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창과 홍랑의 순애보(殉愛譜) 6편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홍랑은 자기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 국토가 황폐화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나 보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홍랑의 이 무덤을 보면서 그녀의 애틋한 삶과 사랑을 엿볼 수 있으니, 역사속의 엄연한 사실로 남아있는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절절한 사랑과 굳은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 「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