어져서 하나로 된 나무를 말한다. 또한 ‘연리목(連理木)’은 흔히 나무를 심을 때 너무 가까이 심은 탓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름이 굵어진 줄기가 맞닿아 생기는 현상이며 연리목은 연리지보다 다소 많이 발견된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가지를 통하여 하나로 되는 것이므로 두 몸이 하나로 된다는 뜻으로 부부간이나 연인간의 사랑을 비유하여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반면에 두 나무 사이에는 성장이 좋은 나무와 발육이 부진한 나무가 서로 양분을 지원해주므로 연리지 자체를 나무들의 ‘나눔의 지혜’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리지로 유명한 것이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다.

 

 

 

조선시대 ‘보안경’을 아시나요?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3-3> 전통문화, 과학으로 풀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하늘에서는 우리 둘이 비익새가 되어 살고지고
땅위에서는 우리 둘이 연리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천지는 영원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땐가 마지막 날이 오는데
그러나 이 슬픈 사랑의 한스러움은 길이길이 다할 날이 없으리.‘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쓴 것이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인 중에 하나로 꼽힌다. 이 이야기가 나왔을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저는 백낙천의 ‘장한가’를 전부 암송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다른 여자와 같은 화대로 저를 부를 수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시였다고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연리지는 과거 문헌상에도 상서로운 나무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내물왕 7년(362) 시조묘의 나무와 고구려 양원왕 2년(546)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지가 됐다고 썼고, ‘고려사’에는 광종 24년(973), 성종 6년(987)에 연리지 출현을 기록할 정도였다. 홍기응 가옥 외에도 우리나라 몇몇 곳에 연리지나 연리목이 있지만, 집 안에 이런 나무가 있거나 단풍나무가 연리지로 변한 것은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놓아 만든 구멍이 있는데, 이는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을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보안경‘이다. 이종호 제공

 

 

이 집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또 하나 있다. 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놓아 만든 구멍이 그것이다. 이 구멍의 용도는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을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현관문에 설치하는 ‘보안경’이다.

우리 선조들은 강도가 달려와도 갈짓자(之)만 걸었고 이방인이 밖에서 ‘이리 오거라’라는 소리에 늦게 문을 열었다고 투덜댈 정도로 양반의 체통을 중요했다. 또 다른 사람의 개인 사생활만은 철저하게 보호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안경이란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당대에 신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와 세태가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투박하던 시대에 남보다 앞선 아이디어를 내고 살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이야기다.

더불어 집 뒤에 약 0.5킬로와트 정도의 태양전지 판이 있다. 최첨단 현대문물 기기엔 태양전지로 전기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보면 선조의 앞선 생각이 후손에게도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옥에 대해 약간 설명하려고 한다. 우선 ‘호’와 ‘채’의 개념부터 정리하겠다.

호는 일정 단위 면적 안에 집을 이루는 여러 요소를 합한 개념이다. 안채, 사랑채, 부엌 등등을 합한 것이 호가 되는 것이다.

 반면 채는 단독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말한다. 한옥의 경우 집 하나에 여러 채의 건축물이 들어서므로 집 전체를 호로 부르고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채라 부른다.

건물의 구조를 설명할 때 3량가, 또는 5량가, 7량가라고 하는데 이는 지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설명이다. 3량가는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간단한 구조다.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종도리(서까래가 받치는 횡부재)를 설치하고 지붕의 앞뒤 양쪽 가장자리에 두 열의 처마도리(외벽의 상부에 있으며 서까래 등을 받치는 보)를 두어 세 열의 도리가 서까래를 받치게 만든 방식이다. 일반적인 일반적인 양반 건물은 5량가이며, 원형기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게 기본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65호로 지정된 ‘홍기헌 가옥‘의 모습. 위쪽 사랑채는 정면 4칸의 전후좌우 4방향 퇴를 꾸몄고, 대청을 한쪽으로 시설한 남도방식의 건축으로 지붕은 합각지붕이며, 기단이 높은 편이다.

아래쪽 문간채는 오른쪽으로부터 대문간 2칸, 광, 헛간, 잿간으로 이뤄졌고, 남쪽 끝의 지붕구조가 특이하다. 다소 번거로운 초가지붕을 계속 유지했다. 이종호 제공

 

 

중요민속자료 제165호로 지정된 홍기헌 가옥은 활 모양으로 휘어진 샛길을 따라 진입하므로 집 안이 밖으로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건물은 서향이며 전체적으로 직선을 축으로 배치됐다. 중심 맨 안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앞쪽에 북쪽으로 곳간채가 있으며, 안채의 중앙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있다. 사랑 마당 앞에 대문채를 두어서 안마당으로 출입하려면 사랑채의 남쪽 측면을 지나게 된다. 사랑공간과 안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나 사랑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구분되도록 배치돼 있다.

1790년에 건설돼 도래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사랑채는 정면 4칸의 전후좌우 4방향 퇴를 꾸몄으며 대청을 한쪽으로 시설한 남도방식의 건축으로 지붕은 합각지붕이다. 사랑채는 당시에 호화주택으로 법에 위반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단을 높이 쌓은 것 말고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인데, 무엇이 호화주택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면이 있다. 다행히도 이런 이야기에 휘둘려 집을 고치지 않고 옛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문간채는 20세기에 지어진 5칸 겹집의 초가다. 오른쪽으로부터 대문간 2칸, 광, 헛간, 잿간으로 이뤄졌는데 남쪽 끝의 지붕구조가 특이하다. 마을의 다른 집들은 대부분 새마을 사업 때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지붕 또는 아예 벽돌집으로 다시 지었다. 이런 시절을 거치면서도 다소 번거로운 초가지붕을 계속 유지했다. 이 집도 장독대를 담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어 대가집에서 먹거리를 중시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홍기창 가옥‘은 안채만 남아 있다. 비교적 큰 규모라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각 방 앞에는 툇마루로 외부와 쉽게 연결된다. 안채는 특별히 높은 기둥 2개가 있고, 7량가로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왼쪽 아래)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이종호 제공

 

 

전라남도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된 홍기창 가옥은 1918년에 건축됐는데 원래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갖췄으나 현재는 안채만 남았다. 평면 구성과 건물 구조가 건실해 당시 주택 모양을 살필 수 있다. 안채는 비교적 규모가 커서 필요한 생활공간을 확보했고, 각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둬 외부와 편리하게 연결됐다. 안채는 서향으로 배치됐고, 앞에 안마당이 있으며, 안마당 남쪽에 최근에 지은 아래채가 있다. 담장은 사랑채 터와 안채 뒤까지 크게 막아서 경계로 삼고 있으며, 예전의 중문을 지금의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2고주(高柱, 여러 기둥 중에 특별히 높은 기둥), 7량가다.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사용한 합각지붕이다. 원형기둥은 일반 민가에서 보기 드문데, 이 집의 경우 영광바닷물에 3년간 담궜던 비자나무로 만들었다. 대청마루는 검은빛을 띄는 먹감나무를 말 오줌에 2년간 담궜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부와 권리를 과시하려던 당시 전남의 부농주거의 특성이 배어 있는 건물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선정한 시민문화유산 제2호인 ‘나주도래마을옛집‘의 모습. 안채와 문간채, 별채로 구성됐고,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흡수되면서 한 채의 복합형 살림집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종호 제공

 

 

도래마을에는 남다른 우리 유산인 ‘나주도래마을옛집’이 있다. 이 집은 시민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된 건물인데, 시민유산은 국가에서 미처 지정하지 못한 비지정 문화재를 직접 보전하려는 운동으로 추진됐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건설된 대지 1051㎡, 건평 157.78m² 규모의 나주도래마을옛집을 시민유산으로 지정하고 관리에 들어갔다. 시민유산으로 선정된 이 한옥은 안채와 문간채, 별채로 구성돼 있는데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흡수되면서 한 채의 복합형 살림집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는 1920년 전 조선시대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으로 근대화 과정 중에 요구되는 효율적 공간 활용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건물 자체의 규모는 작지만 지정문화재에서 느낄 수 없는 아기자기하고 친근감이 넘치는 시골집과 유사한 한옥이므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6년에는 이 집을 문화유산기금 1억 원으로 매입했다. 이후 국무총리산하 복권위원회 복권기금 6억 원을 들여 안채와 대문채를 원형으로 복원했으며 다목적공간으로 별당채를 신축했다. 별당채는 현대시설도 도입한 한식으로 내부에 화장실, 샤워, 부엌을 갖추고 있다. 이 집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에 이어 시민문화유산 제2호가 되었는데, 내셔널트러스트 3호로 지정된 곳은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이다.

 

 

 

붙어있되 떨어진 공간...채나눔의 미학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3-4>전통문화, 과학으로 풀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도래마을이 씨족마을이라는 건 집과 집 사이의 연계로 알 수 있다. 원래 마을은 집들이 밀집해 배치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도 중요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택 사이는 서로 분리돼 있다. 그러나 씨족으로 구성된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서로 친척 간이므로 이웃 사이에도 일상적인 왕래가 잦아 주택 사이가 서로 연결되면 유리한 경우가 많다.

● 전통주택, 분리와 연결의 조화

주택은 기본 속성상 분리와 연결이라는 서로 모순된 요구가 존재한다. 도래마을 집 사이에 이런 이중적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몇몇 집들이 각각 대문과 담장으로 독립된 주거 영역을 형성하는 동시에 인접한 주거로 왕래할 수 있는 샛문을 두어 서로 연결한 것이다. 거주자들이 혈연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물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물론 현재 도래마을은 현대화에 밀려 점차 이런 샛문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사는 아름다운 모습이 곳곳에서 보일 것이라 기대해 본다.

 

도래마을 집 사이에는 ‘분리와 연결‘이라는 서로 모순된 요구가 잘 나타나 있다. 사진은 도래마을이 아닌 민속마을 이미지다. 이미지비트 제공

 

 

한국 전통마을에서 주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마을마당이 제대로 조성된 경우는 드물다. 대개 마을길이 조금 넓혀진 곳이 마을 마당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래마을은 세 부분의 주거지 모두 안길이 주거지 안쪽에서 몇 갈래로 분기하는 지점에 마을마당이라고 할 만한 공간을 두고 있다. 동녘에서는 홍기응(중요민속자료 151호) 가옥 앞의 바깥마당이 마을마당 역할을 한다.

내촌과 후곡에는 좀 더 넓은 마을 마당이 조성돼 있다. 현대화는 이곳에도 어김없이 들어왔는데 그 이용방법이 재미있다. 후곡의 마을마당은 기본적으로 농작물 건조장으로 사용되지만 놀이기구들을 설치하여 어린이 놀이터로도 사용한다.

도래마을에는 여러 정자가 있는데 흥미있는 것은 우산각이다. 우산각은 전라도 지역에서 마을 입구나 마을 주거지와 들판 사이에 세워진 정자로 다른 말로는 모정(茅亭, 짚·새 따위로 만든 정자) 또는 시정으로 불린다. 원래 마을에서 공동으로 집회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지만 도래마을의 우산각은 오늘날 주로 마을의 여자 노인들이 사용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전라도 지역의 우산각은 여름철에 주로 사용되는데다 겨울철도 다소 온화한 기후이므로 대체로 마루로만 되어 있는데 이곳은 온돌방 두 칸, 마루 네 칸, 부엌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면과 측면이 2 : 1의 비례를 가진 평면 비례는 전라도 지방 모정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반면에 내촌 입구의 시멘트 기와를 얹은 괴고정은 과거에 콘크리트 구조로 건설되었는데 최근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는 시류에 따라 전통 한옥풍인 도천정으로 탈바꿈했다. 도천정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타 마을들과 같이 느티나무가 마을이 있다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 정자, 마을사람의 사랑방

마을에 사람들이 집결할 수 있는 중심공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래마을은 세 갈래의 안길이 모이는 곳에 있는 영호정 학당 옆의 양벽정이 그 역할을 한다. 조선 중기 선공감역·성균사업 등의 관직을 지낸 홍징이 선조 25년(1587) 능주현 화포(현재 화순군)에 있던 것을 1948년 후손들이 이전한 것으로 흙과 돌로 이루어진 흙돌담길이 인상적이다. 양벽정과 마을 뒤 감태봉을 잇는 선은 도래마을 전체 공간의 중심축으로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선이다. 양벽정의 입구는 목탑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옆에 작은 화장실이 있다.

 

 

도래마을에 있는 정자 ‘계은정‘은 다른 정자들과 달리 마을 공간에서 벗어나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이종호 제공

 

 

양벽정은 서향 건물이지만 전면 5칸, 측면 2칸 모두 10칸 규모이며 온돌 3칸, 마루 7칸으로 팔작지붕이며 마루 앞으로 길게 내민 처마가 여름철 햇볕을 차단해 주는데 시문이 적힌 현판만 19개가 있을 정도로 정자의 용도를 잘 보여준다. 답사하면서 피로한 김에 누워 낮잠 한숨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대청 위에 한 사람이 오수를 즐기고 있어 함께 누울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벽정은 도래마을의 중심시설일 뿐 아니라 풍산리를 이루는 다섯 마을에서 함께 사용하는 공동시설이다. 그러므로 다섯 마을 주민들은 음력 정월 초4일 음식을 추렴하여 새해를 축하하고 공동으로 세배를 한다. 이때 전해에 수확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음식을 내는데 양벽정에서 노인회관과 동계(洞契)의 모임장소 구실도 한다.

양벽정 앞에 연못이 있는데 영호정과 경관을 공유한다.

양벽정과 대칭되는 위치에 계은정이 있는데 다른 정자들이 마을 앞쪽에 세워진 것에 반해 이곳은 마을 공간에서 벗어나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마을 앞의 정자들과는 달리 주산봉의 중턱 즉 마을 영역의 뒤쪽 경계부분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세워졌다. 사대부들이 현실적인 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조망이 좋은 곳에 누정(樓亭)을 세웠는데 계은정이 바로 그런 뜻으로 지은 것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 모두 6칸의 정자로 그중 중앙 부분에 온돌이 1칸, 마루가 5칸이며 지붕의 전후좌우로 금속재로 된 처마를 달았다. 일반적으로 한옥에 이질적인 재료를 가미했을 때 어색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계은정은 그런 감이 들지 않는다. 한옥도 현대화의 물결 즉 디자인에서도 변형이 가미되어야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철쭉과 배롱나무들이 주위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철쭉꽃이 필 때와 여름철의 풍광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곳에 오르면 도래마을이 앞으로 보이고 멀리 방풍림 그리고 송림제라는 저수지가 보인다.

 

 

도래마을 계은정 앞에 있는 연못에서 시작된 물은 마을공간을 관통한다. 덕분에 이 마을은 물과 녹지가 어우러져 보기 드문 환경친화적 경관을 연출한다. 이종호 제공

 

 

계은정 앞에는 연못이 있다. 계은정의 연못은 천원지방이라는 원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연못 형태는 사각형에서 다소 변형된 凹형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 원형의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식수는 하지 않았다. 도래마을의 물은 높은 곳에 위치한 계은정 연못에서 시작해 마을공간을 관통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양벽정 앞의 연못으로 흘러든다. 도래마을의 두 연못의 물과 녹지가 어우러져 보기 드문 환경친화적 경관을 연출하는데 전체 마을을 둘러보아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으므로 답사할 때 서두르지 말고 꼼꼼이 전통마을의 참 맛을 음미하기 바란다.

도래마을이 속한 나주는 1000년 고도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고 있다. 세계적인 팝스타인 고 마이클 잭슨이 전용비행기로 공수하면서 나주 배만 먹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나주 배를 혹자는 하얀 속살이 우리 민족의 색깔이므로 더욱 맛갈이 난다고 한다.

세종 때 한글창제를 도운 신숙주, 거북선을 발명한 나대용 등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 이곳 출신이고 조선 성종 때 중국 3대기행문(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중 하나인 ‘표해록’을 지은 최부도 이곳 출신이다.

매년 유채꽃과 더불어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축제가 열려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한다. 10월에는 나주 금성관 일대에서 나주 영산강 문화축제가 열리는데 마한의 추수감사제인 ‘소도제’를 시작으로 왕건과 장화왕후 궁중혼례, 삼현육각 공연, 나주목사 부임행사 등이 성대하게 꾸려지므로 우리 역사를 함께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인근에 보물 1310호의 대웅전이 있는 불회사, 운흥사(중요민속자료 12호),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 도갑사, 쌍봉사, 보성차밭, 소쇄원 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세계유산 화순고인돌의 체험학습관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 있는 전라암도산림자원연구소에서 자연의 맛을 한껏 음미할 수 있다.

 

 

 

New 나주 [나주시-도래힌옥마을]

 

 

참고문헌:
참고문헌 :
「나주도래마을 한옥의 건축형식에 관한 연구」, 류성룡,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9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눌와, 2002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한필원, 북로드, 2007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과학삼국사기』, 이종호, 동아시아, 2011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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