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며 앞에서 마주 오는 또 다른 나를 만났을 때
모두가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어떤이는 커다란 지팡이
어떤이는 반야심경을 빼곡하게 쓴 지팡이를
또 어떤이는 낡은 배낭과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걸었을지 상상케 했고
또 어떤 이는 긴 수염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로서 그 내공을 보였다.
모두가 대단했던 분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런 분들을 오고 가며 만나는지
이번 걸음에도 3m 되는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분을 만난다.
오늘 하천은 백제 제26대 성왕과 그의 맏아들 창(昌)의 피눈물이 고여있는 충북 옥천의 금강 지류인 서화천이며 그 길을 통해서 옛 삼국의 신라와 백제의 골 깊은 사연도 알아본다.
이른 아침 첫 기차로 충북 옥천읍에 내려 다시 택시로 금산군 추부면 용지리 마을에 내려 금성산으로 오른다.
금성산에서 본 충남 제일봉인 서대산이 우뚝하게 보이고 멀리 영국사가 자리하는 영동의 천태산이 "나 여기 있다"며 그 위용을 드러낸다.
천태산과 봉황이 날개를 편듯한 금산의 진악산이
인삼의 고장임을 알리며 길게 보이고
백제-고려시대의 금성산성이 있던 금성산
보시는 것과 같이 조망이 좋아 옛 병사들이 이곳에서 적이 오는지 안 오는지 골이 깊어 못 오는지 바라보던 곳이라
조망이 아주 빼어난 곳이다
뒤로는 호남의 금강이라는 대둔과 계룡이 있지만 가려진 나무로 인해 보이지 않고
잠시 조망구경하다가 일어선다.
금강으로 흐르는 서화천은 백제 26대왕과 그의 아들인 창(27대 왕) 왕의 눈물이 서려진 하천이라 오늘 길은 조금 특별한 물길 여행이 될 것 같다.
서하천 지나간 경로와 거리
산성 안에는 비가 오면 물이 가득 찼을것 같은 웅덩이가 있고
옛 흔적인 토기와 파편이 있나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서화천 물길 여행은 금성산 북쪽 계곡이 가장 길지만 갈수기인 점을 감안해 금성산 아랫마을인 윗못골(용지리) 마을 샘터에서
시작하는 걸로 한다.
금성산성 안내판
금성산 북쪽 계곡이 조금 더 길지만 아래 마을 우물을 감안해서 마을로 이어지는 서쪽 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면 잡목이 순서 없이 반기고
서화천은 충남 금산군 추부면 금성산에서 발원하여 옥천땅을 지나 대청호로 흐르는 약 35km의 하천이다.
바위틈에서 내려오는 첫 물을 만난다.
이후로는 길이 좋고
앞으로는 대전과 금산의 경계봉인 만인산이 지척이고
계곡 따라 내려오면 만나는 윗목골 마을
마을이 생긴 시점부터 있던 마을 우물인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나온다는 샘터다.
서하천 발원지를 금성산 북쪽 계곡에서 내려오면 마을을 조금 벗어나 이곳의 우물을 찾지 못하니
애써 산으로 꾸역꾸역 올라 찾는 것보다 이곳을 발원지로 해도 될듯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 샘터
멀리 보이는 산은 금성산
350년 된 마을 느티나무
마을의 유래를 나무에서 찾는다면 최소 350년 이상된 마을이며 우물도 그 시점부터 있었을 걸로 보인다.
물길여행 아직은 그 힘이 미미하고
금산땅이라 인삼밭에 지주목 세우는 작업 중인데
추워서 불을 피워놓은 곳이 있어 잠시 곁불을 쬐고
양반은 아무리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 했는데...
지나는 길에 손가락 하나만 잠시 걸치고 갑니다.
목골 저수지를 지나
금산군 추부면 어느 분식집에 들러
추부면은 깻잎 농사를 짓는 곳이라 깻잎이 들어간 김밥인데 맛이 아주 좋다.
금산군 추부면
추부면은 깻잎과 추어탕으로 유명한 동네죠
오고 가는 길에 꼭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금산군 추부면은 좌 달기, 우 달이산이 곁에 있으며 계곡형 마을이기에 길게 이어지는 비닐하우스에는 거의 대부분이 깻잎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금산군 추부면을 크게 보면 금산을 대표하는 서대산이 동쪽에 있고, 남쪽에는 금성산, 서쪽으로는 지봉산이 감싼다.
보이는 곳은 오래전에 백제 미전산성이 자리하던 추부면 마전리 방향
서화천(추풍천) 하천은 비교적 깨끗하게 흐르며
저 아래 대청호에 살던 수달이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가끔 고개를 든 수달이 보이기도 했고
도로가로 나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녀석도 보였다.
장마철에 대청호로 가야 했을 헌 옷과 비닐이 떠내려 가다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 녀석을 잡고 버티는군요
마치 미친? 치맛자락 같은 모습인데
저런 건 다음 장마가 오기 전에 제거를 해야 할 텐데 미관상 좋지 않음에도 방치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헌 옷 수출국으로 세계 5위이며
세계적으로 한해 만들어진 옷은 천억 벌
버려지는 옷은 300억 벌이 넘는다.
뭐든 아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하천가로 비닐은 지자체에서 공공근로 투입해서 하루빨리 제거해 주길 바래본다
요광리로 가며
요광리 은행나무
전년기념물 84호다
매년 마을 주민들께서 정성을 다해 목신제(木神祭)를 봉행하는 신성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높이 24미터 가슴둘레 13m이며 수령은 1,000년이라고 한다.
머리 나쁜 아이도 한밤중에 나무밑에 한 시간만 세워 놓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안 생기던 아이도 낳게 해 준다는 은행나무
시간만 있으면 한 시간 정도 나무 밑에 서있고 싶지만 금줄이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시간 되시는 분은 오고 가는 길에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하천 정비사업 중인데 지나는 길에 몇몇 곳 공사하느라 온통 흙탕물 가득하고 걸쭉한 모습이 마치 한여름 얼음 동동띠운 미숫가루 타놓은 것 같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간직한 충남제일의 서대산이 보이고
저짝 뒤로 흐르는 물도 흘러 흘러 서화천으로 합류한다.
금산군 추부면 공공하수리장을 지나고
지방하천 추풍천(서화천)
충남제일의 산답게 그 위용이 웅장하고 대단하며
정상에 서면 대전과 옥천 금산일대가 잘 보이고
옛 삼국시대의 산성들이 즐비했던 마성산을 필두로 마성산성과 동평 산성, 용봉산성, 삼성산선, 그리고 대원군의 척화비까지 서화천의 금산천을 끼고 걷는 서대산-천대산-대성산-장령산-마성산-용봉-삼성산 척화비로 돌아봐도 좋을듯한 산행 코스가 나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포크로 공사하는 곳이 많아 온통 흙탕물이며 하천가 나뭇가지에는 비닐이 많이 보인다.
충청도를 남도와 북도로 가르는 곳인데
물을 건너면 충북 옥천군이고 이곳은 금산군 추부면이다.
옥천군 군서면 상지리 마을에 들어와
상지리 마을에서 서화천을 건너 진행
멀리 식장산이 보이는 걸 보니 대략 끝날 시간이 된 듯
서화천 건너 멀리 마봉산이며 저곳부터 옥천을 둘러싸는 산들은 대부분 산성들이 있었던 곳이죠
마성산성, 동평산성 용봉산성 삼성산성이 길게 옥천군 삼양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곳으로 신라 변방의 성들이죠
역사가 묻어나는 서화천
향수의 고장 옥천
정지용 님의 "향수" 그리고 "고향"
서대산 동쪽과 대성산 서쪽에서 흘러온 금산천(상곡천)이 서화천으로 합류되는 곳으로 물은 아주 맑게 흐른다
상중리 마을 앞 버스 승강장
모퉁이 돌아와 승강장을 쳐다보다가 아이!~C? 깜짝이야
놀라 자빠질뻔했습니다.
무슨 80년대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
인형인데 왜 이런 걸 버스 승강장에 두었는지
언놈인지 잡히면 아주 작살을 내야
늦은 밤이나 새벽에 봤다면 분명 기절했을 듯하다
설마 낮에는 인형이고 밤에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서하천에 다슬기가 많이 사나 봅니다.
다슬기 한 마리는 물 1리터를 정화시키는데 꼭 잡아서 밥상 위에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정지용 시인의 고향 시
고향에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월전교에서 본 서화천
물은 아주 파랗게 맑았고 마치 이무기라도 나타날 듯
고요하게 흐른다
삼국시대 때 백제의 할미산성이 있던 곳으로 보이는데
한굽이 돌아가면 백제 제26대 성왕께서 매복 중이던 신라 군졸에 의해 목이 떨어진 곳이다.
월전리 마을
앞으로는 삼성산이 있고 뒤로는 할미성이 자리하는 마을이다.
관산성(삼성산?)은 확실하게 어디라는 근거는 없으나 옥천읍을 둘러싸고 있는 삼성산이 관산성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다.
백제의 성왕이 이곳에서 전사하셨고 월전리 성왕교 다리를 건너면 막다른 길이지만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던 2만 5천의 이상의 군사들이 싸우는 도중에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전의(戰義)를 상실해 대부분 전사하고 죽은 시체는 염장(殮 裝)을 해서 백제로 가지고 갔다는 곳
구진벼루에 자리 잡은 백제 제26대 왕 성왕께서 이곳에서 잡혀 목이 떨어진 곳
때는 바야흐로 554년 백제 성왕 때이며, 신라의 가장 강력한 군권을 쥐었던 진흥왕 15년 때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으로
보리문디 신라의 관산성 공격을 할 때 일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와의 동맹 60년이 지나고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동맹을 배신한 전투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성왕의 아들 창과 젊은 신흥 세력의 강건파와 전쟁은 다소 무리가 따르니 신중하자는 나이 드신 분들의 온건파로 나누어졌지만 성왕은 아들 창의 손을 들어준다,
전쟁 초반은 백제의 태자 부여 창이 승기를 잡아, 신라는 위기에 빠지고 한강 유역에 있던 김무력을 불러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는데, 그 당시 성왕은 아들 창을 격려하기 위해 부하, 기병 50명 정도 거느리고 무주에서 금강을 따라 금산을 지나 이곳 구진벼루에
도착했으나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의해 잡혔으니 하필이면 노비 출신의 군사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금산땅에서 서하천 따라 내려오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금강에서 역으로 이곳까지 올라오셨는지 뭐가 그리 급한 일이 있어
이런 협곡에 들어와 잡히셨는지 왕으로써 노비출신 군졸에게 죽음을 당하는 치욕이 억울했던지 노비손에 죽기 싫으니
높은 놈 불러라 했으나 끝내 성왕의 청은 거절 당하고 "하늘을 우러러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죽음을 맞는다.
이후에 몸은 백제로 돌려보내지고 머리는 신라로 가져가 왕궁 계단 아래 묻어 문무백관 모두 밟으며 다니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밤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
이사건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서로가 원수 대하듯
왕이 죽음을 맞이하자 아들 창과 2만 5천 이상의 백제 군사들은 대부분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아들 창은 겨우 살아 돌아가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는 성왕이 아들 창을 응원차 가는 길에 백제군 50명 중에 분명 첩자가 있었을 걸로 보이며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신 왕이다.
백제 제 21대왕이셨던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때 위례성 전투에서 배신자들의 손에 의해 죽었으며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이고
마지막 31대 왕이셨던 의자왕은 사비성이 함락될 무렵 웅진으로 피했으나 부하 성주이던 "예식진"에 의해 생포되어 나당연합군에 끌려갔다.
잘해주면 기어 오르고 못해주면 배신은 밥먹듯하니
읽어 보시고
성왕이 죽고 이후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가야는 얼마못가서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해서 멸망하죠
잠시 서서 묵념하고 발길을 돌려 성왕교를 건넌다.
바로 앞은 삼성산이며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천년고찰 영국사가 자리하는 천태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끝자락인데 신라의 변방 산줄기로 그 당시에는 산성들이 즐비하게 이어진 곳이다
빠른 시일 내에 장령산에서 삼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답사를 통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
성왕교를 건너오면 막다른 길이라 하천강가로 걷는다.
산 위로는 군부대가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제방둑으로는 군부대가 있어 올라가면 보이지 않는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삼성산 자락 끝으로 흥선 대원군의 옥천 척화비가 서있다.
서양 제국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고종 8년에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 하나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라는 글을 반포하여 쇄국의 의지를 알렸다.
비석 우측은 6,25 전쟁 때 사람으로 오인 사격되어 총에 맞은 흔적이 몇 곳 있고
장령산 북쪽에서 흘러온 금구천이 옥천읍을 지나 서화천에 합류하는 삼거리
우측은 서산성이고 서산성은 백제가 공격하기 좋은 지형이나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많이 불리한 지형이다
그렇다고 백제도 그렇게 유리한 게 아니다 앞으로는 서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삼거리에서 본 우측은 척화비가 있는 삼성산 삼거리 토성이 있는 곳이다.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백제가 충북 보은 삼년산성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삼성산(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운 듯하고
성왕이 아들 창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서 약 2km가량 떨어진 구진벼루에서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듯
하천 따라 걷다가 옥천읍 서정리 도로가에 자리하는 **카페에 들어가니
꼬마인형들이 엄청 많은데 돈으로 환산할 경우 1억이 넘는다고 하신다.
따뜻한 모과차 한잔 들고 밖으로 나와
옥천 하수처리장 앞을 지나는데
멀리 범상치 않은 한분이 오시는데 지팡이가 대략 3m는 되어 보인다.
잠시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낡은 배낭에 신발은 너덜너덜하지만 맑은 눈을 하셨다
걷는 이유는 집안에 암 4기 환자분이 있어 아직 희망이 있기에
고통 분담과 아울러 기도를 하기 위해 걷는다고 하셨다
오늘밤은 어디서 주무실지 아직도 걷고 계시는지 알길 없으나 돌아서 가는 저를 다시 불러 세우시더니
배낭에 먹을 것 있으면 주고 가란다.
마침 배낭에 시루떡 한팩이 있어 모두 드리니 주인장 먼저 먹으라며 하나 집어 입에 넣어 주신다.
여느 이름난 고승의 발거음보다 더 대단하고 마음 따뜻한 분을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니
다음 어느 길에서 만날지 모르겠지만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짠한 뒷모습을 잠시 보며 어디서 구한 지팡인지 탐은 나지 않지만 나도 가는 길에 저런 거 하나 주워 들고 갈까 생각해 본다.
앞으로는 옥천 이지당이 보인다.
이지당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셨던 조헌이 서화천 강가에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인데
훗날 김만균이란 분이 조헌의 업적을 기리고자 만든 건물이다.
하천가로는 대청호의 영향으로 갈 수 없고 마을 안으로 돌아가는 길 따라 이동한다.
환산아래 자리 잡은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 마을 돌담길
전형적인 풍수의 배산임수 지역이라 명당 중의 명당 마을로 보인다.
추소리에서 본 마지막 부소담악과 노성산 방향
물 위에 뜬 풍경으로는 좋으나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그렇다.
부소담약이 길게 이어지지만 저곳은 하늘에서 봐야 그 아름다움이 묻어나고
걸으며 보는 부소담악은 그저 그렇다.
가보실분들은 참고하시고
부소담악의 추소정이고
조선시대 때 우암송시열 선생께서 소금강이라 칭했다고 하셨는데
송시열 선생께서 공부하시느라 다른 곳은 가보지 않으셨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막혀 이곳에서 서하천 35km는 마칩니다.
이곳은 가을에 가면 좋다는데 우리나라 어지간한 경치는 모두 가을에 가야 제격이라
하다못해 시골의 벼 익는 들판도 멋있게 보이는데...
시간 나시는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곳은 하늘에서 봐야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좋은 방법 없을까요
다음날 다시 옥천으로 다녀옵니다.
이른 아침에 ktx 기차로 대전역에 내려 다시 무궁화로 갈아타 옥천에 내려 장령산으로 갑니다.
휴양림에서 잠시 오르면 장령산이며 장령산에서 옥천 삼양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짧은? 산줄기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쌓은 마성산성-동평산성-용봉산성-산성산성-삼거리토성-서산성까지 줄지어 서있는 모습인데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급경사의 산성에서 방어를 하면 되나 공격하는 백제군의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하거나 힘이 들 것 같다.
그렇다고 신라도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와서 싸웠을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충남제일의 서대산과 만인산 방향으로
그아래 금산천이 흘러 서화천으로 향해 달려가고
이어지는 산성길과 멀리 대전의 식장산이 보이고
사목재로 금산군 추부사람들이 장마철에 서하천에 물이 불으면 서대산 북쪽 고개인 성덕고개를 올라 금산천을 건너 이길로 올라와 옥천으로 넘어갔던 고갯길이다.
마성산 성터 옥천을 한눈에 바라볼수있는 성터이나 지금은 잔나무 가지로 조망은 별로 없고
돌은 어디서 모아 왔는지 백성들이 고생꽤나 했을법한 신라가 축조한 산성?이다
옥천을 지키는 신라의 최종 방어선격인 산자락
동평산성 아래 웅덩이의 물
예전에는 병사들이 이곳에서 집을 짓고 살았을 것 같다.
물도 여기서 보충했을걸로 보인다.
동평산성
북,서쪽을 경계하도록 쌓은 성으로 신라가 쌓은 산성이다.
동평산성에서 본 서화천 일대
적이오는지 살펴보기 좋은 성으로 경사가 심하고 방어하기에 좋은 신라의 성
용봉 산성
용봉 산성에서 본 고리(환)산
굽이 돌아가는 서화천이 보이고
대부분 백제땅이며 신라와의 국경선이다.
지나온 장령산과 멀리 천태산과 마니산 망향
바로 앞은 이어지는 산성길과 대청호를 품은 고리산
지나는 산성은 적이 오나 안오나 살펴보기위한 망루로써의 기능이며
좌측과 우측 모두 경사가 심하다.
서화천이 흐르고 중간지점이 성왕이 죽은 자리인 구진벼루
삼성산성
이곳을 관산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데 서쪽 사면은 경사가 심해 과연 이곳으로 백제가 올라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한여름 7월(양력 8월)경사진곳으로 기어 올라오는것보다 싸움에 유리한 서산성 서쪽에서 싸우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삼거리 토성은 인근의 삼양 토성과 서산성이 삼각형으로 자리하고 있어
금구천과 서화천이 만나는 삼양 사거리를 방어하는데 크게 기여했을것 같다.
신라와 백제가 싸웠다면 관문격인 금구천과 서하천이 만나는곳 분명 저곳 삼양사거리나 서산성 아니였을까
저곳은 이곳과 반대로 백제군의 입장에서는 경사가 적고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급사가 있어 방어에 불리한곳이다.
서산성 아래 작은 성 밑골따라 오르면 기와파편을 자주 만난다.
바로앞은 삼양산성
해발 198미터의 서산성
신라와 백제간 서로가 죽을듯 싸웠다면 삼거리 토성과 삼양산성 그리고 서산성일것 같다.
서산성을 지나 조금 더 가보기로 하고
서산에서 호롱재를 지나
산능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다시 경사가 심해져 백제군이 올곳이 못되고
가랑뱅이제까지 산성길 여행을 마치고
첫댓글 물이야기, 산이야기, 그리고 역사이야기 모두 잘봤네요.
잔잔한 음악과 함께한 서화천 편 잘보고 갑니다.
수고하셨어요^^
어제 남쪽 끝자락 진도가보니 지천에 쑥이...ㅎㅎㅎ
갓김치 갓도 많이 나고....
한즉한곳 진도... 매력이 있습니다 너무 멀어서 그렇지...
충청도로 가셨네요....몇해전인가 추부쪽에 들린 기억이..
맑고 깨끗한 서하천과
작년에 갔다온 부소담악과 주변산들
장령산과 이어갔던 새대산도 눈에 익네요.
방장님의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인해
조금씩 알아가는게 늘어납니다.
부소담악은 멀리서 봐야 멋있으니까
지맥님이 드론으로 찍는게 가장 좋을듯....ㅎ
금성산의 금산이라... 어쩐지 이름에서 연관이^^
이번 걸음하신 금산, 옥천 구간...
서화천에 백제 성왕의 마지막 길 구진벼루,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방장님 덕분에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감사~요.
그래서 그렇게 백제가 성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던거였네요.
이곳 주위로 산성들도 많고... 그 옛날부터 전쟁의 흔적들...
식장지맥과 장령지맥 그 길도 궁금해지며
후기 잘 봅니다.
요광리 은행나무님은 진짜 효염이 있을까나요?
제가 꼭 찾아뵈어야 할 듯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