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법 시행에도 비극 되풀이
재계 법 무력화 시도에 솜방망이 처벌
검찰은 기소 꺼리고 법원은 집행유예
“중대재해법 효력 높여 참사 막아야”
경기 화성시 일차전지 제조업체인 아리셀에서 24일 발생한 화재로 23명이 숨지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을 더욱 실효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공장은 상시 근로자가 50명 안팎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사업장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화재 사고가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자가 1명 이상이거나 같은 유형의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또는 유사한 유해 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 질병을 앓은 이가 1년 안에 3명 이상 생기면 적용된다. 올해 1월 27일부터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에도 확대 적용됐다.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는 중대재해 처벌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이미 사고가 난 다음이라 사후약방문일 수밖에 없다.
25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관계자들이 화재 원인을 찾기 위한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2024.6.25 [공동취재] 연합뉴스
중대재해처벌법은 2022년 1월 27일부터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에 들어갔고 올해 1월부터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모든 기업으로 대상이 확대됐다. 이 법의 본래 취지는 기업 대표와 경영책임자가 준수해야 할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강화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 중대 사고를 예방하는 데 있다.
그러나 법을 시행한 지 3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중대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실효성이 떨어진 이유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경제단체들이 이 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켜 법 자체를 무력화하려 하고, 사법부도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 시행 이후 중대재해 사고가 유의미하게 줄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아전인수식 해석이 난무한다. 재계는 법의 실효성은 없고 기업 경영만 위축시킨다고 주장하고 노동계는 그나마 법이 도입되면서 중대 사고가 감소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경총이 지난 14일 공개한 ‘기소·판결 사례로 본 중대재해처벌법 핵심 체크포인트’ 자료를 보면 법 시행 후 지난달까지 약 2년 4개월간 기소된 기업(사업주)은 51곳이다. 현재 법원은 이 중 17건에 대해 판결했다. 15건에 대해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됐고 징역형은 단 2건에 그쳤다. 작년 12월 한국제강 대표가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을 확정받았고, 지난 4월 경남 양산시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대표가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이에 대해 재계는 기업인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소된 사건에서 기업 대표나 경영책임자의 예방 조치와 사고 원인 등을 보면 오히려 처벌이 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징역 2년 형을 받은 기업 대표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 10개월 동안 대한산업안전협회로부터 안전문 방호장치가 파손돼 사고 위험성이 높으니 즉시 개선이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보고받았다. 그러나 대표는 이를 무시했고 사고에 대비한 작업 중지나 근로자 대피, 위험 요인 제거 방안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기소된 다른 사건들도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고 원인은 대동소이하다. 기업 대표나 경영책임자의 안전 소홀이 노동자 사망 같은 중대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검찰 기소를 피하거나 기소된 사건도 집행유예로 결론 나기 십상이다. 재계가 전방위적 여론전을 펼치며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사법부는 이에 부화뇌동해 솜방망이 처벌을 하며 법의 효력을 반감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 사업장도 반드시 적용 되어야 하는 이유' 카드뉴스 중에서. 민주노총 홈페이지.
재계는 아리셀 화재 참사 같은 중대 사고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도 집요하고 줄기차게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달 만해도 여러 차례 법 개정을 건의했다. 지난 5일 경총은 현장 밀착형 안전보건·환경 분야 규제개선 과제 총 120건을 고용부와 환경부, 국무조정실 등 관련 부처에 제출했다. 일주일 후인 12일에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해 달라는 내용의 경영계 건의서를 고용부에 전달했다. 경총은 건의서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넘게 지났지만 뚜렷한 산재 감소 효과가 확인되지 않고, 불명확한 규정으로 인한 현장 혼란과 경영활동 위축이 심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4일 ‘기소·판결 사례로 본 중대재해처벌법 핵심 체크포인트’ 자료를 발표할 때는 “법을 위반해 재판에 넘겨진 기업 중 약 80%가 중소기업인”이라며 '약자 코스프레'를 했다. 지난 21일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정책 토론회’에서도 법을 하루빨리 개정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앞서 20일에는 대한상공회의소가 50인 미만 702개 중소기업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응답 기업의 절반가량이 “중대재해처벌법 체계 구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면책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계가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제시한 사실은 오히려 법을 강화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5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 사고 발생률이 높다는 건 이들 기업에 대한 감시와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망 사고가 줄지 않았다는 점 역시 중대재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법을 오히려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중대재해처벌법의 효력을 높여야 ‘아리셀 화재 참사’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