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기사님께서 나리분지에 씨껍데기술이 유명하다고 모두 한 잔씩 하고 가란다.
그러나 다음이 성인봉 산행인데 술먹고 앉아있을 시간이 있어야지,
목젖이 팔랑거렸지만 성인봉 산행의 안전을 위하여 씨껍데기술은 다음에 마시기로 하고,
(준비체조)
둥그렇게 모여서 일어섰다 앉았다 팔도 돌리고, 다리도 돌리고, 고개도 돌리고,
먼데까지 와서 작은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나니까 안전을 위하여 몸부터 풀고 "출발!~ "
(나리분지에서 단체사진)
참 내, 인연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 또 한사람 생겼다.
또 뒤에서 어떤 분이 "산행팀끼리 나리분지 이정표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고 갑시다."
그런데 또 빠진 사람은 왜 빠졌나, 발걸음을 떼지 못하더니 그새 씨껍데기술 받으러 갔는가?
(단풍 들었다)
성인봉을 향하여 첫발을 떼자 아, 벌써 가을인가, 세월이 그렇게 되었는가?
새파란 잎이 반질반질 윤이나서 반짝거리던, 길가의 잎이 동그란 잡초가 그만 노리해졌다.
(나리분지)
울릉도는 화산폭발로 생긴 화산섬이라 지형이 울퉁불퉁 하고 도로도 꼬불꼬불 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나리분지는 평지다. 화산 때 생긴 분화구로 땅이 푹 꺼지고 바닥이 평평하다.
(사탕수수)
평평한 평지에 이제 한창 무성해지는 부드럽고 시원한 사탕수수가 너무도 싱그럽다.
(녹음)
이미 물이 든 것은 들었지만, 먼산의 녹음은 싱싱한 여름 뜨거운 8월의 모습 그대로다.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푸른 산과 푸른 들을 보고 걷는 내 마음도 푸르다.
(투막집)
이렇게 좋은 날, 그 무엇인들 좋지 않을까.
발아래 짓밟혀 멍이 든 잡초도 좋기만 하고, 노래기 볼볼 기는 초가 불편한 투막집도 좋기만 하다.
(섬바디)
울릉도 특산식물 섬바디가 생글생글 마중 나왔다.
(?)
잎이 새파란 이름없는 무명초도 나풀나풀 마중나왔다.
(신령수)
앞사람 쫒아갈 일도 없고, 뒷사람 기다릴 일도 없고, 그저 가는 대로 가면 되는 성인봉 가는 길.
"샤샤샤" "속속속" "지지지"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를 들으면서 살랑살랑 걷는 성인봉 가는 길,
신령수 앞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친다. "머리가 맑아지는 신령수, 신령수 한 잔 마시고 가세요."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신령수는 마시지 않았다. 아니 신령수까지 마실 필요가 없어졌다.
나리분지에 드는 순간, 푸른 녹음과 맑은 공기로 이미 귀와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고 지구가 돌고 머리가 띵한 사람을 위하여 신령수는 생략, 나는 직행이다.
(예쁘다)
야, 이건 또 뭔가, 숲속에 별이 떴다. 초록별이다.
반짝반짝 반짝, 울릉도 성인봉 원시림에 초록별이 떴다.
(나리분지 녹음)
신령수를 지나고 본격적인 산길을 맞으면서 끝나는 평지가 아쉬워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야, 멋있다! 나리분지가 한폭의 그림이다.
움푹 패인 분화구가 한송이 푸른 꽃으로 피어났다.
(나리분지 녹음)
진짜, 너무 좋다!
발걸음을 뗄 수가 없어서 또 보고, 또 보고, 뒷걸음을 걸으면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쌕쌕, 그제 내린 비로 땅이 꼽꼽하여 걷기도 좋고 감촉도 좋은데 왜 이렇게 숨이 찰까?
그래도 죽겠다는 소리는 못하고 "하느님 숨 좀 안차게 해주이소" 하고 쌕쌕거리며 올라오니,
아우 저걸 어쩌나, 저 큰 나무가 할딱 벗고 서서 어디로 어떻게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살까?
좀 더 살이 많고 푹신푹신하고 사방으로 울이 쳐진 안전한 곳에다 터를 잡지,
좋은 땅 다 빼앗기고 능선에다 터를 잡아 이넘도 찌지밟고 지나가고 저넘도 찌지밟고 지나가고,
내 자신도 숨이 차서 목구멍에서 문풍지 떨리는 소리가 나고 죽을 지경인데 저 나무가 걱정이다.
(계단은 끝이 없다)
오르막은 계속되고, 계단은 끝이 없고, 몸은 무거워서 천근이고, 숨은 차서 쌕쌕이고,
(섬바디)
휴유, 안되겠다 좀 쉬었다 가자. 배낭 내리고 서서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물 한 잔 마시고,
예쁜 것들, 얼마나 숨이 차던지 숨쉬기 바빠서 모르고 있었는데 섬바디가 죽 나를 따라왔다.
계단 금줄을 잡고 궁둥이 뒤로 쑥 빼고 섰으니 저 안쪽 숲에서 섬바디가 나를 보고 생긋 웃는다.
쉬었으니 이제 또 가야지, 가자, 어서 가보자, 산에서는 가는 게 일이다.
어제 독도에서 들었던 홀로아리랑을 마음속으로 부르면서 나는 지금 울릉도 성인봉으로 간다.
"아리랑 아리랑 홀로아리랑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 ~ ~ 가보자"
(성인봉 984m)
야!
성인봉이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까지 3.8km, 2시간 만에 올라왔다.
숨을 헐떡헐떡하면서 어른들은 인증사진 찍는다고 정신없고, 아이들은 정상석 앞에서 퍽 퍼졌다.
그래, 해본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는데 이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왔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집에 가서 조용히 책상에 앉아보면 그래도 가장 쉬운 것이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성인봉에서 본 나리분지)
노래처럼 말하지만 울릉도는 공기가 너무너무 좋다.
찹찹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온몸에서 쏴한 바람이 드라이아이스처럼 피어오른다.
한여름밤에 우물물에 목욕하고 풀멱여 다듬이질한 깔깔한 세모시이불 덮고 자는 기분이다.
하늘은 어쩌자고 또 저렇게 맑으며,
바위는 또 어쩌자고 저렇게 날카롭게 튀어올랐느냐.
성인봉 전망대 난간을 잡고 선 내마음 황홀하다.
금방 구름이 지나가고, 금방 바람이 지나가고,
그 사이 금방 또 해가 나타나고, 그 사이 금방 또 안개가 깔린다.
변화무쌍이라고 했나, 울릉도 성인봉의 날씨도 변화무쌍이다.
(내려가는 길)
이제 하산한다.
산이 아무리 좋아도 산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내 죽으면 산에다 묻어다오"
(울릉도 고비)
하산길은 고비길이다.
온 산에 고비가 이끼처럼 덮혔다.
(고비길)
새파란 고비길은 먼저 간 사람들이 다져놓아 바닥이 쫀득쫀득 한다.
촉감이 얼마나 찰지고 좋은지 한줌 뜯어내어 뭉쳐서 찰싹찰싹 때리면서 앉아 놀고 싶다.
(팔각정 쉼터)
팔각정에서 그냥 물 한잔 마시고,
아무 곳이나 보이는 대로 그냥 한번 쳐다보고,
(마가목이다)
출렁출렁 출렁다리를 건너고 탁탁탁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마가목을 발견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좀처럼 손짓은 안하는데 손짓을 하면서 "마가목이다" 하고 소리치고,
뒤따라오던 사람, 나무에 뱀이라도 기어올라가는 줄 알고 놀라 "뭐꼬 뭐꼬" 하면서 달려오고.
(마가목)
오래전 강원도 설악산에서 어떤 할머니가 마가목이 기관지에 좋다며 권하기에 한 봉지 샀다.
끓여서 차로 마셨는데 시큼텁텁한 것이 비위가 거슬려 끝내 한 봉지 다 못 먹고 버린 적이 있다.
마가목을 살때는 약효만 생각하고 샀으나 그것을 버리고 나니 마가목나무가 몹시 궁금했다.
내 언젠가는 마가목 나무를 꼭 한번 보고 말거야, 꼭 열매를 확인할거야, 하고 벼르고 있던 차에
마침 마가목 열매가 열릴 때 마가목이 많은 성인봉을 오게 되어 마가목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가목 열매)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 기쁠 때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기쁘던지 손짓까지 해가면서 큰 소리로 "마가목이다" 하고 소리질렀던 것이다.
(도동마을)
쉬엄쉬엄 걸어서 어느새 산을 넘어 도동마을이 보인다.
산에 에워싸여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도동마을, 녹음 짙은 8월의 도동마을이 평화롭다.
(도동전망대 케이블카)
그냥 두면 더 좋을 것을,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와서 삐대니까 밭둑도 세멘으로 발랐다.
세멘밭둑에 앉아서 케이블카를 바라보고 그저 "좋다" "좋다" 좋다를 연발하며 축 처져 있으니,
저 앞에서 터벅터벅 배멀미를 하고 토하물 버리려 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아저씨가 온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멀미기는 좀 어떻습니까, 속은 괜찮은가요?" 하고 인사를 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아 멀미동창" "나는 3등"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받는다.
너무도 재미있고 유쾌한 인사에 난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멀미동창에 자신은 3등이라고?
오물봉다리를 들고 배 모서리에 처박혀도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나보다는 낫고,
비틀비틀 술취한 사람처럼 기둥을 잡고 기어서라도 자기 손으로 토하물 처리는 할 수 있었으니
바닥에 퍼질러 앉아 의자에 머리 처박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여인보다는 자기가 낫다는 그 말이지,
그럼 1등은 완전 뻗어버린 나, 2등은 바닥에 퍼져버린 여인, 3등은 배 기둥 모서리에 처박힌 아저씨.
(밭둑)
나는 뱃살이라도 있지, 아저씨는 살 하나 없이 삐쩍 말라가지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겠나 싶더니
펄펄 살아 일어나서 거뜬하게 성인봉 산행까지 하고 나를 웃기는 여유까지 가졌다.
2등을 한 여인은 멀미 때문에 두통이 일어나 내일 성인봉도 못가겠다고 하여 개보린 두알 주었는데,
밤새 나았는지 아침에 보니 남편 손잡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진 찍고 내앞에 쌩쌩 날아가더라.
(도동)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울릉도 말만 나오면 또 가고 싶어서 한 가랑이 두다리 끼고 나서는 나,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기도 한데 공기가 워낙 맑고 좋으니까 힘든 줄도 모르고 금방 다 내려왔다.
나리분지에서 도동까지 총 7.9km, 쉬엄쉬엄 걸어서 4시간 걸렸다.
2시간 2시간
나리분지-------------------성인봉-------------------도동
3.8km 4.1km
(썬플라워호)
참 좋은 세상이다. 울릉도는 도시락 짊어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산행 마치고 내려오니 식당에서 점심상 차려놓고 기다린다.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울릉도 이야기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도동 해변 한 바퀴 돌고,
(도동항)
울릉도는 올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재미나는 일도 많고 추억거리도 많을까.
아직 못다 본 곳,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모자란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날씨도 좋고, 관광도 신나고, 산행도 가볍고, 재미와 추억을 가득 담아준 알찬 울릉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